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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 전성환님의 좋은 의견에 일련의 댓글로 달아놓은 내용이었는데, 내용 상 하히해님의 글과도 접점이 꽤 있기 때문에 구차하지만 따로 모아서 글로 올립니다.
일단, 임란에서 조선군의 활약 못지 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군과 각 부대장들의 행동 및 결단인데, 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개전 초기에, 적어도 일본군이 분명히 완전한 승리를 거머쥘 기회가 한 번 정도는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평양이지요. 여기에서 대체 일본군은 왜 끝까지 국왕을 추격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애초에 왜 그렇게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점령지를 확대해 나갔을까요? 적어도 숙련된 군인, 경험이 많은 장수라면 그저 빨리 나아가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그리고 그만큼 보급이 중요한 요소임을 모를리가 없는데 말이죠.
이에 대한 의미심장한 주장 중 하나로, 당시 일본 장수들의 전략적 오판을 자아낼만한 요인으로써 일본의 정치/사회환경과 조선의 정치/사회환경의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1. 일본군은 도성의 함락-평양성의 함락 이 두 사건을 "결전 決戰"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일본의 철저하게 분열된 봉건사회는 개별영주 및 영지의 독립성이 강합니다. 애초에 어느 지역에서 큰 전쟁이 발발한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 지역 vs. 다른 지역]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한 지역에서 짱 먹고 있는 사람 및 그 수하들 vs. 다른 지역에서 짱 먹고 있는 사람 및 그 수하들]의 싸움이라는 것이지요.
"아니, 본질적으로 모든 전쟁은 다 그런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문장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봉건적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의 전쟁은 왠지 모르게 "사전私戰" 의 성격을 띕니다. 이것은 서양의 중세나 일본이나 비슷한데, 근대사회 이후의 국지전이나 전면전, 총력전을 경험한 오늘날의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에 필요한 동원이 국가적으로, 대규모로, 체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적公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매우 익숙합니다.
여기서 '공적'이라고 한다면, 조직적/행정적으로 통합된 국가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전쟁수행의 시스템을 통하여, 병력의 징집, 훈련, 전개, 무기의 생산 및 배치, 보급품의 생산 및 이동 등 전쟁을 위한 모든 요소에 필요한 사회적/물적/인적 자원이 분배되어 활용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공적인 전쟁수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직력과 행정력이 (그리고 근대적 규모로 쌈박질 하려면 운송/교통편의 발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봉토별로 분열되어 있는 봉건사회에서는 당연히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하나의 체제, 시스템으로 통합된 국가들간의 전면적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공동운명체로 모든 국민이 묶여있는 하나의 통합체로써의 국가]라는 개념부터 있어야 하는데, 봉건사회에는 이런 국가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봉건사회에서의 전쟁은 지역 및 국가 단위의 전쟁이 아니라, 인물 vs 인물의 "사적인 전쟁"이며, 병력의 동원, 자원의 분배, 행동 및 거취의 선택 등 모든 면에서 굉장히 "사적"입니다.
서양의 대표적인 경우를 하나 들어보죠.
영-프의 100년전쟁 초중반, 전쟁의 동기는 영국이 주장하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입니다. 그에 대한 영주들의 반응은 "유리한 세력에 붙자"입니다. 프랑스 땅이 영국에 넘어가든 말든, 그딴건 애초에 아웃 오브 안중이죠. 프랑스의 국왕 쟝 2세가 막내 아들인 "용감한" 필립에게, 프랑스 영토의 일부를 영지로 뚝 떼어줘서 생긴게 부르고뉴 공국인데, 떼아주면서 부터 아예 프랑스와는 별개의 나라처럼 행동합니다. 나중에는 아예 헨리5세와 동맹을 맺고 영국 편을 들죠(-_-;). 이런 식으로, 전황에 따라 프랑스 내에 있는 여러 영지의 영주들은 전황의 전개에 따라,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충성의 대상을 바꿉니다.
애초에 봉건영주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왕이든 따위 별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국가의 이름이 "잉글랜드 왕국"이든 "프랑스 왕국"이든 또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국왕의 세력이 강하다면 '프랑스'라는 의미도 없는 이름 때문에 그에 저항하여 영지가 개발살나고 가문이 몰락하고 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두 왕의 사적인 전쟁입니다.
영국왕이 이겨서 프랑스를 몽땅 다 차지한다고 해도, 어차피 영주들은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으로, 그 봉건영주들의 총대장으로 영국왕을 섬기면 됩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스요. 오죽하면, (장차 샤를르 7세가 될) 프랑스의 왕태자가 "이 프랑스 땅에서 내 봉신보다 영국왕의 봉신이 더 많다규;;; ㅠㅠ" 면서 절망을 했겠습니까.
이런게 소위 봉건사회의 전쟁의 "사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일본사회에도 매우 비슷하게 전개가 됩니다.
전국시대에서의 전쟁의 양상은 매우 극적이고 비장한데, 이게 뭔가 전쟁이라는게 "코시엔 토너먼트"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코시엔 고교야구대회는 토너먼트 방식이고, 어느 팀이든 전승을 해야만 우승을 합니다. 그 도상에서 단 한 번의 패배만 있어도 토너먼트 탈락이죠. 전국시대도 뭔가 비슷한데, 소규모 접전은 매우 일상적이라 온 나라가 상시적인 전쟁상태에 있지만, 그래도 일단은 작은 충돌을 제외하고는 서로 숨을 죽이면서 엄청나게 군비를 쌓아나갑니다.
그러다가, 뭔가 한 방... 단 한 방의 큰 싸움 -- 즉, 최종적인 결단을 통해 나오는 합전: "결전決戰"이 발생합니다. 이 "결전"이라는 단어, 오늘날에조차도 일본인들이 무지하게 좋아하는 단어지요. 이런 "결전"은, 그 말 그대로, 일단 거기에서 대패를 당하면 당시 일본의 환경에서 "권토중래"를 꾀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다시 몇 번이고 싸울 수 있는게 아니라, 말 그대로 단 한 번의 결단으로 단 한번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최고최종의 전투인 것이지요.
전국시대의 일본 또한 서양의 중세와 비슷하게 통합된 국가로써의 틀이 전무한 지경이고, 통합된 국가적 정체성을 지닌 행정체계가 아니라 독립된 영주들이 위계적/수직적 권위에 따라 상징적으로 복종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일단 한 번의 결전에서 패하면 그것으로 전국의 향방이 바로 가려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패배자는 항복을 하든, 사로잡혀 처형을 당하든, 스스로 배를 가르든간에 어쨌든 멸망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이지요. 영주에 따라서는 봉신들에게 공포의 존재같은 사람도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드문 예 -- 봉신에 대한 영주의 통제력은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국시대의 영주들에게 있어서 큰 전쟁이란 곧 "決戰" 이며, 또한 "結戰"이 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패하면 당장 봉신이니 맹우니부터 바로 등을 돌리는 것이 예사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세력권이, 그냥 전쟁 한 방에 바로 무너지고 와해됩니다. 패한 영주기 적지도 아니고 자기 영지 안에서 도망가다가 자기의 (배신한) 봉신에고, 혹은 자기의 농민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면, 당대 일본 장수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의 전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하여 조선에서의 전쟁을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했다고손 쳐도, 결국에는 조선을 하나의 커다란 쿠니, 조선의 왕을 하나의 큰 다이묘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전쟁 초기에 소위 '전격적'에 가까운 속도로 진군하여 도성을 함락하고, 조선반도 남쪽의 상당한 권역이 일본의 통제 아래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허술한" 그들의 대처가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됩니다. 결전사상에 입각한 전국시대의 전쟁은 몇 년이고 오래 동안 싸우는 경우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단기결전입니다.
단 한 번의 결전에서 최대한의 성과와 최대한의 패배를 적에게 안겨주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기동하여 우선 야전에서 적의 주력을 무너뜨리고, 이후 패주하는 적을 좇아 적의 지성과 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적의 영주가 더 이상 싸울 능력도 없으며, 믿고 따를 수 있는 모든 권위가 실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것으로 싸움은 끝이니까요. '흙먼지를 일으키며 되돌아 오는" 그런 환경이 아니니, 그것으로 적의 백성도, 적의 병사들도, 적의 영주조차도 모든 싸움이 끝나고 어떠한 희망도 없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놀랍게도, 이러한 성향은, 국민국가로 전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이 진주한 일본에서조차 보이는 듯 합니다...)
개전 첫 해에 동래성의 관문을 박살내고 쳐들어와서, 미친 듯한 속도로 조선반도 남부의 권역을 장악하고, 두 갈래의 군대가 서로 경쟁하듯 북상하면서 가장 중요하고 거대한 두 도시인 한양과 평양을 점령했다는 것은, 아마 당대 일본 장수들의 생각으로는 "결전에서의 결정적 승리"에 해당하는 사건이었을 듯 싶습니다. 일본으로 치면 주된 공략대상으로의 공격루트 상의 수 많은 지성이 대부분 함락되었고, 다이묘의 근거지인 주성 또한 함락당하였으며, 영주는 결국 패주하여 어딘가로 도주한 상황인데, 일본 전국시대의 예를 따른다면 이 시점에서 이미 전쟁은 끝난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남부의 도는 일본이 장악하였고, 지성에 해당하는 여러 고을 및 읍성 등 또한 함락되었고, '다이묘'에 해당되는 국왕은 도주하였으니 응당, 조선의 백성들도, 조선의 병사들도, 조선의 각 고을 수령등도 완전한 패배를 자인하고 항복해오는 것이 순리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왜장들의 생각에서는요. 국왕의 운명은, 대체로 전쟁에서 패하여 도주하던 영주가 맞이하는 운명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니 굳이 거세게 북방까지 추격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스스로 항복해오거나, 자살하거나, 누군가 배신자가 잡아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 '결전'에 대한 전국시대 일본인들의 경험은 매우 흔하고, 매우 극적이며, 매우 비장합니다. 전국시대의 흐름은 그야말로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영주들 사이에서 결전에 결전을 거듭하는 싸움이었으니까요. 작은 영주들끼리의 결전으로 보다 큰 영주가 탄생하고, 그런 영주들끼리의 결전으로 거대한 전국다이묘가 출현하고....
전국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오다 노부나가 또한 오케하자마 결전으로 일어서서 결전을 거듭하며 거대한 다이묘가 되었고, 그 오다가 몰락한 후 야마자키의 결전 한 방으로 미츠히데가 몰락하고 히데요시가 부상했으며, 이후 시즈카다케의 결전 이후 오다의 중신 시바타 카츠이에 또한 몰락, 토요토미의 천하가 되었고,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의 결전 한 방으로 이에야스의 시대가 되었으며, 오사카성에서의 최후결전으로 함락으로 토요토미 세력은 완전히 절멸되었고... 이런 "決戰"을 수 없이 마주한 일본 장수들이 개전초기, 조선과의 전쟁에 대해 어떤 인식을 하였는지 매우 흥미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당대 유교 및 동아시아 관료제/행정조직의 본좌였던 조선인의 "忠"과 봉건사회 일본인들의 "忠"
그런데, 일본 장수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결정적인 전략적 실수였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은 봉토를 중심으로 운용되는 봉건국가가 아니거든요. 근대국가 레벨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관념이 존재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조선은 사실 중국보다도, 일본보다도, 서양의 어느 국가보다도 공동운명체로써 "나라"의 개념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면에서 그것은 (일부 사람들이 그토록 까는) 유교가 이룬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도 있지요. 漢代 이후 법가의 정신이 상당히 가미되어 혼합된, 현실적 통치체제로서의 유교적 질서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강력하고도 효율적인 통치이념이 되었고, 그 통치이념으로써 잠재력을 강력하게 발휘한 것은 중국보다도 오히려 조선에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선의 체제에서는, 백성을 통치하고 교화하는 중심적 존재로써 국왕이 존재하고 있고, 그 국왕을 보좌하는 조정의 신료 및 수하의 관료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 "조선"이라는 국가 또한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유교적 통치시스템이 그토록 강력할 수 있는 이유는, 개별가정에서의 "孝"가 가부장 아래의 가족의 매우 끈끈한 유대와 단결을 이끌어내었고, 그 "孝"의 원리가 보다 큰 개념으로써"忠"이 되어 국왕에 대한 백성의 유대와 단결을 이끌어내었으며, 그러한 백성의 경애와 충성의 대상으로써 왕과 사대부는 "仁"과 "禮" 로써 백성을 대접해야 하며, 이렇게 위로 올라가는 충과 효, 아래로 내려오는 인과 예는 곧 "義"를 통해 하나로 묶이니 그것이 곧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근본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리즈 시절의 조선에서는 양반 사대부와 국왕이 백성에 선정을 베푸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기며는 국왕이라도 개발살날 수 있는 막대한 의무"로 받아들여졌으니까요,
이러한 엄청나게 강력한 이념을 통해 조선은 굉장히 강력한 관료제 및 행정체계를 자랑하고 있었고, 이는 개전 초기에 불타는 개가죽마냥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일본에 장악된 지방에서 전령이 평양, 의주까지 올라와서 보고를 하고 장계를 올리며, 굵직한 패배가 연속되는데도 패잔병이 그대로 다시 모여 군대로써 되살아나고 (그리고 그 때 마다 경험치를 쌓아서 레벨업까지....;;;;), 한 때 중앙의 통제가 끊어진 것만 같았던 상황에서 의병과 관군이 자발적으로 행동을 개시함에도 불구하고 꽤 수준높은 역할분담 및 연계가 가능할 정도로 현장조직체계까지 움직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됩니다. 당장 칠천량에서 그런 패배를 당해서 조직 자체가 다 와해되었는데도 이순신을 구심점으로 명량에서의 기적을 연출한 이후에는 불과 몇 달 내로 해군이 재조직되었으니, 기본적으로 행정력과 조직력이 살아있는 한 읍이니 도니 성이니 몇 개 함락되고 왕이 거처를 옮긴 정도로는 싸울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는거죠.
그리고 그 의지를 뒷받침하는 당시 병사들의 근본이념은 곧 "忠" 이었습니다. 조선은 [국왕에 대한 직접적인 대상을 향한 "忠"]과, 하나의 개념인 [나라에 대한 백성의 "忠"]이 서로 괴리되지 않도록 단단히 봉합하여 통합시킬 수 있는 이념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 개인에 대한 충성과, 나라에 대한 충성이 괴리를 일으켜, 백성이 그 양자가 서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는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으로써 외적과는 결코 같은 하늘을 이지 않겠다"라는 식의 결연한 의지가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적어도,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전함이 남아 있습니다 ... 신이 살아있는 한 적은 결코 업수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레벨로 끝까지 저항함을 결의하는 충의는 당시 일본인들로써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애초에 일본의 "忠"의 개념은 그와는 전혀 달랐거든요.
전국시대의 "忠"은 지역을 제패한 개인, 인물에 대한 "忠"이며 매우 강렬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 불과했으니, "사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사적인 성격"의 봉건제 답게, 그 "忠" 또한 매우 사적인 조건에 따라 좌우됩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사적인 "忠"이라는 것은 온전히 "忠"이라기 보다, 개념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리 -- "의협심" -- 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그러한 의리 또한 그나마 그 인물 1대에 머물러있지, 그 사람 죽으면 충의건 의리건 뭐건 바로 다 와해되고 그 때 마다 권력싸움을 펼치던 환경을 보아온 (그리고, 그런 정치적 지변의 변화와 함께 섬기는 영주를 무수히 바꾸면서 생존해왔던) 장수들에게는 각 고을의 수령이며 지휘관이며 다 도망가고, 국왕도 도성에서 튀고, 전쟁의 향방은 명백히 조선에 불리해 보이는데 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위한 "忠"으로 의병이며 관군이며 그토록 저항을 하는건지, 아마 이해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일본에서 조선과 같은 "忠"의 개념은 에도막부가 들어선 이후 매우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서서히 진행되어 갔으니까요.
3. 생각
임진왜란의 싸움은, 어느 측면에서는 군사력의 충돌인 동시에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신념과 체제의 충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문약"한 조선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쌓아온 시스템의 "내공" 및 그걸 뒷받침하는 신념체계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지요.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침략군은 봉건체제 아래서 100년 넘도록 쌈박질하던 나라에서는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실로 가공할 침략이었지요. 반면, 임진왜란에서 조선은, "평화의 단 잠에 빠져있던 나라"라는 것이 (흔한 대중적 상상과는 달리)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 그 평화를 가능케한 체제와 시스템의 저력이 얼마나 막강한건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자의 장점은 즉물적이고 화려하여 알아보기 쉽습니다. 후자의 장점은 매우 내면적이고 치밀하여 쉽게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후자야말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게 아니다"라는 금언에 보다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백운청산 강력한 중앙권력 및 엄격한 학문적 수양을 통해 선발되는 사대부 관료층에 의해 사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아시아형 보통국가'화가 안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일본 햐쿠쇼들은 충성을 바칠 대상이 다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통치권력을 행사하는 "가까운 높은 분"에게 국가를 대표하는 "더 높은 분들"을 대신하여 충성을 바쳤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지금 거꾸로 얘기하는 거거덩요?! 애초에 같은 '일본인'이란 관념의 공유가 있기는 했으되 같은 국가의 백성으로써 강한 소속감을 갖지 못했던 일본인의 일본국에 대한 충이 더 관념적인 거지, 당장 나랏님과 그 관료들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받으면서 강한 소속감
@백운청산 을 공유하던 한중의 인민들이 관념적인 충을 들고 있었다니...
이건 뭐 역사담론도 아닙니다. 애초에 주자학 자체를 "관념적인 똥망학"이라고 답을 정해두고 썰을 푸니 헛소리만 나오는 거죠...나참... 그렇게 까대는 주자학이 대체 어떤 학문인지 기본적으로 궁구는 해보셨어요?! 주자학이 얼마나 오묘한 학문인데 주자학 나오기 10세기 전인 흉노가 나오고 당시로써는 '보통국가' 수준에도 못올라온 가마쿠라 일본이 나와요?! 주자학 이전과 이후, 송나라 이전과 이후는 아예 사회 자체가 다릅니다.
@★海東天子☆ 전 백운청산님과의 의견과는 별도로 질문을 드리고 싶은것이, 그렇다면 거란이나, 몽고침입시기의 고려에서 나타나는 호국불교의 움직임이나, 여몽연합군 침입시기에 일본에 나타나는 호국기도의 모습은 주자성리학 성립이후의 충과는 다르다는 의견이신가요? 물론 고려가 가마쿠라 막부와는 달리 관료주의적 체계를 갖추고, 유교를 받아들이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조선의 제민지배 수준에는 한참 못미쳤는데 처인성의 전투나 향소 부곡민들의 몽고군의 저항같은 사례들이 있었는데 이건 임란시기의 '의병'과는 다른 성격이다는 말씀이신지요? 저는 주자성리학 도입 이후 한반도 왕조의 제민지배가 더욱 체계적이고 구체화 되었다
@★海東天子☆ 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구체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 문화,체제에 대한 '정체성'을 지키는 '명분'으로 신국사상'및 불교를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자국내 세력을 동원을 한 형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것 또한 한국이나, 중국에서 말하는 '충' 과는 별개로 일본이란 독특한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충' 개념으로 볼수도 있지 않을까요. 결국 이러한 개념들을 '주자성리학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에도막부시기에 정체성 확립을 위한 도구로 더욱 '구체화' 되는 모습을 볼때 위의 사례들을 '국가에 대한' 충이란 형태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배달민족 호국불교는 '내가 사는 이 땅이 불국토, 우리 임금이 계시는 이 땅이 성지(聖地)'라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외적에 맞서는게 종교적인 성전이 되지요. 물론 고려조쯤 되면 저런 구체적인 개념은 많이 변질됩니다만, 유교적 질서인 忠과 동일 선상에 놓고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호국기도는 그네들 나름의 신토와 섞인거라 로컬라이징이 심하죠. 기본적으로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집단의 침입에서 우리를 보호하소서'니까요... '우리와 다른 그들'의 발견에서 오는 반동으로 '우리'를 돌아보는 형태라, '우리'의 정체성을 구체화된 이후에나 발생할 수 있는 忠의 개념과는 다르지 않나 싶네요.
@★海東天子☆ 천자님 저는 주자학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말한적이 없습니다.이점을 주지해주십시요.주자학으로 인해서 사상적 한계를 갖게 되어서 대국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안을 적절하게 판단하지 못하게는 요인으로 작용했던거이 아니였나 그런 취지에서 주자학을 얘기한것니다.대국적 판단까지라도 안되면 임기응변으로라도 상황에 유불리를 판단해야하는데 그마저도 안됐던 이유가 궁금해서 에둘러 적어본건데 천자님이 그렇데 느껴다면 제가 적절하게 글을 표현하지 못한거 같습니다.원래 송나라에 전시대까지 유교는 말그대로 현재 우리가 아는 유교일것이고 주자가 새롭게 해석한 유교는 전시대에 담겨있지 않았던 형이상학적인 부분까지 포함해서
@★海東天子☆ 모든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사유체계를 발전시킨것이 주자학을 일겁니다.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주자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신유교적인 관점이 필요했겠지만 후대에 내려와서 주자학에 사단논쟁이나 혹이 주리론이나 주기론적에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주자학안 사상적모순이 잉태가 되어있어습니다.그리고 그런 부분들이 조선에서도 그러한 약점을 알고 있었을 것(하지만 조선에서 주자학의 모순을 말하는 순간 역적으로 몰리고 멸문지화를 당하기에)이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주자학이외의 다른 관점을로 세상과 시류를 판단할 수가 없어서 사상적인 한계를 갖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표현한겁니다.
@★海東天子☆ 논쟁이 벌어진 부분은 천자님은 충이라 개념을 어느정도 중앙집권국가에서 발생하는 충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저는 물론 그런 충성심에 발로도 좋지만 주자학이 통치체제로 확립되지 못했던 국가나 민족들에게도 민족이 존재하고 영토와 위계질서를 갖게되면 유교적 충은 아니더라도 충이라는 관념은 있었을 것이라는 차이일뿐이지 그렇게 심각한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일본이 중앙집권하되지는 못했지만 유교도 불교도 거의 대부분에 한반도를 통해서 일본에 전래된것이기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은 못했지만 당시 상류층이나 지식인계층에서는 충분히 학문적인 부분도 충분히 포함된다고 저는 보는거지 일본이 중앙집권
@★海東天子☆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기때문 당시 조선과 일본에 사상적인 의미에서 주자학적인 충이라는 개념을 비교를 해본다면 그건 당연히 천자님 말이 맞는걸겁니다.
@백운청산 1. 대체 그 얼어죽을 "대국적 판단"이라는 것이 뭔지부터 설명 부탁드립니다. 한 국가의 정책이나 흥망이 그리 간단히 지도층의 '학문경향'으로 바뀌는 거이 아니거든요. 예컨대 조선의 개항이 늦어진 것은 애초에 지리적인 요건으로 서구열강과의 접촉성이 떨어진다는 요인이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든가 하는 식... 역사라는 것이 그린 간단하면 뭐하러 연구합니까?! 답은 이미 나왔는데...ㅋ 임기응변이요?! [대동법] 문제만 봐도 조선정부의 눈물나는 노력과 합리적 정책결정이 대체 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국가 시스템이 망조가 들어가는 상황에서 그 망할 대국적 판단이라는게 잘되는 나라가 어딥니까?! 즈치 마사노부를 크게 활용한
@백운청산 근대화의 나라 대일본제국?!...ㅎㅎㅎㅎㅎ
2. "송나라에 전시대까지 유교는 말그대로 현재 우리가 아는 유교일것"...??? 우리가 아는 유교는 대국적 판단에 능해 , 임기응변에 능해 근대화에 성공했던 대일본제국에 의해 변질된 [군대식 유교]죠...ㅋ
3. "조선에서 주자학의 모순을 말하는 순간 역적으로 몰리고 멸문지화를 당하기에"...??? 사문난적으로 몰려 일신이 망한 사람으로는 윤휴와 박세당 정도가 유일한데 누가 그렇게 손쉽게 멸문지화 당했는지 예 좀 들어주소...-_-; 윤휴의 경우는 경신환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거고, 박세당의 경우는 주자를 깠다기 보다는 송시열을 까서 당한 거고... 대체 누구요?! 마녀사냥 당해서
@백운청산 멸문지화 당한게... 요즘에는 '실학자'들 조차 그 뿌리가 주자학이라고 한계를 지적당하고 까이는 세상인데, 아직도 이런 썰이...-_-;
기본적인 팩트부터 틀리는데 주장의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음...ㄳ
@배달민족 성리학의 도입으로 강해지는 것이 [민족 정체성]입니다. 그러니까 '화이관계'을 대입하면서 자아정체성이 강해지는 것이죠. 물론 이전의 유교에도 그런 것이 존재하지만... 그런 측면에서 국가에 대한 충으로 일어난 의병은 여말 홍건란 때 일어난 수많은 의군의 존재도 살필 필요가 있을 겁니다...^^; 대몽항쟁기의 경우는 국가가 인민을 버린 상황에서 자구책인 경우가 많았고, 그런 투쟁에 정면으로 반하는 경우도 수두룩했었죠.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의 사례... 아예 한 도 크기의 동네가 투항...ㄷㄷ
개인적으로 성리학 도입 이후의 상황은 [전근대 민족주의]와 일정부분 관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배달민족 전근대 민족 성립 이전의 상황과 이후의 상황은 크게 달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한 국가 정체성이 확립되려면 일정 정도의 종족적-민족적 정체성의 존재가 확립될 필요가 있으니까요...ㅎㅎ;; 그래야 국가에 대해 충성을 해도 할거 아님메?!
@★海東天子☆ 오규 소라이가 논어징이라는 책에서 논어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합니다.그것을 백년 후에 다산 정약용선생이 보고서 뛰어난 책이라고 감탄을 합니다.무슨 말이냐 일본인들은 유교를 믿더라도 중앙집권화가 안된점이 크게 작용한 점도 있지만 주자학이 유일한 통치체제가 아니기에 까더라고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없는것이고 다산선생이 그렇게 뛰어나 학식과 폭넓은 지식이 다산선생에 논어주석집이 후대사람들한데 그렇게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이유인거죠.(다산 선생도 논어징이상에 주석집을 낼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했다면 살아남지 못했겠죠)그게 아니라면 다산선생의 학문도 꽉막힌 골방서생수준을 넘지
@★海東天子☆ 못했다는 말도 될거 같습니다.주자가 새롭게 유교를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가 그 당시 재배적인 사상이 불교였습니다.그래서 그 불교를 이기기위해 원래 유교에 없던 내세관이라던가 이런것을 참조를 해서 사람이 살고 죽는 모든것을 포괄할 수가 있는 학문으로 발전을 시킨것이 주자학입니다.우리가 흔히 선종의 위대한 스승들이 거의 당나라시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추론하실 수가 있을 겁니다.
@★海東天子☆ 그리고 실학운동 실학자들이 정말로 역사책에 가르치듯이 그렇게 주자학에 틀을 깨고 나름대로 실용적인 측면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저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서양에 문물를 받아드려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기술적인 이유이거나 또는 막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지 실제 실천적인 방법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거 같습니다.
@★海東天子☆ 유교경전들에 뿌리가 어디부터인가 찾아보면 하.은.주 삼대에 거의 우리가 아는 유교에 13경에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그것을 처음으로 명문화하고 일종에 규정으로 만든 사람이 공자님입니다.그리고 유교에서 말하는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이상화해서 받는 사람이 요.순입니다.
요.순이 전승이자 실존으로 생각해 볼때 잘 살펴보면 하.은.주 그리고 요.순 이렇게 꺼꾸로 추적을 해보면 영토가 작은것에서 큰것으로 서서히 넓어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그때부터 그들의 봉건제도 같이 존재한 것을 보면 그 뿌리가 무척 깊은 사상인거 불변에 진리겠죠.
@★海東天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로 대변되는 유교가 말하는 바는 사람과 사람과에 관계를 떼어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는것을 잘 아실겁니다.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나'라는 주체적이고 독립된 존재가 빠져있습니다.
문명이나 문화가 발전하지 않았을 때는 나라는 존재는 사실 의미가 별로 없을겁니다.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발전에 과정에 어느정도가 되면 필연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가장 큰 욕망에 주체가 된다는것은 필연일겁니다.
제가 가끔 공사구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나"와 유교적인 관점에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말하는 겁니다.
@★海東天子☆ 역사를 어떻게 볼거있냐는 개인에 취향과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역사의 발전과정을 자유와 평등으로의 지향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천자님이 볼때에 어떤 역사적인 사실만을 놓고 이야기 한다면 제가 역사에 일천하기에 천자님에 말처럼 제가 틀리는 부분들도 있을수가 있을 겁니다.그것은 제가 역사가 일천한 부분이 존재하니까 천자님도 그점은 이해를 하십시요.
@백운청산 나참... 아 그러니까, "목숨이 위태로웠던 사례"를 들고 오시라고요. 주자학이 뭔 주체사상도 아니고, 사문난적으로 마녀사냥하듯 잡아죽인 것도 아니라는데, 뭔 헛소리를 계속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_-; 박세당의 경우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귀양갔다가 돌아와 죽었고(물론 정치적 숙청), 그의 저술 또한 전하며 무려 나랏님으로부터 시호까지 추증받았는데요?! 말하자면, 뭔 "주자학이 유일한 통치체제가 아니기에 까더라고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 자체가 많지 않았다는 겁니다. [서학] 즉 천주학이면 몰라도요. 그리고 정약용선생의 저술은 물론이고 내노라하는 실학자들이나 이름깨나 난 학자들의 저술에 보면 꼭 나오는 것이 유교경전에
@백운청산 대한 내용수정이나 비판 및 신학설의 제시거든요?! 일본유학이 발전하는 것은 맞는데, 사실 국학- 즉 신도와 결합하여 ㅄ논리로 가는 경우도 꽤나 많아요. 말씀대로 그렇게 주자학 탈레반이 설쳤다면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다 죽어야 정상이라는 거...ㅋ 오오미 실용적이고 혁신적인 일본유학에 아주 지리것소...ㄷㄷ
또한 성리학의 성립은 불교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는 거... 한대 이래의 훈고학에 대한 발전시도가 계속 나타나다가 자리잡은게 성리학이거덩요. 한대 이래로 통치이념 자체가 계속 유학이었고, 수당대에는 아예 '과거제'가 시행되면서 유학의 관학화가 진행되는 마당에 불교에 유학이 그렇게 후달릴 입장도 아니었죠.
@백운청산 그리고 성리학에는 '내세관'이라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게 있다고 불교를 그렇게 까는 상황인데 그걸 참조했다니... 성리학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는데, "사람이 살고 죽는 모든것을 포괄할 수가 있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 및 자연의 존재원리와 인간이 성인의 길로 가는 수양법을 제시하는 것이 성리학입니다. 죽음 이후의 내세는 주요하게 다루지 않지요.
각설하고 실학이라는 것은 '실천방도'를 전제하기 때문에 실학인 겁니다. 그.러.나... 그 방법론 자체가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를 타파하지 못했던 점 및 그들의 주장이 주류정치세력에게 그닥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실제 실천적인 방법론이
@백운청산 거의 존재하자 않는다"는 뜬금포는 또 뭔가요?! 그런 식으로 보면 일본유학도 다 마찬가지에요. 애초에 실학에 영향을 미치는 양명학 같은 경우도 아예 성리학의 범주에 넣는 경우도 많습니다. 동아시아 세계 자체가 성리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이룩(혹은 이룩하려고)된 체제거든요. 일본의 경우가 그나마 조금 자유로운 거고...
또한 성리학 이전의 유교에서는 '주공'을 가장 위대한 인간상으로 보았으며, 요순 및 삼대의 시절은 그저 [유교적 유토피아]이지 그게 뭔 기준인 것은 아닙니다. 봉건제도 운운 도 그런 것이 그것의 영향을 받은 학문인 유학이 통치철학인 나라들이 진대 이후로 계속 군현제를 채택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겅미...ㅋ
@백운청산 결정적으로 성리학이라는 학문은 [위기지학], 즉 스스로를 위해서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궁구하고, 나아가 성인의 길에 이르는 수양을 중시하는 학문인데 뭔 얼어죽은 관계가 나오는 건지...나참...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나라는 존재고, 때문에 "무자기 구방심", 즉 스스로를 기만하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놓지말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건 뭐 역사담론이 아니라니까요?! 애시당초 [기본]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줏어들은 거에 자기 개똥철학까지 범벅으로 해놓고 추측으로 된 장문만 쎄우면 뭐합니까?!...ㅎㅎㅎㅎㅎ 이해하라고요?! 왜요?! 틀린 소리만 하는데...나참...
@★海東天子☆ 피곤하네요."중국 및 몽골제국은 신성적 전제정의 제국이다.거기서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가부장제적인 상태이다.한사람의 아버지가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양심에 따라서 행하는 일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중국에서 이런 가부장제적원리는 국가로까지 조직화되었다.중국에서는 한사람의 전제군주가 꼭대기에 앉아서 계층제의 많은 단계를 통해서 조직적인 구성을 가진 정부를 지도하고 있다.거기서는 종교관계나 가사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가의 법으로 정해져 있다. 개인은 도덕적으로 자기가 없는 것과도 같다."때문에 거기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고 국가 주체가 아직 자기의 권리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직접적인,
@★海東天子☆ 법률이 없는 윤리가 지배하고 있는 국가이며,그것은 역사의 유년시대이다.이런 형태는 두가지 측면으로 나뉘어진다.첫번째 측면은 가족관계 위에 구축되어 있는 국가,훈계와 예의범절의 가르침에 의해 전체를 질서지우고있는 국가이며, 거기서는 대립이나 이념성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이른바 산문적제국이다.동시에 그것은 지속의 제국이며,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이것이 바로 극동지역,특히 중국제국의 형태이다.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공간적인 지속에 대해서 시간이라는 형식이 대립한다.여러 국가들은 자기의 내부에서는, 즉 자기간이라는 형식이 대립한다.
@★海東天子☆ 여려 국가들은 자기의 내부에서는, 즉 자기의 원리에서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국가상호간의 관계에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쉴 새 없는 항쟁을 계속하며, 이런 항쟁은 여러 국가의 급속한 몰락을 준비하게 된다.,이런 몰락은 결코 진실한 몰락이 아니다.왜냐하면 이런 모든 쉴 새 없는 변화를 통해 아무런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몰락하는 것에 대신하여 등장한 새로운 것도 역시 몰락해가는 것으로 침전해버리고 만다. 그 동안 어떠한 진보도 보이지 않는다.이런 동요는 이른바 비역사적인 역사이다.헤겔<역사철학서론>중에서 이것으로 마지막 댓글을 답니다 피곤해서 댓글을 못달거 같습니다 꾸뻑~
@백운청산 ㅎㅎㅎㅎㅎ 이러니 줏어들었다는 얘길 안할 수 있나...ㅋ
헤겔 할아버지 얘기가 뭔 불변의 진리라도 되는줄 아는 모양인데, 이 양반이 언제적 사람인지 알기나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마륵스나 헤겔이 규정한 (동)아시아 지역의 이른바 [전제 군주정]은 가장 대표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며, 나아가 역사를 '단계적 발전론'으로 규정하는 과정에서 비유럽지역의 발전형태를 낮게 평하여 서구의 발전 및 식민지배를 필연적이고 정당한 방향으로 규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서구 우월주의]의 산물로써 아주 가루가 되게 까이는 가장 대표적인 주장이기도 하지요. 죄송하지만...ㅎㅎ;;
@백운청산 이 양반들의 주장은 "오직 유럽만이" 운명적이고 필연적으로 타지역을 압도하는 유일한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줏어듣고 인용하신 부분도 아아~주 그걸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역사를 연구 및 공부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비판적 사고]인데, 자기 개똥철학과 19세기 할아버지의 얘기를 토씨하나 안틀리게 끌어붙여놓고 피곤 운운하는 상대와는 별 할 얘기가 없는거 같네요.
아마 "주자학 때문에 조선 장애아됨"식에 많이 세뇌 당하신 분인듯 ㅡㅡ;;;
문제는 외부에서는 이게 지극히 일반적인 사고라는 겁니다.
그거 아니라고 하면 내가 헛소리한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