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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장 1~9절/누가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가?
노아시대 대홍수 이전이나 이후에도 하나님의 자녀와 인간의 자녀, 다시 말하면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속적인 사람 사이의 구별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인간이 번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들에 대한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10장 8~9절에 함의 후손인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라가 시날 땅과 바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벨은 “하늘의 문, 신의 문” 이리고 불리었습니다. 노아로 부터 저주를 받은 함의 자손들은 땅에서 유력한 자들로 세워지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문, 신의 문을 세워 놓고 경배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사로잡고 있습니다. 셈과 야벳의 후손들도 번성하였고 여러 지역으로 나뉘었습니다. 노아의 자손들로 말미암아 “홍수 이후에 땅의 백성이 나뉘었다”(창10;32)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번성하고 많아지니까 그 중에 뛰어난 사람들이 무리들을 이끌게 되었고 땅의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거주하면서 각각의 성읍을 만들어 세우고 여러 부족과 무리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왔던 곳이 그들에게 이제 너무 협소하게 되었습니다. 각 부족이나 무리들은 자기들의 진로를 찾아 더 좋은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인접한 땅에서부터 시작하여 보다 멀리까지 나아갈 계획을 세우고, 그들의 수효가 늘어나게 되므로 거기에 필요한 만큼 서로 멀리 헤어져서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노아가 그 자손들에게 지시하고 자녀들의 합의한 일이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홍수 이후에 노아의 자녀들을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모든 문제들이 원만하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손들은 먼 곳으로 서로 분산해 사는 것이 싫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인간만이 아니지요. 짐승들도 대개 같은 종류의 짐승끼리 군식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떨어져 사는 것을 원치 아니하고 서로 한곳에 모여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집성촌을 이루고,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오랫동안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흩어져 살 때보다 함께 모여서 살 때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서로가 모여서 살 때가 더 즐겁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살 것을 궁리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나 노아보다도 훨씬 더 현명한 듯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18장 3절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하고 책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각 족속들이 자신들이 제비뽑아 분배받은 땅을 점령하러 가는 것보다 자신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좋아서 땅을 정복하고 가지 않는 것을 보고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면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수천 개의 언어가 있어서 서로의 의사가 통하지 않습니다. 인도 같은 나라는 한 나라 안에서도 서로 통하지 않는 방언이 수백 가지가 있어서 공문서는 영어를 쓰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어떤 다른 언어가 있었을지라도 홍수 이후에는 노아의 자녀들로 인하여 번성하였기 때문에 같은 언어로 사용되었고 서로 말하는 것의 의미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라는 의미는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의 의미 전달이 정확하게 되어 결속력을 가지는데 좋았으며, 서로의 의사가 전달되고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동안에는 서로의 문제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고 도와줄 수도 있었기에 헤어지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서 살아갈 수 있을 만한 넓은 곳을 찾았습니다.
2절 말씀에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했습니다. 대홍수 이후에 노아의 가족과 후손들은 동방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는데 이는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에서 바벨론은 정확히 남동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를 가리켜 동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시날 평지를 만났습니다. 이곳은 일찍이 함의 후손들이 나라를 세우고 거주하던 곳이었습니다.(창10;10) 사람들의 수효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자기들이 풍족하게 지내며 거할만한 곳을 찾아 헤매다가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한 넓은 시날 평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땅은 그들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의 넓고 비옥한 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자손들은 서로 하나로 뭉쳤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한 지체로서 평화로운 출발을 하여 자신들의 경계선을 확장해 나가는 대신에 오히려 힘 있고 능력 있게 보여 지는 함의 후손들에 의해 요새화 하려고 궁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욕망을 드러낸 사건이 바로 시날 평지에서 거류하면서 자신들이 결의한 사건이 바로 높은 탑을 쌓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켜낼 힘 있고 능력 있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결정한 것은 “성음과 탑을 쌓자.”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4장 17절에 보아도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홍수가 지난 새 세상에서 쌓은 성은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 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장막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한 자들이 최초로 성을 세웠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절에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서 흩어짐을 면하자 ”했습니다. 데모 군중이 함께 뭉치는 것처럼 저희들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담대히 했고 똘똘 뭉쳤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의 수가 많고, 서로 격려해 줄 때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큰일을 해 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거슬리는 일에 마음이 합해졌고 사람들이 힘을 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을 위해서 힘을 합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요즘 수해로 어려움을 당하고 태풍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자는 일에 힘을 쓰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신탄진 지역에 어려운 분들에게 쌀 한 포씩 사서 드리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이런 좋은 일, 남을 돕는 일에 우리의 힘을 모은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실 때 헤롯 왕의 궁중에 나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재벌 집 아들로 태어나신 것도 아닙니다. 어느 학자의 집에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가난한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조금 가정의 형편이 여유가 있었다면 호적을 하러 갈 때 임신하여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가는 요셉이 여관방을 미리 잡아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가정은 그럴 만한 재정적인 여유가 없어서 이리저리 이집 저집 찾아다니다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해 짐승들과 같이 짚을 깔고 밤을 지내다가 마굿간 구유위에 아기를 낳아 눕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사람을 우리가 만났는데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나다나엘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요즘 말로 “웃기지 말게. 나사렛같이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데서 무슨 선한 사람, 쓸 만한 사람이 날 수가 있느냐?”고 반박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가난한 가정에서 나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학교라는 데를 다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게 자라신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곧 나를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한정된 힘으로 어려운 사람 모두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을 모아서 최선을 다해 돕는다면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을 행하기 위해서 힘을 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합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2장 5절에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나와서 힘을 합해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축복의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 이후에 사람들이 번성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과 대등하게, 아니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위해서 힘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성읍과 탑을 건축하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재료로 건축했습니까? 그 지방 시날 평야는 평지였기 때문에 돌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저들은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돌 대신에 벽돌을 만들어 쓰기로 했습니다. 3절애 보시면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요즘 말로 하면 시멘트와 모래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도 이렇게 일에 열중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감동을 받아 선한 일을 열중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건축과 하나님의 건축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세울 때에는 벽돌과 역청이 최고의 재료이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에는 청옥으로 그 기초까지 쌓으며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미셨다고 했습니다.(이사야 54:11-12, 계시록 21:19) 그들의 건축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이가 말하기를 “또 다른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서 저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쌓았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저희는 하나님께서 “다시는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지 아니하고 자기들 자신이 세운 탑을 믿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들은 성읍과 탑을 세울 때 평지보다는 산 위에 탑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운 바벨탑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모독하기 위해서 탑을 세웠습니다.
4절에 “성음과 탑을 건설하여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탑을 세우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높이에 있어서라도 가능하면 하나님과 가깝게 되려 했었습니다. 이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지 창조주와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했고,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하늘에 기어 올라가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2. 바벨탑을 세움으로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 떨치고자 했습니다.
4절에 “우리 이름을 내고..,” 사람에게는 누구나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권세를 누리던 왕들이 죽기 전에 왕릉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소비했습니까? 요즘 중국에서 발굴한 진시황릉의 1/5정도만 보아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걸려 얼마나 많은 재정적인 낭비가 있었겠습니까? 바벨탑을 쌓은 사람도 그 후손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는 자기들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고 이 일을 꾸몄을 것입니다. 후대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죽기보다는 오히려 이 같은 교만과 야심과 우둔의 유적이라도 남기고 싶은 본능에서였을 것입니다.
3.바벨탑을 세움으로 흩어짐을 방지하고자 하였습니다.
4절에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 세상의 곳곳에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증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벨탑을 쌓는 목적은 흩어지지 말고 우리가 힘을 합하여 우리의 능력을 자랑하자는 것입니다. 요즘에 세상에서 힘을 규합하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집단이 많이 발생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국민을 볼모로 잡고 선동하는 일은 배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언어를 혼잡하게 함으로 바벨탑을 와해시켰습니다.
7절에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말씀합니다. 언어가 혼잡하게 되니 서로가 통하지 않게 되었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다시 자신들의 있어야 할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에서 바벨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그들은 흩으셨다(9절) 고 말씀합니다. 언어가 하나 되었을 때는 그들이 자신들의 힘을 통해서 “하나님의 문, 신의 문”을 만들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니 자신들의 일치된 마음이 사라지고 각자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함께 일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흩어져 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흩어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딸들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항상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생각이나 주장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세운 자들은 자기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 너무나 엄청나고 어리석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이루어 놓지 못했습니다. 바벨탑을 그렇게 굉장하게 세우려했는데 오늘 우리 가운데 그 바벨탑을 세우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Philo Judaeus 는 말하기를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이름을 영원한 기념으로 남게 하기 위해서 벽돌 위에 이름을 새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뜻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힘을 모아 하나님을 거역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보시고 웃으십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에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해서 흥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단일 제국으로 뭉치기 위해서 이 같은 성읍과 탑을 짓고 그것으로써 그들 왕국의 수도와 자기들의 통일성의 중심이 되게 하려 했습니다. 야심에 가득 찬 니므롯의 무리들이 이 가운데 함께 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는 어느 특정한 부락을 지배하는데 만족할 수가 없어서 세계적인 군주국을 목표로 삼고, 이 일을 위해서 그들이 함께 뭉치고, 모든 사람을 자기의 감시 하에 두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모든 사람을 자기의 휘하에 모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마저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거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9절에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흩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대답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대항하는 자는 화를 면치 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거만한 경쟁입니다. 세계적 군주국이 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5절 말씀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했습니다. 진행 중에 있는 그 계획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계셨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유감스럽게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것은 단순히 구경꾼으로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 위해서” 심판관으로, 왕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반드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로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그때라도 회개하고 돌아왔더라면 지나가는 자마다 저들을 보고 “세우기는 시작했으나 끝맺지 못하였도다.” 하는 조소는 듣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계획에 이것은 불후의 영예라고 스스로 약속하며 자기들의 손으로 이루려 했던 그 영광이 이제 영원한 치욕으로 변화되고 마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그 영광의 대적자들이 저들의 불경한 계획을 대규모로 경영하고 저들의 기업이 오래도록 번창하게 되는 것을 묵인하시는 중에도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두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많은 염려와 수고로써 그들의 건축을 어느 정도 진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방법을 꺾고, 무너뜨리고, 분산시키셨습니다.
6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사악한 세력이 합심하면 상상을 초월한 무서운 일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셨습니다. 사실은 죽어 마땅한 죄를 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죽이지 아니하시고 흩으시고 만 것입니다.
이제 8~9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인간의 뜻을 허사로 돌리고 좌절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었는지, 저들의 말이 실현되었는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마음을 합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보다 더 견고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히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번창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치밀한 계획도 다 부수어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대적해서 싸우겠다고 하는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의 방안과 계획을 헛되게 휴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우연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악한 사람들의 바벨탑 건설을 중단시킨 것입니다. 자신들의 계획을 갖고 높이 쌓으려 했던 성읍이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시지 아니하면 인간의 도모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위대한 이름을 목표로 삼는 자들이 흔히 ‘악명’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어리석게 살지 말고 지혜 있게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