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 <빠삐용>, 그리고 자유!
<빠삐용>을 다시 보았다.
나는 원래 리메이크 영화는 잘 안 본다. 보기가 겁난다. 먼저 나온 작품의 감동이 새 영화를 봄으로써 다 깨지곤 하기 때문이다. 특히 <벤허>의 경우는 정말 그 실망이 너무 커서 다시는 절대로 리메이크 영화를 안 보기로 결심했을 정도다. 그런데 이번에 <빠삐용>은 다시 봤다. 아내가 <보헤미언 랩소디>의 라미 말렉이 나오니 꼭 보자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보기를 참 잘한 것 같다.
내가 <빠삐용>을 처음 본 것은 40년 쯤 전이다. 무모하게 덤벼들었던 사법시험에 연달아 떨어지는 바람에 당시 몹시 침체해 있던 어느 날 오후, 무작정 고시원을 나와 거리를 방황하던 중 강한 인상의 스티브 맥퀸 얼굴이 그려진 동대문 극장의 광고판을 보고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화는 잘 만들어진 것 같은데 착잡한 내 마음을 그다지 위로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기아나 교도소 독방에서 갖은 고통으로 신음하던 빠삐용이 꿈속에서 재판 받는 장면이 나왔다. 사막을 헤매던 빠삐용이 재판장 앞에 서게 되는데 빠삐용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런데 재판장의 선고는 엉뚱했다.
“살인은 무죄.
그러나 인생을 낭비한 죄, 유죄!”
그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아무튼 그 뒤 정신을 가다듬고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나는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하는 진지한 태도는 내 삶의 지침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찰리 허냄과 라미 말렉이 빠삐용과 드가로 나온 새 <빠삐용>을 보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리게 되었다.
“자유가 언제나 아름다운 건 아니다.
아름다운 건 자유에 대한 갈망, 자유를 얻기 위한 분투(奮鬪)다.”
이 만큼 새 <빠삐용>은 자유의 소중함을 절절이 깨우치게 해준다.
새 <빠삐용>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스포일링 있음).
작은 문을 통해 보이는 흐릿한 형체, 점점 클로즈업되며 감방의 작은 문으로 빠삐용이 고개를 내밀어 어딘가를 바라본다. 컷! 영화 타이틀이 바로 올라간다(영화를 보는 관객도 빠삐용처럼 구금된 상태가 되어 함께 자유를 추구해 보자는 마이클 노어 감독의 의도로 보인다).
1931년 프랑스 파리. 가슴에 멋진 나비 문신이 있어 ‘빠삐용(papillon: 프랑스어로 나비를 뜻함)’으로 불리는 앙리 샤리에르는 능숙한 금고털이다. 조직의 우두머리로부터 정보를 입수해 금고를 털어 갖다 주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애인에게 줄 보석을 약간 빼돌린다. 그것을 알아챈 조직에서는 빠삐용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 무기형 선고를 받게 한다.
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 특수교도소로 가는 호송선을 타자마자 빠삐용은 탈출을 결심하는데, 한편 그 배에는 백만장자로 알려진 국채 위조범 루이 드가가 타고 있었다. 빠삐용은 드가에게 그의 배를 째고 숨긴 돈을 뺏으려는 다른 죄수들로부터 지켜줄 테니 탈옥 자금을 대라고 제의하고 실제로도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에서 드가를 구해준다.
그렇게 그 둘은 기아나의 섬에 있는 교도소에 도착하는데 교도소장의 제1성은 이러하다.
“너희는 이제 프랑스령 기아나 교도소의 소유물이다.”
기아나 교도소에서는 죄수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고된 노동과 빈약한 식사 속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죄수들, 또 죄수들 역시 동료 죄수가 죽으면 애도하기는커녕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잽싸게 다 훔쳐간다. 그곳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지옥과 같은 곳이다.
남의 금고문을 손쉽게 열었던 빠삐용이 과연 자신을 가둔 이 지옥의 문도 쉽게 열고 탈출할 수 있을까?
빠삐용과 드가는 그곳에 온갖 끔찍한 일들을 겪는다. 다른 죄수가 먼저 탈옥을 시도하다가 교도관을 죽이게 되어 단두대의 칼날로 목이 잘리는 끔찍한 일을 직접 보지만 빠삐용은 이에 겁먹지 않고 첫 번째 탈출을 실행한다. 그러나 교활한 인간사냥꾼에게 속아 붙잡히게 되어 세인트 조셉 격리수용소의 독방에 갇히게 된다. 그곳은 빛도 제한되고, 있는 것이라곤 물양동이와 식사통, 그리고 배식구멍뿐이다. 소리도 없다. 철저히 단절된 공간, 단절되지 않는 순간은 교도관으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할 때뿐이다. 수감자는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곳에서 빠삐용이 바로 죽거나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드가가 몰래 물양동이 안에 숨겨 보내준 코코넛 덕분이었다. 그 코코넛은 바로 드가의 진한 우정이요 깊은 신뢰였다(결국 들통이 나 배달해주던 사람은 죽고 빠삐용에게는 더 가혹한 제재가 내려지지만 끝내 보내준 사람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세인트 조셉 격리수용소에서 2년간의 독방 생활을 이겨내고 나온 빠삐용은 다시 탈옥을 결심한다. 이때에는 드가도 부인과 변호사가 자신을 배신하고 결혼했으며 항소는 물거품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빠삐용의 탈옥에 합류한다. 면밀한 계획을 세워 다른 동료 죄수 2명과 함께 탈옥을 감행하고, 우여곡절 끝에 기아나 섬을 벗어나 바다로 나온다. 폭풍우 속을 헤집고 가던 중 그 중 한 명이 작은 배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니 힘도 약하고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드가를 바다에 던져 버리자고 하여 다툼이 일어나고, 드가를 지키려는 빠삐용이 위험에 처하자 드가가 그 동료 죄수의 등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폭풍우가 잦아들고 3명이 탄 작은 배는 콜롬비아에 도착한다. 드디어 탈옥을 한 것이다. 드가와 다른 한 명의 동료 죄수는 그곳에 남겠다고 하지만 빠삐용은 프랑스 본토로 꼭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그런데 믿었던 수녀의 신고로 이들은 다시 잡혀가게 된다.
빠삐용은 다시 세인트 조셉 격리수용소에 수감되어 5년 동안 독방생활을 한다. 5년의 독방생활도 견디어 낸 빠삐용은 ‘죽음의 섬’으로 보내지게 되는데 거기서 드가와 다시 만난다.
그리고 다시 탈옥을 준비한다. 그러나 드가는 그냥 그곳에 남아 있겠다고 한다.
수직 절벽에 부딪히며 부숴지는 파도를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드디어 탈출 방법을 찾아낸 빠삐용, 3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절벽을 뛰어내려 코코넛 뗏목을 타고 조류를 이용해 자유를 향해 망망대해로 나아간다. 드가는 그의 탈출이 성공하기를 빌며 “빠삐! 빠삐용~”이라고 애절하게 소리친다.
그리고 영화는 후기(後記)를 덧붙인다.
1969년, 자서전을 펴낸 늙은 앙리 샤리에르(빠삐용)는 베네수엘라에서의 망명생활 끝내고 프랑스에 귀국 신청을 하며, 프랑스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고 빠삐용을 사면한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찾은 희망, 강요된 무력감을 극복해 가는 빠삐용의 ‘굴복 당하지 않는 의지’와 함께 진정한 친구를 향한 끝까지 ‘변하지 않는 의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큰 가치가 있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이 두 가지 덕목을 갖춰야 되지 않을까?
새 <빠삐용>은 전의 <빠삐용>보다 더 실화에 충실하면서도 탈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빠삐용의 인생 전반을 조명한다. 영화의 앞뒤에 교정시설 밖에서의 그의 삶을 비춰주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도 끝까지 탈옥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집념에 쉽게 동화된다.
빠삐용은 무고한 자신을 살인범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강한 복수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복수심은 자유를 향한 탈출에 강한 동인(動因)이 되었다. 이에 반하여 드가는 부인과 변호사가 자신을 배신을 하고 서로 결혼을 하였는데도 나중에는 탈출을 포기한다.
그러면 빠삐용은 오로지 복수만을 위하여 탈출을 기도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실제로도 앙리 샤리에르는 탈출에 성공한 후 어느 누구에게도 복수를 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본다. 하나는 ‘빠삐용형’이고 다른 하나는 ‘드가형’이다. 빠삐용에게 자유는 자신의 삶 그 자체였기에 끝까지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빠삐용과 같은 국적의 실존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버리면 누군가의 소유물일 뿐 이미 인간이 아니다. 빠삐용이 자유를 찾아 그토록 어려운 탈옥을 감행한 것은 인간임을 잃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조르쥬 브라크의 명제를 빠삐용이 실행에 옮긴 것이다. 우리가 영화 <빠삐용>에 높은 평점을 주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탈옥 영화가 아니라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세의 엑소더스와도 같은 ‘자유인의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번에 본 새 <빠삐용>은 빠삐용을 비롯한 죄수들을 소유물로 취급하는 기아나 교도소의 비인간적인 교정행태를 더욱 리얼하게 보여줌으로써 빠삐용이 감행한 엑소더스의 당위성을 한층 더 뒷받침해주고 있다. 기아나 교도소의 소장은 죄수가 탈옥을 시도하다 잡혔을 때 바로 처단하지 않고 격리수용소의 독방에 2년 동안 가둔다. 그리고 다시 탈옥을 했을 때는 독방에 5년 더 수감한 후 ‘악마의 섬’으로 보내 버린다. 탈옥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죄수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학습화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을 주입하는 것이다. 즉, 피하기 어려운 혐오스런 사태(inescapable aversive events)를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실제로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러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확신감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희망을 없애서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포기하도록 하는 악랄한 전략이다. 드가는 결국 이 학습화된 무력감에 빠져 자유인이기를 포기한 셈이나 빠삐용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쟁취했다.
물론 드가가 나중에 탈출을 포기한 것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지만 자신은 함께 탈출하던 동료 죄수를 칼로 찔러 죽였다. 빠삐용은 금고털이였지 살인자는 아니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탈출하여 자신의 무고함을 밝혀야 하지만, 자신은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악마의 섬에 계속 남아서 속죄를 해야 한다는 인간적인 자책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어찌됐든 드가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하고 악마의 섬에서 누리는 조그만 안락에 안주해 버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이 “일시적인 안전을 얻기 위해서 본질적인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유도 안전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역설한 말을 떠올리는 것은 드가를 너무 폄훼하는 것일까? 성격이 유약하고 체력적으로도 딸리는 드가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이해는 가지만, 나는 결코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주어진 상황에의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는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빠삐용이 악마의 섬을 탈출하여 자유를 찾은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런 강론을 했다고 한다.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지만 기도가 필요합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용감하고 분투하며 굴하지 않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맞는 말씀이다. 영화 <빠삐용>을 본 나는 이를 패러디해서 감히 이렇게 말해 본다.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지만 행동이 필요합니다. 형식적인 행동이 아니라 용감하고 분투하며 굴하지 않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빠삐용은 용감하고 분투하며 굴하지 않는 행동을 결행하였기에 자유를 얻는 기적을 이룬 것이라고 본다.
<사족>
새 <빠삐용>에서는 나에게 큰 깨우침을 주었던 그 장면, “살인은 무죄. 그러나 인간의 가장 무거운 죄, 인생을 낭비한 죄는 유죄!”라고 빠삐용에게 선고하는 꿈속의 재판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기본 주제에만 집중하려는 마이클 노어 감독의 의도는 이해가 되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인생 낭비’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누범 가중 선고를 해서 다시 한번 더 깨우쳐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