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20240510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는 헬라스(고대 그리스)의 땅 테바이의 존경받는 통치자 오이디푸스와 그의 비극을 그린다.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의 왕 폴뤼보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받고 도망치듯 그 땅을 떠난다. 그는 테바이에서 그곳 사람들을 괴롭히던 스핑크스를 멸하고 죽음을 맞서는 지혜자이자 존경받는 지도자 즉 왕으로 추대된다. 때마침 테바이의 이전 왕, 라이오스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당했던지라 오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아내였던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모든 행복과 명예를 가지게 된 오이디푸스에게 뜻밖의 수난이 찾아온다. 전염병이 돌아 테바이 땅이 비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백성들의 고통에 오이디푸스는 질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 아폴론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해결책을 구한다. 그는 이 땅에서 생겨난 오염을 살인자를 추방함으로써 혹은 살해로 살해를 품으로써 정화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바로 테바이의 전 왕 라이오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밝혀내라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전염병을 없애기 위해, 또 진실을 알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조사를 시작한다.
나는 책을 펼치고 첫 페이지에서 도서관 책이었음에도 적혀 있었던 꼼꼼한 메모 덕분에 결말을 알게 되었다. 비극의 원인을 몰랐더라면 책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겠지만 결말을 아는 사람의 시각으로 읽는 것도 새로웠다.
결말을 알았기에 더욱 눈에 띄었던 것은 엄청난 비극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오이디푸스가 계속해서 신탁과 예언을 부정하려 노력하는 장면이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자와 예언자를 데리고 온 가족을 비난하기도 하고 예언자가 신체적으로 눈이 먼 것처럼 앞날을 볼 능력도 없다며 그를 조롱하기도 한다. 예언에 대한 그의 부정은 오래전으로 이어진다. 젊었을 때의 오이디푸스는 이 예언을 피해 고향 땅을 떠나왔었고 부모님과도 거리를 두었었다. 라이오스 또한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 아내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었기에 아들을 죽임으로서 예언을 막으려고 했다.
두 인물의 노력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의 탄식은 변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깊이와 방대함을 깨닫고 “그것은 아폴론이었고, 아폴론이오, 친구여. 나의 불행을, 불행을, 나의 고통을 완성한 것은”이라며 절규한다. 스핑크스를 멸했고 예언자의 예언술을 뛰어넘었던 그의 지혜는 운명을 막지 못했다. 주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아, 필멸의 인간 종족이여, 그대들이 살아 있을 때조차 아무것도 아님을 내 얼마나 헤아렸던가! 대체 누가, 어떤 인간이 겉으로만 행복해 보이고, 그러다가 기울어 저무는 것 이상의 행복을 얻고 있는가? 오, 가여운 오이디푸스여, 내 그대의, 그대의, 그대의 운명을 거울로 삼아, 그 어떤 인간도 행복하다 여기지 않으리.” 책의 가장 마지막 대사도 비슷하다. “오, 조국 테바이의 거주자들이여,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로다. 그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알았고, 가장 강한 자였으니 시민들 중 그의 행복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하지만 보라, 그가 무서운 재난의 얼마나 큰 파도 속으로 쓸려 들어갔는지.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
이처럼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휩쓸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가졌던 오이디푸스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지금의 행복과 능력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인간의 인생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인간의 연약함으로 끝맺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에게 절규하지만 곧바로 이런 말을 한다. “하지만 눈을 직접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련한 나 자신이었소.” 그렇다. 라이오스 왕의 죽음을 수사하고 끝없이 주변인들을 추궁하며 불리한 과거를 파해치기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은 오이디푸스 자신이었다. 그는 정해진 운명을 피하려 하는 만큼 자신의 의지로 그 비극을 파고든다. 오이디푸스의 말처럼 그의 눈을 찌른 사람 또한 자기 자신이다. 그는 진실을 얻기 위해 스스로 위험한 선택을 했고, 비굴하게 삶을 이어가는 대신 자신의 손으로 그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이디푸스가 운명에게서 도망쳤든지 아니면 받아들였던지 그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음과 비극을 두려워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의지로 삶을 이루어 나간다.
이렇듯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는 운명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한 사람의 미래는 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의도를 통해서 정해진다. 운명은 미래에 대한 예견 즉, 개인의 선택의 결과를 아는 신이 이를 보이는 것 아닐까? 이런 점에서 신의 개입은 운명을 보여줌으로 이루어진다. 기독교의 하나님 또한 이렇게 일하시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