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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싸움하는 방식의 차이 = 결국, 체제와 신념체계의 차이 by kwessa
뉴에이지 추천 2 조회 1,949 14.02.06 18:46 댓글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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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2.10 20:54

    @백운청산 강력한 중앙권력 및 엄격한 학문적 수양을 통해 선발되는 사대부 관료층에 의해 사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아시아형 보통국가'화가 안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일본 햐쿠쇼들은 충성을 바칠 대상이 다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통치권력을 행사하는 "가까운 높은 분"에게 국가를 대표하는 "더 높은 분들"을 대신하여 충성을 바쳤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지금 거꾸로 얘기하는 거거덩요?! 애초에 같은 '일본인'이란 관념의 공유가 있기는 했으되 같은 국가의 백성으로써 강한 소속감을 갖지 못했던 일본인의 일본국에 대한 충이 더 관념적인 거지, 당장 나랏님과 그 관료들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받으면서 강한 소속감

  • 14.02.10 20:58

    @백운청산 을 공유하던 한중의 인민들이 관념적인 충을 들고 있었다니...

    이건 뭐 역사담론도 아닙니다. 애초에 주자학 자체를 "관념적인 똥망학"이라고 답을 정해두고 썰을 푸니 헛소리만 나오는 거죠...나참... 그렇게 까대는 주자학이 대체 어떤 학문인지 기본적으로 궁구는 해보셨어요?! 주자학이 얼마나 오묘한 학문인데 주자학 나오기 10세기 전인 흉노가 나오고 당시로써는 '보통국가' 수준에도 못올라온 가마쿠라 일본이 나와요?! 주자학 이전과 이후, 송나라 이전과 이후는 아예 사회 자체가 다릅니다.

  • 14.02.10 23:06

    @★海東天子☆ 전 백운청산님과의 의견과는 별도로 질문을 드리고 싶은것이, 그렇다면 거란이나, 몽고침입시기의 고려에서 나타나는 호국불교의 움직임이나, 여몽연합군 침입시기에 일본에 나타나는 호국기도의 모습은 주자성리학 성립이후의 충과는 다르다는 의견이신가요? 물론 고려가 가마쿠라 막부와는 달리 관료주의적 체계를 갖추고, 유교를 받아들이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조선의 제민지배 수준에는 한참 못미쳤는데 처인성의 전투나 향소 부곡민들의 몽고군의 저항같은 사례들이 있었는데 이건 임란시기의 '의병'과는 다른 성격이다는 말씀이신지요? 저는 주자성리학 도입 이후 한반도 왕조의 제민지배가 더욱 체계적이고 구체화 되었다

  • 14.02.10 23:37

    @★海東天子☆ 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구체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 문화,체제에 대한 '정체성'을 지키는 '명분'으로 신국사상'및 불교를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자국내 세력을 동원을 한 형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것 또한 한국이나, 중국에서 말하는 '충' 과는 별개로 일본이란 독특한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충' 개념으로 볼수도 있지 않을까요. 결국 이러한 개념들을 '주자성리학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에도막부시기에 정체성 확립을 위한 도구로 더욱 '구체화' 되는 모습을 볼때 위의 사례들을 '국가에 대한' 충이란 형태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 14.02.11 12:02

    @배달민족 호국불교는 '내가 사는 이 땅이 불국토, 우리 임금이 계시는 이 땅이 성지(聖地)'라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외적에 맞서는게 종교적인 성전이 되지요. 물론 고려조쯤 되면 저런 구체적인 개념은 많이 변질됩니다만, 유교적 질서인 忠과 동일 선상에 놓고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호국기도는 그네들 나름의 신토와 섞인거라 로컬라이징이 심하죠. 기본적으로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집단의 침입에서 우리를 보호하소서'니까요... '우리와 다른 그들'의 발견에서 오는 반동으로 '우리'를 돌아보는 형태라, '우리'의 정체성을 구체화된 이후에나 발생할 수 있는 忠의 개념과는 다르지 않나 싶네요.

  • 14.02.11 14:52

    @★海東天子☆ 천자님 저는 주자학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말한적이 없습니다.이점을 주지해주십시요.주자학으로 인해서 사상적 한계를 갖게 되어서 대국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안을 적절하게 판단하지 못하게는 요인으로 작용했던거이 아니였나 그런 취지에서 주자학을 얘기한것니다.대국적 판단까지라도 안되면 임기응변으로라도 상황에 유불리를 판단해야하는데 그마저도 안됐던 이유가 궁금해서 에둘러 적어본건데 천자님이 그렇데 느껴다면 제가 적절하게 글을 표현하지 못한거 같습니다.원래 송나라에 전시대까지 유교는 말그대로 현재 우리가 아는 유교일것이고 주자가 새롭게 해석한 유교는 전시대에 담겨있지 않았던 형이상학적인 부분까지 포함해서

  • 14.02.11 14:58

    @★海東天子☆ 모든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사유체계를 발전시킨것이 주자학을 일겁니다.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주자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신유교적인 관점이 필요했겠지만 후대에 내려와서 주자학에 사단논쟁이나 혹이 주리론이나 주기론적에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주자학안 사상적모순이 잉태가 되어있어습니다.그리고 그런 부분들이 조선에서도 그러한 약점을 알고 있었을 것(하지만 조선에서 주자학의 모순을 말하는 순간 역적으로 몰리고 멸문지화를 당하기에)이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주자학이외의 다른 관점을로 세상과 시류를 판단할 수가 없어서 사상적인 한계를 갖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표현한겁니다.

  • 14.02.11 15:06

    @★海東天子☆ 논쟁이 벌어진 부분은 천자님은 충이라 개념을 어느정도 중앙집권국가에서 발생하는 충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저는 물론 그런 충성심에 발로도 좋지만 주자학이 통치체제로 확립되지 못했던 국가나 민족들에게도 민족이 존재하고 영토와 위계질서를 갖게되면 유교적 충은 아니더라도 충이라는 관념은 있었을 것이라는 차이일뿐이지 그렇게 심각한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일본이 중앙집권하되지는 못했지만 유교도 불교도 거의 대부분에 한반도를 통해서 일본에 전래된것이기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은 못했지만 당시 상류층이나 지식인계층에서는 충분히 학문적인 부분도 충분히 포함된다고 저는 보는거지 일본이 중앙집권

  • 14.02.11 15:07

    @★海東天子☆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기때문 당시 조선과 일본에 사상적인 의미에서 주자학적인 충이라는 개념을 비교를 해본다면 그건 당연히 천자님 말이 맞는걸겁니다.

  • 14.02.12 02:55

    @백운청산 1. 대체 그 얼어죽을 "대국적 판단"이라는 것이 뭔지부터 설명 부탁드립니다. 한 국가의 정책이나 흥망이 그리 간단히 지도층의 '학문경향'으로 바뀌는 거이 아니거든요. 예컨대 조선의 개항이 늦어진 것은 애초에 지리적인 요건으로 서구열강과의 접촉성이 떨어진다는 요인이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든가 하는 식... 역사라는 것이 그린 간단하면 뭐하러 연구합니까?! 답은 이미 나왔는데...ㅋ 임기응변이요?! [대동법] 문제만 봐도 조선정부의 눈물나는 노력과 합리적 정책결정이 대체 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국가 시스템이 망조가 들어가는 상황에서 그 망할 대국적 판단이라는게 잘되는 나라가 어딥니까?! 즈치 마사노부를 크게 활용한

  • 14.02.12 03:01

    @백운청산 근대화의 나라 대일본제국?!...ㅎㅎㅎㅎㅎ

    2. "송나라에 전시대까지 유교는 말그대로 현재 우리가 아는 유교일것"...??? 우리가 아는 유교는 대국적 판단에 능해 , 임기응변에 능해 근대화에 성공했던 대일본제국에 의해 변질된 [군대식 유교]죠...ㅋ

    3. "조선에서 주자학의 모순을 말하는 순간 역적으로 몰리고 멸문지화를 당하기에"...??? 사문난적으로 몰려 일신이 망한 사람으로는 윤휴와 박세당 정도가 유일한데 누가 그렇게 손쉽게 멸문지화 당했는지 예 좀 들어주소...-_-; 윤휴의 경우는 경신환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거고, 박세당의 경우는 주자를 깠다기 보다는 송시열을 까서 당한 거고... 대체 누구요?! 마녀사냥 당해서

  • 14.02.12 03:03

    @백운청산 멸문지화 당한게... 요즘에는 '실학자'들 조차 그 뿌리가 주자학이라고 한계를 지적당하고 까이는 세상인데, 아직도 이런 썰이...-_-;

    기본적인 팩트부터 틀리는데 주장의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음...ㄳ

  • 14.02.12 03:09

    @배달민족 성리학의 도입으로 강해지는 것이 [민족 정체성]입니다. 그러니까 '화이관계'을 대입하면서 자아정체성이 강해지는 것이죠. 물론 이전의 유교에도 그런 것이 존재하지만... 그런 측면에서 국가에 대한 충으로 일어난 의병은 여말 홍건란 때 일어난 수많은 의군의 존재도 살필 필요가 있을 겁니다...^^; 대몽항쟁기의 경우는 국가가 인민을 버린 상황에서 자구책인 경우가 많았고, 그런 투쟁에 정면으로 반하는 경우도 수두룩했었죠.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의 사례... 아예 한 도 크기의 동네가 투항...ㄷㄷ

    개인적으로 성리학 도입 이후의 상황은 [전근대 민족주의]와 일정부분 관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 14.02.12 03:12

    @배달민족 전근대 민족 성립 이전의 상황과 이후의 상황은 크게 달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한 국가 정체성이 확립되려면 일정 정도의 종족적-민족적 정체성의 존재가 확립될 필요가 있으니까요...ㅎㅎ;; 그래야 국가에 대해 충성을 해도 할거 아님메?!

  • 14.02.12 10:48

    @★海東天子☆ 오규 소라이가 논어징이라는 책에서 논어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합니다.그것을 백년 후에 다산 정약용선생이 보고서 뛰어난 책이라고 감탄을 합니다.무슨 말이냐 일본인들은 유교를 믿더라도 중앙집권화가 안된점이 크게 작용한 점도 있지만 주자학이 유일한 통치체제가 아니기에 까더라고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없는것이고 다산선생이 그렇게 뛰어나 학식과 폭넓은 지식이 다산선생에 논어주석집이 후대사람들한데 그렇게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이유인거죠.(다산 선생도 논어징이상에 주석집을 낼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했다면 살아남지 못했겠죠)그게 아니라면 다산선생의 학문도 꽉막힌 골방서생수준을 넘지

  • 14.02.12 11:00

    @★海東天子☆ 못했다는 말도 될거 같습니다.주자가 새롭게 유교를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가 그 당시 재배적인 사상이 불교였습니다.그래서 그 불교를 이기기위해 원래 유교에 없던 내세관이라던가 이런것을 참조를 해서 사람이 살고 죽는 모든것을 포괄할 수가 있는 학문으로 발전을 시킨것이 주자학입니다.우리가 흔히 선종의 위대한 스승들이 거의 당나라시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추론하실 수가 있을 겁니다.

  • 14.02.12 10:52

    @★海東天子☆ 그리고 실학운동 실학자들이 정말로 역사책에 가르치듯이 그렇게 주자학에 틀을 깨고 나름대로 실용적인 측면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저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서양에 문물를 받아드려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기술적인 이유이거나 또는 막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지 실제 실천적인 방법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거 같습니다.

  • 14.02.12 11:07

    @★海東天子☆ 유교경전들에 뿌리가 어디부터인가 찾아보면 하.은.주 삼대에 거의 우리가 아는 유교에 13경에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그것을 처음으로 명문화하고 일종에 규정으로 만든 사람이 공자님입니다.그리고 유교에서 말하는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이상화해서 받는 사람이 요.순입니다.
    요.순이 전승이자 실존으로 생각해 볼때 잘 살펴보면 하.은.주 그리고 요.순 이렇게 꺼꾸로 추적을 해보면 영토가 작은것에서 큰것으로 서서히 넓어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그때부터 그들의 봉건제도 같이 존재한 것을 보면 그 뿌리가 무척 깊은 사상인거 불변에 진리겠죠.

  • 14.02.12 11:32

    @★海東天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로 대변되는 유교가 말하는 바는 사람과 사람과에 관계를 떼어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는것을 잘 아실겁니다.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나'라는 주체적이고 독립된 존재가 빠져있습니다.
    문명이나 문화가 발전하지 않았을 때는 나라는 존재는 사실 의미가 별로 없을겁니다.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발전에 과정에 어느정도가 되면 필연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가장 큰 욕망에 주체가 된다는것은 필연일겁니다.
    제가 가끔 공사구분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나"와 유교적인 관점에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말하는 겁니다.

  • 14.02.12 11:32

    @★海東天子☆ 역사를 어떻게 볼거있냐는 개인에 취향과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역사의 발전과정을 자유와 평등으로의 지향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천자님이 볼때에 어떤 역사적인 사실만을 놓고 이야기 한다면 제가 역사에 일천하기에 천자님에 말처럼 제가 틀리는 부분들도 있을수가 있을 겁니다.그것은 제가 역사가 일천한 부분이 존재하니까 천자님도 그점은 이해를 하십시요.

  • 14.02.12 19:09

    @백운청산 나참... 아 그러니까, "목숨이 위태로웠던 사례"를 들고 오시라고요. 주자학이 뭔 주체사상도 아니고, 사문난적으로 마녀사냥하듯 잡아죽인 것도 아니라는데, 뭔 헛소리를 계속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_-; 박세당의 경우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귀양갔다가 돌아와 죽었고(물론 정치적 숙청), 그의 저술 또한 전하며 무려 나랏님으로부터 시호까지 추증받았는데요?! 말하자면, 뭔 "주자학이 유일한 통치체제가 아니기에 까더라고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 자체가 많지 않았다는 겁니다. [서학] 즉 천주학이면 몰라도요. 그리고 정약용선생의 저술은 물론이고 내노라하는 실학자들이나 이름깨나 난 학자들의 저술에 보면 꼭 나오는 것이 유교경전에

  • 14.02.12 19:42

    @백운청산 대한 내용수정이나 비판 및 신학설의 제시거든요?! 일본유학이 발전하는 것은 맞는데, 사실 국학- 즉 신도와 결합하여 ㅄ논리로 가는 경우도 꽤나 많아요. 말씀대로 그렇게 주자학 탈레반이 설쳤다면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다 죽어야 정상이라는 거...ㅋ 오오미 실용적이고 혁신적인 일본유학에 아주 지리것소...ㄷㄷ
    또한 성리학의 성립은 불교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는 거... 한대 이래의 훈고학에 대한 발전시도가 계속 나타나다가 자리잡은게 성리학이거덩요. 한대 이래로 통치이념 자체가 계속 유학이었고, 수당대에는 아예 '과거제'가 시행되면서 유학의 관학화가 진행되는 마당에 불교에 유학이 그렇게 후달릴 입장도 아니었죠.

  • 14.02.12 19:42

    @백운청산 그리고 성리학에는 '내세관'이라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게 있다고 불교를 그렇게 까는 상황인데 그걸 참조했다니... 성리학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맞는데, "사람이 살고 죽는 모든것을 포괄할 수가 있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 및 자연의 존재원리와 인간이 성인의 길로 가는 수양법을 제시하는 것이 성리학입니다. 죽음 이후의 내세는 주요하게 다루지 않지요.
    각설하고 실학이라는 것은 '실천방도'를 전제하기 때문에 실학인 겁니다. 그.러.나... 그 방법론 자체가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를 타파하지 못했던 점 및 그들의 주장이 주류정치세력에게 그닥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실제 실천적인 방법론이

  • 14.02.12 19:48

    @백운청산 거의 존재하자 않는다"는 뜬금포는 또 뭔가요?! 그런 식으로 보면 일본유학도 다 마찬가지에요. 애초에 실학에 영향을 미치는 양명학 같은 경우도 아예 성리학의 범주에 넣는 경우도 많습니다. 동아시아 세계 자체가 성리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이룩(혹은 이룩하려고)된 체제거든요. 일본의 경우가 그나마 조금 자유로운 거고...
    또한 성리학 이전의 유교에서는 '주공'을 가장 위대한 인간상으로 보았으며, 요순 및 삼대의 시절은 그저 [유교적 유토피아]이지 그게 뭔 기준인 것은 아닙니다. 봉건제도 운운 도 그런 것이 그것의 영향을 받은 학문인 유학이 통치철학인 나라들이 진대 이후로 계속 군현제를 채택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겅미...ㅋ

  • 14.02.12 19:55

    @백운청산 결정적으로 성리학이라는 학문은 [위기지학], 즉 스스로를 위해서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궁구하고, 나아가 성인의 길에 이르는 수양을 중시하는 학문인데 뭔 얼어죽은 관계가 나오는 건지...나참...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나라는 존재고, 때문에 "무자기 구방심", 즉 스스로를 기만하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놓지말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건 뭐 역사담론이 아니라니까요?! 애시당초 [기본]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여기저기서 줏어들은 거에 자기 개똥철학까지 범벅으로 해놓고 추측으로 된 장문만 쎄우면 뭐합니까?!...ㅎㅎㅎㅎㅎ 이해하라고요?! 왜요?! 틀린 소리만 하는데...나참...

  • 14.02.12 21:11

    @★海東天子☆ 피곤하네요."중국 및 몽골제국은 신성적 전제정의 제국이다.거기서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가부장제적인 상태이다.한사람의 아버지가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양심에 따라서 행하는 일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중국에서 이런 가부장제적원리는 국가로까지 조직화되었다.중국에서는 한사람의 전제군주가 꼭대기에 앉아서 계층제의 많은 단계를 통해서 조직적인 구성을 가진 정부를 지도하고 있다.거기서는 종교관계나 가사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가의 법으로 정해져 있다. 개인은 도덕적으로 자기가 없는 것과도 같다."때문에 거기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고 국가 주체가 아직 자기의 권리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직접적인,

  • 14.02.12 21:21

    @★海東天子☆ 법률이 없는 윤리가 지배하고 있는 국가이며,그것은 역사의 유년시대이다.이런 형태는 두가지 측면으로 나뉘어진다.첫번째 측면은 가족관계 위에 구축되어 있는 국가,훈계와 예의범절의 가르침에 의해 전체를 질서지우고있는 국가이며, 거기서는 대립이나 이념성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이른바 산문적제국이다.동시에 그것은 지속의 제국이며,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이것이 바로 극동지역,특히 중국제국의 형태이다.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공간적인 지속에 대해서 시간이라는 형식이 대립한다.여러 국가들은 자기의 내부에서는, 즉 자기간이라는 형식이 대립한다.

  • 14.02.12 21:24

    @★海東天子☆ 여려 국가들은 자기의 내부에서는, 즉 자기의 원리에서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국가상호간의 관계에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쉴 새 없는 항쟁을 계속하며, 이런 항쟁은 여러 국가의 급속한 몰락을 준비하게 된다.,이런 몰락은 결코 진실한 몰락이 아니다.왜냐하면 이런 모든 쉴 새 없는 변화를 통해 아무런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몰락하는 것에 대신하여 등장한 새로운 것도 역시 몰락해가는 것으로 침전해버리고 만다. 그 동안 어떠한 진보도 보이지 않는다.이런 동요는 이른바 비역사적인 역사이다.헤겔<역사철학서론>중에서 이것으로 마지막 댓글을 답니다 피곤해서 댓글을 못달거 같습니다 꾸뻑~

  • 14.02.13 00:02

    @백운청산 ㅎㅎㅎㅎㅎ 이러니 줏어들었다는 얘길 안할 수 있나...ㅋ

    헤겔 할아버지 얘기가 뭔 불변의 진리라도 되는줄 아는 모양인데, 이 양반이 언제적 사람인지 알기나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마륵스나 헤겔이 규정한 (동)아시아 지역의 이른바 [전제 군주정]은 가장 대표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며, 나아가 역사를 '단계적 발전론'으로 규정하는 과정에서 비유럽지역의 발전형태를 낮게 평하여 서구의 발전 및 식민지배를 필연적이고 정당한 방향으로 규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서구 우월주의]의 산물로써 아주 가루가 되게 까이는 가장 대표적인 주장이기도 하지요. 죄송하지만...ㅎㅎ;;

  • 14.02.13 00:07

    @백운청산 이 양반들의 주장은 "오직 유럽만이" 운명적이고 필연적으로 타지역을 압도하는 유일한 발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줏어듣고 인용하신 부분도 아아~주 그걸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분입니다...^^;

    역사를 연구 및 공부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비판적 사고]인데, 자기 개똥철학과 19세기 할아버지의 얘기를 토씨하나 안틀리게 끌어붙여놓고 피곤 운운하는 상대와는 별 할 얘기가 없는거 같네요.

  • 14.02.11 20:26

    아마 "주자학 때문에 조선 장애아됨"식에 많이 세뇌 당하신 분인듯 ㅡㅡ;;;

  • 14.02.12 13:04

    문제는 외부에서는 이게 지극히 일반적인 사고라는 겁니다.
    그거 아니라고 하면 내가 헛소리한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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