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시작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눅7:11-17)
갈등
1. 세계 뉴스를 보면, 사건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미국 중서부지역에서는 토네이도가 지나가면서 한 마을을 망가트리고 24명의 생명을 앗아갔어요.(4월에) 요즘은 토네이도가 미국에서만 아니라 중국 랴오닝성이나 장쑤성, 일본 동경 인근 등 아시아에서도 발생하며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강원도 양양 해수욕장에서는 번개를 맞고 여섯 명이 쓰러졌는데, 그중에 30대 젊은 사람이 치료를 받다가 끝내 생명을 잃었습니다. 지난 주중에는 20대 후반의 청년이 계단에서 낙상해서 머리를 다쳤는데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자연재해와 사고와 질병 등으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 이야기는 하루도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젊은 청년들의 죽음은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특히 부모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 젊은이의 죽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그 후에’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죽게 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다음 날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을 떠나 나인 성으로 왔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동안의 행보는 주님이 정하셔서 움직이셨어요. 제자들과 무리는 주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따라다녔어요. 가버나움에서 나인성까지는 약 40km, 100리 길입니다.
2.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걸어야 이동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에 제자들만 아니라 많은 무리가 동행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과 행하시는 기적들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이어질수록 주님의 동선을 따라 동행하는 무리가 늘어났습니다. 주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남서쪽으로 이동하며 다볼산 방향으로 가셨어요. 주님은 산악지역을 넘어서 쉬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해서 나인성에 이르렀어요. 주님은 왜 이날 쉬지 않고 산을 넘고 물 건너 나인성에 오고자 하셨을까요?
갈등 심화
3. 예수님 일행이 나인성 성문에 가까이 도착했을 때, 한 가정의 장례식 행렬이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일행들의 행렬이, 한편에서는 장례식 행렬이 서로 마주쳤습니다. 죽은 이의 가족들은 단출했어요. 죽은 자는 한 어머니의 독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어요. 이 가정에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이 젊은 청년기에 죽은 것을 보면, 특별한 질병이나 사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가정의 사정을 아는 나인성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이 가정을 위로하고자 장례 행렬에 함께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차마 이 가정의 장례식을 외면할 수 없었어요. 이스라엘의 장례식은 예나 지금이나 24시간 내에 마칩니다. 죽은 당일이나 적어도 다음 날에는 장례를 치릅니다. 날씨가 더워서 위생상 그렇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과부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과부를 향하여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4. 예수님은 젊은 아들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슬픈 과부를 보고 함께 울지는 않으시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이상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상여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죽은 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것입니다.(레22:4, 민19:14-19) 주님은 이 율법을 아셨지만, 관에 손을 대셨어요. 주님은 왜 죽은 자의 어머니를 향하여서는 울지 말라 하시고, 관에 손을 대셨을까요?
실마리
5. 예수님이 가버나움을 떠나 나인성으로 오신 것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려고 의도적으로 오신 것인지, 오시다 보니까 장례행렬을 만나고 이 가정을 불쌍히 여기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는지 오늘 본문만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주님이 이 가정의 형편을 아셨을 것이고, 나인성으로 달려오신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오직 이 가정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100리 길을 재촉해서 달려오셨어요. 제자들과 무리는 이런 상황을 모르고 따라왔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찾아서 움직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어요. 주님은 장례행렬을 보시자마자 상주인 과부에게로 가셨습니다.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남편을 잃고 이제 젊은 아들까지 장례를 치르는 형편을 주님이 아시고 불쌍히 여기셨어요. 불쌍히 여긴다는 스프랑크니조마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의미해요. 주님께서 장례식 가운데 있던 이 가정의 고통을 보시고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성경에 주님이 울었다는 말은 없지만,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에서와 같이 우셨을 것입니다.(요11:35)
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지정의가 완전하신, 신성이 충만하셨어요. 주님이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것은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이 아니었어요. 그의 사랑하시는 피조물이 고통당하심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은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보통 사람이 문상 중에 울고 있는 상주에게 하는 말이라면 결례입니다. 상중에 우는 자와 함께 울지는 못할망정, 우는 자에게 울지 말라고 할 수 없어요. 주님이 과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은 대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울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마련해 주시겠다는 선포였습니다.
젊은 아들을 잃고 장례 가운데 울고 있던 과부에게, 예수님이 줄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이 어떻게 해주면 이 여인이 울지 않을 수 있었나요? 주님의 행동을 보세요. 주님은 상여에 다가가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주님이 관에 손을 대시니, 운구하는 이들이 발걸음을 멈추었어요.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죽은 청년을 향하여 명령하셨어요.“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세상에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예언자 중의 예언자였던 엘리야나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렸지만, 이렇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죽은 자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뿐입니다.
7. 베드로와 바울도 죽은 자를 살렸지만, 엘리야나 엘리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 죽은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한 피조물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죽은 자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명령하실 수 있었어요. 지존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르지 못할 자가 없어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모든 피조물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죽은 청년이 일어나 앉았습니다. 말도했습니다. 주님께서 울지 말라고 했던 과부에게 아들을 돌려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시려고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과부에게 선포한 말씀을 이뤄주셨습니다.
복음 제시
8. 오늘 본문을 보면, 과부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치유 사례에서와 같이 과부는 자기 아들을 주님이 살리실 만한 믿음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먼 길을 달려와서 아무 조건 없이 청년을 살려내셨어요. 주님께서 이 가정을 살리심은 한 가지였어요.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스프랑크니조마이) 남편도 없이, 홀로 오직 아들 하나만 바라고 살아온 한 여인의 아픔을 주님께서 잘 아셨어요. 주님은 이 여인이 살았던 나인성으로부터 100리 길 밖에서도 슬픈 이 가정의 형편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먼 거리에서 이 사실을 알기만 하지 않으셨어요. 이 기구한 여인의 통곡 소리를 들으셨어요.
이 가정-이 여인의 아픔을 아셨기에 100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단숨에 찾아오셨어요. 주님께서 장례식 가운데 죽었던 청년을 살리시자,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요.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즐거워했어요.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응답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당시 유대인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아직 성경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35:5-6,“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9. 이 예언의 말씀은 메시야의 징표를 이사야가 전한 것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구약 성경을 제대로 읽고 알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행하는 일들을 보고서도 어찌 믿지 못했겠습니까? 그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말았어요.(사6:9)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은 기적을 보고 놀란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것과 같이,“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10:10)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다른 기적을 보고서가 아니라 성경(구약)을 읽으면서 복음을 발견하고 믿었습니다.
기대
10. 저와 여러분에게 최고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의 형편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 같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지금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어요. 이제 우리도 주님의 마음-이 심장으로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본질-복음의 본질이 여기에 있어요. 세계 역사는 능력이 아니라, 불쌍히 여김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도 그렇고,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도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도록 때로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주께서 먼저 본을 보이시고, 우리도 남을 긍휼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마5:7, 팔복 가운데 다섯 번째 복) 반대로 약2: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우리도 심판 때에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하고 심판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에요.
11.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대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게 하십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그 마음을 잘 간직하고 사랑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다 같이 일어나 찬양하며 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고, 양육하고, 치유 사역으로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오늘 찬양: 나의 기쁨 나의 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