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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일 월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제1독서 : 민수 6,22-27
제2독서 : 갈라 4,4-7
복 음 : 루카 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아주 오랜 시간 연구했던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1938년부터 시작되어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굳건히 진행하고 있는 ‘하버드 성인 발달 연구’입니다.
어렸을 때 겪은 문제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들 삶의 다양한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이 연구는 최초 참가자 724명에, 그들의 후손까지 1,3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해
3세대에 걸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진정 행복하고 좋은 삶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밝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현재까지도 완결되지 않은 연구이지만, 지난 85년 동안 사람들을 추적하면서
수천 개의 질문을 던지고 수백 가지를 측정해서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게 뭔지 알아냈습니다.
직업적인 성취가 정답일까요? 아니면 운동? 또는 건강한 식단은 어떠합니까?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광범위한 중요성을 증명한 한 가지 요소는 바로 ‘좋은 관계’였습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 안에서, 이웃과의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좋은 관계’야 말로
이 연구 조사 전체를 인생에 대한 단 하나의 원칙으로 요약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도 이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닐까요?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만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직적인 관계라 할 수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더욱더 ‘좋은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철저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예수님 잉태 소식도 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셨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요셉과 예수님과 함께 성가정을 이루십니다.
서로 불목하고 미워하는 관계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가정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목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 예수님을 찬미했지요.
천사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 곧 하느님과의 ‘좋은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관계’ 속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갑니다.
예전의 삶에 머물지 않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전의 삶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좋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삶.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또한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새해의 첫날, 오늘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건네줍니다.
왜냐하면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난 한 해의 종이를 덮어버리고,
앞에 놓인 나날의 새로운 백지 위에 무엇인가 새롭게 색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 곧 맏배, 첫 자녀, 첫 수확, 첫 봉헌 등
첫 번째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정신에 따라, 새해의 이 ‘첫 번째 날’을 통해, 1년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우리는 이 한 해의 ‘첫날’에 ‘천주의 모친 마리아’를 기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원, 곧 구원 생명의 시원을 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다름 아닌 구원자를 낳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당신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하느님을 낳아주시고, 하늘을 열어주셨습니다.
곧 복된 은총의 하늘 문을 여신 성모님을 통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니,
성모님께서는 세상에 빛을 건네주신 빛의 문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와가 잠갔던 낙원의 문을 다시 여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신 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당신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며 살아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이 신비의 그릇이요, 통로요, 그 ‘첫 번째’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뚫어 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듯,
오늘 제 안에서도 그분이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하느님을 낳는 날'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곧 하느님이신 말씀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을 구원한 신비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크신 자비, 당신이 하신 일을 간직하고 되새깁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되새기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한 해 동안 가슴 깊이 품고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이 ‘새해 첫날’에 천주의 모친 축일을 지내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상속자임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기쁘게 살아가라는 희망의 호소요, 외침이라 할 것입니다.
새해의 ‘첫 번째 날’, 오늘은 ‘평화의 날’입니다.
1967년 교종 바오로 6세께서는 '제1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평화가 인간 발전의 유일하고 참된 길”임을 제시하면서,
“야심적인 민족주의가 야기하는 긴장, 폭력을 통한 정복,
그릇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억압은 그러한 길이 아니다.”라고 지적하셨지만,
오늘날 21세기에도 여전히 비이성적 야만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바로 그렇습니다.
한편 나아가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0년 '평화의 날' 담화를 통해
“오늘날에는 자연에 대한 마땅한 존중의 결여, 자연자원의 피해,
점차 악화되는 생활의 질적 저하로 인하여
세계의 평화가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의식이 증대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인간들 사이에 실현되는 정의로만은 평화가 보장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창조물들도 모두 하느님을 찬미하는(시 148장, 다니 3,57-81) 주체인
목적적 존재로 대해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결국 생태정의가 실현될 때 인간의 평화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찬미 받으소서>에서
“자연을 우리 자신과 분리된 것이나 단순한 우리 삶의 틀로만 여기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합니다.”(139항)라고
혁명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사실 지구 온난화가 초래한 각종 환경 재난은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를 휠씬 뛰어넘는 정도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고통받았던 코로나 19 펜데믹 사태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창조물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사랑하는 ‘생태적 회심’이 촉구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그리스도 제자들이 맡은 사명의 핵심이며,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이 지구를 돌보고 부름을 받고”(2019년 '53차 평화의 날' 담화)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새해 첫 아침!
오늘 복음에서 목동들이 어둠을 가르고 첫 새벽을 달려와 구세주를 찬양하였듯이,
우리도 기쁨과 희망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기쁨과 희망으로,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을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주님!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그 자비가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 자비를 늘 맨 첫 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올해도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福)’이라는 한자의 어원을 생각해 봅니다.
하늘에 의해서 배가 부른 것을 상징합니다.
중국의 고대에는 장수를 누림(壽), 가멸함(富), 건강하고 마음 편안함(康寧),
심성의 후덕함(攸好德), 임종을 성취함(考終命)을 다섯 가지 복(五福)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치아가 좋은 것, 자손이 많은 것, 부부 해로하는 것,
손님을 대접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 명당에 묻히는 것을 다섯 가지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당 신부에게도 다섯 가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모두 사람과 관련된 복입니다.
보좌 신부님 잘 만나고, 본당 수녀님 잘 만나고, 사목회장 잘 만나고,
사무장 잘 만나고, 주방 자매님 잘 만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생활 5년째인 저도 5복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건강을 주셨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고민할 수 있는 동료 사제들을 주셨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신문사 직원을 주셨습니다. ME와 꾸르실료 봉사자들을 주셨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지난 5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24년에는 제가 받은 복을 기쁘게 나누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복을 나누면 더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반인이 생각하고 있는 이런 복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며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늘 깨어 지키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가장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면서 시작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깨어 있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만남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이 세상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은 이 세상은 물론 하늘나라에서 완성되는 복입니다.
그렇기에 때로 시련도, 박해도, 고난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복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한 이들을 복자(福者)로 공경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한 이들을 성인(聖人)으로 공경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복은 우리의 노력으로 더 커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재능,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물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받는 복은 우리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2024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상 끝 모든 곳이 그분을 경외하리라.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새해 첫날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셈을 하지 않고 줍니다.
새해 첫날에 복을 받기에 앞서 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복을 빌어 주는 가운데 주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가정, 이웃, 모두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이렇게 축복하고 빌어주면, 주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또한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그릇을 준비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옆에 분에게 인사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를 맞이하며 제야의 타종식과 해맞이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참석합니다.
그런데 누가 복을 줍니까? 그 해가 복을 줍니까?
해를 만드신 분,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복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형제애를 나누고자
미사참례를 하시는 여러분은 이미 복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가족과 이웃이 함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복을 전달하는 소중한 연장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될 것이다”(신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새기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하는 자체가 복입니다. 은총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행복합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 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예기치 않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새기고,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올 한해는 주님 안에서 복을 짓고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이 순간이 얼마나 큰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천상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오복(五福)을 보면,
1.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2.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3.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4.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5.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오복은 무엇일까요?
1. 건강한 몸을 가지는 것 2. 서로 아끼면서 지내는 배우자를 얻는 것.
3. 자식에게 손을 안 벌려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가지는 것. 4. 적당한 일거리를 갖는 것.
5, 나를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가지는 것을 신오복(新五福)으로 여긴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세에 국한된 것입니다. 천상의 복과 연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세 안에서 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으로 누리는 복은 천상을 차지하는 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1,3).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복, 하느님 나라, 영원생명, 완전한 구원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더 큰 사랑으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올해는 ‘더 큰 사랑을 담아’라고 정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아야 하고, 그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워 더 큰 복을 받으려니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더 큰 사랑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지금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새해 첫날이며, 성 바오로 6세께서는 1968년부터 이날을 세계 평화의날로 제정하셨다.
마리아께서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낳아주시면서
새해의 모든 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복음은 목자들이 천사가 그들에게 알려준(루카 2,11) 구세주를 찾아가는 장면이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목자들의 관심은 오직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있다.
그들이 찾고 있던 것도 아기였고, 그들이 본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도 그 아기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아기에 대해 말하면서 그 옆에 있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19절) 간직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목자들이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기쁨이 퍼져나가도록 하지만,
마리아는 그 일에 담겨있는 보다 깊은 의미와 주님의 가르침들을 파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리아의 모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아들의 신비에 언제나 보다 철저히 참여하고자 하는 사랑에 불타는 모성이다.
그 모성은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까지 동화하는 그런 모성이다.
이런 내용이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다.”(21절).
할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 계약의 징표였다(창세 17,11).
남자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예수께는 구원업적인 수난의 전표이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십자가의 죽음에 처할 운명을 타고난 아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이 때문에 마리아의 모성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더욱 풍요롭다.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의 피로써 생겨난 자기의 자녀들(요한 19,26)로 받아들인다.
마리아는 항상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역할에 종속되어 있는 모습을 우리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과 율법을 대립시키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갈라티아서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주신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극하여 악의 힘에 억눌렸던 우리를 속량하시어(참조: 갈라 4,5),
당신 자신의 신적인 자녀 관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5).
이 자녀는 법적인 권리를 얻는 것보다도
우리의 존재 자체를 다시 나게 하는 내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6)로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7).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기 위해 마리아가 필요하셨다는 것이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고.”(갈라 4,4-5).
때가 찼을 때, 즉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되려는 때,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율법의 속박을 없애기 위해 율법의 지배하에 태어나신 것처럼
마리아에게서 살과 피를 취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 여자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없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갖는 우리의,
하느님의 자녀 관계도 어느 정도 마리아의 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리아의 구세사 안에서의 역할을 볼 때,
마리아가 어떻게 평화의 주인(이사 9,5)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해의 평화에 대한 표징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평화는 바로 자녀들-형제들의 관계를 생기게 하는 모성이라는 표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녀-형제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용서하고, 섬길 수 있게 된다.
결국 평화는 우리의 어머니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선물이며,
그 모성을 통하여 생명의 신성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공격은 모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따라서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태중에 잉태된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안 되는 일이다.
또한 젊은이들을 그릇된 길로 몰아가는 사회적 폭력의 원인이란,
바로 폭력을 쓰는 젊은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모성적 사랑의 결핍에 있는 것이다.
즉 그 사랑의 결핍으로 모든 것을 헛되이 여기고 누구에게나 반항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평화의 상징이며, 마리아의 모성을 펼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평화의 창출자이시다.
이 평화는 나약함이나 겁 많고 비겁한 이들의 무감각과 혼동되는 것은 아니다.
마리아는 마리아의 찬가에서,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51-52).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민수기의 대사제가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이유를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제 이 축복이 마리아의 미소와 함께, 그리고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한 해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새해를 봉헌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의 자비가 교차하는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또다시 새해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또다시 우리 모두에게 새해 아침을 선물로 열어주셨습니다.
그분의 넘치는 은총과 자비에 크게 감사하면서 기쁘게 이 한 해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오늘은 눈물겹도록 은혜로운 날입니다.
우리 안에서 낡은 것과 새것이 교대하는 날,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의 자비가 교차하는 날,
빛나는 얼굴의 내가 죄에 물든 나와 작별하는 날,
분노와 질투의 화신이었던 내가 사랑과 자비의 사도로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날,
우리 가톨릭교회는 한 해 동안 본받고 살아갈 모델 한 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천주의 성모!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입니다.
그분은 나약한 인간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무한한 성장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거하신 분이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분,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가장 큰 영예를 얻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비결은 바로 지극히 겸손한 순명이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별것도 아닌 인간 존재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첨단과학이 점점 발전하면서, 인간은 큰 착각에 빠집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의 자리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니 인간 측의 가장 큰 문제는 겸손의 결핍이군요.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자신감이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의 겸손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성모님은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모신 분이십니다.
과분하게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으신 분입니다.
장차 구세주의 어머니로 살아가며 누리게 될
세속적 영예나 특권에 대한 일말(一抹)의 기대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란 타이틀이
성모님의 신앙 여정에 마이너스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작은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셨기에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오직 메시아를 담아내기 위한 질그릇 같은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았던 성모님의 겸손, 여기에 그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 성모님,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예수님 뒤에서 조용히 서 계시던 성모님,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성모님,
늘 예수님 그늘에 서 계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이토록 겸손하셨던 성모님이었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인류의 어머니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겸손의 덕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덕행이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으뜸가는 덕행입니다.
참된 겸손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하루하루 살아감을 고백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을 떠나있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나는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축복과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함에서 시작합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실 것을 빕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 시작하는 정월 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플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뜻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미와는 다르게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참다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를 자리매김하는 데에 필요했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결의하여 선포한 표현을 가져와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우리가 알아들으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평화의 날을 1967년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루카 2, 14)를 의미합니다.
성탄 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려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 루카복음서가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기에 이웃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카 복음서(7,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심과 허영에 사로잡히고, 이웃에게 무자비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제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사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운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며,
세월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따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운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이승화 시몬 신부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평화인지는 서로 다릅니다.
지향점이 미묘하게 다르니
오히려 서로 갈등과 분쟁이 벌어지고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이 평화를 깨뜨리게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평화라는 말을 거부하고 혐오하게 됩니다.
이는 종교인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니
성모님은 신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적인 어머니이지만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면서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 때문에 성모님을 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쪽과
예수님께서 인간이며 하느님이심을 중심으로 하기에 문제가 없다는 쪽과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만 바라보는 이들과
이를 통해 정치와 권력을 추구하던 이들 때문에
신학적 논쟁은 오랜 시간 길어졌습니다.
결국 누구는 이단으로 단죄되고
누구는 싸움 끝에 죽음을 당하면서
상처뿐인 승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를 추구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평화를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오해와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하느님께 대해 알아가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하고
알게 된 것을 체험하기 위한 기도 생활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를 바라보며
평화를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은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서로의 갈등을 넘어 연대하기 위해서
함께 이야기 나누며 참된 진리를 향하는 날이며
동시에 우리가 탁상공론을 벗어나 현실을 바라보는 날입니다.
각자의 불편함을 감내하며 참된 진리로 나아갈 때
비로소 평화가 이루어짐을 기억하며
동정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청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이 예레미아 수녀
루카 복음의 독자는 희랍, 로마 문명에 속한 이방인들이다.
이 시대는 여러 가지 세속적인 문제 즉 빈부 차이, 권력과 억압 등에 당면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가난한 상태였다.
그래서 복음 안에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복음사가는 매일 당면하고 있는 이 힘든 문제들을
구세사의 전체 흐름 속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존재를 설명하면서 해결해 보려고 한다.
복음사가는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가져오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서 첫머리에 등장한다.
루카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복음이다.
소외당하고, 억압당하는 가난한 이들까지도 포함한 구원의 복음서이다.
천사는 언제나 중요한 소식을 가져온다.
구약에서 천사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지만,
신약에서는 천사가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메시지를 갖고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나타난다.
복음서가 쓰여 질 그 시대의 목자들은
거짓말쟁이, 강도, 죄인들이었지만, 복음의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목자들은 천사들로부터 구세주 탄생의 소식을 듣고 직접 가서 확인하고
모든 이에게 기쁨을 주는 복음을 선포하고 전파하는 메신저가 되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구세주 탄생을 알리는
복음선포 과정과 선포된 말씀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게 된다.
복음은 들음에서 시작한다.
천사의 말을 들은 목자들은 천사가 알려 준 일을 보러 간다.
목자들은 보고 들은 말을 알린다.
들은 이들은 모두 그들에게 전해진 말에 놀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신앙인의 자세는 선포된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고, 받아들인 것을 삶으로 연결시킨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인들의 모델이시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성모님처럼 매 순간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되새기면서 말씀 안에서 기쁨을 찾는 신앙인이 되도록 새해 첫날 다짐해 보자.
[출처] 툿찡 베네딕도 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