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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작시와자작글방 스크랩 수필 신라 제35대 경덕왕릉을 찾아서
동살청암 추천 0 조회 88 07.09.05 14:2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여름의 찌는듯한 염장의 날씨에 타오르는 해가 중천에 날개짓하고 있지만 일요일 그냥 불현듯 신라시대 절대군주의

완성자요 조선시대 영,정조왕과 같이 신라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그리고 효성 지극한 제 35대 경덕왕을 만나러 보기위해

행장을 꾸리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발길을 내 디뎌본다.

바깥의 기온은 폭염주의보가 내린관계로 지열을 감지할수가 있다.

그렇타고 나의 역사기행을 멈출수는 없는일이다 .

8세기의 왕이 나와 함께 놀자고 초댓장아닌 초대를 받고 있는 느낌은 내심 즐거운 일이 아닐수없다.

경덕왕릉 찾아가는 길은 경주I.C에서 내려 5분정도 찻길로 온 후 오릉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나정,포석정,삼릉을지나

면 5분도 안되어 윗 사진의 경덕왕릉 안내판이 기다리고있다

 

들어가는 입구의 논 안의 벼이삭이 언제 며칠도 안되었는데  벼이삭은 올해 풍년을 예고 하듯이 고개를 내밀고 풀내음을 풍기고있다

 

경주 울산간 경부고속도로 다리밑을 통과하여 내남면 부지리 내남 초등학교를 지나니 경덕왕 입구가 지척임을 알리는

표지돌이 자리잡고 매미소리는 늘어지게 맴맴거린다.

 우측 산중턱에 천년 이상을 영면하신 경덕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승용차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더 이상 차로는 진입 못하도록 관리자인지 주민인지 모를 일이지만 부러진 나뭇가지를

도로를 가로 질러 조심스럽게 놓여있는데  어쩌면 우스꽝스러운지 순수한지 모를일이다

 

저 소나무숲 뒤로 경덕왕릉의 숲이 보일락 말락하다 입구의 소나무는 곧게 허리편 나무는 찾아볼수 가없다.

잃어버린 천년의 사직을 슬퍼라도 하듯이 구불어지고 비틀어지고 갈라지고 우는듯 나를 맞이한다.

어느 산림 학자에 따르면 곧은 소나무는 사찰 짓는데 숯불피우는데 다 사용되고 우성 열성의 법칙에 의해

열성인자만 살아남았다는데...

 

 

 

 

신라 제35대 경덕왕의 능이라고 전하는 고분.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내남면(內南面) 부지리(鳧池里)에 있다. 지름 약 22m, 높이 약 6m의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둘레돌[護石(호석)]이 설치되어 있다. 둘레돌은 목조건축물의 석조기단(石造基壇)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지대석(地臺石)·면석(面石)·탱석(撑石)·갑석(甲石) 등이 놓여 있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둘레돌 구조는 통일신라시대 왕릉이 가장 잘 정비된 형식이다. 능 앞에는 높은 석상(石床)이 놓여 있으나, 그 밖에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돌사자·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과 같은 석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경덕왕릉의 위치와 문헌기록의 일치 여부는 알 수 없고 이 능이 경덕왕의 능인가를 의문시하는 견해도 있다. 사적 제23호.
           _ 윗글은        발췌한글_

 

 

 10여분 산구릉이 올라온 탓인지 모자 쓴 미간사이로 땀이 삐죽히 내릴쯤 35대 신라 경덕왕은 뜨거운 여름날 산찌르기 울음소리와

풀내음으로 나를 반긴다..

 

 

 

 제단석 앞에서  영면 1200여년후 이름 모를 경주김씨 후손이 초댓장없이 찾아왔지만 합장 인사는 해야  도리가 아닌가 싶다.

막상 눈감고 합장하는 순간 속으로 빈손으로 찾아온것을 후회했다.

문안 인사 드리고 당신의 영명하심을 보여 달라고 속으로 빌어보지만...

대답은 없고 허공만 맴도는구나

 

 

1970년대 초등 다닐때 수도산 김유신 장군묘옆 십이지신상 바깥에 윗사진처럼 둘레석 난간이 확실하게 장식 되어 있지않아서

동네 개구장이들하고 들락날락 했다 아침 일찍 운동하러  와서는 능둘레를  숨안쉬고 능 주위를 먼저 돌기 내기를 벌였던 추억이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 둘레석 안으로 들어가서  십이지신상 가운데  뱀석상 옆에서 기념 사진 한장 찍어 본다

 

 신라시대 절정기의 시대를 이끌었던 경덕왕릉이 있는 내남면 부지리는 신라 육부촌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에 속했으며

그당시 두번째 권력 집단이 살았던 곳으로 말기에는 고운 최치원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 되어 있지만 모지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수 없는지라

산중턱 언덕이라고는 여기밖에 없어서 200년전 경주 김씨 문중에서 지적했다고하니 약간 어아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타면 모지사 절터가 어디엔가는 있을터인데  그리고

언젠가 경주시내 모든 왕릉을 다 발굴해야 할일이라고 여겨진다.

개인적으로 경주시내 크고 작은 고분은 거의 왕릉내지 왕비의 무덤이라여겨진다

1대박혁거세부터 56대경순왕과 그 왕비를 단순히 합계하면 100기 이상은 경주시 일원에 있어야하는데

우리들은 모르고 있을뿐이다.

경주시민이 자고있는 그 밑이 왕가의 무덤일 확률은 타지역에 비해 상당히 높은것이라 여겨진다.

이집트처럼 왕가의 계곡이 따로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희미하게 잘보이지는  않지만 쥐모양의 십이지신상이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 술,해(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오랜만에 입속으로 외워 본다

"십이지에 대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집트,그리스, 중국 등 동서양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그것이 동물로 형상화된 것은 중국의 한대 이후이며, 조각의 한 주제로서 확립된 것은 통일신라 때였다. 당에선 작은 크기의 십이지인형이 방위신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무덤 안에 부장되는데, 신라에선 이와 같은 관습을 크게 벗어나 능 외부에 독립된 조각으로서 표현된다.

 또 성덕왕릉, 경덕왕릉, 괘릉 등의 십이지 복장은 불교의 사천왕 복장과 일치하고 있다. 당에서 받아들인 십이지상에 불교의 것을 혼용한 셈인데 십이신장(十二神將)과 사천왕 같은 불법수호의 자세를 왕권보호의 자세로 탈바꿈하여 표현하였다. 사천왕상 등의 자세에 얼굴만 십이지동물로 바꾸어 능에 배치하는것은 대담한 변형이며, 이로써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호국불교의 관계를 확인해볼수 있다."

                      참고서적 _      (강우방의 ^원융과 조화^)

가히 우리민족 독창의 예술이라 할수있다

 천년의 풍파에 닳아서 희미하게 남아있는 소 형상

 호랑이 눈모양의 형태만 보인다

 양쪽 길다란 귀모양 의 토끼상

 용의 두상의 형태는 제법 선명하게 살아있다 십이지상 복장은 사천왕상의 복장과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십이지신상 전부 신체는 굴곡없이 직립상을 연출하고 있다.

 뱀 형상인데 도끼를 들고있는것 같다

 천의(天衣)를 걸친 말 형상은 칼을 차고 마치 튀어 나올듯하다

 온순한 양 모양의 십이지신상

 

 약간 코믹하게 생긴 이마가 튀어나온 원숭이 상

 부리가 사나워 보이며 눈을 무섭게 치켜뜨고있는 닭

 신라시대에는 개고기를 식용으로 사용했는지 궁금하게 멍멍거리듯 서있다

 

 코가 유난히 크게 조각된 돼지 형상

 

 

 봉분의 면석과 호석(둘레석) 사이에는 사람의 손길이 없는듯 잡초만 무심하게 피고

 능위로는 싱그러운 구름이 피어 오르고

 주위의 소나무는 더위에 지친듯 찬찬히 서있고

 왕릉 소나무 뒷편에는 남산 고위산 봉우리가 보일듯 말듯한데,무인상 문인상은 왜 없을까

 

경덕왕은 태종 무열왕으로 시작되는 신라중대(中代)의 마지막 전제군주로서 전제왕권 확립을 위한 2대 개혁을 단행했던  왕이다.

재위16년에는  전국의 땅이름을 한자로 바꾸었고 재위 18년에는 관제(官制)를 개혁했다.

삼국사기에는  두차례나 일본사신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로써 그의 강한 일면을 볼 수 있지만,충언에는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군주였다.

형인 효성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뒤 아버지 성덕왕의 비를 세우고 능을  완비했으며 성덕대왕신종을 계획했던 효자.

전제주의 왕권의 절정기이자 또한 신라문화의 절정기를 이루었던 왕. 능의 수호신 십이지상과 분황사 약사 거불.

50여만근의 거대한 황룡사 종과.신라예술의 대표적인 걸작이며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통일신라 삼보인 불국사와 석굴암도

이당시에 완성되었다.  _참고서적 강석경 著 능으로 가는길_

 

초등다닐무렵 박정희 대통령시절 당시에 신라문화 복원이 한창이었다. 안압지에는 목욕도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했을 정도였고 안압지안의 말밤을 따기도 했다. 시내 일원의 고분 들은 동네 개구장이들의 미끄럼틀 대용으로 사용되곤했다.

비닐 비료 포대기를 엉덩이에 깔고 고분 정상에서 아래로 타고 내려오면 요새 말로 기분이 짱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성덕대왕 신종 이라는 말은 국사책에서나 보았을까 내 어렸을적에는 에밀레종이라 불렀다.

종을 만드는데 실패하자 그 비책으로 어린아이를 쇳물에 던져넣어니 완성되었고 그 종소리가 제어미를 찾듯이

에~밀레 에~밀레하면서 울린다하여 에밀레종이라 불렀다.

우스갯소리로 개구장이들은 진짜 에밀레종은 동해바닷속 깊은물에 빠져있는데 이유인즉은 일본 왜놈들이 이 종이

탐나서 배로 운반하여 가는 도중 풍랑을 맞아서 배가 침몰되었는데 큰 파도가 나면 심해속 에밀레종이 에~밀레 에~밀레

운다고 경주시 당시 어린이들 가슴속에는 아직도 전해내려온다.

 

 

 천년의 명상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은 경건하며 내딛는 발걸음 행복의 자욱이구나

 

 저 멀리 남산 고위봉이 한여름 뭉게 구름에 병풍처럼 버티고 있구나

 

 5월이면 벗꽃축제는 있는데 우리나라꽃 무궁화는 요즘 피는것 조차 알고나 있는지  국화(國花)를 사랑 합시다

 해바라기

 능소화

 꽃이름모름니다 가르쳐주세요

 

 

가을이 올려나 고추를 벌써 말리네~

 

 

나어릴적 꿈이 서린 이곳 경주에서 살리라

천년의 왕도(王都)가 살았던것처럼

살아서 죽어서 경주에서 살고파라

왕가의 봉분 풀 밥그릇처럼 여기며,

첨성대를 마음의 촛불처럼 밝히며 살고파라

 

우리민족문화의 발상지요

예술의고향인 이곳에서

영원히 숨쉬며 살고파라

나의 사랑 경주여~

나의 사랑 신라여~

 

 

  2007.08.22일 소낙비 오는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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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9.05 15:54

    첫댓글 동살청암님의 밝은 사학에 찬사 보냅니다. 그리고 찌는듯한 더위에 마다않고 좋은 자료를 찾아 게시해 주심에 너무 감사 드립니다.

  • 작성자 07.09.06 00:35

    미진한 글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용기내서 올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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