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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을 맞는 정세 |
해방 65년 만에 마련된 협상 테이블. 그러나 제1의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협상은 시작부터 엇나가고 있었다.
7차례의 지리한 예비접촉을 거쳐 본협상이 시작된 것은 2010년 12월 8일. 그러나 테이블에 나온 미쓰비시 측은 초장부터 빗장을 걸고 나섰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최고재판소 기각을 이유로 ‘이미 끝난 문제’라는 것. 초반이긴 하지만, 협상이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장기전으로 흐를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려운 것은 단지 미쓰비시 측의 반응만이 아니었다. 밖으로는 ‘무슨 일이라도 금방 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와 달리, 정작 안으로는 또 다른 고민에 봉착한 것이다.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되면서부터 시작된 어려움 중의 하나는 빠듯한 재정문제였다. 예비접촉, 본 협상 등으로 거의 매달 일본을 오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왕복 항공료 등 그동안 시민모임으로서는 한 번도 감당해 보지 못한 재정적 출혈을 동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 보다 더한 어려움은 다른데 있었다. 초조감과 고립감이었다. 협상의 전제조건에 따라 反 미쓰비시 활동을 중단하게 되고 시민모임 활동이 전적으로 ‘협상테이블’로 옮겨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동력이 떨어지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시민대중들과 손을 놓은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시민모임 창립 이후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지라도, 이처럼 시민적 동력을 스스로 놓은 채,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모르고, 결과도 전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협상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마냥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서 오는 무료함과 초조감만큼 큰 어려움은 일찍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고립이었다.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협상, 재정난, 시민대중들부터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 이 세 가지 문제를 타개할 ‘뭔가’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 2011년의 막이 올랐다.
‘대중으로 돌파하라’...10만 희망릴레이 |
2011년은 ‘10만 희망릴레이’로 첫 포문을 열었다. 시민모임 창립 이후 처음으로 마련한 ‘후원의 밤’(1.22일) 행사에서였다. 안으로 숱한 논의가 없지 않았다. “단순한 서명운동도 아니고, 돈을 낼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말 꺼내기도 쉽지 않다.”
누구도 자신할 수도 없었지만 그러나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10만 희망릴레이 선포식은 그래서 일면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거리’에 방점을 찍었고, 시민들을 찾아가 직접 마음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기자회견(2.15일)에 이어, 3.1절 기념행사장 홍보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10만 희망릴레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99엔은 뭐고, 10만명은 뭔지, 1000원은 어떤 식으로 입금해야 하고…. 설명도 간단치 않았고 결국 돈 앞에서는 말문이 꽉 막혔다.
이 무렵 성미 급한 여성회원들이 먼저 나섰다. 오하라츠나키씨 집에서 박수희, 이정현 회원 등이 모여 작당을 벌인 것이다. 서명운동엔 웬만큼 이력이 붙은 그들이지만, 1000원을 모금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여서 갖은 수를 짜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거리에 나서는 일만 남았다. 한 가지 2010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1000원이 역사를 만듭니다’라는 문구를 넣은 10만 희망릴레이 노란색 홍보 티셔츠를 제작하는데 과감히 투자하기로 한 점.
역시 기우는 기우에 불과했다. 두려움으로 나선 3.5일 무등산 문빈정사 앞 첫 거리캠페인에서 예상을 뛰어넘어 138명의 시민들로부터 20만7000원을 모금한 것. 기대 밖의 시민들 반응은 우리 스스로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랬다. 진정성 있는 운동이라면, 시민들은 서명이 아니라 기꺼이 지갑까지도 열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한편, 작당을 남모르게 준비해 온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일명 ‘김마담’, 김선호 광주광역시 교육의원이었다. 3.8일 광주광역시의회 임시회 5분 발언은 기억할만한 역사의 명장면이었다. 관례를 깨고 노란색 홍보 티셔츠를 직접 입고 단상에 오른 김선호 교육의원은, 광주시와 광주시교육청을 상대로 근로정신대 문제와 10만 희망릴레이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두 기관의 적극적 동참을 촉구하고 나선 것. 근로정신대 투쟁의 불씨가 시민운동 진영을 넘어 지방자치단체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게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며칠 뒤 전혀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만 것. 일본 동북부를 휩쓴 대지진(3.10일)과 이어진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었다. 모든 방송사는 연일 24시간 일본 재난 방송에 할애하면서 막 달아오르려던 분위기는 일순간 가라앉고 말았다. 이 마당에 감히 10만 희망릴레이를 입에 올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내 사회적 분위기는 관,언,기업들을 총동원한 전례 없는 일본 지진 돕기 성금모금 운동으로 확 바뀌고 말았다.
뜻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시민모임은 슬기롭게 이 상황을 맞이했다. 역사 관련 단체로서 가장 먼저 애도 성명을 발표하며 진정어린 마음으로 피해자들을 위로했고, 이 과정에서 역사를 뛰어넘는 자혜로운 모습들은 오히려 더 많은 국민들에게 감명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하남중학교(광산구 월곡동) 학생들의 소식은 더 없는 감동이었다. 인권동아리 학생들이 중심이 돼 스스로 등굣길 학생들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벌이고 직접 교실을 돌며 10만 희망릴레이 모금 캠페인을 진행한 것. 하남중학교를 첫 시발로 학생들 스스로 학생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진행한 감동은 동신여고, 충주여고, 강원도 봉평고 등으로 점차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시민모임’의 틀을 과감히 벗고, 지역사회에 겸손히 손을 내민 것도 각별한 경험이었다. ‘10만 희망릴레이 운동본부’(공동대표 장연주)의 출범(4.14일)이 그것이다. 시민모임의 역량 상 10만명 모금운동을 진행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아울러 지역 시민사회 역량의 결집이라는 측면에서, 지역사회에 정중히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기대에 부응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분명한 것은 ‘시민모임’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면, 결과는 오늘의 양상과 상당부분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10만 희망릴레이’에 언론은 물론 그동안 연계가 없던 자치단체, 의회도 힘을 보탰다. 시민들의 동참을 촉구하는 전남일보 사설(4.18), 10만 희망릴레이 무료 광고 후원(전라도닷컴, 5.18기념재단 기관지 주먹밥, 전교조 기관지 교육희망, 남구, 광산구, 서구, 북구 구보)에 이어, 광주시 산하 공직자 2808명이 10만 희망릴레이 참여해 힘을 보탰다.
한편, 4.18일 남구 의회에서 10만 희망릴레이 동참 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것을 시작으로, 이어 북구, 광산구의회에서도 결의안이 이어졌고, 9.6일에는 광주시의회가 미쓰비시중공업의 성실한 협상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는데, 무엇보다 지방의회 차원에서 ‘근로정신대’라는 문제로 공식적인 입장을 개진한 것은 이때가 최초(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은 종종 있었음)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 또한 작지 않다 하겠다. 아울러 이러한 여파는 지역을 넘어, 국회 1일 희망릴레이(10.24일) 행사로 확산되는 하나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10만 희망릴레이 운동본부’ 구성 단체들 중에서도 특히 ‘광주시민센터’가 쏟은 노고는 각별한 것이었다. 운동본부 구성 이전부터 이미 자체 운동본부를 구성해 힘을 보태기로 한 광주시민센터는 회원들의 참여를 독려한데 그치지 않고 수회에 걸쳐 자체 거리캠페인에 나서기까지 했다. 뿐만아니라, 무등산 문빈정사 거리캠페인이 진행되는 9개월 동안에도 어려운 순간순간마다 자리를 채워준 가장 든든한 벗이었다.
애초 목표했던 2000명을 넘어 약 3400여명의 명단을 조직하기까지 들였을 수고는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겠다. 전국적 네트워크를 동원한 ‘아이쿱 생협’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는 단순히 조직된 규모의 의미를 뛰어 넘어, 근로정신대 문제를 전국적으로 전파하는데 중요한 계기였다.
한편, 10만 희망릴레이는 근로정신대 문제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또 다른 계기였다. 특히 임덕호 회원의 제안으로 시작된 다음(Daum) 아고라 ‘모금청원’은 각별한 경험과 감동의 시간들이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60년 한을 풀어주세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모금청원(3.24~4.16일)은 말 그대로 감동의 물결이었다.
‘한류열풍’을 비롯해 전국적 회원망과 규모를 자랑하는 카페들에서 시시각각 10만 희망릴레이 모금청원 소식을 전파했고, 이 보다 더 많은 이름 없는 전국의 네티즌들은 초를 다퉈가며 SNS와 인터넷 공간을 활용해 10만 희망릴레이 모금청원 소식을 도배했다.
가히 뜨거운 반응이었다. 댓글 하나로(1개당 100원) 최대한도인 100만원(댓글 한도 10,000개)을 채우는 바람에 더 이상 댓글을 달래야 달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으니, 가히 폭발적 반응이라 할 것이다.
참여한 분들의 사연 하나 하나도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청원 기간 내내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려 기부를 실천한 어느 네티즌, 생애 처음으로 여기에 기부해 본다는 분, 지식 마일리지까지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털어 10만 희망릴레이에 마음을 실어 보탠 어느 네티즌 등, 사연 하나 하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더 없이 큰 격려였다.
아고라 모금청원은 단순히 모금액이 아니라, 광주 전남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전국의 수많은 네티즌들에게 근로정신대 문제를 새롭게 알리게 되는 계기였다는 점에서 각별한 시간이었다.
99엔 재심청구...일본 방문단 투쟁 |
6월, 또 하나의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9년 일본 후생노동성 사회보험청이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지급해 파문을 일으킨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 사건이었다. 한 차례 기각(2010.7월)에 이어 후생노동성을 상대로 제기한 재심 청구에 대한 공개심리가 6.23일 도쿄에서 예정된 것이다. 취재진을 포함해 22명 규모로 원정 방문 투쟁단이 꾸려졌다. 이때 99엔 재심 사건에 대한 야5당의 공동성명이 발표(6.22)된 바 있는데, 정치권에서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공동 논평을 낸 것은 흔치 않는 경험이다.
무엇보다 공개심리 현장이 바로 역사적 장면이었다. 후생노동성이 생긴 이래 후생연금탈퇴수당 문제로 한국인에 의해 심사청구에 이어 재심청구 공개심리까지 이르게 된 것 자체가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고작 99엔(한화 1,300원)에 불과한 문제로 그 막대한 비용을 들여 원정 투쟁에 나선 것 자체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해방 66년에 이른 한일과거사 문제의 근본을 파헤친 참으로 값진 역사적인 투쟁이었다.
당일 현장 분위기가 더욱 가관이었다. 현장 분위기로만 보면 이곳이 한국인가 일본인가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공개심리 회의장을 한국 원정 투쟁단이 장악한 채, 오히려 후생노동성 당국이 죄인처럼 꼬리를 내리기 급급했다. 이에 앞서 방문단은 후생노동성 앞 삼보일배 시위를 통해 99엔을 내민 일본정부를 강하게 규탄했다.
비록 낡은 사고에서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한 일본정부 기존 입장을 바꿔내는 데는 실패(9.30일 기각)하고 말았지만, 한국 측의 거센 반발을 통해 후생노동성 스스로도 99엔이 마찰이 불가피한 사안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했다.
이와 관련해 후생노동성 사회보험청은 비록 기각은 하면서도 “정부 정책의 결과로서 청구인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준 것에 대해서는, 유감한 일이며, 다시는 있어서 안 될 일”이라며, 전례 없는 표현으로 사실상 잘못을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입장을 밝힌바 있는데, 기존 일본정부가 취해 온 논리를 일부 허무는 적지 않은 정치적 성과라 하겠다. 결과를 떠나 일본정부의 도덕적 입지에 적지 않은 타격을 안긴 것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결코 용서치 않는다는 한국 국민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 것은 한일 과거사 투쟁에 남다른 의미가 있겠다.
대규모 원정 투쟁단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10만 희망릴레이’를 통해 원정 투쟁단이 꾸려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준 시민들 덕분이었다. 아울러 기꺼이 적지 않은 개인적 비용과 시간을 들여 원정 투쟁에 동참해준 방문단원들의 결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누차 강조해 온 후생연금 문제는 단순히 99엔에 그치지 않고, 모욕적 결과로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말았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10.11일 일본 정부로부터 넘겨받은 5천713명의 후생연금 가입 명부 사본을 공개한 것에 따르면, 5천40명(88.3%)은 한 푼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탈퇴 수당은 최저 10엔에서 최고 300엔까지인 것으로 확인됐다. 300엔이라 해야 커피 한잔 값에 불과한 최대 4,500원이다. 99엔을 방치하면 무더기 99엔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시민모임의 경고가 그대로 적중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일제 전범기업 입찰제한...정치적 상황 |
미쓰비시와의 협상은 여전히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정치적 상황에서는 의미있는 변화들이 시작됐다. 6.29일 국회에서 일제피해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재단이 설립될 수 있는 법률이 개정(이용섭 의원 발의)된 이어, 8.18일에는 기획재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과거사 문제에 사죄하지 않는 일제 전범기업들이 앞으로 정부 발주 사업에 아예 입찰에서 배제(이명수 의원 주도)하기로 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헌재 판결(8.30일)은 한일과거사 문제에 획기적인 판결로 기록되고 있다. 헌법재판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한국정부가 한일협정에 대한 일본과의 해석상의 차이, 곧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 침해라며 위헌 판결을 내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손 놓고 있던 한국정부를 매섭게 질타했다.
알다시피 한국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반인도적 범죄의 경우 일본정부에 여전히 그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반인도적 범죄를 어디까지 규정할 수 있느냐는 것.
헌재 판결에 따라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지원 단체 등과 함께 외교통상부 면담(9.28일)을 통해 일본정부와의 협의시, 근로정신대 문제도 위안부 문제의 성격과 같이, 정식 의제로 다뤄 줄 것을 요청했다. 두말할 것 없이 13~15세 어린 아이들을 강제동원한 근로정신대 사건도 역시 반인도적 범죄이지 않느냐는 것. 그러나 외교부는 뒤늦게 근로정신대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마무리됐다는 입장을 밝혀, 이 문제는 향후 과제로 남겨지게 됐다.
이런 가운데, 일제 전범기업 입찰제한 조치는 상징하는 바가 적지 않다. 비록 WTO 정부조달협정 규정에 의해 굵직한 중앙 부처들이 빠진, 7개 중앙부처를 비롯해 약 1천여개의 공공기관에 입찰제한 조치를 적용할 수밖에 없는 제한적 효력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주도해 입찰제한 조치를 내렸다는데서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
한편,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제1의 전범기업 미쓰비시를 포함해 136개 일제 전범기업 명단이 발표(9.16일)되기에 이르렀는데, 단적으로 한국에서 다시는 아리랑 3호 위성 사업과 같은 일을 수주할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물론 미쓰비시가 입을 경제적 타격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직 가늠하기 힘들다. 2010년 8월 미쓰비시중공업이 당진 화력발전소 9, 10호기 건설공사를 수주한 것과 관련해, 늦었지만 최근 한국동서발전의 움직임은 의미가 적지 않다. 전범기업 입찰제한 조치와 관련해 11월말 한국동서발전측이 직접 히다치와 미쓰비시중공업에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전향적 해결을 촉구하는 입장을 전달한 것이 그 내용. 비록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한국에 시장을 두고 있는 미쓰비시로서는 예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직감했을 것이다. 겉으로 굳이 내색하고 싶지 않을 뿐 미쓰비시로서는 가장 곤혹스럽고 불편한 시간이 도래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정치권의 의미 있는 변화 역시, 우리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단초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특히 전범기업 입찰제한 조치는 미쓰비시중공업에 아리랑 3호 위성 발사용역을 맡긴데 대한 국민적 반발이 그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사실 근로정신대 투쟁이 이번 조치에 이른 결정적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추이를 지켜보며 시간을 끌어보려던 미쓰비시 입장에서 보자면, 시간이 갈수록 자신들의 뜻과는 정 반대로 모든 것들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KBC광주방송 특집다큐...‘아직 해방되지 않는 영혼’ |
근로정신대 투쟁을 기록하는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나왔다. KBC광주방송 특집 다큐멘터리-국치 100+1, 해방되지 못한 영혼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연출 김한민, 촬영 이상원)가 그 것. 애초 계획은 단편이었지만, 사건의 무게를 감안한 제작진의 판단에 의해 1부와 2부로 나눠 제작됐다.
다큐는 아직 근로정신대 문제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안방 시청자들에게 근로정신대 문제를 보다 정확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포기하지 않고 시민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시민모임’의 진정성과 땀방울을 생생히 전달함으로써, 시민모임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특히 거리캠페인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여름을 넘기면서 피로감이 쌓인데다, 참여자 수도 떨어지고 있을 무렵 다큐가 방송됨으로써, 10만 희망릴레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끌어들이는데 큰 활력소가 되었다.
KBC 광주방송의 애정도 각별했다. 작품의 성격을 감안해 시간을 할애해 본방에 이어 재방송까지 편성한 데 이어, ‘이달의 PD상’ 수상을 기념, 또 한번 재방송을 함으로써 근로정신대 문제를 알리는데 이보다 더한 홍보수단이 없었다. 아울러 각 지역 민영방송사에 방송의뢰를 해 서울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다큐가 방송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근로정신대 문제를 전국에 알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KBC광주방송 특집 다큐는 작품성에서도 인정을 받아, 전국PD연합회가 주최하는 '제139회 이달의 PD상'을 시작으로, 한국YMCA주최 '제2회 YMCA 좋은 방송대상' 장려상, 한국여성민우회가 주관하는 '2011 푸른미디어상' 특별상 등 3관왕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후지코시 소송 종결...도야마 호쿠리쿠연락회 방문 |
10월, 역사의 또 한 장이 또 끝났다.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사건이다. 8년에 걸친 소송이 끝내 패소(10.24일)한 것. 도야마(富山)에 위치한 후지코시(不二越) 회사에 강제동원 된 할머니들의 투쟁을 도와 온 호쿠리쿠(北陸)연락회의 제안에 따라, 앞서 8.29일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외교부 면담을 가진 바 있다. 이어, 호쿠리쿠연락회 관계자들이 다시 광주를 찾은 것은 9.30~10.1일.
그동안 김정주할머니를 통해 후지코시 사건을 청취해 온 시민모임으로서는, 여력이 미치지 못하지만 더 이상 호쿠리쿠연락회를 남의 일처럼 관망하고만 있을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아울러 그 일환으로 10.28~11.1일 김정주할머니를 모시고 도야마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역사는 때로 마냥 게으른 사람들을 언제까지 기다려 주는 것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도야마 방문 직전인 10.24일 도쿄 최고재판소 판결에서 최종 기각되고 만 것. 결과도 결과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이 일본정부에 제기한 마지막 남은 손해배상 소송이었다는 점에서 한일과거사 투쟁의 중요한 역사적 국면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시민모임은 규탄 성명을 발표한데 이어, 김희용 대표, 김정주 할머니 등이 참가한 가운데 현지 규탄 기자회견, 후지코시 회사 앞 규탄 시위 등을 통해 재판의 부당성을 알렸다. 아울러 능력에 상관없이 시민모임에 부여된 역사적 책무를 느끼는 기회이기도 했다.
최고재판소 판결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투쟁은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시민모임은 마치 운명처럼 마지막 남은 패소 사건의 역사적 현장을 목도함으로써, 공교롭게도 시대의 증언자가 되어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부여안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양측은 모두 후지코시 상황 역시, 미쓰비시와의 협상 결과가 후지코시 투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
폭염을 뚫고 온 회원들...그리고 ‘김마담’ |
10만 희망릴레이 애초 목표시한은 5월말, 되돌아보면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6~7월 장마와 잦은 비로 거리캠페인이 원활치 못하자 내심 속은 타들어갔다. 이 무렵 또 한편의 걱정은 각 학교가 이제 곧 방학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제 관건은 10만 희망릴레이가 시민들의 관심에서 아예 사라지지 않도록 방학이 끝나는 개학 때까지 상황을 유지하고 잘 버티는 것. 8월 작렬하는 햇볕과 폭염은 여느 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냥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 자체도 힘든 날씨. 급기야 거리캠페인 진행 시간대를 오후 2시에서 오후 4시로 변경해 보기로 했다.
무더운 폭염에 산을 사람도, 모금 참여자 숫자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나 회원들은 검게 그을린 얼굴을 마다하지 않은 채, 때론 아이들 손을 이끌면서까지 매주 무등산 등산로를 지켰다. 문홍석, 민병수, 이정현, 박수희… 등이 그들이다. 오직 했으면 ‘시민모임은 휴가도 안 가냐?’고 할 정도…. 열정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고, 시민들은 그 속에서 시민모임의 남다른 열정을 눈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방학이 끝나 2학기가 시작되면서 걱정과는 반대로 학교로부터 모금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KBC광주방송 특집 다큐, 무등산 거리캠페인의 홍보효과도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거리 캠페인을 통한 모금은 뜨거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월 4회 안팎의 주말밖에 움직일 수 없다는 점에서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었다.
냉정히 말해 10만 희망릴레이는 시민들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김선호 교육의원이라는 이 한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 교육의원은 회기가 없는 때를 이용해 일일이 광주시내 중고등학교를 방문했다. 사실 한 두 곳도 아니고 170여곳에 가까운 광주시내 중고등학교를 방문하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도 그렇지만, 각별한 사명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결과로 광주에서는 약 170여개 중고등학교가 10만 희망릴레이 운동에 뛰어들었을 뿐 아니라, 일부 초등학교에서도 교직원들을 중심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참여는 단순히 숫자를 채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교과서에서 미처 다 배우지 못한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아울러 이들이 장차 내일의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세대라는 점, 향후 근로정신대 투쟁의 잠재적 동력이라는 점에서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실천의 경험 공유, 그리고 ‘낙관’ |
“한마디로, 그건 사변이다”
2010년 미쓰비시 항의 서명운동(13만 5천여명)을 두고 어느 시민단체 중견 간부가 한 얘기였다. 그런데 이 말도 ‘10만 희망릴레이’ 앞에서는 이제 거둬야 할 것 같다. 이번엔 단순한 서명이 아니라 투쟁기금을 내는 것. 도처에 무수한 기록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하나의 역사적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1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1천원씩의 투쟁기금을 스스로 모은 예를 알지 못한다. 한마디로 광주가 또 한번의 역사를 쓰고 말았다.
사실 많은 국민들이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도덕적 부채감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냉정히 말해 현실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이외에는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독도나 역사교과서 문제 등을 예외로 한다면 한일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시민운동의 성격을 띠고 운동이 전개된 사례도 극히 드물다. 이런 점에서 ‘10만 희망릴레이’는 광범위한 일반 국민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참여했다는 점에서, 대일 과거사 투쟁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고 할수 있겠다.
아울러 서울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광주라는 지역적 한계, 많은 국민들에게는 아직도 ‘근로정신대’는 잘 모른다는 점, 시민모임이 이렇다 할 명망 있는 단체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히 기적 같은 일이라 자평해도 무방하다.
물론 여러 손길들이 함께 이뤄 만들어진 기록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10만 희망릴레이가 가능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회원들의 굴욕의 역사를 바꿔보려는 의지와 땀방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겠다.
거리캠페인만 82회, 장장 9개월에 걸친 헌신적인 노력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것이 때론 언론을 통해, 때론 입에서 입으로 시민들에게, 각 학교로, 전국의 네티즌들에게, 지역 정치권을 넘어 국회까지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다른데 있다. 그것은 실천을 통해 승리적 경험을 집단적으로 공유했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후원의 밤’(1.22), ‘10만 희망릴레이 운동본부’(4.14), 도쿄 원정 방문단 활동(6.22~24), 9개월간에 걸친 거리캠페인, ‘10만 희망릴레이 보고대회’(12.17), ‘제2회 한일청소년 평화교류’(12.26~29)까지 숨 가쁜 일정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이 과정 속에서 부족한 조건을 탓하지 않았다. 때론 좌절과 오류를 반복하면서도 시민들을 믿고, 직접 조직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처음에는 하나같이 낯설고 한없이 두려웠던 것 들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누구보다 시민대중을 만나는 데 자신감을 갖게 됐고, 안으로는 고락을 같이 한 사람들에 대한 동지적 신뢰와 함께,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낙관적 신심을 갖게 됐다. 한마디로 ‘우리는 할 수 있다’ 신념을 관념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경험한 1년이었다고 하겠다.
총평 |
‘협상’에 대한 주변의 기대감과 달리, 시민모임으로서는 지지부진한 협상, 재정적 어려움, 대중과의 단절로 인한 고립감 등 가장 어려운 내면의 상황을 맞아야 했다.
이런 속에 ‘10만 희망릴레이’는 고육지책이자,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리고 열정과 불같은 신념은 제 아무리 혹독한 조건도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천으로서 보여줬다. 외롭고도 때론 인내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 낮은 자세, 진정어린 노력들은 마침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됐고, 애초 목표를 훌쩍 뛰어넘어 12만명이라는 전례 없는 역사적 화답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 할 것이다. 협상장에 묶여 反 미쓰비시 활동을 전면에 내 걸 수 없었던 지난 1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년은 ‘협상장 밖에서 벌어진 소리 없는 전투’, ‘그래서 가장 어려운 전투’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출발의 근본 조건이 달라지진 않았다. 미쓰비시와의 협상 전망은 아직 불투명하다. 그러나 1년 전 시민모임-미쓰비시과, 현재의 시민모임-미쓰비시 전선은 많은 점에서 그 궤를 달리하게 됐다.
시간을 벌면서 지치기만을 기다렸던 미쓰비시로서는 시간을 번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민모임의 체력만 길러준 꼴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안으로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맞게 된 반면, 역으로 시민모임으로서는 물적 투쟁자금과 함께, 손수 호주머니를 털어 이 싸움에 동참한 12만명의 ‘신 독립군’, 아울러 향후 전개될 투쟁을 도모할 수 있는 대중적 동력을 한꺼번에 얻어내는 상황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돌아보면 2011년 시민모임은 협상장 밖에서 협상을 견인하는 길고 긴 장외 전투를 치러 왔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로 ‘대회전’을 앞두고 있다. 난관과 고락이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다. 상대는 제1의 전범기업이며, 해방 67년 동안 굳게 문을 닫아 건 채 아무도 아직 허용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1년이 그랬던 것처럼, 2012년 또한 우리는 승리적으로 맞이할 것이다.
‘신념이 옳으면, 반드시 길은 열린다.’
※ 뒤늦은 감이 있지만, 더 시간이 지나가면 아예 잊혀 질 수 있어 나름대로 정리해 봤습니다. 물론 각자 평가가 다를 수 있으며, 후속 평가가 뒤따르길 기대합니다.
참고로 할머니들에 대한 결연 및 지원, CMS 도입 등 사무국 관련업무, 회원 사업, 한일청소년 교류, 미쓰비시와의 협상 부분 등은 자체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거나 필요상 다루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끝으로, 회원 한명 잘 챙겨주지도 않는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시민모임 임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이 뒤에서 매월 후원을 아끼지 않아 오신 모든 회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민모임의 진정한 얼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두 손을 모아 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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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군더더기 없이 정리를 잘해주셨네요 역시 사무국장님은 멋지십니다!! " 신념이 옳으면, 반드시 길은 열린다 "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최선을 다해오신 우리 시민모임 회원님들 모두를 존경합니다. 실로 여러분들은 신독립군 이였습니다.
튼튼한 발판을 만들어 주신 시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