우리나라 강원도 - 순응법사가 창건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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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10. 21:19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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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법사가 창건한 절
선림원은 당시 화엄종의 승려들이 대거 선종으로 이적한 사실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찰이다. 1985년 동국대 발굴조사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금당 터의 주춧돌이나 여타의 다른 유물들이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절은 10세기 전반기에 태풍과 대홍수로 산사태가 나면서 금당, 조사당 등 중요 건물들이 무너진 뒤 복원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층석탑 뒤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금당 건물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주춧돌이 남아 있고, 금당 터 서북쪽에 석등을 앞에 세운 조사당이 있었으며, 조사당 터 동편에는 홍각선사부도비가 있고, 조사당은 홍각선사의 영정을 봉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림원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선림원지삼층석탑(보물 제444호), 선림원지부도(보물 제447호),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 선림원지석등(보물 제445호) 등이 남아 있다. 선림원지삼층석탑은 다른 유물들과 마찬가지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에 복원한 것이다. 누군가가 사리장치를 훔쳐가기 위해 오래전에 무너뜨린 것을 한 승려가 옮겨 세우려고 해체하던 중 기단 밑에서 많은 납석제 소탑과 동탑이 나왔다. 그런데 1층 몸돌에 사리공이 있기는 하지만 그 많은 소탑을 봉안할 공간이 없었으므로 원래부터 기단부나 그 밑에 넣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납석제 소탑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탑의 높이는 약 5미터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쌓아올린 전형적인 남북국시대 양식이다.
선림원지부도
현재 기단부만이 보존된 선림원지 부도는 3층석탑, 석등 등과 함께 무너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1965년에 복원한 것이다. 보물로 지정되었다.
하층 기단과 상층 기단에는 각각 우주와 탱주를 조각하였는데 눈에 띄는 것은 상층 기단에 팔부신중을, 우주와 탱주 사이에 팔부신중 두 개씩을 조각해놓았는데 마모가 심하다. 탑신부는 각각 1매석으로 된 몸돌과 지붕돌을 듬직하게 쌓아 올렸고 지붕돌의 추녀는 수령으로 한 뒤 5단의 층급 받침을 두었다. 네 모서리의 전각부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고 낙수 면은 급하지도 원만하지도 않아서 경쾌해 보인다. 지붕돌 위에는 그 단의 굄을 마련하여 그 위층에 몸돌을 얹었다. 상륜부에는 직경 10.5센티미터의 찰주원공이 남아 있고 그 위에 보륜 조각들을 적당히 쌓았으며, 탑 앞에는 장방형의 비례석이 놓여 있다.
선림원지석탑과 마찬가지로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선림원지석등은 높이가 2.92미터에 이른다. 4매석으로 짠 지대석 위에 8각 하대석이 놓여 있고 하대석 측면에는 1구씩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 위에 간석을 놓았고 간석 상단과 하단에 원형으로 구름무늬를 조각했으며 전체적으로 장구 같은 모습이다. 화사석은 8각이고 4면에 장방형 화창을 썼으며 각 면 아랫부분에는 안상을 얕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에는 8각의 추녀마다 하대석과 같은 양식의 귀꽃이 있고 꼭대기에는 8각의 연꽃이 귀엽게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는 대부분 없어지고 다만 복판복련(複瓣覆蓮)이 조각된 원형 석재가 하나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선림원지에는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가 1965년에야 복원된 홍각선사부도비가 있다. 귀부와 이수만이 남았고 비신의 파편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귀부의 높이는 73센티미터이고, 이수의 높이는 53.5센티미터다. 보물 제446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 886년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홍각선사부도는 부도 중대석에 운룡문이 나타나는 최초의 작품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름다움을 발한다. 현재 높이는 1.2미터다. 선림원지에서 발견된 신라 범종은 한국전쟁 때 파손되어 그 잔해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선림원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홍천군 내면으로 넘어가는 아름다운 구룡령 옛길이 있다. 국가 명승 제29호로 지정된 구룡령은 양양과 홍천 지방을 연결하는 길이다. 양양과 고성, 간성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넘나들던 고갯길이었다. 미시령, 한계령보다 산세가 평탄하여 사람들이 이 길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특히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상품 교역로였고, 고성ㆍ간성ㆍ양양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선 꼭 넘어야 하는 길목이었다.
구룡령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의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큰 구렁이가 지나간 자국을 따라서 길을 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곳 광원리에 단종의 외조부이자 문종의 비 현덕왕후의 아버지인 화산부원군 권전(權專)의 비가 있다. 권전은 단종이 승하하자 세상을 피하여 실론(實論)으로 와서 살다가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실론의 산중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슴에 놀란 말이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자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뒤 이 근처의 산에는 지금까지도 칡이 없다고 하며, 그 후 후손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응법사가 창건한 절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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