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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8일 목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제1독서 : 1요한 1,5―2,2
복 음 : 마태 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무엇인가를 적절한 대가나 노력 없이 거저 얻으려는 사람을 향해
우리는 ‘도둑놈 심보’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우수한 성적 맞기를 바라는 것은 어떨까요?
근면 절약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벼락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또 어떨까요?
그렇다면 100의 노력을 했는데, 결과는 20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불평불만을 가져야 할까요?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있는 본당에서는 매주 금요일마다 성경 특강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준비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까요? 아닙니다.
한 번의 강의를 위해 10시간 이상의 시간을 소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고 나면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으면서,
더 좋은 강의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매번 깨닫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과만 나오길 바라는 모든 것이 ‘도둑놈 심보’입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한한 존재 앞에서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완벽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노력만으로는 그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또 함께하시기에 그래도 이만큼의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도둑놈 심보에서 벗어나 겸손함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는 오늘입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은 뒤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장차 유다의 왕이 되시리라는 예언을 듣고는 없애려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찾지 못하자 급기야 갓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자기 왕위를 지키기 위해 이런 엄청난 짓을 한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의 아픔은 상관없다는 생각이
역사에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왕으로 기록되게 했습니다.
특히 자기는 중요하고 어린아이의 생명은 별것 없다고 생각하는 헤로데 왕의 모습이
‘도둑놈 심보’를 가진 못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왕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려야 하는 의무는 잊어버리고,
자기가 누릴 것만 찾고 있음은 그가 진짜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남의 아픔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저 자기만 편하고 많은 것을 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헤로데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살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며,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사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의 신비를 드러내 줍니다.
이 ‘죄 없는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겉으로는 헤로데의 잔인한 학살을 드러내지만,
실상은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곧 그들의 죽음은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메시아가 나타나심에 대한 지상의 왕의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 학살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신약의 ‘새로운 라헬’이라 칭합니다.
곧 라헬이 일생동안 고통을 겪고 죽음의 고통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면,
마리아 역시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루카 2,35)
십자가의 고통을 겪음으셨던 ‘고통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 라헬이 <예레미아서>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예레 31,15)라 칭해지듯이,
마리아는 <요한묵시록>에서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켜
메시아 어머니의 “후손들”(묵시 12,17;12,1-6 참조)이라 칭하기에 전체 ‘교회의 어머니’라 칭해집니다.
그리고 라헬이 하느님 앞에서 지상의 자녀들을 위해 슬퍼하며 울음으로 전구했듯이,
마리아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장 유력한 ‘기도의 전구자’가 되십니다.
또한, 우리는 ‘무죄한 어린이의 희생’을 들으면서 앞서 있었던
모세가 히브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곳 없이 반드시 이루어지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한 소식을 들었을 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 소리”가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슬픔은 한순간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슬픔의 끝이었겠지만,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죽은 아기 어머니들의 아픔을 마리아는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가 희생되어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 고통을 받아야 했던 마리아는
또다시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아기 예수님도 훗날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학생 때 처음 접한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은 ‘태백산맥’입니다.
대하소설이었고, 감동과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 조정래 선생님의 장편 ‘한강과 아리랑’을 읽었습니다.
세 작품의 권수는 32권입니다.
시대순으로 하면 아리랑, 태
백산맥, 한강의 흐름이지만 저는 태백산맥, 아리랑 그리고 한강을 읽었습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단편인 ‘정글만리, 천년의 질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최근 82세의 조정래 선생님은 신작 ‘황금종이’를 발표하였습니다.
지구에 있는 대부분의 종교와 신은 점차 쇠퇴(衰退)의 길을 가고 있는데
여전히 막강한 권능과 힘을 자랑하는 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돈’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에서 ‘돈’ 때문에 망가지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등단 60년이 되는 2030년에 인간의 존재와 영혼을 주제로
‘신화(神話)’의 세상을 전하며 은퇴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점에서 황금종이를 사오면서 제게 스스로 ‘성탄선물’을 했다고 여겼습니다.
연말연시입니다. 저무는 한해와 다가오는 한해를 책과 함께 보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리랑에서는 나라를 빼앗기고 먼 타국에서 살아야 하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동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서럽고, 아프고, 고난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배신과 모함으로 일본 형사에게 잡혀서 고문을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념의 갈등으로 갈라서야 했던 형제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념의 이름으로 죄 없는 이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군인에게 고통을 받고, 밤에는 빨치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서러운 민중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권력에 기대어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는 가난 때문에, 연좌제의 그물에 갇혀 꼼짝 못 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져야 했던 슬픈 청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력과 능력이 있어도 꿈을 펼칠 수 없는 젊은이의 고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우리 민족의 슬픔과 고난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한과 아픔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바라보며 모든 설움과 아픔을 견디어 가는 민중의 힘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어린 아기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두 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아이가 메시아가 되어
자신의 권력과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두려움이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를 만들어 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무고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고,
또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친 사람은 다리를 오그리고 자고, 맞은 사람은 다리를 펴고 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뒷일이 걱정되어 늘 불안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살해했습니다(마태2,16).
그는 권력에 집착하여 간교하고 잔인하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이라고 단정하고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 하려는 욕심과 불안함이
잔인한 죄를 저지르고 무거운 짐에 눌려 지내야 하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습니다.
이런 어둠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리 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죄와 탐욕에 눌려 사는 것보다 손해 보고 버리며 사는 것이 훨씬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요즘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맞바꾸려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아도 인간입니다. 그들의 생명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합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며 지체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든지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역경 안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세상의 불의는 의인의 탄생을 싫어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면 우리 사회 안에
거짓과 불의에 어떻게 다가서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 신비를 본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 않은 이유와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만남의 기쁨을 누린 뒤 모두 다 도망자처럼 서둘러 달아나야 했다.
박사들은 페르시아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헤로데는 구세주를 없애려고 박사들에게서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명령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사악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신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지만,
하느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파멸했다.
이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순교자들이었다.
마태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를 표현한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우는 것은 마치 내장이 뜯겨 나가듯이 아기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들보다 남겨진 어머니들의 슬픔이 더 크다.
아기들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니,
한순간의 슬픔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슬픔은 갑절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는 이제 아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에게는 그들의 슬픔에 복된 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아기를 잊지 못해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하며 불평을 하고
신앙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욕심이 저지르는 잘못이기에 인재이다.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가 없다.
나의 잘못으로 우리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이는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를 제외한 모든 주일과 대축일,
성탄과 부활의 팔일축제와 성인들의 축일에 노래하는 ‘대영광송’의 첫 부분이다.
이 외침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순간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천사들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양한 데서 비롯된다.
천상군대의 찬양에 걸맞게 목동들이 떼를 지어 와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께 경배드렸고,
동방에서도 박사들이 셋이나 선물을 드렸다.
그런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다고 했던가?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젖먹이를 포함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모조리 떼죽음을 당하였으니 말이다.
문제의 발단은 점성가들이었던 동방의 박사들이 하늘에 큰 별이 나타난 것을 보고,
그 별의 주인을 찾아온 데서 시작된다.
그들이 제각기 먼 길을 거쳐 찾아와 보니, 그 별이 성도 예루살렘 위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 화려하고 웅장한 성도 예루살렘 정도라면
별의 주인인 유다인의 왕이 탄생한 장소로 적합하다고 보였던 것이다.
자기 말고 어떤 왕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던가,
헤로데 대왕은 한밤중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 놓고 예언서를 뒤졌다.
거기에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이라고 적혀있었다.(미가 3,1. 5)
그 길로 박사들은 별의 안내를 받아 베들레헴의 예수 아기가 있는 곳으로 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경배하였다.
물론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가서 찾아보고 와서 알려달라고 청을 했었다.
자기도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가겠다는 말도 했다.
그동안 헤로데는 아기를 제거할 무슨 책략을 꾸미려 했을 것이다.
或者는 헤로데가 박사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당장 손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그 아기가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요 영도자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백 년을 기다려 온 메시아임이 틀림없기 때문에
유대 혈통이 아닌 헤로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사들이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들 나라에 돌아간 일 때문에
결국은 헤로데 대왕의 주권이 발동되고 잔악한 대학살이 벌어진다.
아버지 안티파텔을 닮아 아내를 수십 명씩 거느리며,
부귀와 권세와 영달을 좋아하던 헤로데에게 두 살도 채 안 되는 사내아이들이
미래 이스라엘의 꿈이라는 단순한 진리조차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구약의 모세도 서슬이 시퍼런 파라오의 칼날을 피해 갔고,
아기 예수도 하느님의 안배로 미리 피난 길에 올랐지만,
졸지에 변을 당한 그들의 억울함을 누가 있어 송사해 주겠는가?
好事多魔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만,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또 그 아이들을 젖 먹여 키운 엄마들의 찢어진 마음은 누가 있어 위로해 주겠는가?
어처구니가 없음은 마태오 복음사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예레 31,15)라는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성탄대축일 이후
팔일축제의 첫 3일간을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예수님의 애제자 ‘성 요한사도 복음사가’,
그리고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을 잇달아 기념하여 왔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은 서방교회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50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에서 처음으로 기념되었다.
12월 28일에 이 축일을 지내게 된 이유는 무죄한 어린이들에 대한
헤로데의 학살극이 예수 탄생 3일 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아이들의 죽음이 졸지에 당한 ‘개죽음’이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격의 죽음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교회는 이 아이들의 무죄한 죽음과 이 아들을 잃고 애통해하는
어머니들의 마음을 순교의 행위로 승격시켰다.
경배와 찬양으로 둘러싸인 아기 예수의 搖籃 아래,
이미 증오와 박해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구원사명과 운명에 포함된 것이리라.
우리 주변에도 이러한 죽음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애통해 하는 마음들이 많다.
아직 한마디 말도 못하고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아기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은 오늘 헤로데의 칼날에 쓰러져 간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과
다른 모든 죄 없는 죽음과 의로운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계실 것이다.
오늘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빛이
세상을 밝힐 수 있도록 ‘초의 심지’와도 같이 죽음이 된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승화 시몬 신부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나면
그 눈부심에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자칫 실명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물려 하지 않습니다.
빛이라는 것은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따스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은
고통을 알면서도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곳에서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
빛이신 하느님이 찾아왔을 때도 그렇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지만
그럼에도 빛을 덮으려고 애를 씁니다.
덕분에 빛을 찾아가는 이들은
어둠에 의한 상처와 아픔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빛이 강할수록
우리가 머물던 어둠이 깊을수록
어둠에 머물던 이들은 빛을 찾는 이들을 박해하고
빛을 사랑하는 이들은 상처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에
무죄한 어린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것도
병사들의 손에 아이를 빼앗긴 어머니들의 슬픔도
빛을 거부한 어둠의 세력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추구하는 빛이 강렬하기에
우리는 어둠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건
빛을 따르는 동반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고
어둠의 유혹에 흔들리는 이들을 붙잡아 주는 일이며
죄와 나약함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오늘을 살아갈 힘을 줄 것임을 기억하며
오늘 어둠의 세력에 흔들리지 않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