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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선조와 정릉동 행궁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 돌아온 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처음 사용한 궁궐 ⓒ 고앵자
덕수궁 중화문(德壽宮 中和門) ⓒ 李永日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이 그렇듯이 모든 궁궐의 정문은 남쪽에, 그리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담은 ‘화(化)’자를 이름에 넣었다. 덕수궁의 정문인 ‘인화문(仁化文)’도 정전의 정문인 중화문 앞 남쪽에 있었다. 대한제국 출범 직후 환구단(圜丘壇)이 건설되고 궁궐의 동측이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되면서 원활한 기능 수행을 위해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大漢門, 본래이름 대안문)’을 정문으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德壽宮 中和殿 및 中和門)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덕수궁 중화전(德壽宮 中和殿) ⓒ 李永日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德壽宮 中和殿 및 中和門, 보물 제819호)은 덕수궁의 중심 건물 정전[法殿]으로서 왕의 즉위식(卽位式), 신하들의 하례(賀禮), 외국 사신의 접견을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中和門)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본격적인 궁궐 중건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1902년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정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905년 중건되면서 원래 2층이던 것이 1층이 되었다.
대한문(大漢門) ⓒ 李永日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덕수궁 대한문 앞 월대(月臺)가 100년 만에 2023년 복원 되었다.
대한문(大漢門)은 1904년 덕수궁이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고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 이었는데, 환구단(圜丘壇) 건립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1904년 4월 '크게 편안하다'는 뜻의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도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1.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의 거처
“새벽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오니 백관들과 인마(人馬) 등이 대궐 뜰을 가득 메웠다. 이날 온종일 비가 쏟아졌다. 상과 동궁은 말을 타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었는데 홍제원(洪濟院)에 이르러 비가 심해지자 숙의(淑儀)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궁인(宮人)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는 『선조실록』 1592년 4월 30일의 기록은 선조가 한양의 창덕궁을 떠나 피난길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한양을 거쳐 다음날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은 선조 일행은 이해 6월 13일 평양을 지나 의주로까지 피난하였다.
선조의 피난 생활은 1년 6개월 가량 지속되었고, 1593년 3월 권율 장군이 지휘한 행주산성 전투의 승리로 한양이 수복되자 이해 10월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조가 귀환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왕이 거처할 궁궐이 없었다. 전란의 와중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조선 전기 3곳 궁궐 모두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고 시어소(時御所)로 삼았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으로,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종 사후 왕위계승에서 동생인 잘산군(성종)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밀약 때문에 왕이 되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었다. 이곳은 ‘정릉동(貞陵洞) 행궁’이라고도 불렸는데,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원래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릉은 태종 때 현재의 서울 성북동 쪽으로 옮겨졌지만, 정릉의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지금도 덕수궁 일대를 ‘정동’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릉이 연원이 되었다. 1593년 10월 1일의 『선조실록』은 “상이 아침에 벽제역(碧蹄驛)을 출발하여 미륵원(彌勒院)에서 잠시 쉬었다가 저녁에 정릉동의 행궁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선조가 한양에 돌아온 직후 정릉동 행궁에서 머물렀음을 기록하고 있다. 같은 날 “상이 10월 4일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정릉동에 있는 고(故)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다.”고 하여, 이곳이 원래 월산대군의 집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돌아와 시어소로 사용했던 건물 즉조당, 인조가 즉위한 뒤부터 즉조당으로 부름 ⓒ 고앵자
덕수궁 준명당(德壽宮 浚眀堂) ⓒ 고앵자
덕수궁 준명당(德壽宮 浚眀堂)은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라는 뜻이다.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덕수궁 석어당(德壽宮 昔御堂 ⓒ 高櫻子
덕수궁 석어당(德壽宮 昔御堂)은 '임금이 머물렀던 집' 이라는 뜻이다.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한양에 돌아와 임시로 정치를 행하였던 곳이다.
2. 광해군, 인조와의 인연
1593년 10월부터 정릉동 행궁에서 머물던 선조는 1608년 2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의 1608년 2월 1일에는 “이날 미시(未時)에 상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정릉동 행궁의 정전(正殿)에서 훙(薨)하니, 나이 57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릉동 행궁의 정전은 현재의 석어당으로 추정된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광해군은 행궁의 서청(西廳:현재의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올렸고, 이후에도 계속 정릉동 행궁에 거처했다. 『광해군일기』의 즉위년(1608년) 4월까지의 기록에는 “왕이 정릉동 행궁 여차(廬次)에 있었다.”고 하여 광해군이 이곳에서 선왕의 상을 치루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1611년 10월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의 명칭을 ‘경운궁(慶運宮)’으로 고쳤다. 1611년(광해군 3) 10월 11일의 『광해군일기』에는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고쳤다. 흥경궁(興慶宮)으로 하려고 했는데, 정원에 전교하기를,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고 하였다. 드디어 고쳐서 경운궁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경운궁이라는 명칭을 처음 쓴 왕은 광해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경운궁에 거처하는 기간에 광해군은 전란 후 소실된 궁궐의 재건 작업에 힘을 기울였고,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건 사업을 완성했다. 그러나 1609년(광해군 1) 창덕궁이 중건된 후에도 광해군은 경운궁을 더 선호하여 이곳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다. 경운궁과 창덕궁에 번갈아 가며 거처하던 광해군이 신하들의 권유로 1613년(광해군 5) 다시 창덕궁으로 완전히 이어(移御)했다. 경운궁은 선조, 광해군과 인연을 가진 후에는 인조가 즉위식을 올리게 되는 역사도 만들어 갔다. 광해군과 계모 인목대비의 악연 때문이었다.
1613년 영창대군의 증살(蒸殺)을 계기로,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관계는 극히 악화되었고, 광해군은 1618년 인목대비를 경운궁으로 유폐하였다. 당시 경운궁이 서쪽에 있어서 서궁(西宮) 유폐라고도 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있던 창덕궁을 접수한 반정군은 곧바로 경운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반정의 명분으로 제시했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의 대상인 인목대비에게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기 위함이었다. 인조는 인목대비를 직접 찾아뵙고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는데, 별당인 즉조당(卽祚堂)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건물만을 남기고 경운궁을 떠났고,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인조 이후 경운궁은 왕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국왕이 직접 찾은 것도 1773년(영조 49)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週甲: 180년)을 맞아 배례를 행하고, 영조가 선조의 기일을 맞이하여 세손인 정조와 함께 즉조당에서 기념식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97년 고종이 이곳에 돌아오면서부터였다. 고종이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근대를 대표하는 궁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덕수궁 광명문(德壽宮 光明門, 사적 제124호) ⓒ 高櫻子
덕수궁 광명문(德壽宮 光明門, 사적 제124호)은 본래 함녕전(咸寧殿)의 정문이었으나 함녕전과 멀리 떨어진 석조전(石造殿) 맞은편 숲에 1938년 석조전 서관을 미술관으로 개관할 때 흥천사명 동종(興天寺銘 銅鍾, 보물 제1460호), 창경궁 자격루(昌慶宮 自擊漏, 국보 제229호), 신기전기 화차(神機箭機 火車) 등을 전시 하려고 이전하였다. 광명문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서 2018년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2019년 1월 함녕전의 정문으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다.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 보물 제820호) ⓒ 高櫻子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 보물 제820호)은 ‘모두가 평안하다’는 뜻을 가진 전각으로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생활공간(寢殿)이다. 광무 1년(1897)에 지었는데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에 화재로 불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6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에 황후의 침전이 따로 없는 것은 명성황후가 승하한 뒤, 고종이 다시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수궁 덕홍전(德壽宮 德弘殿) ⓒ 高櫻子
덕수궁 덕홍전(德壽宮 德弘殿)은 ‘덕이 넓고 크다’는 뜻을 지닌 전각으로 중화전(中和殿)의 동북쪽,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의 서쪽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이었는데, 뒤에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명성황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던 경효전이 위치했던 곳으로, 고종황제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덕수궁 정관헌(德壽宮 靜觀軒, 사적 제124호) ⓒ 高櫻子
덕수궁 정관헌(德壽宮 靜觀軒, 사적 제124호)은 함녕전 뒤편의 화계를 정원 삼아 위치한 1900년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음악을 감상하던 휴식처로 쓰였고, 외교사절단을 맞아 연회[宴遊處]를 여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한 회랑 건축물이다. 이름 그대로 덕수궁 일대를 ’조용히 내려다 보고(靜觀)’있는 셈이다.
덕수궁 석조전 ⓒ 李永日
덕수궁 석조전은 고종이 1910년에 세운 대한제국의 궁궐이었으나 완공된 그해 일제에 병합으로 가시밭길 운명이였다. 1933년에 일제는 미술관으로 내부를 회손하고 굴뚝을 없었으며, 광복 직후는 미소공동위원회와 유엔 한국위원단 사무실로,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인민군에 의해 내부가 불에 타기도 했다. 그 후 박물관으로 쓰여 왔었다.
✵ 대한제국 궁궐 덕수궁 석조전 104년만에 부활한 대한제국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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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명전(德壽宮 重眀殿, 사적 제124호)은 ‘광명(光明)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殿閣)’이라는 뜻으로, 덕수궁이 아직 경운궁(慶運宮)일 당시, 우리나라에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중 하나이다.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지하1층, 지상2층의 단순한 벽돌집이지만 1층의 아치형 창과 2층 서쪽에 베란다가 꾸며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래 이 자리는 경운궁 안 평성문(平成門) 밖이었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면서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다. 1906년에 황태자(純宗)와 윤비(尹妃)와의 가례(嘉禮)가 여기에서 거행되었으며,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이기도 하다.
▲ 덕수궁 중명전(德壽宮 重眀殿) 을사늑약(乙巳勒約)의 현장(Site of the Eulsaneukyak)/ 「경성회담 京城會談」, 「일로전쟁실기사진화보 日露戰爭實記寫眞畫報」, 박문관 博文館, 1905년 12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대한제국 고종「황제어새」(大韓帝國 高宗「皇帝御璽」, 보물 제1618-1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은 ‘을사년(乙巳年)스럽다’에서 나왔다. 1905년이 을사년이다. 그해 11월 17일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된 뒤 사람들은 날이 꾸무럭하여 스산하거나 쓸쓸할 때 ‘을시년스럽다’고들 말했다. 그날의 원통함을 잊지 않고자 날씨를 형용하는 말로 새겨 두웠던 것이다. 을사오적(乙巳五賊)과 달리 보통 한국인들이 얼마나 이를 뼈아프게 여겼는지 1백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실감 할 수 있다.
덕수궁 돈덕전(德壽宮 惇德殿)
덕수궁 돈덕전(德壽宮 惇德殿)은 석조전의 뒤에 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돈덕전도 그 중 하나이다. 러시아 제국의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돈덕(惇德)' 뜻은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이다. 《서경(書經)》의〈순전(舜典)〉에서 유래했다. 현판 글씨는 당나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모아서 만들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때문이었다. 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 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다. 바로 그 행사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콜레라의 창걸과 러일전쟁의 시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진 돈덕전은 1층은 폐현실, 2층에는 침실이 자리하였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활용하였다. 또한 순종의 즉위식과 고종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오찬 장소로 사용되었다.
돈덕전은 고종 승하 이후 방치되었다가 덕수궁의 권역이 점차 축소되고 공원화되기 시작하면서 1933년 이전에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100년 전 대한제국의 외교 무대를 꿈꾼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이 다시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9월 26일 오전 9시부터 돈덕전을 개관하였다.
붉은 벽돌과 푸른 빛의 창틀이 어우러진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대한제국과 만날 수 있다. 발굴 과정에서 나온 다양한 색과 무늬의 타일을 지나 걸으면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경축하는 모습 등을 담은 영상을 만날 수 있다. 1층에는 다양한 전시를 선보이거나 국제 행사를 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돈덕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상설 전시는 2층 '대한제국의 외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총 5개 부분으로 구성된 전시는 1876년 일본과 국제법적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 덴마크 등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과정을 소개하고 주요 사건을 짚는다.
또, 초대 주미 전권공사를 지낸 박정양(1841∼1905), 대한제국의 마지막 영국 주재 외교관 이한응 (1874∼1905)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외교관들의 삶과 활동도 조명한다. 2층에는 각종 도서와 영상자료를 갖춘 아카이브실(대한제국 자료실)도 자리한다. 당시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는 유물도 눈여겨볼 만하다. 초대 주미공사관 수행원이자 서화가였던 강진희(1851∼1919)가 그린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는 한국인 화가가 처음으로 미국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 부분과 4괘를 검은색 먹물로 덧칠해 항일 독립 의지와 애국심을 강렬하게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 보물 '서울 진관사 태극기'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강진희姜璡熙 그림, 종이에 수묵, 1888년, 19.5×24.2cm, 간송미술관.
일하향임도(日下向臨圖), 장음환張蔭桓 그림, 팽광예 글, 종이에 수묵, 19세기 말, 19.5x 24.2cm. 간송미술관.
✵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의 아픔이 서린 중명전(重眀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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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및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서울시청 홈페이지〉/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고봉산 정현욱 님
덕수궁을 수없이 드나들었으면서도 대충 러시아공관에서 나온 고종이 거처하고 집무를 보시든 곳으로만 알았지 선조가 피난후 귀경해 임시거처로 썼다는 내력이나 정문도 남쪽에 있든 인화문에서 위치가 동쪽으로 바뀌면서 대안문으로 바뀌고 다시 대한문으로 바뀐 내력 그리고 덕수궁의 중심역활을 한 중화문과 중화전의 역사성
궁의 정문 이름에는 반드시 가운데 될 '화'자가 들어갔다는 등 아는게 하나도 없었는데
오늘 제대로 공부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