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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통제의 흔적
1. 거짓 없는 기록
다카시마 긴지
영화와 결별하는 것은 조강지처와 헤어지는 것처럼 애통했다. 이는 영화인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정말 영화라는 일 없이 살 수 있을까. 영화를 자신과는 무관한 세계라고 달관한 마음이 될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며칠을 고민했다.
게다가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고민이었지, 누가 강요한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치 바로 전 일로 생각되지만 반년 이상이나 영화의 세상에서 떨어져 있다.
2월29일에 휴직원을 내고 3월 3일에 청향원(淸香園)에서 회사 사람들 30명 정도를 초대하여 저녁식사를 같이 하며 사직 이야기를 하는 결별의 연회를 열었다. 8일에 총독부의 모리 도서과장을 만나 정식으로 의를 표명하고, 곧 상공회의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나카 사장에게 사표를 제출하였다. 9일에는 본사관계,10일에는 촬영소 관계 양쪽에서 사무의 인수인계를 한 후 조선생활 12년에 비로소 낭인생활의 일보를 내디디게 되었다.
그 후로 반년이 지났다. 참으로 세월은 빠르다. 그 사이 2개월 반 정도 일본과 만주를 여행한 것 외에는 거의 매일 집에 틀어박혀 외출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화인들과도 만날 기회가 없었고 때때로 찾아오는 두세 명에게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자신이 낭인임을 잊은 듯한 말투를 하고 있는 것에 쓴웃음 지은 적도 종종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3자의 입장에서 듣고 생각하게 되어 그 때는 남모르게 자신이 구원받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나를 영화인으로서 여러 감동적인 의견이나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미안하지만 역시 내자신이 왠지 초월한 경지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내 자신의 이런 마음에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예를 들어 성급한 이야기지만, 이 책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으면 쓰지 못했을 것이고, 또 쓴다 해도그것이 바른 기록이 되지 못할 위험이 다분히 있기 때문에 아마 쓰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조선영화를 산에 비유하여 나무 한 그루라도 심은 내가 그 산이 울창해지기를 어찌 바라마지않으리오.
적당하게 비가 오고 아이들이 산을 망치지 않도록, 또 해충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인정일 터이다.
조선에서 영화제작회사의 경영은 상당히 곤란한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이 곤란을 헤쳐나가는 책임은 결코 사장이나 상무만의 책무는 아니라고 본다. 그 회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 모두의 책임이다.
조선 측 영화인도 과거의 체험을 통해 이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화를 만들게 하는 회사의 경영자도,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도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난국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
영화제작에 대해 의견 같은 것을 쓰거나 이야기 하는 기회도 앞으로는 적어질 것 같아 두 세 가지의견을 피력해 보겠다.
사람 사이의 화(和)라는 단어는 제작회사 수뇌부에서 항상 입에 올리는 이야기로 실로 중요한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일수록 어렵다. 인간의 화 중에서도 일본과 조선 사람 사이의 화가 가장 중요하다.
조선인 기술자를 모욕하는 일은 크게 삼가야 한다. 영화계의 사정이나 영화인의 기질을 모르는 아마추어가 중요한 자리에 앉은 경우 등 측근이나 관계자는 매우 주의하여 사원이나 사내 모든 일을 가르치지 않으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거기서 인간의 화는 생각지도 않게 무너져 버린다.
적어도 영화라는 문화 사업에 종사하는 자들 가운데에 내선간의 구별이 있거나 강하게 조선인에 대한 편견을갖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조선영화인은 대개 자존심이 강한 반면 공부나 연구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경우 특별한 자존심이 필요하지만 공부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길 바란다.
야규우 세키슈우사이(柳生石舟齊)가 칩거한 뒤의 일이지만, 야규우타니(柳生谷) 가까운 츠끼노세(月の瀬)의 오쿠 아라키손(奥荒木村)에서 석탄이나 산나물 등을 팔러 오는 추노스케(丑之助)라는 13, 14세의 소년이 있었다.
걔는 무사가 되고 싶었다.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여 하루는 야규우 효고(柳生兵庫)가 도장에서 그 소년에게목검을 잡게 하였더니 꽤 감각이 있었으며, 효고의 공격을 받자 소년은 효고 그의 어깨를 순식간에 뛰어 넘었다.
그 소년이 나중의 아라키유에몬(荒木又右衛門)67)인데, 그는 무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에서 이가 코가(伊賀甲賀)의 닌자(忍者)가 수행하는 것을 흉내 내어 뿌린 삼베 씨가 2척 3척 커가는 데 따라 매일 아침저녁으로 계속 뛰어넘는 힘겨운 연습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2년이나 계속했다 한다.
그러한 노력과 그 같은 연구심이 지금의 조선영화인들에게 필요하다.
나카다 상무가 오랫동안 와병 중이어서 창립 직후의 회사로서는 기획 면에서 여러 착오가 있거나 작품 제작 스케줄에 변경이 있었던 것은 불가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계속해서 신작품의 착수가 발표되고 나카다 상무도 완쾌, 출근함으로써 활발한 제작이 시작될 것으로 생각한다.
대작 ‘젊은 모습’도 대략 완성을 보았는데, 이 작품은 물질적으로는 조선영화이나 정신적으로는 조선영화라고는 할 수
없는 성격을 다분히 갖고 있다. 또 제작비 면에서 말하면 조영으로서는 장차 운명적 작품이 될 것이고 숫자적 측면에서 보면 조영의 복덩어리가 될지 또는 생명을 위태롭게 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만 훌륭한 작품의 완성을 간절히 기대해 본다.
촬영소의 신축이 이런 시국에서는 상당히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촬영소가 없다는 것도 실로 난처한일이다.
신축허가는 어려워도 기존 건물을 매수 개조하여 하루라도 빨리 촬영소의 간판을 올리고 싶다.
일본의 제작회사와 같은 제작편수도 없으니 소규모로 시작해도 지장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작의 본거지는 역시 조선에 두지 않으면 경비 면에서나 영화의 색채 면에서나 조선영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2, 3백 평의 건물이 있다면 나중에 목조건물을 증축할 때 막대한 경비 없이도 될 것이니 꼭 실현해 주기바란다.
일본 측과의 협력 작품도 1년에 2편 정도는 이곳에서 될 것이고 일본 배우도 월별로 계약하여 부르면 일본에서와 같은 복잡함이나 착오, 수고 등을 덜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각본난도 많이 고민해 볼 문제이다. 자유주의 시대와 같은 내용으로는 물론 안 되지만 그렇다 해서완전히 재미없는 것도 곤란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영화 뿐 아니라 조선의 연극 방면에서도 현상타개책으로 고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해서든 좋은 기획을 잘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을 위해서는 시나리오 작가의 양성도 필요하고 널리 인재를 구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만하다.
다나카 사장의 수고도 보통이 아니라 생각된다. 장사하듯이 5에 5를 더하면10이 되거나3곱하기 3이9가 되지 않는 게 영화이니 회사경영에 밤낮으로 골머리를 앓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좋은 부인역을 맡은 듯 나카다 상무가 곁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 부인은 절대로 신뢰하여야 한다. 남편의 권위를 보이는 것은 좋으나 부엌살림이나 세탁까지 간섭하는 것은 지나치다. 남편이 쌀 뒤주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오사카에 있을 때 자신이 외출할 때 쌀 뒤주에 손을 넣어쌀미(米)자를 써놓거나 눈금을 그어 놓기도 했던 노인이 있어 크게 웃은 적이 있는데, 그렇게 부인을믿지 못한다면 어찌 살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부부는 일심동체이기도 하다. 남편의 수치는 아내의 수치이고, 아내의 불신행위는 남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오다 노부나가(小田信長)는 역신 미쓰히데(光秀) 때문에 혼노지(本能寺)에서 죽음을 당하나 미쓰히데 입장에서는 훌륭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은 모시는 장군을 위해 어떤 전투에서나 공을 세우며 위를 바라보고 있는데 주인은 자신의 목에 칼을 대고 모욕을 주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투를 잘라 흔드는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창피를 주곤 하였다.
그 때마다 두고 보자는 반감이 쌓여 그랬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바보같은 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결국 미쓰히데 때문에 영웅의 일생을 마친 것이다.
노부나가는 워낙
67) 일본 에도시대 초기의 검객으로 시대극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어렸을 적 이름이 추노스케(丑之助).
성격이 급하고 단순하여 히데요시(秀吉)나 모리 란큐(森蘭九)에 대한 편애의 정도와 미쓰히데를 대하는태도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누구나 일국일성(一国一城)의 주인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려는 자는큰 아량과 사랑이 필요하다.
조선영화의 제작에 종사하고 있는 150명에 가까운 조선영화인 제군이여.
여러분은 결코 영화에 마비되어서는 안 되오.
생활력에 대한 강한 자신과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소. 생활을 위해, 영화를 위해라는자기 위안의 구실을 찾아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것,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고 해서는 일보의전진도 없을 것이다.
싸우는 병사는 먼저 냉정히 자신의 발밑과 적군의 진형(陣形)을 통찰한 뒤 용감히돌파하여 이기기도 하고 무운이 약해 전투에 져서 죽기도 한다.
영화에 빠져서는 안 된다. 하물며 생활에 빠져서도 안 된다. 준엄한 마음으로 자기비판을 하면서 영화인으로서 후회 없기를 기약하여야 한다.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가 일대 성전을 하기까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은 단지 검술 만의 고난이 아니고 실로 사람이 가는 길의 다함을 얻으려 한 것이고 그 때문에 그의 검은 악검이 아닌 이른바정검(正劍)이었던 것이다.
요즘 시간이 나 옛날 책들을 읽고 있어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쇼와(昭和)의 현재나 덴초(天正), 분로쿠(文緑)의 옛날이나 사물의 도리나 인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옛 영웅의 일과 지금의 일을 비교하여 그 사이에 여러 인물을 끼워 보면 실로 재미있다.
지난 신문은 관부연락선 곤린마루(崑崙丸)가 적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안전하다는 관부 사이도 적의 잠수함 출몰 위험에 노출되는 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정말 가깝게 전쟁의 화염을 느꼈다. 그 다음날 바로 오늘 신문에는 조영의차기 작품 <거경전(巨鯨傳)> 촬영대가 경상남도의 바다로 용감히 출발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영화도역시 싸우고 있다는 감개를 한층 더 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촬영 일행이 무사히 해상 로케를 끝내고돌아오길 바란다.
‘영화통제사’의 집필을 마치고 편한 마음으로 지금의 심정을 거짓 없이 쓰려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사적 견해 같을 것은 지나치게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와 같은 만필조(漫筆調)가 되어 버렸다.
나는 여기서 조선영화의 눈부신 발전과 조선 영화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비는 사람 중의 하나임을 거듭부언하며 펜을 놓는다. (10월 9일 씀)
2. 임전영화 이야기(1941년 10월 9일 경성일보 게재)
다카시마 긴지
일본의 영화제작, 배급 양 부문은 실로 핍박해졌다.
임전통제의 큰 물결에 떠밀려 구체제의 이른바 자유주의적 영화제작회사는 이미 궤멸 전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원인이 없는 곳에 결과는 없다.
영화의 무서운 감독관청이 내무성이라 했던 것은 옛말로 지금은 군과 정보국을 중심으로 문화의 첨단을 가는 영화사업의 임전적 총동원 계획이 구체화되려하고 있다.
요로의 모씨는 “모든 영화회사를 한번 두드려 가루로 만든 후 두개나 세 개의 경단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극언하고 있다. 구체제 영화인도 웃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일본영화 제작의 대전환과 조선영화의 관계는 논할 것도 없고 그 전도가 장차 위급 존망의 감을 더해 갔다.
일본 의존의 조선영화계에서 고군분투하여 조선인이 만드는 이른바 조선영화의 질적 향상에 노력해 온 재 경성 영화인은 물론 일본인 제작자도 일본 영화계의 급변에 다들 당황하고 있다.
조선에 문화입법인 영화령이 시행되었으나 아직 그 실질적 시행을 한발 앞두고 영화의 임전체제라는 태풍이 일본에서 조선으로 불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영화는 어떠한가. 일본 영화의 이른바 “두드려 가루를 내어 새로운 두개의 경단을 만드는” 식으로 정리 통합해야 하는가. 또는 항간에 전해지는 것처럼 일본의 모 유력 제작회사와 같이 완전히 해산의 운명을 걷는 일이 발생할 것인가.
나는 일본의 너무 익어버린 영화제작회사와는 달리 형극의 길을 계속 걸어 점차 여 명을 보려 하는 조선영화제작계는 완전히 이론적 근거에 대한 적확한 이유를 구별하고 느낀다.
여기까지 썼을 때 일본의 영화통제에 관한 마지막 당국 안이 마련되었다. 즉 현재 극영화 제작회사를 통합하여 3사로 하고 각각 이데올로기를 발휘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드디어 낙착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 문화영화의 통합정리, 일원적 통합기관의 설치 등 남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정보국의 모 간부(과장)가 “나한테 맡겼다면 15분 만에 해치웠을 텐데”라고 장담했던 극영화 문제가 마침내 뚜껑을 열어 보니 업자 측의 복잡한 사정 등 관리들이 너무나도 영화계의 실정을 몰랐던 점이 유감없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독선정치는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던 셈이다.
조선에서 영화제작의 임전체제화도 일본의 추세를 보아 가며 시행된 것은 당연하다.
당국이 우리 업자를 초치하여 보여준 당국 안이라는 것은 우리가 항상 역설 강화한 것을 한 발 더 내디딘 임전적 통합
으로 꽤 적극성이 강한 것이며, 과거의 영화인들이 꿈꾸었던 미지근한 방책이 아니고 소외 각종 조건을초월한 국책적 통합이다. 이에 당국이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관여하는 이유가 있는 것으로 조선영화계의 역사적 대전환기가 우리 눈앞에 전개한 셈이다.
나는 장차 태어나려 하는 조선 유일의 영화제작회사에 대해 많은 기대와 열의를 갖고 또 신회사의 성립 방법, 수단 및 앞으로의 운영에 대해 당국이 과연 어느 정도의 적극성을 가질지 중대한 관심을 갖는다.
나는 당국에 대해 솔직히 모든 각도에서 바람을 말해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당국에 대해 영화제작에 대한 전면적인 적극성을 희망한다. 즉 당국이 독자적인 영화정책을 확립해줄 것을 요망한다는 의미이다. 과거 감독하는 입장에서는 자주 업계와 절충이 있었으나 대국적 견지에서 영화계를 지도하고 영화제작의 향상에 힘을 쏟는 태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국의 영화정책이 일방적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신흥만주국에서조차 일찍이 1937년 칙령 만주영화협회법을 공포하고 이에 기초하여 현재의 만영(滿映)이 탄생하였다. 나는 만영을 전면적으로 찬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결함도 있지만 만영의 탄생 자체에 대해서는 만주국 당국 및 관동군 당국의 ‘영화 국책 확립’이라는 문화적 정책을 왕도낙토의 건설과 병행하여 실시한 점에 진심으로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만영은 차치하고라도 조선의 현재는 당국의 적극적 지도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급하고 중차대한 문제이다.
임전적 견지에서 조선에 1제작회사가 실현되는 경우 자재, 주로 생필름의 획득이 장래 이 회사를 운영해 가는 데 중대한 관계를 갖게 된다.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여 조선의 특수성, 조선통치의 정치적의미를 포함한 당국의 노력으로 자재의 확보는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전망이 생길 것으로 나는 기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영화제작 통제의 방편으로 생필름의 중지라는 비상수단을 썼다. 이에 대해 모든 회사가 손을 들었다.
조선도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다른 말을 할지도 모르나 확실히 그런 경향이있었다.
생필름의 기본이 셀룰로이드이고 비상시 중요 자재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영화통제의 방편에 생필름을 갖고 나와 “필름보다도 폭탄이다”라며 급전직하 80, 90%의 배급정지를 한다면 어
떤 이유로든 적(敵)은 혼노지(本能寺)에 있다는68) 느낌이 깊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전시 하 자재의 제한도 물론 필요하고 또 시국 하에 긴급 조치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정보국과 군부는 이렇게 영화의 통제와 자재 제한의 제 1보를 내디딘 셈이다.
따라서 조선의 장래 생필름 확보의 문제는 제작회사가 1사로 통합됨으로써 작품도 당국안과 같이 제한된다면 할당수량은 어떻게든 받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당국의 적극적 영화정책의 수행을 크게 요망하는 바이다.
다음으로 신 제작기관의 성격과 진용에 대해 바란다. 성격은 물론 임전체제이지만 조선이 독자적 입장에서 총독 시정의 일익을 맡아 때로는 조선 대중을 계발하고 때로는 약동하는 조선 대중에게 비상시국임을 인식시키는 한편 건전한 오락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가 갖는 사명은 활자에 의한 출판물에 비할 바 아니게 매우 광범위하다. 이들 중요한 사명을 갖는 영화의 제작은 온갖 인지와 기계의 종합예술이다.
명랑한 제작진의 노력과 기술자들이 애지중지하는 기계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만들어내는 숭고한 예술품이다.
신기구의 인적 요소는 여전히 조선영화계의 노력을 기다리는 바가 크다.
조선의 정서와 습성과 색채는 하루아침에 일본영화인이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인재가 부족한 업계에서 이렇게 잘라 말하면 좀 적막한 감도 있지만 나는 그렇다 하여 일본의 신인 등용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적극적으로 신기구에는 일본의 전문가나 기술자를 영입하는 것이 당연하나 제작의 근본정신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앞
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이번에 탄생하는 영화제작 기구는 당국의 의사가 상당히 강하게 작용할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고 또 당연하다. 그러나 경영주체와 제작부문의 제작태도, 제작의욕은 양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 영화계의 거인이 어제까지의 오랜 보금자리를 오늘 떠나거나 또는 삼삼오오씩 뭉쳐 이합 집산하는 사실을 보면 경영자와 제작자의 이념만으로 도려낼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조선에서의 신체제영화기구 아래 사리사욕이나 한 개인의 명예나 자기만족을 위해 영화인의 신념 등을 돌리는 동지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서로 자신을 돌아보아 후회 없도록 했으면 한다.
이에 내가 신 기구에 대한 바람이 있다면 그 운영과 제작계획을 심의 검토하는 ‘기획심의서’ 또는 ‘기
68) 일본의 전국시대 무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가장 믿었던 심복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혼노지라는 사찰에서 암살당한 사건에서 적은 가까운데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
획연구회 가칭 를 세우는 것이다 ’( ) . 이 기관은 총독부 당국, 예를 들면 도서과장, 문서과장, 사회정책과장, 국민총력 연맹의 선전부장, 문화부장, 또는 헌병사령부 당국, 그 외 조선의 대표적인 문화인과 경영자 측의 간부로 조직한다. 이 기관은 신회사의 제작계획 내용을 심의하는 기관이나 한편으로는 또 신회사 운영에 관해서도 발언하고 군 관 민이 일체가 되어 영화에 의한 임전사상의 철저를 기하는 명분에 충실한 곳이어야 한다.
조선의 영화제작회사는 가령 그것이 주식 조직이어도 혼자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자재 관계, 작품의 배급, 그 외에 대해 검토하면 할수록 이른바 관민이 일치하는 존재이어야만 한다.
긍극적으로는 반관(半官) 회사와 같은 색채를 띨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가 많다. 당국의 적극적인 영화정책이 지금에 이르러 그 제작방침이 기획심의회와 같은 기관으로 결정되고 완비된 설비와 조선 독자의 진용으로 제작될 경우 그 작품은 과거와 같은 좁은 시장에서 신음하는 것이 아닌 전 일본의 시장으로의 진출이 약속되어 있다.
이에 관청 영화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다.
일본에서도 영화의 임전체제 실시와 동시에 관청 영화의전폐를 단행하게 되었다.
관청영화는 원래 자기만족에 빠지기 쉬운 속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착수에서 완성까지, 또 완성 이후 영화의 효과에 관해 제작자는 불안이 없고 또 영화가 노리는 바 초점은 언제나 대중과 동떨어져 있다.
<배가 부르면 잠이 온다(腹がふくれると睡気を催す)>, <배고프게 찍은 영화가 볼 만하다(すき腹程度でつくったものが見ごたえがある)> 등 조선에서도 관청영화의 완성도는 질책을 받을지 모르나 많이 떨어진다.
이는 역시 제작 의도와 기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경우 중점주의에서 보아도 당연히 관청영화는 폐지돼야 하며 관청영화라는 명칭마저 동의할 수 없다. 관이 민을 지도하는 이상 현재우리가 제작하려는 임전 영화야말로 환언하면 관청영화의 대중화이고 영화를 통해 상의하달의 역할도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국의 뜻에 따라 신 제작기구의 창립에 관한 계획안은 이미 제출되었다. 곧 구체적 방책에 대한 명확한 당국안이 발표될 것이다.
나는 경무국 혼다 도서과장의 정중하면서도 간절한 임전영화의 장래에 대한 투철한 의견이나 노부하라(信原)문서과장의 명확한 찬조의 뜻과 약진하는 조선의 경제력을 잘 꿰어 맞춰 장래의 조선영화에 불타는 정열을 쏟고 있다. 또 이 신 기구의 경제적 중심이 되는 인재도 모두 곧 클로즈업 될 것이고 인선 또한 당국의 방침에 의할 것이지만 나는 일본영화를 오늘날의 수준까지 끌어 올린 영화경영자들을 생각한다.
우리의 중심인물은 “경제인이면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절대조건으로 섬세한 두뇌보다도 담대하여 청탁을 함께 아우르는 아량 있는 걸출한 인물을 요망하는 바이다.
백만 이백만 엔의 회사라고 무시하지 말라. 게다가 조선 유일의 영화사업은 항간의 천만 이천만의이윤추구를 업으로 하는 회사와는 그 정신과 가는 길이 다르다.
마지막으로 나는 임전영화 체제에 관한 당국의 정식안을 학수고대하며 펜을 마감한다.
3. 조선영화의 신 발족('문화조선' 1942년 9월호 게재)
다카시마 긴지
조선 유일의 영화 회사. 다시 말해 일본의 쇼치쿠, 도호, 다이에이에 이어 유일한 조선영화사가 만들어졌다.
영화기업이라는 자본가와는 다른 사업, 그것도 자본금 200만 엔의 회사를 성립시키기까지 자본가의 고심은 상상이 가나 영화인으로서 어언 3년, 오늘이 있기까지 고투해 온 필자 자신으로서도 매우감개무량하다.
조선영화에 대한 개념론이나 이상론은 이미 여러 선배나 지인들이 다 말한 바이다.
요컨대 그러한 이상을 어떻게 살려 어떤 방법으로 실현시킬 것인가이다.
조선영화는 재출발하였다. 아니 새롭게 발족하였다.
그리고 이미 제작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돈만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제작비를 가장 교묘하게 사용하여 보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인간과 설비의 문제이다.
그러나 기계도 인간이 사용하는 이상 사람에 의해 B의 기계로 A의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또 반대로 A의 기계로 B의 효과를 올리는 데 그치는 기술자도 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는 사람의 힘인 것이다. 조선영화의 경우 대회사, 대자본이 실현되었다 해서 바로 현재의 인적 구성으로 만족스러운 영화를 기대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결국 현재의 조선영화 기술진의 사기를 저하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지도적 지위에 있는 일류전문가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급한 문제로서 기계를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이 점에서는 도쿄에가 있는 나카다 촬영소장에게서 꽤 고무적인 소식이 와 있다.
이 사이 다나카 정무총감 하의 동시녹음으로 <후방의 책무(銃後の責務)>라는 짧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인화해 보니 끝 부분이 전혀 소리와 입이 맞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여러 가지로 조사해 본 결과 10 피트에 4나 5 콤마씩이었다. 모터의 고장으로 판명 났다.
간단한 이유이지만 이래서는 좋은작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 촬영에서 현상까지 일관 작업으로 설비가 있는 데나 싱크로69)나 프린트가 없어 고생하며 찍고 있다. 소리를 시청(試聽)하는 무비올라도 없다. 이 들 종래의 조선영화의 빈약함을 직접 체험한 나는 이런 악조건에서 오늘까지 잘도 찍었다고 감탄한 지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비도 곧 일소되어 완전한 설비 하에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은 영화인 전체의 행복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배우에 대해 느낀 것은 종래 자칫하면 이단자 취급을 받아 온 그들이었으나 주연급 남녀배우 대부분을 만나 보니 그들의 영화에 대한 정열은 실로 뜨거웠다. 그들은 진지한 자세로 큰 조직에서 땅에 발을 붙이고 원 없이 일하고 싶다는 마음에 가득 차 있었다. 과거의 어두운 면을 일소하여 명랑한 연기자로 일어서는 그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나는 남몰래 쾌재를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후속부대로서 계속 올라오는 신인의 양성도 물론 필요하나, 이들 현역배우의 분발은 신회사의 가장 바라는 절실한 문제일 것이다.
조선영화의 연출진 즉 영화감독은 정말 척박한 수준이다. 펼칠 힘을 갖고서도 묻혀 있는 그들도 드디어 자기의 야심을 펼칠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에 심사숙고해야 할 부문은 눈앞의 공명을
69) 싱크로스코프의 준말로 시간에 따른 입력 전압의 변화를 화면에 출력하는 장치를 말한다.
지 말고 큰 마음을 가져야 하고 말도 안 되는 야 쫒 심을 품다 실패로 끝나는 일은 개인의 자멸뿐 아니라조선영화의 패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상무이며 촬영소장인 나카다 세이고 씨는 일본 영화계 최고의 공로자로 예민한 신경과 제작 의욕의 권화와 같은 선배이다. 이 사람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은 조선영화의 행복이다. 실적을 서두르지 말고 한 발 한 발 건실히 나아가 조선에서 일본 감독진을 육박하는 일을 준비할 것이다.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으나 우리들은 현실 문제로 광명의 출발선(스타트 라인)에 섰다. 이 행복, 이 환희와 감격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로 가슴에 새기고 싶다.
고이소 총독은 이 무렵 국장회의에서 “항상 윗 사람과 아랫사람이 하나가 될 마음가짐이란 윗 사람의 명령이 정당하고 무리가 없으며 감독이 치밀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수양과 큰 감화력을 가져야하며, 아랫사람은 숭고한 덕의심과 충실한 복종심이 필요하다.” 이 말은 영화계의 경우 절실히 들어맞는다.
신 회사의 자본가들이나 우리의 사용인들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나가 되어 영화보국의 염원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4. 대동아문학자대회 일행을 맞아[1942년 11월 14일 명월관(明月館)]
다카시마 긴지
대동아공영권의 유력한 문화(학)인 여러분이 모여 장차 도래할 찬란한 아시아 문화를 위해 진지하게협의한 뒤 적절한 성전 완수 협력의 선언을 내외에 발표한 일은 실로 시의적절한 쾌거로서 진심으로여러분의 협력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대회 출석자 중 만주, 중화민국, 몽고의 대표자들은 귀국 길에 들러 조선의 문화인들과 이같이 무릎을 맞대고 교류한 점은 조선영화계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큰 기쁨이고 그들과 가까워질 기회를 얻은것이 일신에 차고 넘치는 영광입니다.
오늘 이 회합을 통해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전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조선 문화인의 불타는 애국의 정열을 외지 문화인 여러분이 깊이 인식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제휴와 협력으로 대동아 문화인 각자가 품고 있는 대아시아 문화의 여 명을 향해 일약 매진해 가고 싶습니다.
조선영화계의 한 사람으로 초대해 주신 오늘 조선 영화계의 현상을 간단히 보고 드리겠습니다.
조선에서 영화의 제작이 시작된 것은 지금부터 22년 전 1921년입니다.
그 후 1934년까지 무성영화의중심작 95편, 이후 토키영화시대가 된 지금까지 약 40 편 전후의 극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이 숫자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조선영화의 과거는 실로 빈약 그 자체입니다만 여기에는 설비 면에서나 용어 관계,
또는 조선의 부의 정도 등 여러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조선 영화인이 이 모든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여오랜 동안 영화를 위해 악전고투해 온 사실은 우리나라 영화계와 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조선 영화계도 만주사변 직후부터 상당히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에 이르러 지나사변, 대동아전쟁과 시국의 중대화에 따라 조선 영화인의 제작 의욕은 구태를 벗어나 새로운 조직적인 영화제작으로 약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8월 이내 외지를 일관한 내각정보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의 임전체제 확립안이 발표된 이래 조선영화가 나아갈 길이 완전히 확립되어 일본의 3대 영화제작 회사에 이는 일대 제작회사를 창립하였습니다.
즉 조선총독부 당국의 절대적인 지원 하에 지난 9월 30일 자본금 200만 엔을 갖고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창립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회사의 목적은 영화가 가진 힘을 국책 선에 덧붙여 대동아전쟁을 완수하는 한 기관임을 당연한 책무로 하고 이전부터 활동해 오던 조선 영화인의 대다수를 수용하여 화려한 스타트를 끊은 바입니다.
영화에 국경 없고 문화에 국경이 없음은 여러분이 모두 잘 아시는 바이고 교만한 미국영화가 세계를 더럽히고 경박한 구미문화가 얼마나 아시아를 멍들게 했는지도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는 우리 문화인의 손으로 모든 문화재를 총동원하고 전 아시아인을 진정한 아시아인으로 만들어 대동아 번영을 위해 백년, 천년의 대계를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은 대륙병참기지로서 대동아에 클로즈업 했습니다.
조선영화는 조선만의 영화가 아니라 일본 영화이고 또 만주, 중화민국, 몽고 등 친구들의 마음에도반드시 깊이 파고들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 이에 유력한 외지 문화인 여러분 앞에서 이상 조선영화계 현황의 일단을 보고하고 앞으로 조선영화에 대한 지원과 지도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으면서, 출석해 주신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하며 제 인사를 마칩니다.
1943년 12월 25일 인쇄, 1943년 12월 28일 발행
조선영화통제사 비매품
발행자 경성부 종로구 서대문정 2-7-3
히로가와 소요
인쇄자 경성부 중구 태평통 1-31
텐잔 마스미(天山益進)
인쇄소 매일신보사 인쇄부
저작자 경성부 서대문구 봉래정 4-290
다카시마 긴지
발행소 경성부 중구 장곡천(長谷川)정 동양상공 빌딩 1층
조선영화문화연구소 (전화 본국 6234 번)
<출전 : 高島金次, '朝鮮映畵統制史', 朝鮮映畵文化硏究所, 1943년>
2) 나카타 하루야스(中田晴康), 영화정책과 영화제작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상무이사·촬영소장 나카다 하루야스 일본영화계는 자기 자신을 변혁하도록 요망되는 한편, 날로 커져 바닥을 모르는 큰 규모가 충실해져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에 엄청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속된 말로 하자면 주판을 쓰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이른바 영화가 갖는사명 중에는 정치성을 갖는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경영의 기초가 단순히 주판에 맞다 안 맞다로
결정할 수 없게 되었다.
여러 가지 커다란 사명 중에서도 영화의 힘으로 동아에 침윤(浸潤)하고 있는 미, 영 사상을 때려잡고참다운 일본정신을 심는다는 일은 매우 중대하며, 또 쉬운 일이 아니다.
유식한 여러분들이 그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연구하고, 적절한 방법을 찾아내는데 노력하고 있지만, 가장 주의가 필요하고 또한 연구의 중점을 두어야 할 점은 아무리 영화의 내용을 바꾸어도, 그 방법이 그 전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중앙에서 만든 필름테이프를 그냥 빙빙 돌리는 것만으로 다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경제적인 것만으로 경영의 기초를 삼아 대중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방편이며 목적인 미, 영국식 방법이라면 대중이 갖고 있는 본능적인 약점을 노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일은 없을 것으로 이런 방법이라면 물론 필름테이프를 돌리기만 하면 충분하지만, 새로운 일본영화계가 갖는사명으로 말하면, 여러 가지 점에서 그렇게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미, 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계발하고, 교화하고, 지도하며, 민도를 높이는 것으로 대중을 끌어올리는 일이며, 그리고 대상은 오랫동안 본능적인 것에 자극 받으며, 감성적인 것에 길들여 진 상대임으로 그것의 전환이 쉬울리 없다.
따라서 대중의 흥미를 끌면서 부지불식간에 교화와 계발을 하는 영화가 좋고 그것이 영화의 강점임을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갑자기? 그것도 괜찮은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영화 제작 쯤이야 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워서, 실제 그러한 영화가 지금까지 몇 개나 만들어졌나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게다가 대동아라고 하면, 여러 가지 기후풍토도 다르며 민정도 제 각각으로, 그렇게 손쉽고 즉흥적인 예술적 발상만으로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영화가 갖는 대중성이라고 하는 것에 현혹되어 무엇이든지 영화의 힘에 기대어, 하나의 의지가 필름의 흐름을 타고, 가는 곳마다 같은 모양으로 스며든다고 생각하면 크나 큰 오산이다. 장소와 때와 그곳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효과가 다르다는 것을 잘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결과도 초래하는 일마저 있다.
풍속과 습관의 차이에서 아무리 해도 이해 못하는 것이 생기거나, 민도차이에서 완전히 반대의 관점으로 포착되는 예는 만영(滿映)에서 제작에 제휴한 친구들에게서 종종 듣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극단적인 예이지만, ‘북지’70) 방면의 선무반이 민중에게 화려한 뉴스영화를 보여 주었을때, 일본군은 강할 텐데 도망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조금도 감명 받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즉 돌격하는 모습은 뒤에서 찍는 것이 진짜로, 교양도 나오고, 상식도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영화가 갖는 진실성은 실제의 현실성에 가까운 것을 요구하지만, 그것을 채울 만한 영화기술이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한편에는 별도의 효과가 있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70) 북중국.
기술적인 방면과 마찬가지로 내용적으로도 주변 사정을 여간 연구하지 않으면 엉뚱한 잘못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전과 같이 국민의 교양정도가 거의 일치하고 또 영화관객 층의 지식정도에서나,자연과 극한적인 환경만이 제작의 기획에 대조를 이뤘던 경우와는 달리 이제 그 주변이 크게 달라진것에 자주 또 충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미국영화는 그 만큼 광대한 지역에서 발전하며, 교양이나 상식의 차이가 심한 사회에서나, 민도의 차이가 심한 여러 나라에서도 먹혀들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주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점이다. 미국영화는 전 인류가 갖고 있는 본능적인 약점을 자극해 마지않음으로, 전적으로 망가지기 쉬운 인간 공통의 약함이란 점에서 민도, 교양을 초월한공명성(共鳴性)이 있기 때문이다.
오욕(五慾)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인간본능의 취약 면에서, 겸손이나 인사도 없이 무책임해도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영화에 대중성이라거나 보편성이 있다고 해서, 지금부터 일본영화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영화의 대상은 대중이라고 말하며, 대중을 파악하는 방향에서 과거의 그것과는 천양지차를 보이기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일본영화의 사명과 어려움이다.
거기에는 지역, 풍토, 교양, 민도 등의 차이에 따라 각각 알맞은 방법을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자체가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지적, 정신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것을 요청받고 있을 때는, 당연히 실행해가는 방법도 대상의 차이에 따르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그 때문에 시대의 추이와 함께 일본영화의 취급방식이 지역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된다.
한 예로서 최근 만주에서 두개의 커다란 작품의 상영 불능과 같은 문제가 일어난 것은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재료 부족, 자원 부족 등의 이유로 굳이 한 곳에 제작을 집중하고, 그것을 각 방면으로 유통하는 방법에 기울기 쉬운 때이지만, 이러한 일은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일방적인 관점이나 독선적인 나쁜 결과를 낳을 우려가 다분히 있다.
지나사변의 전반(前半)에서 가장 화려했던 서주(徐州)회전 때 함락의 실황방송이 실시되어, 국민의피를 끓게 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 방송을 뜻밖에도 당시 태국 샴의 북쪽 도시인 첸마이에서 들었다.
그날은 또 각별히 더운 날로 내가 묵고 있던 사진관 식당에서 식사하다 우연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찜통에 들어 간 것 같은 더위도 잊어버리고,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감격의 눈물이 볼을 흘러내리는 것 조차도 느끼지 못할 정도이었다. 타관에서 그러한 기쁜 소식을, 그것도 국어로 듣는다는 기쁨은 도저히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나, 그때 같은 식탁에는 그 집의 가족 일동 외에 중국인 사진직공 세 사람이 함께 있었다. 나의 묘한 행동에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나는 조금은 상대의 기분도 짐작하며 겸손하게 일본 방송으로 서주가 함락된 실황을 들었노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들 세 사람은 일제히 소리를 높여 웃기 시작했다. 가가대소(呵茄大笑)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할 만큼 명랑한 폭소를 해 제켰다.
그러고는 일본의 선전(데마) 방송의 정교함에 대해, 그런 바보스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바로 우리는 어젯밤에도 이 귀로 중국 대승리의 상황을 호텔에서 들었다, 당신은 딱하다며 모두 몸을떨 정도로 계속 웃는 것이었다.
나는 온 몸의 피가 한꺼번에 역류할 정도의 분노가 치밀어, “무례한 놈”이라고 크게 꾸짖고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갔으나, 그들의 웃음소리가 언제까지나 귀에 남아서 그밤은 잠들지 못했다.
나 자신이 여기 올 때까지 같은 기차에는 장제스의 군사(軍使)라고 말하는 남자일행이 타고 있었으며 아무리 한 밤중이라고 해도 이 급행이 서는 역에는 반드시 많은 중국인이 산더미 같은 현금을 쟁반에 얹어서 헌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 쪽 침대에는 알몸에도 단총을 허리에 찬 기분 나쁜 놈이 언나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 도착하니 도시의 유일한 호텔에는 지붕에서 땅에 닿을 만큼의 현수막에 대대(大大)라고 불유쾌한 글자가 걸려 있다. 환영군중에 둘러싸인 그들은 당당하게 호텔에 들어가서 그곳을 독점했다.
덕분에 나는 잘 곳도 없이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일본 동포는 지금 피를 흘리면서 참다운 그들의 행복을 만들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리 허구일지라도 현실에 나타난 눈앞의 달콤한 말에는 대중은 무엇 하나 의심치 않고 네, 네 하며 마음으로 믿고 따르고 있다,
이 사실은 어쨌든 -나는 그 때 이후로 정치공작, 문화공작에 대한 영화인으로서의 사고방식에 뿌리에서부터 개혁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문화를 높인다, 교도한다, 계발을 한다고 하는 일은 절대로 그곳에 가서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결심한 것은 그때부터다. 이와 같이 거짓과 속임수마저 현실이 힘을 갖는데 하물며 ‘일본의 진실’은 언제 어디서든 현실로 모양을 드러내면 절대로 그 이상의 힘을 가질 것이 틀림없다는확신을 그때부터 갖게 된 것이다.
문화는 생활이다. 빨아들이는 숨결, 뱉어내는 숨 속에서 태어난다.
그 향상은 멀리에서 오는 통신교육처럼, 혼이 없는 방법으로 충분한 것이 절대 아니다. 그곳의 물을 마시고 그곳의 공기를 마시며, 그 땅에서 잠자며, 그곳의 진실을 자신의 피부로 느끼는 것이야 말로 참다운 것을 할 수 있게 한다.
최근 남쪽 방향의 영화제작에 여러 방면의 노력이 경주되어 왔다. 현지 시찰, 연구도 여러 가지로 열심히 하고 있다.
참으로 업계의 앞길에서 뿐만 아니라 대국적으로 말해서 경하 해 마지않을 일이다.
“거기에 가서 한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을 잃지 않을 것과 자재 관계나 기타 이유를 빌미로 단순히판로를 넓히기 위하여 일본에서 만들어진 필름을 유통하는 것만 생각하지 말 것을 바란다.
대동아의 영원한 문화향상을 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물자가 빈곤하고 기재가 부족한때 일지라도, 이제부터 그 부족한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를 나누어 가지며, 유능한 지도자를 계속해서 현지에 심고, 뿌리를 살리며, 아무리 빈약할지라도 그곳에서 제작하는 고통에 부딪히는 기백과 실행이필요한 것이다.
민도를 높이는 것은 옆에서 문화재를 주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갖고 있는 생활 속에서 기세가 높은것을 보육하고 교도해 나가지 않으면 참다운 것이 안 된다. 모양은 갖추었다 해도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골수로부터 피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선도하고, 생활 바닥에 있는 것을 잡아내어 함께 연구하고 연마해 나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조선에 와서 아직 1년, 아무것도 알 리가 없으나, 다행히 조선의 좋은 친구들이나 문인, 학자들의 열심어린 가르침과 실지의 공부 덕택에 조금은 조선을 알아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전에도 친구나 선배에게서 조선영화에 대해 여러 가지 듣고 있었으며, 다소 일하는데 협력한 일도 있었으나 이쪽에 와서 실제를 보게 되니, 이렇게 자신들의 인식이 박약했던가를 부끄럽게 여기는 동시에 친구나선배들의 남모르는 고심과 조선영화인의 헌신적인 고투에 머리가 수그러진다.
조선의 영화인은 완전히 자신들의 손만으로 20년 이상 계속 고심하면서,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영화에 잘 맞춰 넣는데 노력해 왔다. 그리고 조선 전체의 민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많고 많은 신고(辛苦) 30년이란 오랜 기간 내선협동의 일익을 자신들 손으로 이루어 온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영화는 어느 정도의 수준을 달성하고, 점점 스스로의 몸 안에 육성된 일본정신을 실제 모양으로 드러낼 기회가 온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기쁜 일이 아닌가. 이것은 참으로 한때의 땜을 위하여 다른 곳에서 가져와 급하게 갖다 붙인 것이 아니며, 조선의 생활 속에서 솟아올라 만들어진것이다.
위에 덧칠한 것이 아니다.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이며 존귀한 것이다.
미국영화가 예전에 일본을 휩쓴 것처럼, 조선도 마찬가지 피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모습을 감춘다 해도 조선에는 조선 자체의 생활, 즉 황국신민으로서의 생활에서부터 싹튼 영화가 있었다.
조선의 일본영화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경하할 것이며, 조선영화인의 공적으로서 칭찬해야 할 것인가. 때는 왔다, 조선영화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예술지상주의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일본의 의지를 짊어지고, 조선 대중에게 호소하는 사명을 띤다. 따라서 조선영화인은 심각한 자성아래 자기를 청산하고, 연성하며, 씩씩한 출발을 시작했으며, 곧바로 그것을 해 낼 수 있는 것도 스스로의 몸 안에서 만들어 올린 실제 고투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징병제도, 해군특별지원병제도와 조선청년이 황군의 일원으로 천황의 방패가 되는 영광을 짊어지기에는 과거 30여 년 남짓한 연마의 역사가 있다. 이 귀한 사실과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영화의 발생과 성장에는 확고한 것이 있는 것이다.
동아를 유린한 미, 영문화가 하룻밤 사이에 그 정체를 폭로하고 이후 쇠퇴일로를 더듬기만 하는 것은 결국 그것이 민중의 바깥 피부를 물들인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름이 그 물감과 같은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지만 그 형태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하지 않으면안 되는 것이다.
이것저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제야 그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주의가 정말 중요하다.
안팎으로 다단(多端)한 이때, 일본영화가 나아가야 할 곳이 점점 더 중대한 뜻을 갖는 오늘날, 영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엄밀한 반성과 용기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출전 : 中田晴康, 「映畵政策と映畵製作」, '映畵旬報', 1943년 7월 11일>
3) 구라시게 슈조(倉茂周藏), 조선영화에의 희망
조선군 보도부장·육군소장 구라시게 슈조
1
영화순보에서 “조선영화에 대한 희망”을 말하라는 주문이다. 편집자 생각으로는 “조선영화의 본연의모습”이라거나 “조선영화가 가야할 길”이라거나 하는 점에 관하여 의견을 타진하고자 하는 의향인 것같다.
그런데 조선영화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일까. <당신과 나(조선군 보도부 제작)>, <멋들어진 금광 도호 ( (東寶) 작품)>, <망루의 결사대(앞과 같음)>나 현재 제작 진행 중인 <젊은 모습(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같은 것은 과연 어떤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조선영화도 일본영화와 동등한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새삼스럽게 ‘조선영화’라고 멋진 이름을 붙이는이상, 조선영화로서의 특별한 색깔이며 성격 같은 것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양해 받을 것은 “조선옷을 입고 아리랑을 노래한다.”는 것이 조선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별한 색깔이나, 성격이라는 것도 억지로 강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좋다. 아니, 오히려 색깔이나 성격 같은 것이 모양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배척되어야 하며, 그러한 것은 어떤 ‘냄새’로서, 혹은 ‘맛’으로서 오로지 내용적으로 넘쳐나야 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영화는 대중의 것으로 제작자나 일부 인텔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대중의 기호에 맞추어, 또한 대중을 지도와 계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조선영화가 조선대중을 첫번째 대상으로 하는 만큼 선결조건으로서 조선대중의 기호에 맞지 않으면 그 영화가 어떻게 훌륭한 의도를 가질 것이며, 아무리 멋지게 완성한다 해도, 결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 사람들에게 황국신민이 된 이상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타쿠앙(단무지)’에 친숙해야 된다고 하는 유치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인이 ‘타쿠앙’을 좋아하고, ‘타쿠앙’ 없이는 밥을 먹을수 없다고 한다면 할 수 없지만, 요즘은 우선 ‘김치’도 괜찮다. ‘김치’에 맛들인 혀로서도 굳이 국어를상용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황국신민으로서의 정신에 철저하지 못할 이치는 없을 것이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김치’ 냄새와 맛을 가진 것이 곧 ‘조선영화’이다.
가령 다른 사람들에게 코를찌르는 것일지라도, 조선 대중에게는 ‘치즈’나 ‘버터’보다도 혹은 ‘타쿠앙’보다도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이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뜻에서 앞에 든 4개 작품 중에서 <멋들어진 금광>은 조선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그영화가 조선에서 로케이션 되고, 화면에 나타나는 인물이 조선옷을 입고 있었다고 해도 따져보면 조선산 ‘타쿠앙’에 지나지 않고 ‘김치’와는 아마도 거리가 먼 물건이기 때문이다.
다른 3편은, 정도에 다소 차이가 있으나 ‘김치’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일본영화에도 흔히있는 것과 동시에 조선영화에도 있을 수 있는 작품이며, 조선영화가 가야 할 길을 여러 각도로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당신과 나>는 일본의 기재를 이용하였으며 배우도 일본에 많이 의존했다. <망루의 결사대>는 도호의 출장 촬영이었다. <젊은 모습>은 자본이야 조선 것이지만 이것 또한 일본의 의존이 농후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조선에는 독자적인 영화회사의 존재가 필요 없는 게 아닌가, 일본 영화회사의 지점이라든가 출장소가 더 낫지 않은가 라는 설을 논하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조선의 특수한 사정을모르는 자의 설로, 인식부족도 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이나 대만에 총독정치가 시행되고 있는 것은 그 어느 쪽이나 이런 특수사정에 의한 것으로, 독자적인 영화회사의 존재가 필요한 것도 이 특수사정에 불과하다.
“사람을 보고 법을 말하라”인 것이다. ‘김치’를 주어라 하는 곳에 총독정치의 어버이 마음이 있는 것이며, 어버이마음이 있음으로써 정치의 원활한 처리와 운용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일본 영화회사에서도 조선영화를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참다운 조선영화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들어진다고 해도 결국은 조선제 ‘타쿠앙’이라는 ‘김치’와는 닮았으나 진짜가 아닌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다.
조선영화는 그 전제로 조선 대중을 대상으로 기획되고, 조선사정에 정통한 작가(조선인 작가는 말할것도 없이)의 각본, 조선인의 심리에 통달한 연출가의 연출에 의하여 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작자의 의향으로는 채산 상 일본, 만주와 중국, 남방공영권도 대상으로 하고 싶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두 번째(第二義)의 일이며, 근본적으로는 총독정치의 익찬(翼贊)문화재인 동시에 조선 민중생활의 문화적인 배양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조선에 독자적인 영화회사의 존재 의의가 있게 되는 것이므로, 회사 당국이 함부로 채산을 추구하거나 일본 영화에 도전하는 것 같은 무모한 태도는 삼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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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경영방침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할당 필름의 양에 의하여 결정된다.
현재의 연간 할당량은 회사 창립 당시의 예정보다 크게 삭감되어 있다.
그래서 이 적은 할당량을 어떻게 유효하게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영화와 연극의 분리” 즉 영화와 연극의 분야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영화가한정된적은필름으로연극영역에침입하는것은바보짓임을깨달아야한다.
연극에연극 독자적인 영역이 존재하는 동시에 영화에는 영화만이 군림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상으로 극적인 성질은 무시할 수 없을 뿐더러 존중하는데 인색하지 않아야겠지만, 영화의“극적인 것”이 당연히 연극의 그것과는 스스로 다른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연극성에 있어서는 외면적으로 유사한 것을 보이고 있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무대(영화의 경우에는 스크린)를 가지며, 극장과 많은 관객을 가진다는 점에서, 또는 외부적인 제약을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만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필연적인 제약에 대한 방법적 분화 면에서는 정당한 연극과 영화는 눈물을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영화문화의 연구」, 이이지마 타다시(飯島正)
이것은 참으로 귀를 기우려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논설로서, 조영(朝映)이 나아갈 길에 커다란 시사를 준다고 생각한다. 영화와 연극의 분리에 의하여, 당면한 필름난도 상당히 완화될 것이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적은 할당이라는 제약 하에서는 도저히 기획도 세울 수 없을 것이다.
문화영화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의 것을 말할 수 있으며 절대로 공포는 쏘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에는 문화영화의 제재(題材)는 많이 굴러다니므로, 엄선에 엄선을 거듭하여 주옥편(珠玉篇)을 낳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뉴스는 조선시보 라고 제목을 ' ' 바꾸어 1개월간의 조선 내 주요 시사문제를 하나로 묶고 있으나,평판은 좋지 않다. 그것은 뉴스로서는 이미 시기가 늦으며, 기록영화로서는 너무나 조잡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개의 제작으로 생생한 뉴스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기록영화로, 두 번 다시 되풀이될수 없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그쳐야 할 것이다. 그 역사적인 가치와 정치적인 선전력은 영원히 상실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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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영화기획심의회의 문제이다. 영화회사가 일본과 같이 몇 개사가 병립할 경우, 기획을 일원화시키기 위하여 기획심의회의 존재가 필요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미 영화회사가 1개사로 통합되어있기 때문에, 그 임무도 자동적으로 일본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심의회의 의사(議事)를 거칠 때마다 모처럼의 각본이 맛이고 무어고 없어질 것 같으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위원이 각본 중 하나하나의 글귀에 구애받거나 혹시 미스프린트를 발견하여 의기양양해져서는 이야기가 안 된다.
기획심의회는 이름 그대로 어디까지나 기획 심의에 중점을 두고 각본, 연출, 연기 같은 것은 전적으로 프로에 일임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관제 냄새가 짙은 영화가 성적이 탐탁지 않은 것은 정평이 나 있다. 지난 4월 첫째 주 전국에서 일제히 개봉된 <헤이로쿠(兵六) 꿈 이야기>가 6십 6만 엔을 올린데 대하여 <적기공습>은 겨우 4십2만 엔에 그친 현실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조선에서는 이러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조선에서는 기획심의회의 손을 거칠 때마다 기획에 광채가 나고, 각본에 매력이 더해 오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전 : 倉茂周藏, 「朝鮮映畵への希望」, '映畵旬報', 1943년 7월 11일>
4) 가라시마 다케시, 조선과 영화
경성제대 교수, 조선문인보국회 이사장, 연극문화협회 명예회장 가라시마 다케시조선에서 영화가 갖는 임무는 매우 중요함과 동시에 매우 다각적이다. 오늘날 말레이나 수마트라의 보도를 손쉽게 머리에 떠올리는 우리들이 조선에 와서 살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안채의 현관에 서 있는 정도일 것이다.
결단코 “멀리 고향을 떠나서 이국땅에 온 것일까”와 같은 감회를 가질 것이 아니고,또 여기는 결코 이국이 아닌 것이라고 하나, 도시 중심에 미쓰코시(三越)의 지점이 당당하게 솟아 있고,학교 거리에는 제대(帝大)가 많은 사각모를 토해 내고 있는 경성에서마저, 풍물의 차이는 일본인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망향의 심정을 품게 한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일본의 풍색(風色)을 화면에 수록한 영화는, 그리고 가끔 우연히도 고향 사투리마저 귀에 들려 준 영화는 일본사람들에게 헤아리기 어려운 사모와 위안을 주는 것이다.
카부키(歌舞伎)에서, 요세(寄席: 연예장)에서, 마을 축제의 북소리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일본에서 오는 영화는 확실히 커다란 위문이다. 그리고 이 위문품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실제로 이미 이 땅에서 대학을 나와 결혼하고 아이들까지 키우고 있는 나이의 이른바 2세 이하의 사람들에게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과 마음을 연결시켜 주고 또 커다란 하나의 임무를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어서도 아직도 부모의 고향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일본의 전원풍경을 보여주는 영화는 오락 이외에도 깊은 영혼의 교육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일본영화가 여기에 살고 있는 일본인에게 주는 오락이나 교육 같은 것은 2천4백만이라고 하는 일본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조선동포에게 주는 교화에 비한다면 숫적으로 거의 아무 문제가 안 될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풍속과 습관을 달리 해 온 조선동포를 하루라도 빨리 같은 피와 감정으로까지 키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역사를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의 역사로 자각시키고, 두들기면 울리듯 같은 일본인으로서 기성(氣性)을 단련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영화의 한 토막 한 토막이 라듐선처럼 이 사람들의 혼에 작용하지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금은 이미 조선 중소년층의 일부가 “추신구라(忠臣藏)”를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하고 있다.
“하와이·말레 오키나와(沖) 해전”은 조선에서 최고의 영화흥행 성적을 올렸는데, 7할 이상이 조선동포가 본 것이다.
“싱가포르 총공격”에서는 영국군을 때려 부수는 장면에 대해서, 내가 앉은 주변의 조선관중 사이에서 예기치 않은 환성과 박수가 일어났다.
이때에 일본 영화계는 조선동포에게 언제라고 할 것 없이 일본적인 성격을, 일본인의 생활감정을, 고이소(小磯)총독의 말을 빌리면, 일본인의 도의정신을 침투시켜서 위대한 “역사와 민족을 창조하는” 사업의 의의를 깊이깊이 자각하고 더 한층의 긴장과 성의를 갖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의미에서 저속하고 이윤만을 추구하는 “낭비 많고, 또 예술로서 감화력이 없는” 일본의 일부 영화를 단호하게 배격하고 싶다.
우리는 대동아전쟁의 목적이 다만 거저 이기는데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아시아에,천황에 귀일(歸一)하는 세계최고의 문화를 쌓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한 지방인 우리 조선도 문화수준을 하루빨리 세계 최고 수준까지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조선의 오늘날 문화수준은 일부분 높은 층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유감스럽지만 매우 낮다.
여기에 일본영화만으로 이 땅의 문화공작을 기대하고 있을 수 없는, 독자적인 제작회사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이유가 있다.
조선의 영화인은 이제 이곳의 문화에 일본의 정신을 철근처럼 확고하게 집어넣고, 이것을 조금이라도 급속하게 “높이
기 위하여” 제작의 모든 곤란한 조건을 극복하면서 싸우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중앙정부도 또 일본영화 관계자도 충분한 이해를 가져주기 바란다.
나아가서 조선에서 제작된 영화나 혹은 조선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는 조선의 대중만을 대상으로하지 않고 널리 일본, 만주, 중국에 사는 조선동포를 관중 대상으로 큰 의의가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안 된다.
또한 한 걸음 더 나가 말한다면, 대동아의 각지에 조선이 지금 어떤 모습, 어떤 마음인가를 영화로써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나타내는 것은 매우 큰 의의가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의 제작자가 근시안적으로, 반도 내부 만을 목표로 하여 제작하지 않도록 특별히 희망하고 싶다. 총독부 정보과는 최근에 “전진하는 조선”이라는 제목을 부친 조선의 새로운 모습과 마음을 그린 영화를 만들어 남방에 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이미 구체화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참으로 시의에 알맞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조선영화계는 시야가 좁고 향토에 지나치게 구애받고 있었다.
허나, 이제는 제작회사의 통합도 이루어졌고, 내용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커다란 비약의 계절이다.
차제에 총독부 당국의 원조도 적절하며, 참으로 “영화의 새로운 정치적 의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단련된 조선 관료의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해 본다. 만약 이후 조선총독부와 조선민중이 일체가 되어 진정한기획과 제작 노력을 계속해 나간다면, 조선은 영화에 의하여 먼저 자기를 늠름하게 단련해 나감과 동시에 훌륭한 대동아의 지도문화인을 육성해 나갈 것이다. 영화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새로운 민족을만드는 연성의 도장인 것이다.
<출전 : 辛島驍, 「朝鮮と映畵」, '映畵旬報', 1943년 7월 11일>
5) 야마베 민타로(山部珉太郞), 벽지에서 싸우는 연극
-조선이동연극 제1대를 살펴보다
승리는 전쟁 중인 나라에 있어서 지상명령이다. 예술도 이기기 위해 동원돼야 한다. 예술을 전시하의 불급(不急)사업으로 보고 유휴(遊休)시설로 끝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가능한 최대한까지 예술의 전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조선에서는, 예술에 있어 지금 어떤 식으로 그 전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육성으로 직접대중에게 호소하는 결정적인 특징이, 다른 부문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향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예술부문인 연극의 면에서 엿보인다.
면(面)에서도 연극이 갖는 본질적인 힘에 대해서 일종의 마비증상을 보이고 있는 도회민을 상대하지 않고, 오로지 공장·광산, 벽원(僻遠)의 농산어촌(農山漁村) 등 모든 문화적인 것에 대해 백지 같은 청순함을 가진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서, 배우와 관객의 상호작용에 의한 새로운 국민연극의 싹을 키우고 있는 이동연극에, 나는 ‘싸우는 예술의 최전선’을 그린다.
거기에서 나는 현지보고의 조준(照準)을 잡았다.
조선연극문화협회 소속 이동연극대 제1대. 기억력이 좋은 독자는, 올해 3월 신태양사(구 모던 일본사)에서 ‘대장 야나가와 초안(柳川長安) 씨 이하 남녀 22명의 대원이 조선 내 팔도의 벽지를 순회공연,210개소에서 연인원 42만 9천명에 이르는 지방민중의 위안계몽(慰安啓蒙)에 노력했다’라는 공로로 제4회 조선예술상을 받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조선에서 연극문화의 정신대(挺身隊)로서 도회 일류극장의 화려한 무대를 떠나, 배낭을 맨 채 흔들리는 트럭을 타고 광산에 들어가고, 공장의 문을 나서서 산간벽지의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오로지 연극이 가진 전력의 발휘에 그 젊은 힘을 쏟아 붓는 이 이동극단은 본토의 그것과 비교해서 더욱 가치있는 사명의 크기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어, 신태양사 측에서 표창하고픈 존재이다.
그 이동연극 제1대가 지금 평북도내 순연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고, 마침 만포선 연선(沿線)에서 오지로, 멀리 북쪽의 후창(厚昌)을 지나서 국경 마을인 중강진(中江鎭)으로의 길을 서둘렀다고 하는데 때마침 이 벽지에서, 싸우는 연극을 문자 그대로 조선의 가장 벽지에서 파악하고자, 우리는 만포선 연선에서 자성(慈城)를 경유해서 중강진(中江鎭)으로의 경로를 택해서 여행길에 올랐다.
사직고개(辭職峙)의 다른 이름인 구현령 길을 넘어가는 만포선에는 야행열차가 없다.
평양에서 아침에 만포행 버스를 타고 저녁 6시 즈음 강계(江界)에 도착, 1박을 한다.
다음 날 자성행 버스에 올라타면 그날은 강계, 자성 간 155킬로미터를 이동하고, 해가 저물면, 이제 중강진으로 가는 버스 편은 없다.
이것은 우리의 경로 선정이 잘못되었던 것으로, 전날 만포까지 가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자성행 버스를 탔다면, 자성에서 중강진행으로 갈아탈 수도 있고, 또 매집(梅輯)선, 임강(臨江)선의 만철(滿鐵)선에서 그날 안에 중강의 건너편 연안 임강으로 가는 방법도 있었다.
동행한 연극문화협회원 아사쿠라(朝倉) 씨가 전화로, 중강에서 만나게 되면, 비가 내리지만 오늘밤 중강공연을 강행한다는 것과,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일 토성동(土城洞)공연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성을 출발하던 때부터 아직 가보지 못한 북경(北境)의 마을 중강진은 우리에게 매력적이었지만, 결국 기회를 놓쳐버렸다.
자성군청의 소재지로 소도읍(小都邑)을 형성하고 있지만, 아직 전기도 없이 램프를 쓰는 자성에서 또 하룻밤을 숙박하게 되었다. 내일은 간신히 우리가 찾는 적(敵)이 아닌, 이동극단과 상봉할 것이다.
평양에서 출발한 것에서부터 계산해 보아도 2박3일의 여정이다. 이동연극대가 어떻게 벽지까지 가서 몸을불사르며, 문화의 첨병이 되는지 눈여겨보지 않겠는가.
벽지의 상황
다음날 아침 자성의 숙소에, 극단의 선발대로서 다녀 온 사카이(坂井)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중강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얻어서, 전날 공연을 중지했던 중덕(中德)의 사람들까지 더해지자, 마침내 관중의열망을 받아들여서 재공연을 했다고 한다.
이동연극의 결전(決戰)적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국과 맞닿은 변경의 마을에서는 그 이전의 역할, 즉 단순한 오락위안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갈망되었던 것이다.
탄광 등의 경우는, 이동연극이 어느 정도의 증산을 가져올 것인지 등을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면,이번 순연에서 용등(龍登)의 탄광 등은, 이동연극이 내연하는 1주일 전부터 현상을 내걸어서 하루를 쉬면 입장료 얼마, 이틀을 쉬면 얼마, 개근하면 무료라는 결정을 내린 곳으로, 상당히 성적이 좋아서 증산몇 백 톤이라는 숫자가 보란 듯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일이 무리 없이 이루어진 것은, 건전오락의 현저한 효과가 나타난 덕분이다.
그러나 이 근방의 주민들은 사정이 달라서, 신문도 3,4일분이 쌓여서 한꺼번에 오고, 전기도 없어서 라디오도 못 듣는다. 몇 년에 한 번인가 오는 시골순회 서커스 이상의 볼거리는 본 적이 없는 변경지역에서의 삶 자체가 하나의 인내이며 고투인 그 곳에서, 그저 일상의 단조로움을 깰 연극대의 내연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전대미문의 일이고, 그것이 그들에게 단순 소박한 희열과 위안을 주었다면, 그것만으로 연극의 국책적 역할은 일단 완수했다고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시국의식이 어느 정도 높아지고, 또 옥수수가 몇 섬 증산되었다는 효과를 계량하기 전에, 무엇이 어찌되었든 건전오락으로 그들의 생활을 단장하고, 그 심정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비 내리는 토성동
자성에서 중강진으로 1일 1회 있는 버스 편은 오후 2시 반, 승객과 우편 행낭을 실은 압록강의 나룻배를 쉬지 않고 노를 저어 출발했다. 법동(法洞)이라는 곳에서 작은 지류가 압록강으로 합류하는데 거기서부터 길은 압록강을 따라서 이어져 있다.
강가를 점철(點綴)해서, 여기저기에 한 무리의 취락이 망루가 있는 주재소를 에워싸듯이, 아무리 봐도 국경다운 모습으로 조금씩 모여서 긴 한줄기 마을을 형성하고 있고, 만주방면도 조선방면도 모두 산이 바로 근처에 있어서 가늘고 긴 틈으로, 압록강과 한 줄기길만이 생명의 줄처럼 보이는, 그런 작은 부락, 그것이 장토면(長土面)의 중심인, 토성동이다.
자성에서10리, 중강까지는 9리.
비가 내린 탓에 산 근처는 이미 해질 무렵인 4시 45분경, 우리들은 토성동에 도착했다.
연극대 일행은 벌써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야나가와 대장은 압록강 풍경이 보이는 여관에 연극대의 간부급 사람들과 여배우 일동과 함께 했다. 스타가 없는 것이 이동극단의 특색이라고는 하지만, 숙소가 나뉘어지는 경우는 자연스럽게 그런 식이 된다. 일행은 이번 순회연극의 행정(行程)이 너무나도 난코스인 것, 그러나 후창에서 중강까지 오는데 낙엽송과 전나무의 대밀림이 굉장했던 것, 7리 사이에 테이블 장고대(狀高臺)를 달린 중강부근의 대밀림은 얼마나 장관이었던가.
길은 가까운 마을에서 모여든 관중들로 혼잡하고, 경방단원이 여기저기 있는 것이 보인다.
이동연극과 경방단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저 어디라도 청원은 경찰 아니면 경방단(警防團)에게 하고, 그렇지않은 경우라도 숙소나 트럭, 가설극장의 재료조달 및 작업의 일손 등 하나에서 열까지 도움을 받는다.
물론, 도내순연의 주선은 도 경찰부가 하기 때문에 이동연극대의 행동 일체가 경찰, 경방단과 떼어놓을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숙소에서는 젊은 대원들이 대본을 읽기도 하고, 음악부원은 악보를 쓰거나 기타를 친다.
모두 성실한 청년으로 체격도 다부지고 강인해서, 시골순회에서 자주 보이는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허약한 청년배우의 모습은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모두 뭔가 확고한 목표를응시하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 일만 했다 하면 그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한눈팔지 않는 순진형이다.
한결같은 청년들이다, 라고 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우리의 숙소로 정한 집에 가자, 대여섯 명의 국민학교 아이들이 모여 있어서 이유를 물으니, “서커스를 보러 왔어요.”라고 대답한다. 볼만한 것이라고는 시골순회 전문의 서커스밖에 없는 이 지방에서는이동연극도 서커스와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3리 떨어진 부락까지 이 ‘서커스’를 보기 위해 와서, 오늘 밤은 이 여관에서 머물 거라고 한다.
그들뿐만 아니다. 오늘 이 토성동에는 이런 아이들과 남녀노소 누구나가 북적이며 물려들고 있다.
이런 농촌에서는 일몰 후가 아니면 사람이 모이지 않기 때문에 연극은 8시 반 경에 시작된다.
적당한 때에 극장이 있는 국민학교에 간다. 삥 둘러친 장막 밖에선 때마침 후드득 내리는 비에 촉촉이 젖어가며 군집해 있는 관객을 헤치고 천막식 무대로 들어가자, 스텝들과 대장, 회계인 이토(伊東) 씨 등이 쿵쾅거리며 대도구, 게시문 등의 준비에 바쁘다. 무대 뒤에서는, 학교의 학생용 책상을 이어붙인 위에 촛불을 켜고, 남녀배우가 한데 섞여서 일렬로 죽 앉아서 각자 얼굴 분장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비는 그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세차게 내린다. 노천에 자리 잡은 관람석은 이래서견딜 수 없었다.
8시 반, 결국 중지하고 연기하기로 결정, 단원들은 모처럼 한 분장을 지우고 숙소로철수하고 말았다.
3리, 5리의 먼 곳에서 걸어 온 관중들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떼 지어 주재소로 몰려가서 시비를 따지며 젖어도 좋다며 탄원했다. 주최측인 경방단에서도 배급미의 관계도 있고, 토성동의 중대 문제이어서 연극 강행을 요청하는 상황이었으나, 결국 뇌성을 울리며 줄기차게 내리는 비가 처음결정 그대로 연기를 결정지어, 다소 맥이 빠지는 몸으로 우리도 숙소로 돌아왔다.
강가의 하루
아침 6시. 압록강의 물안개가 주변 산들의 끝에 걸리고, 닭이 여기저기서 울며, 국경의 부락은 평화롭게 아침을 맞이한다.
야나가와 대장 혼자서 벌써 일어나서 강가 자갈밭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로 막세수를 했다.
배우들도 차례로 일어나서 세수를 한다. 재빨리 대본을 손에 들고 대사를 보기 시작하는사람도 있다. 대충 인원이 모이면 모두 ‘이동극단’이라고 자수를 새겨 넣은 의상을 단정히 갖춰 입고압록강 가에 모여 아침 조회를 시작한다.
반장이 “집합!”이라고 구령하면 6명의 여배우를 전열(前列)로 하여 횡대로 정렬하고, 신사요배와 묵념, 국기에 대해 경례, 그리고 음악담당인 창원문평(槍原文平)71)의 지휘로 단가를 합창한다.
동아의 하늘에 새벽이 오면
아침 해 아래에 서서
보아라 우리들의 모습을
문화의 깃발 나부끼며
농산어촌을 돌아다니는
우리들은 이동연극대 …
잘 훈련된 혼성2부 합창이다. 노래가 끝나면 야나가와 대장에게서 오늘의 일정에 대한 전달과 주의가 있고, 마지막으로 국민체조를 하면 조회가 끝난다. 점점 옅어져가는 물안개와 함께 밝아오는 강가에서 열린 이 조회는 몹시도 상쾌하고 건전한 것이다.
대원은 모두 젊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동연극대 결성과 함께 배우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이다.
그런 그들이 일 년 내내 국제적인 사명과 신문화창조의 열의만으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 키사쿠(伊藤喜朔) 씨의 <이동연극10강>에 따를 것도 없이 이동연극배우에게는 단체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반대로 말하면, 이동연극대원의 매일의 행동은 모두 이 단체적 근로와 연성(鍊成)인것이다.
71) 황문평(黃文平)의 창씨명.
이 극단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몇 명의 도구담당자가 대원으로 딸려 있지만,무대가설, 철거, 무대효과, 조명, 이외에 연극에 필요한 어떤 일이든지 배우 자신이 모두 담당하고 있다.
게다가 문화의 사도로서 지방민중의 계발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각은 자연스럽게, 제멋대로인 행동을억제한다.
그런 그들의 일상이, 배우로서의 자질과 유형을 모르는 사이에 기성극단의 이른바 배우라는틀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가고 있다.
반장의 활기찬 구령에 맞춘 전원의 기민한 동작과 단가의 합창 -오늘 아침 내가 압록강 가에서 목격한 그들의 모습-은 단체적인 훈련을 통해 봉공정신의 기백으로 양성된 자의 모습이었고, 낡은 방식의 배우양성을 해 온 자에게는 어느 것 하나도 모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제 도착과 함께 무대가설 및 일체의 작업은 끝내놓았기 때문에, 조회가 끝난 뒤에는 따로 할 일이없었다.
대원들은 장기를 두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압록강에서 헤엄치거나 그물로 고기를 잡거나하며 제 나름대로 하루를 보냈다.
극단 스스로 후생비를 가지고 있어서 하망(霞網. 새잡는 그물), 어망, 야구 도구, 서적, 잡지, 구급약등등, 대원들의 순연 중에 여가를 건전오락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제법 갖추어져 있는 듯하다.
‘국민개창’ 지도
오후 8시, 국경의 산에 해는 지고 자줏빛 저녁놀이 토성동의 부락을 물들일 무렵, 장토(長土)국민학교의 교정 한 구석에 둘러친 장막의, 1개소에만 3척정도 어긋나게 설치해 둔 입장 문으로 지금까지 운동장에 모여 있던 관중, 아이들, 청소년, 여자들, 게 중에는 어제부터 여기에서 머물며 오늘 하루를 기다린 사람들도 상당수 섞여서 잇달아 들어온다.1층 무대 정면의 관람석에는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아서, 손에 손에 앉기에 필요한 돗자리, 의자, 귤상자, 널빤지 등을 가지고 들어온다.
임관(臨官)은 경찰의 초롱불을 켜고 대기하고 있다. 음악단원 히와라(檜原) 군이 국민개창의 가창 지도 효과를 생각해서 국민학생을 전부 앞에 모아 놓았다. 선생이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서 출석을 확인하고,
“지금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 여기에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라”라고 말한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노천의 달빛을 받은 장내를 가득 채우자, 어느 샌가 만원이 된다. 빽빽이 들어차면 2천명을 넘게 수용하는 장막인데, 벌써 그 정도의 관객이 이런 한적한 국경지방 어디에서라고 할것도 없이 나타나서 밀려온 것이다.
딸랑 딸랑 딸랑, 채금(チエ―グム)이 울리면 드디어 개막이다. 원래는 동라(銅鑼, 징)를 쳤지만, 헌납했기 때문에 조선색이 농후한 채금이 대신하게 되었다.
막이 열리면 분장을 한 전원이 나란히 서서 야나가와 대장의 사회로 장내 모두의 국민의례, 이어서 회원 군의 지휘로 아코디언의 반주에 맞춘 대원의 단가 합창. 그것이 끝나면 주최자 측 대표로 이곳의 경방단인 가네모토(金本) 씨가 인사를 한다. 미숙한 국어로 말이 채 안 되는 논지조차 횡설수설하면서,결전 하 국민의 총력을 결집하는데 건전오락이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열변은, 어찌되었 호감을 얻어서 그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국민개창지도. 야나가와 씨가 조선어로 국민개창운동에 대해 해설을 덧붙인 인사를 한 뒤, 여배우 전원의 창가대와 악극대에서 왔다는 야스다 미노루(安田實) 군의 아코디언을 사용해서 창원문평 군이 ‘아시아의 힘’ 제 1절의 가창지도를 시작했다. 진솔한 국어로, 때때로 해학을 섞어서 하는 지도동작은, 그 젊음과는 달리 노련해서 감쪽같이 관중을 창가 부르는 학생으로 만들고 만다.
“앗, 거기 아저씨, 안 부르네요.”
“어쩐지 여자석 쪽 목소리가 작습니다. 자~ 남자석에 지지 않도록 크게 불러 주세요.”라는 식으로 어쨌든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아시아의 힘’ 등의 가곡을 그 과반수에게 부르게 하고,부르지 않더라도 그 선율을 다음에 어디선가 들으면 ‘아, 그건가’라고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친근감을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총력연맹이 추진하고 있는 국민개창운동의 가장 성공적인 것은, 분명 이 이동극단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동행한 조창씨는 말했지만,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벽지에서도 노래하라!
지도가 끝난 뒤에는 노래의 버라이어티로, 여배우들을 중심으로, 바꿔가며 노래를 들려준다.
<아침이다, 힘차게(朝だ元氣で)>, <애국의 꽃(愛國の花)>, <구단의 어머니(九段の母)>, <군국의 어머니(軍國の母)>, <태평양 행진곡(太平洋行進曲)> 등을 여러 번 부르고, 조선민요도 가끔 넣어서 결국 상대를재치 있게, 때로는 춤도 춰가며 구경하게 끌어들인다. 회원 군이 담당한 이 부분은, 시간 융통이 매우 편리한 것이어서, 개연(開演)시간이 늦어지면 조금 자르기도 하고, 어떤 사정으로 빨리 막을 올려야 할때에는 얼마든지 시간을 연장하는, 시간 조절기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열연 <대추나무>
장막 밖에 나타난 야나가와 씨의 이동극단에 대한 계몽적 설명, 오늘의 상연작 <대추나무>에 대한 해설, 조선어여서 의미는 모르겠으나, 매우 열렬한 기백이 담긴 그 열변이 끝나면, 짱가짱가 하고 채금은 울려 퍼지고, 마침내 유치진(柳致眞) 작 <대추나무>의 무대가 우리 앞에 전개된다.
<대추나무>는 작년 가을 연극경연대회에서 희곡상을 획득했던 조선어 작품으로 만주개척을 목표로반도농촌의 분촌(分村)운동을 다룬 4막의 작품이다. 이동극단은 이 연극 한 편으로 이 순연을 강행하고있다.
왜 이런 여러 막의 대작으로 공연을 하냐면, 배우들의 각본 연구가 완벽하고, 연극 안에 가만히녹아들어서 자연스러운 연기수준도 한층 높아졌고, 관객입장에서도 납득하기 쉬워 이번에 처음으로 시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1막짜리를 세 편, 네 편으로 나누어 레파토리를 떠들썩하게 하면, 배우들이 얼굴을 바꾸는 것만도 큰일이고, 또 연극이 짧아 분위기가 달아오르기도 전에 연극이 끝나버릴 수도 있어,기량이 높지 않으면 연극도 할 수 없다. 관객들도 연극이 익숙하지 않아서 뭐가 뭔지 알 수 없고, 심한것은 세 편의 1막짜리를 여러 막의 연극으로 오해하여 앞뒤가 맞지 않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방식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 방법으로 행할지어떨지는 문제이다.
대원들은 “이동극단에 국어극은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있지만 3편의 상연 종목 안에, 1편정도의 국어극을 넣는 방법은, 국어 보급이란 점에서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여기서 <대추나무> 1편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때는 현대, 여름. 장소는 도화동이라는 남조선의 어느 농촌. 소작농 경주세영(慶州世榮)과 정촌태근(鄭村泰根)이 담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그 경계에 자라난 한 그루의 대추나무가 두 사람간 싸움의 씨앗이었다.
결국 순경의 판결로 경주가 이겼지만, 오히려 틀어진 관계는 점점 더 심각해진다.
괴로운 것은 어린애 같이 연애중인 경주의 아들 동욱(東旭)과 정촌의 딸 유희(由喜), 두 젊은이다.
마을에서는 만주로의 분촌문제가 있어서 동욱은 가고 싶어 했으나 아버지 세영은 완강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정촌 일가는 대추나무 한 그루로 마음이 상해서 차라리 만주로 갈 결심을 하지만, 싸움의상대였던 세영의 아들이 몰래 만주행을 신청한 것을 알고는 마음을 바꿔 포기해버리고, 딸은 마을의부자 지주인 마록(馬鹿)의 아들 박천기손(朴川基孫)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한다. 가련한 동욱과 유희가 금색야차(金色夜叉)72)처럼 이별을 하게 되자, 동욱의 결심은 더욱 굳어진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부재중임을 틈타 마침내 만주로 출발한다. 홀아비인 경주는, 아들의 도망에 화가 나고 슬펐지만, 마침 그때 만주개척으로 재출발한 고아 길수(吉守)에게 만주산 쌀과 콩을 받게 되자, 만주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자신도 개척에 뜻을 두게 된다. 그리고는 ―
경주 : (대추나무를 쓸쓸히 올려다보며)이 나무 때문에 어리석은 싸움을 했구나.(갑자기 대추나무를정촌의 마당에 들여 놓는다)
정촌 : 누구지
경주 : (손을 멈칫한다)
정촌 : (마당에 서서 대추나무를 보고 신기해하며) 이게 무슨 일이람……
경주 : (웃으며 나타난다)
정촌 : (그 웃음 띤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자 그의 완고한 표정도 자연히 풀어지며) 고맙네, 세영.
경주 : 태근, 내가 나빴네, 젊은 시절엔 함께 손을 잡고 소를 몰던 사이이지 않았던가.
정촌 : ……하나, 부탁이 있네만, 우리 딸을 동욱의 아내로 맞아주지 않겠는가.
경주 : 고맙네, 실은 나도 그것을 부탁하려 했다네, 우리는 싸움만 해왔지만, 동욱과 유희는 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라난 두 그루의 은행나무이잖나…….
유희의 어머니 : (나와 있던 딸에게) 유희야 (두 사람은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경주 : 동욱도 만주에서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네.
-막이 내림-
무대는 긴 순연으로 빛이 바래고 손상되어 전혀 좋게 보이지 않고, 조명은 각광(脚光) 2개, 정면 위쪽으로 2개의 아세틸렌 램프, 단지 그것뿐이다. 관중을 떠맡고 있는 것은 오직 연기뿐으로, 그 점에서 이극단 사람들의 전신을 쏟아 붓는 연기는 연극을 모르는 관중들조차 한껏 끌어당기는 열정과 힘이 넘치고 있었다.
막간에 악실에 들어가서, 경주세영으로 분장한 금광영일(金光英一)군과 만나서 “열연이네요, 감동했
72) 일본의 소설가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의 장편소설. '장한몽'이 이 소설의 번안 작품이다.
습니다.”라고 하자, “가설무대에서 할 때에는 전체의 가락을 한 옥타브 올려서 차분한 맛이 나오지 않는것이 안타깝습니다.”라 한다. “그러나 연기는 모두 성실하게 열정을 다해서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한사람이라도 대충하는 사람이 있으면 금세 전체에게 영향을 주고 마니까요.”
아무튼 전 대원이 총력을 발휘해서 하는 것 외에는 기댈 것이 없는 이동연극이다. 한사람이라도 마음가짐이 나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는 일종의 동지적 결합이라고 말하는 단결력이 이극단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본다.
사실 이 연극은 국경지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만주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다.’는 등의 대사가 나오는 연극. 남조선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멋대로 만주라는 곳에 대해 상상해서 불안해하며 ‘간다,안 간다’라고 혈안이 되어 논의를 하고 있는 이 연극은 매일 강 저편으로 별다를 것도 없는 만주의 산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무대의 비극적인 장면을 웃어넘기기라도 하는 듯 떠들썩한 큰 웃음이 관중 사이에서 터져 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2천여의 관중은 연극에 빠져들어 있다. 무대에 딱 달라붙어 있다. 이 순박함 가운데로라면, 어떤 호소라도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연극을 선정하는데도 신중한 주의가 필요하다. 나쁜 것도 좋은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박함이라는 것은 생각하면 그리위험한 대상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야유를 퍼붓는 것은 고사하고 대개는 막이 내려도 박수를 치는 것조차 모른다.
연극은, 전원이 땀투성이로 시종일관 열연해서 막이 내린 것은 12시가 가까워서였다.
모두가 맥이 빠져서 장막과 도구를 정리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바로 트럭에 실어 올릴 수 있도록 한뒤, 얼굴을 씻고 집합한다. 반장인 금광영일군이 무대에서와는 싹 달라진 젊디젊은 모습으로 호명한다.
“차렷, 오른쪽으로 돌아, 바로, 번호, 대장님께 경례! 바로!” 활기차다. 거기에 대해 대장은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위로한 후, 내일의 예정을 알리고 해산, 그대로 숙소로 간다. 옛날 형식의 지방순회극단배우라면 꿈에도 보지 못했을 정경이다.
문화사적 족적
다음 날 7시 자성을 향해 출발. 주재소의 광사(框舍: 영화 <망루의 결사대>에 나온 그 망루이다) 앞에서 그 지역의 사람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트럭에 전원이 올라타고 서로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배웅받는다.
하룻밤에 맺어진 친애의 정은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극단은 토성동을 떠나갔다.
트럭으로 이동하는 것에 익숙한 대원들은 다시 트럭 위에서 즐거운 클럽이 되어, 해학과 노래가 터져 나오고, 초여름의 청량한 아침바람에 미래를 짊어진 배우들의 젊음은 향내가 풍겨났다.
자성에서는 전원이 힘을 합쳐서 순식간에 무대가 만들어지고 막이 둘러쳐지는 것을 보았다.
대장도바늘을 가지고 막이 터진 곳을 꿰맨다. 무대의 명배우도 여기서는 땀을 흘리며 막을 친다.
그렇게 해서 여기서도 2천여 명이 넘는 관객이 ‘아시아의 힘’을 노래하는 <대추나무>의 4막을 통해
호소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밤이 밝으면 여기에서 7리 정도 거리의 압록강 수력전기 댐 공사현장, 운봉(雲峰)에서의 주간 공
연과 곧 이어서 밤 공연이 이동극단을 기다리고 있다.
영리나명성을생각해서는될일이아니다. 자신들이하는일이국가에도움이되는일이다, 연극보국
이라는 자각으로 매진하는 순정만이, 이 편하지 않은 노동을 지극히 명랑 쾌활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삼봉이라는 부락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이 갈라져 있어서, 우리들은 여기서 트럭을 내려 극단 사람들
과 헤어졌다. 여행을 함께 했던 3일간 완전히 친해진 이 사람들과의 이별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슬픔
으로 가슴을 저며서, 우리는 몹시 강하게 모자를 흔들었다. 이러한 벽지에서 벽지로의 그들의 일상이
후세 조선의 연극문화사에 빛나는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배웅하는 그들이야말로 그 역사
적인 일을 트럭의 바큇자국으로 남기고 있다. 나는 명랑하게 손을 흔들며 길모퉁이로 사라진, 그러나
망막에 선명하게 남은 그들의 모습에 잠시 감개를 느꼈다.
<출전 : 山部珉太郞, 「現地報告: 僻地に싸우는 演劇-朝鮮移動演劇第一隊를 살펴보다」,'文化朝鮮', 1943년 8월, 52~59쪽>
6) 농촌문화를 위하여 -이동극단·이동영사대의 활동을 중심으로(좌담)
이동극단 제2대 이가영죽(李家英竹)
조선영화배급사 오카다 중이치(岡田順一)
극작가 유치진(柳致眞)
조선영화배급사 스시다 마사오(須志田正夫)
본지 주간 최재서(崔載瑞)
(발언 순서)
최 : 근로문화라고 하면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동안 문화―문학·연극·영화·음악·미술 등이 말하자면 소비자의 여가 도구로 간주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는 근로대중을 위한 문화로 바꾸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화’ 자체도 건전해진다는 생각으로 문학 등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은 연극과 영화 일을 하시면서 더 직접적으로 지방근로대중을 접해 오신 분들께 그동안 경험한 체험이나 의견을 여쭙고자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이동연극이 시작된 것은 언제쯤이었습니까?
이가 : 일본 내지 쪽은 잘 모릅니다만, 조선의 이동극단은 현재 제1대와 제2대가 있는데, 제1대는 1941년 6월, 현재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전신인 조선연극협회의 직속으로 탄생해 9월부터 출동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신태양사의 조선예술상의 단체상을 받았는데, 대장은 유천장안(柳川長安, 야나가와)73)씨입니다.
저희 쪽 제2대는 작년 6월 탄생해서 9월경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대체로 이 일은 농촌이나 산촌, 어촌, 광산 등 이를테면 거의 문화가 낮은 곳, 오히려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는 곳에 건전
73) 유장안(柳長安)의 창씨명.
오락을 제공하는 동시에 반도의 황민화(皇民化)를 위해 적극적으로 작용을 가한다는 점에 주안점을두고 탄생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점에서 일본 내지의 이동극단과 조선의 이동극단 사이에는 그 목적에 상당한 차이가 있죠.
내지의 이동극단은 단지 건전오락―내일의 근로를 위한 영양소를 제공하는 일이지만 조선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이른바 시국성을 자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작가와 연출, 연기자로서의 일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원의 생활 자체가 그대로 문화 지도라는 역할을 해야 하고, 따라서 항상 제각각의 행동이 아니라 단체적인 규율 잡힌 생활을 합니다. 시골에 가면 대원들 행동이 바로 눈에 띄기 때문에 장소에 따라서는 20~30가구의 작은 부락에 가니까요. 언어의사용, 걸음걸이, 아무튼 우리 사고방식이나 생활 방식을 지방민의 생활방식으로 만드려고 하니…….
마음가짐에서 보자면 연극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런 면에서도 역할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연극을 하면, 제가 듣기로는 4리나 되는 먼 곳에서 저녁 도시락을 들고 보러 오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있어요. 태어나서 처음 연극을 보는 거죠.
아마 다른 볼거리로 착각했는지, 원숭이가 몇 마리 있냐는 등, 다시 말해 무엇을 보여 주는지도 모르고 왔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볼거리에 매우 굶주려 있는 거죠. 군이나 면 소재지의 경우에는 포스터를 붙이는데, 그게 또 참으로 묘한데, 문화극단, 문화극단 실연대나, 심한 경우에는 소녀가극단 등, 역시나 우리 일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는 없어요. 그래서 대개 3시간 공연을 하고 끝나면 전원 총동원해서 짐을 정리하고 내일의 준비에 만전을 기한 뒤 겨우 숙소로 돌아가서 잠을 자고 이튿날에는 다른 지역으로 갑니다.
최 : 공연물은 어떤 거죠?
이가 : 제1대는 연극이고 우리 쪽 제2대는 가극이라고 할까요, 우리 쪽은 대개 노래―가수를 중심으로 조직해서……, 그동안 한 것은 ① <푸른 언덕>, ② <마을의 영광>, ③ 버라이어티라는 프로그램입니다. ①의 <푸른 언덕>은 이농 문제를 다룬 것으로, 작년 3월 어느 한 지방에 갔을 때 좌담회―지방에 가면 면(面) 사람이나 경방단(警防團), 감시소 사람들과 모여 얘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어요.
그때 나온 말인데, 즉 여기는 매우 어려움에 처해 있고 우수한 농촌 청년들이 계속 도시로 나간다는 얘기를 구체적으로 들어서, 그것을 힌트로 나온 작품입니다.―어느 농가의 가난한 청년이 경성에 가서 어느독지가의 지원을 받아 전문학교를 나온다는 전형적인 것입니다. 그 독지가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고, 청년은 학교를 졸업하자 마을 건설에 뜻을 품고 마을로 돌아오죠. 그리고 야학을 세워 ‘국어’74)를 가르치고 가뭄을 막기 위해 저수지를 건설하고 국민개창(國民皆唱)운동으로 국민가요를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그런 일을 합니다.
바로 거기에 독지가의 딸이 옵니다.
그리고 경성으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청년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고, 여자에게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 순
박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여성은 청년의 말을 따르게 되죠.
멋부리는것도 포기하고 하고 싶은 것도 참아가며 함께 농촌을 위해 일하는, 그리고 독지가도 자신의 전 재산을 농촌에 가져와 돕는다는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입니다. ②의 <마을의 영광>은 서항석(徐恒錫) 선생 작품으로 지원병을 테마로 한 것입니다. 그런 테마는 그동안 딱딱하고 너무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거기에 약간 웃음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지원병이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그날부터 연극이 시
74) 일본어.
작됩니다 돌아온 지원병 환영을 . 둘러싸고 마을 구장과 어느 할아버지가 서로 다툽니다.
(중략)
77) '동해도중슬율모(東海道中膝栗毛)'의 주인공인 彌次郞兵衛(야지로 베에)와 기타하치(喜多八)를 일컫는다.
이가 : 우리가 작가를 현지에 파견해서 생생한 재료를 들고 오면 그것을 수차례 반복하고 있는데, 지금현재 있는 대본도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입니다만…….
최 : 작가는 그동안 실제로 근로라든가 농촌에 대해 한두 명의 작가를 빼고는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였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래서 결국 이른바 문화라는 것이 일하는 사람들과 매우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유 : 이동극단의 작품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시골에 가 보면 도시보다 이를테면 지도가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가령 면회(面會)나 농회(農會) 등의 증산이나 근로생활 지도에 대해서는씨뿌리기라든가 경작 방식이나 비료를 어떻게 하고, 가마니를 만들라거나 새끼를 만들라는 등, 일일이 그런 지도를 하기 때문에 아무튼 온통 이론뿐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순연한 근로계급에게 보일 연극은 이론을 뺀, 그렇다고 해서 도시의 경박한 것을 시골에 가져가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반동적인 것이 아닌 한 이론을 무시한 즐거운 연극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최 : 이런 테마는 어떨까요? 다시 말해 자신이 일하는 의미―그것도 논리적으로 어떻다거나 하는 것이아니라, 가령 쌀을 한 가마니 수확하면 현재 같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거죠. 산업전사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신들이 일하는 큰 의미를 알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소중함을 알고 일하는 데 자부심을 갖게 하는, 그런 방법은 없을까요? 그것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것과 결부시켜도 좋겠죠. 그런 웅대한 테마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방을 대상으로 한 연극이니 통속적인 것이어도 되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웅대한 테마도 다루었으면 합니다.
유 : 너무 이론이나 교훈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 그런 것은 좀 곤란하다고 생각하지만, 가령 암거래등 국민의 경제생활 문제도 도입 방식에 따라서는 연극으로서도 활용할 수 있겠지만, 나쁘게 도입하면 망치게 되죠.
오카다 : 건설적이고 명랑한 것이라면 그 자체가 신체제의 것이니 논리로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스시다 : 영화의 경우 일본 내지의 필름을 그대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끼워 넣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기껏해야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정도의 기교뿐입니다.
오카다 : 연극은 내용으로 그런 것을 할 수 있죠.
최 : 저는 일전에 진남포의 알루미늄 공장을 견학하고 왔는데, 여러 직공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공장 측에 대한 요구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지만 뉴스영화만은 꼭 자주 보여달라고 하더군요. 농촌의 경우도 서장이나 면장의 훈시보다는 뉴스영화를 보여 주는 것이 좋아요.그런 점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카다 : 저는 연극에 대해서는 이동극단도 매우 좋지만, 더 나아가 아마추어 연극을 일본 내지처럼 더활발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농한기에 좋은 지도자를 구해 지방인이 자신들의 손으로 연극을 하는 거죠. 하나의 극을 연기함으로써 그 자체가 신체제의 지방문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모여 자신들이 하는 연극이 그 지방인 입장에서는 가장 감명 깊죠. 각 도에 한두 개 정도의반을 만들어 하면 좋지 않을까요.
유 : 경상북도에는 도에 극단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최 : 조선 서쪽 지방의 가면극…….
유 : 네, 당신네 쪽이죠. 봉산, 사리원이 본고장이니깐.
최 : 그런 것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박한 민속적인 행사이지만, 모두자기 자신을 잊고 즐기고 있어요. 빼곡히 들어차서 보고 있어요. 하는 쪽도 보는 쪽도 그야말로 일체가 됩니다.
이가 : 그렇죠, 일체가 됩니다.
최 : 그걸 그대로 지금 하는 것도 좀 생각해볼 문제지만, 그런 것을 토대로 하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것도 결국 권선징악이 테마인데, 결국 노래와 춤으로 즐겁게 만들고 있어요. 훌륭하게 아마추어 연극을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카다 : 제가 전북에 있을 때, 방공훈련을 주제로 시도한 적이 있는데, 자신들의 마을에서 아는 남자와 여자가 나오니 흥미도 있고 감명도 깊어요. 그래서 방공훈련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반드시 모두 참가해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생산확충 문제도, 사상 선도에 대해서도 모든 문제에 그런 시도를 하면 좋지 않을까요.
유 : 그동안 시골에서는 시골 청년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아마추어 연극을 하고 싶다든가, 아니면 지도를 부탁하거나 각본을 제공해 달라는 등 우리 쪽에 상담을 바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도라고 해도그것을 민간인 입장에서 하면 아주 곤란합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사상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가하는 점에 어려움이 있어요. 자칫 잘못하면 큰일이 생기기 때문에. 옛날에도 연극운동이 종종 있었는데, 아무튼 어려워요. 지금은 여론이 통일되었고 이는 우선 연맹이나 그런 쪽에서 각 지방과 연락을 취해 지방에 연극을 장려하고 아마추어 극단 같은 것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요.
각본도 전문가에게 부탁해서 배포하는 등, 아무튼 거기서 모든 것을 하는 거죠. 이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오카다 : 앞서 말한 전북의 경우 각본을 모집했지만, 30편 가량 순진하고 재미있는 것이 왔어요.
이가 : 일본 내지에서는 아마추어 극단에 각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동극단 일을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모든 지방이나 부분에 신경을 쓸 수는 없어요. 우리가 신경을 써도 그 사람들 자신의손으로 함께 기뻐하면서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따라서 우리 일은 하나의 쇼크를 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청이 있어서 평남에 갔을 때, 그곳 농무과장이 말했는데, 자신들도 매년 두 번 하고있으니 대본 알선과 전문적으로 하는 여배우를 한 명 소개해 달라고 해서 대본은 만들어 준 적이있습니다.
제1대 쪽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1대가 황해도를 순회한 뒤 곧장 그곳 도에서 극단을 꾸려서 현재 돌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이동극단을 탄생시킨 이데(井手) 씨가 그곳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오카다 : 이동극단은 자신들이 하겠다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기까지 가기를 바랍니다.
스시다 : <농민극장>이라는 문화영화가 있었는데, 그것을 다룬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부락 청년이 연극을 하고 모두 보고 울거나 웃는 장면이 있는데, 제법 재미있었습니다.
최 : 일전에 도쿄에 가서 좌담회를 했을 때, 기쿠치 간(菊池寬) 씨가 말했는데, 즉 지금의 조선에서 좋은 연극을 할 수 있으면 조선의 새로운 국민문학운동도 본격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문가인 만큼 핵심을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실은 저는 거기까지 생각하기 못했기 때문에, 좋은연극이 나오면 비로소 새로운 문학이 성립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문학을 해도 민중에게 침투하지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는 거죠.
소수 사람들이 쓰거나 읽는 것이 아니라 연극이, 혹은 그것이 연극이 되어 계속해서 시골로 가고 그 연극의 인물과 일체가 되어 울고 웃음으로써 비로소 그 문학의내용이 결실을 맺게 되는 셈이죠.
오카다 : 시가(詩歌)든 연극이든 전문가가 그저 자신들을 위해 해서는 안 됩니다.
이가 : 그동안의 문학은 전부 그랬죠. 앞으로는 전달하는 ―대중에게 침투시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문학자만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경성에서 하고 있으면 도리어 답답해요.
연극이 서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골에 가면 더 웃고 더 즐길 수 있습니다. 더생생하고 일하는 보람을 느끼죠.
최 : 지금 시골에서 좋은 호응을 받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유 : 내용에서 보자면 일반적으로 역시 연애이야기죠. 옛날부터 역시…… (웃음)
최 : 책도 그렇죠.
유 : 아이들과 노인들도 그러니…….
최 : 연애이야기가 좋은 호응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지만, 다만 연애소설이 좀 더 변해야합니다.
거기에 뭔가 좀 더 끼워 넣어야 합니다. 가령 지방인이나 산업전사의 진지한 생활 속에 있는 연애죠. 예전과 똑같은 단순한 연애는 아무래도…….
오카다 : 영화에서도 완전히 바뀌었어요.
최 : 그 점은 조선 독자나 관중이 매우 뒤처져 있습니다. 10년 전의 것을 완전히 넉아웃 시키는 데까지가면 좋을 텐데.
이가 : 다른 의미에서의 영웅화 ……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오카다 : 심청전, 그것도 모두 나쁘다고 하는데, 조금만 바꾸면 아주 좋은 것이 될 텐데…….
최 : 현재까지 이동영사대를 본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오카다 : 35만 정도는 될 겁니다. 15반이 하고 있고 월 26,7회는 하니깐.
스시다 : 최고 31회죠. 그리고 대개 하루에 두 번입니다. 매일 거리 행진을 할 수는 없지만, 뭐 그 정도입니다.
이가 : 한 번에 몇 명 정도입니까?
스시다 : 평균 옥외가 500~600명, 실내가 300~400명입니다. 무엇보다 이동영사를 영화배급사에서 하게된 것은 대동아전쟁 1주년 기념사업으로서 작년 12월 8일부터입니다. 그래서 12월, 1월, 2월 가장 추울 때라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할 겁니다.
최 : 이동연극 쪽은 어떻습니까?
이가 : 제1대는 공연이 210곳, 횟수는259회로42만9천 명, 제2대는99곳, 118회로29만5천 명으로 계산됩니다.
오카다 : 우리 쪽은 극영화 하나, 뉴스 두 개로 하고 있는데, 무료관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스시다 : 1회 30원으로 빌리는데, 단 기계를 들고 걷는 두 명의 차비 등은 실비로 받고 있지만.
최 : 아무래도 선전성이 가장 강한 것은 영화죠. 직접 호소하는 점에서 보자면.
스시다 : 다만 그건 아무래도 일본 내지의 것을 그대로 가져가기 때문에 그 점도 생각해 볼 여지는 있습니다만.
게다가 지금 필름이 없어요. 이동영사에 사용할 필름이 없어서 곤란한 상태입니다. 가능한 농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하려고 신경을 쓰고 있지만.
최 : 여기서는 만들지 않습니까?
오카다 : 아직입니다.
스시다 : 시보(時報) 등은 경성과 동시개봉을 하는 경우도 있고 두 개 정도는 남으니깐. <지금 우리는간다(今ぞ我等征く)>, <쇼와 19년(昭和十九年)> 등의 문화영화는 동시개봉입니다. 조선의 필름이 많이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직 제작회사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동안의 조선영화를 돌리면 되겠지만 쓸 만한 게 없어요.
오카다 : 저도 영화대(映畵隊)를 따라간 적이 있는데, 화면은 보지 않고 기계 쪽을 보더군요. 어째서 이게 사진이 되고 목소리를 내는지 이상한 거죠(웃음). 화면 쪽을 보라고 해도 전혀 듣지를 않아요.
아직 그런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어쨌거나 이동극단은 생기고 이동영사대도 생겼어요.
조선도 앞으로 1, 2년 동안에 획기적인 진보를 할 것이라 봅니다.
이가 : 그것도 한계가 있겠지만, 연극의 ‘연’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 : 사변 이후 진보한 것은 연극·영화 부분이겠죠. 연극은 분명히 향상했어요. 당국이 힘을 기울이는방식도 달랐지만 말입니다.
이가 : 이건 여담인데, 다소 선전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는 연극이 끝나고 다음 지역까지 걸어갑니다.
제1대의 최고기록은 이틀 걸려 12리 걸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6리 걸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또 연극을 하죠. 충북에 홍수가 났을 때 경찰들은 친절하게 대해주고, 버스도 있었지만 우리는 힘을 내서 걸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힘들었어요. 저 자신도 힘들었지만 그럴 경우 여자들이 안타깝죠.
스시다 : 그렇군요. 그래서 다음날 또 연극을 한다면.
이가 : 모두 지칠 대로 지쳐서 여자들은 대장에게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며 울상이죠. 그러나 우리 극단은 대장이 있고 반장이 있습니다. 연기는 연기, 무대 뒤의 일을 하는 쪽은 또 그 나름대로 각각 반장이 있는데, 대장의 명령에 절대 복종합니다. 따라서 연극이 성황을 이루고 피곤해도 내일의 준비를위해 어떤 일이든 합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원망도 들었지만, 한 달, 두 달 하면서 동료들끼리 애정도 생기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신념도 생기죠. 아무튼 당시에는 힘들었어요. 그래서 연극이 느슨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있는데, 묘하게도 그날 저녁 연극은 정말 좋았어요.
단체로서의 의욕이 생기는 거죠. 도리어 몸이 편할 때 나쁜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점심 전에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무대를 가설하는 일이 있긴 해도 아무래도 시간에 여유가 있죠.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이것은 묵인하고 있지만, 각자 나름대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 날 저녁에는 도리어 연극이 느슨해집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우리 대원들의 생활은 총노동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고기 배급도 있죠. 술도 나옵니다. 대원들이 후생회를 만들어 협회 돈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돈으로 하기 때문에 즐거움도 있는 게죠.
왠지 몸 상태가 나쁘고 나른할 때도 관중을 보면 힘이 생깁니다. 신념이랄까요.
어쨌거나 이런 일은 직접 국민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 자신은 무대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관객석에서 관객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이런저런 말을 물어보기도 하죠. 자신들은 4,5리나 되는 길을 도시락을 들고 오면서도 도시락 대신 가져온 옥수수를 먹으라고 권합니다. 제가 사양하면 지저분해서 먹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그게 아니라며저도 함께 그것을 먹으면서 연극을 봅니다.
오카다 : 극단의 여배우가 되겠다며 따라오는 아가씨들은 없나요?
이가 : 없습니다.
최 : 그만큼 자각하고 있는 것이겠죠. 분위기가 다르군요.
이가 : 다만 당국자의 생각 여하에 따라 극단의 평가가 제각각입니다.
오카다 : 영사대 쪽도 힘을 기울이는 방식에 따라 다릅니다. 골치 아픈 말을 들었을 때는 엉망이 되죠.
최 : 잡지 쪽도 그렇습니다.
오카다 : 지도하는 쪽에 일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가 : 이쪽을 보면 걸식하는 것처럼 하는 곳도 있어요. 그것은 주로 아래쪽이죠. 저희 쪽은 보안, 고등쪽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만.
오카다 : 뉴스도 그렇습니다. 오는 사람의 절반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연설을하면서 돌아다녀도 소용이 없어요.
최 : 실제로 하와이라고 해도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결국 보여주는 거죠.
오카다 : 뉴스를 30만 명에게 보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결국 …… 이는 나를 선전하는 셈인가(웃음).
최 : 일반적으로 연극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은 어떤 형태에서 국민적 정열이 불타고 있는 때입니다. 3,4년 전에 연극이 왕성했다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것을 조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가 : 일본 내지의 어떤 사람이 연극을 좋아하는 국민은 전쟁에도 강하다는 말을 했는데, 국민사상이매우 고양된 때에는 연극이 활발해집니다. 뭔가 집단적으로 즐길 것을 요구하는 거죠.
최 :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탄생한 시대도 역시 당시 세계를 뒤덮을 기세였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영국이 정복하고 비로소 국민적 자신감이 생긴 시대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이류국가였던 거죠. 국민적인 기분을 셰익스피어가 극으로 만든 것입니다. 어떤 정치적인 의미로 그것을 선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이른바 국민연극이 되었고 또 그만큼 세계적인 것이 되었어요. 작품에는 천박한 것도있고 고급스러운 것도 있지만, 결국 국민적 정열―그것입니다.
이가 : 그리스, 로마 시대도 그렇죠.
최 : 결국 고급스러운 것만 좋은 것은 아니죠. 문제는 국민적인 열기가 식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카다 : 끊임없이 큰 정열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가 : 지금은 단순한 정열이 아니라 하나로 뭉친 정열이죠.
오카다 : 그런 일에 모든 것이 동원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 : 선전계몽의 연극이나 영화도 중요하지만, 아직 대중을 위한 연극이 확실하게 정착되지 못했어요.
단순히 시국적인 것을 하고는 있지만, 유치진 씨, 어떻습니까, 큰 작품을 하나 쓰는 것은. 영화나 연극이나 가극이나 버라이어티가 될 만한 것으로.
오카다 : 그리고 조선 작가들 중에는 아직 하나의 극을 하는 데 있어서 신체제를 향한 것을 따로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체제 한 건을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러나 모든것이 그대로 신체제의 것이니…….
유 : 그게 조선의 극작가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신체제의 이념을 어떤 식으로 작품으로 만들 것인지, 지금도 그렇지만 오직 거기에만 머리를 쓰고 있었죠. 그것은 근래 1, 2년 동안 작가들의 정열이나 당국의 지시나 매우 큰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연극 그 자체의 내용이랄까, 기술이랄까, 그것이 아직 민중과 일치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도이론이 나쁜 것이 아니라 끼워 넣는 방식에, 다시 말해 예술적으로 역시 문제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최 : 그것은 작가가 너무 굳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추나무(棗の木)>는 작품으로서 총독상을 받았고 그래서 당국의 의사가 가장 잘 표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게다가 유독 시국색은 가장없었다고 봅니다. 그것을 작자 쪽에서 좀 더 어깨를 편, 굉장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웃음). 잡지 쪽에 보내는 원고도 그렇습니다만.
오카다 : 역시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이어야 하죠.
최 : 내선일체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내선결혼(內鮮結婚) 이야기…… (웃음).
오카다 :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곳에 국기를 내세우거나, 말도 안 되는 곳에 병사가 나오거나 해서는진정한 의미의 존엄함도 없어질 테니……. 정말 곤란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는 예산 등의 면에서도 지도하는 쪽에서 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최 : 그렇습니다. 이동연극이나 이동영사 같은 일이 경영난으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안 되니깐 말입니다.
스시다 : 이동영사도 곧 16미리로 이행합니다. 필름의 절약이나 수송관계로, 그리고 더 손쉽게 지방에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카다 : 어쨌거나 이러한 문화적인 일에는 건설적인 의의를 인정하고 더 돈을 들여야 합니다.
최 : 그럼 이쯤 해서.
<출전 : 「農村文化のために―移動劇團·移動映寫隊の活動を中心に(座談)」,'國民文學' 제3권 제5호, 1943년 5월, 86~96쪽>
4. 음악·무용
1) 가라시마 다케시, 연예와 대중(2) -중국 신극운동의 경험
저들은 모든 책임을 “기다려 달라. 내가 고려중이니깐”이라며 다른 이에게 돌렸다.
(주7) 1929년 봄 ‘예술극사(藝術劇社)’가 결성된 이후 다른 연극단체도 그 동향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는데, 전한(田漢)은 어느 석상에서 ‘남국사(南國社)’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고 한다.
분명하게 좌익연극운동에 나서지 않는 그의 태도를 이 문장은 비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자의 고투 속에서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정백기(鄭伯奇)의 말을 상기하고 난징(南京)의 지식계급이 오랫동안 연극에 굶주려있던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이 ‘남국사(南國社)’가 경험한 동일한 상연 목록에 대한 갑을 두 지역의 반향의 차이는 토지의 문화적 정치적 분위기가 공연 전에 미리 충분히 관심을 갖고 연구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 ‘남국사’가 난징에서 제2회째 공연을 한 뒤 돌아오는 도중에 우시(無錫)에 하차해서 공연했을 때, 당시 점차 좌익연극운동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전한(田漢)은 우시 도착 전에 차 안에서 갑자기「일치」라는 제목의 즉흥적인 희극 각본을 써서 이를 추가 상연하여 성공했다.
이 각본의 줄거리는 난폭한 왕이 있었는데, 연애만은 아무래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거기에 지도자라 칭하는 남자가 나타나 왕을 해치운다는 줄거리로, 표현주의적 수법으로 무산대중이 일치 연합해서 궐기할 필요성을 설파한 것이었다.
농민 지도자로 분한 진응추(陳凝秋)가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와 “一切被抑壓的人們集合起來…… 一致建設的光明, 新的光明是從地底下來的”이라고 외치자 관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계급적 색채가 많은 작품과 함께 상하이(上海)의 무대에서 연기하자,
등익(鄧翼)이라고 하는 한 관객은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한에게 보내 반성을 촉구했다.
“밝게 켠 전등 아래 시원한 음료수, 과자, 아름다운 의상, 하이힐 구두, 부드러운 머릿결, 그러한 신사숙녀분 등의 지식적 귀족적 공기와 색채가 충만한 가운데 무산자를 위해 대성질호(大聲疾呼)하는 ‘남국’의 공연을 보는 것은 정말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상징적인 불타는 듯한 열기를 가진 저「일치」가 개막과 동시에 박수를 받았을 때, 나는 관중이 진보하고 혁명의 세례를 받았음을 기쁘게 생각했지만, 노동복을 입은 관중이 없었음은 ‘남국’의 무산자에 대한 운동이 결코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를 읽으면 우이에서의 흥분도 왠지 조금 의심스러워지는데, 상하이보다는 조금 나을 것이다.
어쨌거나 무대와 관중이 그야말로 일치했다는 점에서 각본이 공중에 떠 있고, 관객의 다리가 대지에 붙어있지 않으면 결국 공허한 소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등익의 솔직한 비판과 함께 여기서도 진경생(陳勁生)과 정백기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또 하나, ‘남국사’가 제1회 난징 공연을 하는 김에 난징 교외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샤오장(曉莊)이라는 농촌 부락에서(여기에 유명한 샤오장사범학교가 있고 이 학교의 초청으로 갔는데) 공연을 했을 때의 보고를 빠트릴 수는 없다. 즉 난징 공연의 마지막 밤이 끝나자 그들은 자동차를 줄지어 타고샤오장으로 향했다.
(주8) 이 난징 출발에는 반짝반짝 검게 빛나는 신형 자동차를 준비했을 것이고, 남자배우는 맥주와 위스키에 취했고 여배우는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면서 외투를 걸치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필요가 있다. 사실 내가 우리 마을에서 본 1933년 봄의 난민구제의연 공연 무대 뒤도 호화롭고 요란스러운것이었다.
그리고 일찍이 “민간으로 가라”를 표어로 삼고 있던 그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크게 기뻐하고 많이긴장하면서 샤오장에 도착한 아침에 새롭게,
일문전(一文錢) 일막 아(啞) 극, 좌명(左明) 작
(주9) 좌명은 베이징의 예술전문학교 희극계 출신으로 전한 만큼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촌지야(新村之夜) 일막 전한 작이라는 두 개의 농촌을 대상으로 한 작품까지 써서 열심히 공연했다.
그런데 그 영향은 어땠을까?
동행한 남국사의 염갈오(閻扴梧)의 보고문에는 “상하이의 모던한 사람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농부의 눈길만 발견되었다”라는 한 마디가 있다.
여기에 이르러 농촌 공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각본의 내용, 연기 외에 관계자 각자의 무대 이외에서의 복장이나 태도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각본의 이데올로기가 연극인의 일상생활 위에까지 분명하게구현되지 않으면 진정한 연극운동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무대 이외의 언행은 자칫 무관심하게 방임되기 쉽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다.
이상의 경험을 종합하면 결국 연극은 항상 대중으로부터 결코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셈이 된다.
한 걸음이라도 대상이 되는 대중의 현실적 희망 혹은 생활에서 유리된다면, 그 연극은 ‘실패’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이 되는 대중과 그처럼 밀접하게 접촉하면서도 건설적인 연극운동은 언제나 그 대중의 현실보다 한 걸음 전진해서 그 현실의 결함을 자연스레 응시하도록 하고, 이를 새로운 건설적인 방향으로 지도하기 위해 그들에게 힘과 희망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점이다.
태만하고 유탕적(遊蕩的)인 현실 관중들과 손을 잡으면 그 연극은 더 이상 신시대로의 건설적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고, 그 기교와 표현이 아무리 교묘할지라도 결국 그 자신도 역시 유탕적 존재밖에 되지 않으며, 회고 영탄적(詠歎的)인 소극 비관적 허무적인 현실에 안주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한 걸음 전진을 뛰어넘은 도약적 전진도 결코 칭송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머리만 너무 앞으로 나아가고 발이 대지에서 떨어져 있는 유령 같은 각본을 장소와 상대를 불문하고 함부로 상연하는짓은 광기어린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중국의 신극운동의 과거가 가르쳐 주는 교훈은 단지 위에서 언급한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 이러한 서너 가지 예를 들어서 마지막 인사글로 하고자 한다.
‘협예(協藝)’의 동인 인사들중에는 일찍이 좌익연극운동에 헌신한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드는 예는 여러 인사들 자신이 속한 극단에서 이미 경험한 것이어서 새삼 내가 말할 만한 것은 못되고, 또 중국과 조선은 여러 가지 사정도 달라서 직접 참고가 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타산지석, 또 무용지물도 아니고 과거의 반성에 기회를 주는 것도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인사들의 극단의 결성 선언을 읽으면 그 인사들은 “일본정신의 실천적 파악에 따른 국민예술가로서의 굳은 각오”를 지닌 사람들의 집합이다. 또한 그들은 모두 조선 사람들이므로 조선 대중의 현실은 도시든 농촌이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부자든 빈자든, 토지의 남북을 불문하고 모두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 대상에 대한 이해와 파악에 있어서 그릇됨이 없고, 현실에 입각한 일본정신의 고양을 시사하는 흥아(興亞)의 열정을 그린 각본을 제공하고, 나아가 함부로 시류를 거슬러 부화비등(浮華飛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대중과 함께 있으며, 또 일보 전진을 영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자기자신의 일상생활에도 이런 정신을 살리면서 혼신의 노력을 무대에 경주한다면, 그 성공은 반드시 따라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10년 조선의 연극을 사랑하고 그 고뇌를 살피면서 건전한 발전을 기원해온 나이긴 하지만, 연극에 대해서는 여전히 문외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실언, 과언한 점이 있었을지도모르겠지만 노파심이라 생각하고 용서를 바라는 바이다.
<출전 : 辛島驍, 「演藝と大衆(二)―中國新劇運動の經驗―」, '東洋之光', 1939년 11월호, 88~90쪽>
2) 히라마 분주(平間文壽), 문화에의 입찰(立札) -특히 음악가에게 바라는 말
지금으로부터 30년,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는데, 도쿄(東京) 시내의 강이나 제방 가까이에 가면 누구라도 쉽게 볼 수 있게 “이 제방에 올라가지 말 것”이라든가, 또 공원에 발걸음을 옮기면 “이 가지를꺾지 말 것” 등의 팻말을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천연의 아치(雅致)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주고 시민 생활에 대한 굴욕처럼 여겨져 보는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마침 도쿄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 숫자도 더욱 증가하여 국제도시 가운데 굴지의 대도시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게 되면서 이러한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매우 기이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팻말 국욕론(國辱論)까지 등장해, 마침내 이 진기한 풍물은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팻말도 지금은 완전히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돌이켜보건대 그러한 국욕(國辱)으로까지 느껴질 수도 있는 상황이 사회 전반에 아직 남아 있어서 미증유의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려고 하는 대동아전의총후(銃後)에어울리지않는상태를초래하고있지는않을까. 좀더깊이생각해볼문제라고본다.
가령 결성된 지 벌써 2년이 되는 조선음악협회를 보더라도 반도의 음악문화의 향상과 발전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집단이고, 음악가에게는 참으로 적당한 시련의 전야(戰野)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통제력도 음악가 각자가 진정 그 사명에 충실하고 예능보국(藝能報國)의 지성에 불타며 왕성하면서도 자각적
인 예술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입장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점에 진심으로 감격하고 기쁨을 발견하고 봉공해야만 한다.
물론 직접 감독하는 자리에 있는 관청도 순정한 음악문화 신장을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원조를 아껴서는 안 될 것이고, 특히 국가가 고도국방태세 확립을 위해 음감(音感)의 조장·육성을 명령한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외부의 작용을 기다릴 것도 없이 악계(樂界)의 운명은 악인(樂人) 스스로 타개하겠다는 기백과 행동 없이 누가 그 발전적인 경작을 행하겠는가. 악인은 지금이야 말로 몰아적(沒我的)인 음악에 대한 사랑에 철저해야 한다. 무릇 “노 페이, 노 워크”라는 타산적인 것만따지는 영미류의 사상은 배격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각적인 각성 없이 그저 타동적(他動的)인 힘에 의존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팻말을 필요로 한 □□□□ 시민의 선까지 자신을 저하시키는 자일뿐이다. 또한 만약 그러한 팻말을 기꺼이 자신의 머리 위에 두기를 바라는 자가 있다면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출전 : 平間文壽, 「文化への立札―特に音樂家に愬ふる言葉―」, '京城日報', 1942년 9월 19일
3) 히라마 분주, 문화 -악단진어(樂壇贐語)(1)
벌써 조선음악협회도 창립 이후 지난 1월로 만 2년을 맞이했다. 올해는 마침 임원을 개혁하는 해이기도 해서 일단 과거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결전의 해에 부응하는 발전적인 신단계로 나아갈 준비를하는 것도 우리 음악인으로서 전혀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건설에 착수한 후 2년 동안의 주된 음악활동을 열거해보도록 하겠다.
(1) 음악 경연회
(2) 음악 감상회
(3) 음악 강습회
(4) 합창제
(5) 작곡제
(6) 신인 소개 음악회
(7) 국민개창(國民皆唱)운동
(8) 학생음악운동
(9) 국가적 행사와의 연계 음악회
(10) 사회공공사업과의 협력 음악회
(11) 음악계 공로자에 대한 사은 음악회
(12) 음악보국주간(협회 각부 종합대연주회) 등.
이 중에는 매우 강화된 면도 있지만 음악인의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면도 적지 않은 것은, 아직 2살에 지나지 않은 악단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올해는 총후(銃後)도 모든 활동의 면에서 결전하는 국가의 의욕에 부응할 수 있도록 일대 비약을 요망 받고 있다.
때문에 가령 국민운동으로서 큰 역할을 지닌 국민개창운동―국민총력조선연맹 당국의 큰 노력으로 올 봄 이후부터 드디어 궤도에 올랐고, 각지에 이 운동이 파급되어 애국적이고 건전한 일본가곡이 보급 침투되고 있는 현 상황이긴 하지만―과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산업인에게 산업보국정신을 함양시켜 생산 확충과 능률 증진에 경이적인 효과를 보이는 후생음악운동의 두 가지를,더욱 적극성을 띤 방책을 세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당국과 음악인의 전력적인 정신(挺身)이 희구되고 있다.
<출전 : 平間文壽, 「文化-樂壇贐語(1)」, '京城日報', 1943년 7월 13일>
4) 히라마 분주, 악계근시(樂界近時)
1. 개창운동(皆唱運動)
봄의 악계(樂季)에서 가장 주목받을 만했던 것은 “총후(銃後)를 강하고 밝은 노랫소리로 가득 찬 것으로 만들자”라는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가 제창한 ‘국민개창운동’에 호응해서 반도도 뒤쳐질 수는 없다며 일어나 총력연맹의 도움을 받아 음악협회원이 일찌감치 동원되어 조선 내의 각지에서 이 운동을 위해 선정된 애국가를 올바르고 강하고 뜨겁게 함께 부르는(皆唱) 기운을 만들기 위해 정신(挺身)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반도가 마치 일본 내지보다 뒤쳐져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본디음악협회가 창립되었을 무렵, 당시 협회장이자 전 학무국장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 씨는, 그 어떠한 장기전에도 견디기 위해, 또 사회를 좋은 음악 문화 맹아의 온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적정조의 고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순정 국민적인 가곡을 보급하고 침투시키는 것이 절대 불가결한 일임을 통감하고 개창운동 실천의 과정에 필요한 가곡집의 출판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반 준비는 진행되었지만 실행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시오바라 씨가 떠난 지 3년, 드디어
일본 내지에서도 중요한 국민운동의 하나로 개창운동이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돌이켜 보면 작년 가을국민가로 지정된 <바다에 가면(海行かば)>을 보더라도 반도에서는 이보다 몇 년 앞서 시오바라 씨의 혜안으로 나온 지령은 이 국민적인 기백에 가득 찬 명곡 <바다에 가면>을 실로 국민가 이상으로 다루도록 했고 온갖 기회에 불려졌다.
바야흐로 사태는 논의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실천의 시기이다. 이런 때를 맞이해가장 강력한 지도성과 감동성과 침투성을 지닌 음악 예술이 국민들 속에서 많은 역할을 하도록 한 시 오바라 씨의 문화행정에 대한 높은 식견에 대해서는 반도에 살고 있는 자들 모두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인은 원래 노래를 좋아하는 국민이다. 특히 ‘반도인’에게 그런 경향이 현저하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국책적인 견지에서 확실하게 주어졌다면 이제 와서 급하게 “미·영 가곡을 없애야 한다” 따위는 외치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게다가 개창운동의 보편은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산업인에 대해서는 산업보국정신을 함양하고 전시하의 시급한 능률증진을 얼마나 크게 높일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이 운동을 일시적인 불꽃놀이 같은 행위로 끝내지 말고 튼튼하게 육성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교향악운동
다음으로 알아 둘 것은 바로 이 운동이다. 무엇보다 대경성에 상설된 국영, 혹은 재단조직에 의한 교향악단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다.
따라서 문화적인 대도시로서의 풍격이 이런 상태로는 너무나 허전하다.
도쿄(東京)는 여기저기 각 거리에 서너 개나 있고, 이웃나라 만주국에서도 하얼빈과 신징(新京)에 각각 국고의 보조를 받는 교향악단을 갖고 있다. 하얼빈의 그것은 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으로 작년까지 년 , 1 예산 19만 엔으로 우리가 선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올해는 더욱 비약해서 28만 엔을 계상하고 있다. 신징의 교향악단은 재정적으로 더욱 강력하다. “그건 신흥국이라서 그런 거지. 만주는 역시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코 그렇게 끝낼 문제가 아니다. 음악문화에 대한 지도층의 이해와 열정의 유무일 뿐이다. 생각해 보더라도 신흥 만주국에는 돈이 아무리 있어도부족할 정도로 일이 많을 것이다. 당연하다면 음악에 쓸 돈 따위가 있겠는가 하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없을 턴데, 실제로는 교향악운동이 따뜻하게 배양되고 있다.
교향악운동은 음악운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류를 형성하는 것으로, 음악이 지닌 건전성은 백론불여일문(百論不如一聞)으로, 한 번 이를 접한다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 주목하고 있는 만주의 지도층은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비해 조선은 정말이지 부진하다.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스러워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내지와 만주 사이에 갇혀 깊은 계곡 밑바닥으로의 전락을 각오해야 할 상황이다.
경성제대 교향악단, 경성교향악단, 후생실내악단 등 역경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면서 각각 발표회에 헌신한 점은 기억해둘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반도 지도층의 이해 없이는 결코 결실을 맺을 수 없다. 이해만 한다면 재정적, 인적인 불리한 조건은 어떻게든 된다. 반도 문화의 수준을 위해서도 대경성의 위용을 위해서도 교향악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허전하고 빈곤한지를 알았으면 한다.
이상 봄의 악계를 장식하는 두 가지의 큰 움직임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에 대해 창작진이 부진한 것은 어찌 된 일일까. 이런 상태로는 연주가는 하릴 없이 하품을 할 수밖에 없다. 연주가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적인 눈부신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서 음악인이 총후(銃後)에서 짊어지고있는 책무를 다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국민음악 수립은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방악(邦樂)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히 창작 활동이 죽어 있다. 음악을 진정 국민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창작진이여, 분발하라! 라고 외치면서 이 원고를 마치고자 한다.
<출전 : 平間文壽, 「樂界近時」, '文化朝鮮', 1943년 8월호, 38쪽>
5) 나카조노 겐조(中園源藏), 반도교육 혁신론(4) -과학·음악교육을 진흥시켜라
과학교육의 진흥을 도모하고 과학적 태도를 훈련하라
1. 장래의 조선과 과학
독일의 전격전을 계기로 팽배하게 들끓어 오른 여론, 과학의 진흥이야말로 작금 우리나라에 주어진 중요 과제의 하나이다. 지금 조선의 장래를 생각할 때, 그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이 시대의 진운과 지리적인 좋은 조건, 아울러 국책의 강력한 약진은 조선이 언제까지나 구태의연하게 있는 것을용납하지 않는다.
산업의 대종(大宗)이었던 농업에 대한 과학적 연구, 거기에 입각한 합리적 영농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수산, 지하자원 개발, 내일의 조선에 과학적 기술, 과학적 경영이 필요함은 새삼 말할것도 없다.
공업 조선의 건설과 추진에 과학이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2. 조선에서의 과학교육 진흥의 필요
1) 유교주의 교육을 청산하기 위하여
유교가 동아의 명교(名敎)로 과거 동양인의 사상을 기르고 도덕적 부분에 공헌한 힘은 크다.
그러나 유교는요컨대 도덕적 가르침이고 근대과학과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그것을 제일신조(第一信條)로 삼고 그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동양에서 과학의 발전이 구미에 뒤처진 것은 당연했다.
오늘날에도 시골에 가면 서당에 다니는 자가 있다. 여전히 독서 중심이고, 암송만 하면서 머리를 흔드는 곳까지 있다.
아니 당당한 근대 교사(校舍)에 다니는 공립학교 아동에게도 그 잔재는 남아 있다. 모든 것을 교사에게서만 배우려는 수동적인 태도, 기술을 비하하고 법제나 경제 사상론에만 탐닉하려는 사람들이 아직 다분히 있다.
이러한 폐풍 구제를 위해 교육 법규 중에 근로애호의 목표가 나왔고 응용 연습에 힘쓰라고하는 규정까지 두었다. 과학교육의 진흥은 이러한 입각점에서도 역설되어야 한다.
2) 국책순응, 선만일여(鮮滿一如)를 위하여
농공 병진(竝進)은 현 총독의 5대 정강(政綱) 가운데 하나로, 반도 민중이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중대 목표이다.
그리고 농업 진보를 위해 과학적 연구가 필요함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공업 조선에 과학교육이 필요함은 자명한 일이므로 생략한다. 이를 접경하고 있는 만주국과의 관계에서 바라보고자한다. 만주국은 바야흐로 대약진을 이루어 각종 공업의 장래는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그런데 이에 필요한 인적 요소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조선이 지리적 위치에서 여기에 일정한 역할을 분담해야 함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국가로서도 바라는 바이다. 과학적 소양이 있고 과학적 훈련을 거친 산업전사를 계속해서 만주에 보내는 일은 선만일여(鮮滿一如)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3)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완성하고 동아의 지도적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나는 반도에서의 20여년의 초등교사 경험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단정할 수 있다. ‘반도인’(半島人)78)은 수리적 사색에 떨어지고 사고의 과정에 비약이 있다는 점이다.
뇌동성(雷同性)이 있고 시의심이 있다는 것도 결국 이런 원인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사물을 보는 시각이 좁고 감정적으로 비판하며 전체를 직시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태도가 부족하다. 저 민족주의자와 같이 우리 황도(皇道)가 어떠한 것인지, 세계의 현 정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현재 민중의생활적 향상 또는 문화 정도와 다른 동아 민족들과의 그것을 냉정하게 비교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과학을 진흥하고 과학적 태도를 민중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성적으로 내선일체의 근본적 필연성을 인식하는 대전제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그 증거로는 그동안 가르쳤던 반도 아동들 중에 수리적 방면에 뛰어난 자는 비교적 졸업 후 사상이 악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울러 ‘반도인’의
78) 조선인.
앞으로의 역할을 생각할 때 , 과학적 태도의 양성은 하루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중화민국4억의 민중을 지도하는 데 있어서 반도 민중은 어떠한 자질을 갖고 이에 임할 것인가?
노동력에서는 그들의 적수가 전혀 되지 못한다. 전통의 유교는 어떨까? 본가는 자신들이라며 역습을 당할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오랜 역사 시대 때부터의 관계로 중국인은 ‘반도인’을 멸시하고 있다.
이상의 관계에서나는 신속히 내선일체를 완성하고 유창한 일본어와 우수한 과학적 지식과 기능으로 임하는 것 외에 다
른 길은 없다고 믿는다.
3. 과학교육 진흥의 방법
1) 천재주의인가 국민총훈련주의인가
오늘날의 문화가 위대한 천재의 공헌에 힙입은 바가 크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교육 진흥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국민 전체의 향상에 두어야 한다.
특히 기초교육인 초등학교에서과학에 대한 관심을 기르고 기초 도야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2) 현대 초등교사는 좀 더 과학적 지식을 획득하라
도쿄 여자고등사범학교의 호리(堀) 선생은 현대 초등교사가 이과적 지식이 빈약한 점을 문검(文檢)의 문제에 대한 해답에서 귀결시키고 있는데, 참으로 경청할 만한 충언이라고 믿는다. 문검의 일반 이과 문제에 “지상과 평행으로 날고 있는 비행기에서 떨어진 물체가 지상에 도달하기까지의 운동 경로를 묻는다”는 의미의 문제를 냈는데, 만족스러운 답이 너무 적었다.
일반 초등교사의 실력은 충분히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과학교육의 진흥 따위는 바랄 수도 없다.
오늘날의 초등교사는 문학이나 교육서는 비교적 읽는다. 그러나 이과나 수학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것 같다.
아마 초등학교에서 가장 성적이 나쁜 과목은 이과일 것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원의 재교육과 설비의 완성도 물론 필요하지만 경비도 별로 들이지 않고 게다가 순식간에 효과를 올리는 좋은 방법은 각 학교의 초등교사가 물리 책을 한 권 제대로 읽고 터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화학, 또는 기타 과목으로 나아가 현대 기계의 기초지식 정도는 모든 선생이 알아 두어야 한다.
이를위해서는 기초인 대수나 삼각도 소설을 읽는 시간을 줄여서 연구해야 할 것이다.
3) 학습법을 훈련하라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획득 연구의 방법도 가르쳐 아동 스스로 사고하고 궁리해서노작하는 습관을 양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리과, 작업과 등에서는 특히 연구 방법을 수업시간중에 알게끔 하고 그 방법을 일정 시간 반복함으로써 연구의 과정을 훈련해야 한다.
4) 아동의 질문을 환영하고 작은 창작에도 상을 주라
어린아이의 의문 및 요구가 종종 큰 발명을 낳고 위대한 발견을 하는 경우가 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초등교육자는 아동의 질문을 환영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처음에는 우문이나 쓸데없는 물음도 참아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적절한 질문이 나타난다.
또천재도발현하는기회가주어질것이다. 다음으로는아동의창작품은아무리사소한것이어도칭찬하고격려해야 한다. 꾸짖어서 이끄는 것보다 칭찬해서 이끄는 교사가 현명한 교사임을 명심해야 한다.
5) 적당한 장려법을 강구하라
전체적으로 보자면 전람회, 연구회 등도 필요하다.
조선에서도 아동 창작품 전람회가 경성에서 열리고 있는데,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며, 매년 계속해야 할 행사이다.
그러나 작게 1개교를 단위로 생각하면 학예회에서 발표시키는 것도 좋고 메달을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