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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31일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제1독서 : 집회 3,2-6.12-14 또는 창세 15,1-6; 21,1-3
제2독서 : 콜로 3,12-21 또는 히브 11,8.11-12.17-19
복 음 : 루카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가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는 기타입니다.
지금도 강의 중에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기타를 치면서 함께 성가를 부르곤 합니다.
이 기타는 모두 6개의 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기타 줄을 잘 맞춰야 합니다.
‘E(미)-A(라)-D(레)-G(솔)-B(시)-E(미)’의 순서대로
음을 맞춰야 연주할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만약 음 맞추는 것이 귀찮다고 또 음을 잘 모르겠다면서 아무렇게나 줄을 맞추면 어떨까요?
음이 잘 맞지 않는 기타, 또는 기타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의 기타에서는
좋은 소리가 날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불협화음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리만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타’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타를 잡고 기타 줄을 튕기고 있는 사람 탓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많이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미워해서 고통과 시련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왜 자기에만 나쁜 것을 주시느냐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않고, 나쁜 것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은 우리의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행동하지 않고 잘못된 생각만 하는 ‘나’의 잘못이 더 크지 않을까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이 자리에 시메온 예언자, 또 한나라는 예언자의 모습을 봅니다.
이 자리에 있던 모든 분은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성모님과 요셉 성인,
또 오랜 기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
모두 이 기다림의 끝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기다림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불평불만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을 향하고 있었고, 그래서 영적 일치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냅니다.
이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기다림 안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도 이 성가정에 함께할 수 있었음을
시메온과 한나 예언자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탓하느라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만을 바라보려는 사람은
하느님의 고유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사랑’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성가정을 이룹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는 '가정'이었습니다.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집회서(3,2-6,12-14)의 말씀과 화답송의 시편(128,1-5)의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경외는 온전한 부모 공경으로 이어지고,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콜로 3,12-21)은
세속적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정,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와 가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아들 예수님의 봉헌을 통한
율법에 충실한 마리아와 요셉 가정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가정을 '성가정'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주 특별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혈연이나 혈육으로 맺어진 가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곧 ‘영’으로 맺어진 가족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육신의 남편과 아내 되기를 스스로를 포기함으로
맺어진 부부인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아들과 아버지와 어머니로 혈육으로 묶여 있지 않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는 잃은 아들을 찾아 성전에 온 부모에게도,
소문을 듣고 말씀의 선포 현장으로 찾아온 어머니와 친척들에게도,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도, 십자가 아래서도 어머니의 아들이 아님을 선언합니다.
오히려 혈육을 떠나 ‘영적인 성가정’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세례를 받은 ‘신앙인의 가정’이라고 해서
모든 가정이 ‘성가정’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가족’을 이룰 때 모름지기 '성가정'이라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에 대한 애착은
때로는 오히려 ‘영적인 가족’을 이루는 데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가정들이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이익을 도모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자애심’과 ‘이기주의’의 또 다른 형태인
배타적인 ‘가족 이기주의’를 불러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가족’은 동시에 벗어나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특히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모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을 표징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말씀과 같이 성모님은 ‘성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 했으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 했고,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예수, 마리아, 요셉 사이에 그 어떤 다툼도 불평도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요?
성가정을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혹은 말썽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 지금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비록 어려움과 아픔,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 중에 있다고 해서
성가정이나 성수도가정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나 고통이 없는 것이 성가정인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이 '성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란 그것은 결코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거나 가난하지 않은 가정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가정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성가정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드러내 줍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루카 2,35)
이는 어머니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해 줍니다.
곧 부모가 아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가정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이 무엇이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덕분에 신문 홍보를 다닐 수 있었고, 매주 부르클린 미사도 다닐 수 있었고,
좋아하는 산보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성지순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과달루페,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한 번도 가기 힘든 성지순례를 6번이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좋은 사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팬데믹을 함께 했던 사제들이 있습니다.
ME와 꾸르실료의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매주 신문을 제작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부르클린 본당 공동체가 있습니다.
202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행복했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의 가정은 행복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지만 자칫하면 율법에 의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결혼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성사된 가정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했고
예수님은 구유에서 탄생했습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 아기들을 죽인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의 가정은 이집트로 피난 갔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그 시작부터 ‘난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한 잉태, 어렵게 성사된 혼인, 이집트로의 피난으로
예수님의 가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가정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입니다.
성전을 지키던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 아기는 세상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넘어트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 아기의 어머니의 가슴은 예리한 칼로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시메온의 예언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예수님이 12살이 되던 해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갔고,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마리아가 ‘얘야! 우리가 너를 찾았단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이 제가 있어야 할 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삶이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리아와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와 친척들을 만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어머니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이런 가정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가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건강하고, 행복하고, 부유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몹시 놀랐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처녀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그 일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하였다는 말을 들었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요셉은 꿈에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예수님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맞습니다. 교회가 오늘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 마리아, 요셉’ 모두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들 모두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기도하는 가정, 이웃을 돕는 가정,
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새해에도 주님의 사랑이 늘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인가?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그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고 은총으로 감싸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간직하시고, 나누며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우리 성당 주보는 성가정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 평화, 구원을 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면, 아버지 요셉은 목수 일을 충실히 하였고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 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의로운 아버지가 요셉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고,
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
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 라는
시메온의 당혹스런 예언의 말씀을 들었으나,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믿음으로 복되신 분입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19).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고,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습니다.
이렇게 나자렛 성가정에는 인간적 갈등과 고뇌도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고,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성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입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상대를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방식으로 좌지우지하려고 참견하면서 불화를 일으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있는 그대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자기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3,14).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성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입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 애썼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3-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3,13-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모질게 대하지 말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콜로3,18-21)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면, 말씀을 멀리하고
영성체를 소홀히 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삶은 공허해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영적 충만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가정이 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
한 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졌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축일
성탄 8부 내 주일을 성가정축일로 지내는 것은 의미가 깊다.
오늘 축일은 사실 성탄축일의 연장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도구 역할을 한 마리아와 요셉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전례에서 나자렛 가정을 모델로 제시하면서 ‘가정’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게 해준다.
우리는 나자렛 가정을 통해 자신들을 재발견할 수 있을 때, 올바른 가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나자렛 가정이 항상 모든 가정의 모델로 제시되는 것은,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변할 수 없는 사랑이 타오르게 하는 능력(에페 5,25-33 참조)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가정의 근본이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그 기능을 잃고 만다.
사랑은 가정을 하나로 만들고 그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교회가 된다.
제1 독서는 제4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공경을 드려야 할 때와 그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부모에 대한 공경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숭고한 인간성의 표현이며 신앙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부모 공경은 바로 자기의 죄를 벗는 길이며, 자기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보증이 된다.
그것은 가정이 주님께서 원하신 제도이며, 그분의 사랑 계획에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2,22-40: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졌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가정축제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은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생활, 즉 우리와 같은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는
일상의 가정생활을 거쳐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신비스러운 잉태와 그 때문에 은밀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의 마음(마태 1,18-25 참조)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자렛 가정은 가정이 근본적으로 사랑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바로 요셉의 행위는 사랑에 근거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느님께 봉헌으로 이해하는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행위’(22-24절)이다.
이 봉헌은 장차 십자가 위의 봉헌을 예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머니의 태중에서 피어나는 생명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그 생명을 사랑과 감사의 ‘봉헌’으로서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라고 하더라도 막 피어나려는 생명을 질식시켜 버린다면
그들은 살인죄뿐만 아니라 불경죄까지도 범하게 된다.
셋째는 마리아가 아들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이것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한다.
이것은 교육적인 가르침이 있다.
즉 가정을 이루는 사람 각자가 다른 가족들을 위해 살고
또한 그들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알며,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특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때 올바른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39-40절).
이제 성가정은 단순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다.
즉 모든 가정의 모범이 되기 위해 다른 가정들과 같은 평범한 가정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마 그 가정은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한 가정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부족하지 않았던 것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무한한 사랑을 가졌고,
하느님께서 그 “아기”에 대해 특별히 쏟으신 사랑이 있다.
그러기에 그 가정은 하느님과 대화할 줄 아는 가정이었고
하느님의 은총과 빛을 향해 모든 것을 개방한 가정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나자렛 가정을 향한 영적 여행을 하여야 한다.
거기서 ‘가정’의 본질을 사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자렛 가정이라고 해서 특별한 가정이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고 아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고통도 있었던 그런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무에 충실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른 사람이 하느님 안에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정을 우리도 본받아 닮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앞에 승화시켜
계속적으로 봉헌할 수 있는 삶으로 그 가정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가정을 이루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이러한 가정이 되도록 또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사도 바오로는 남편과 아내의 의무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의무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현해야 할 사랑의 기본적인 의무와 결부시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 존재의 본질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이기 때문이다(콜로 3,12-14 참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당시 가족들의 의무를 말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 안에 사는 사람”(콜로 3,18)이라 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사랑이다.
사랑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등 각 사람의 품위와 인격을 평등하게 인정케 한다.
그러면서 사랑으로 가족들 간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가족들의 책임을 말하고 있다(19-21절 참조).
그러면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가정 공동체에 제시하고 있다.
서로 공경하며 주님께 의탁하라.
염철호 사도 요한 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순명과 서로 간의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 성가정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가정의 모범입니다
이러한 성가정을 기념하는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성가정이 되기 위해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에 관해 잘 알려줍니다.
이점들에 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집회서에 따르면 성가정은 부모에 대한 공경이 넘치는 가정입니다.
사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성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은
당연히 아버지를 공경하고,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죄를 용서받고, 자기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장수할 것이고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행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니, 하느님께서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콜로새서도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임을 밝힙니다.
하지만 콜로새서는 부모도 자신에게 지켜야 할 도리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바로 자녀들을 들볶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들이 자녀들을 들볶는다면 그들의 기가 꺾이게 되어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가정에서는 예수님 같은 분이 탄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콜로새서는 이와 함께 부부간에 지켜야 할 도리도 설명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모질게 대해서는 안 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다소 남녀 차별적 권고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이 2000년 전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말씀은 남녀 차별을 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라는 가르침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콜로새서는 성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녀 사이뿐만 아니라,
부부간에도 서로 배려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가정은 한쪽 편의 희생만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한쪽 편의 의무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와 자녀, 부부, 형제간에 서로 지켜야 할 선을 잘 지키며
모든 구성원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올바른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항상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계명 하나까지도 지키고자 했던 이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예언자 시메온은 그들 가운데 태어난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뜻에 따라 탄생하신 이스라엘의 참딘 구원자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가장 철저히 순명한 우리 모두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시메온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실, 가정이라고 해서 세상의 고통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속량을 위해 아이의 목숨마저 내어 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성가정이 된다고 해서 세상의 행복을 누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가정은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자신들에게 닥친 고통마저도 하느님 뜻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성가정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 구성원이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의탁하는 삶을 사는 것 말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충만해졌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한 아이가 한 가정에 찾아오는 사건은
놀라운 사랑의 신비입니다.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는 신비이고
하늘에서 주어지는 선물이며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신앙인의 소명이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실입니다.
생명의 탄생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나를 향한 삶에서 누군가를 위한 삶으로 변화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먼저 누군가를 돌보고 보살피게 됩니다.
그런 자세는 인간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나약함을 뛰어넘는 사랑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또 생명을 받아들이고 기뻐한다는 것은
놀라운 신비이며 사랑의 충만함입니다.
그러나 기쁨만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를 얻었기에 자신의 즐거움과 삶을 내려놓아야 하고
책임감은 때때로 부담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메온과 한나처럼
모두가 기뻐하지만
그 부모가 감당해야 할 아픔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시의 빛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지만
예수님을 통해 마리아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빛이 강렬할수록 어둠이 더욱 짙어지듯
한 아이의 탄생은 신비이며 사랑이지만
그만큼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과 고난과 역경은
우리를 망설이게 만듭니다.
그럴 때에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바라봅시다.
하느님께 대한 큰 사랑으로 응답한 마리아
그런 마리아를 품으며 하느님 섭리에 동참한 요셉
그리고 세상에 찾아온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가정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사랑의 빛으로 어둠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했기에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빛이었고
사랑의 향기로 세상을 가득 채워나가는 성가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정도 성가정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는 일
하느님 앞에서 함께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배우는 일
이렇게 성가정을 닮아가면서
가장 작은 교회를 이루어나갈 수 있습니다.
겸손의 마리아
침묵의 요셉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닮아
오늘 우리의 가정에서 사랑의 빛을 밝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