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 장 10일의 삶
그녀는 미친 듯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왕세열의 몸 위로 덮쳐갔다.
“으윽!”
짤막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더니 채숙아가 비틀거리며 왕세열의 옆의 엎어졌다.
그녀의 등 뒤에는 한 자루의 유엽검이 하얀 손잡이만 밖으로 드러낸 채 깊숙이
박혀있었다. 그녀가 미처 막아내지 못한 나머지 두 자루의 유엽검은 의식을 잃고
축늘어져 있는 왕세열의 등에 깊이 꽂혔다.
채숙아는 자신의 몸을 방패삼아 왕세열의 위기를 해소시켜 주려했지만 결국
그녀의희생은 보람 없는 것이 되고만 셈이었다.
마라검마는 갑작스런 변고에 일시 넋을 잃어버린 듯 멍청히 서 있었다.
채숙아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왕세열을 안아 들고
눈에서예리한 흉광을 폭사시켰다.
“아버님, 우리 모자에게 계속해서 독수를 쓰지 않고 왜 그렇게 멍청히
서있나요?”
마라검마는 안색이 잇달아 몇 번 변했으나 여전히 장승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때 별안간 허공을 찢을 뜻한 날카로운 부르짖음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세
줄기인영이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용각봉 위로 날아올라왔다. 그들은
바로황의미부와 난쟁이 노인, 꼽추 노인 등 3 인이었다.
황의 미부는 장중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안색이 일변하며 다급히
마라검마에게물었다.
“보주, 혹시 어디 다치신 데는 없는지요?”
마라검마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채숙아가 침중한 어조로 다시 날카롭게 외쳤다.
“아버님, 더 이상 우리에게 독수를 쓰지 않겠다면 우리는 이만 떠나겠어요.”
마라검마는 여전히 아무 대꾸도 없이 멍청히 서 있었다.
채숙아는 그가 더 이상 독수를 쓸 기미를 보이지 않자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곧장발길을 옮겨 떠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몇 발짝 벗어나지도 못했을 때 돌연 눈앞에서 황영이
번쩍이며황의 미부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채숙아는 핏발이 가득 맺힌 무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며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외쳤다.
“당신은 어쩌자는 건가요?”
황의 미부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태연히 말했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녀의 말이 막 끝나는 찰나 석상처럼 멍청히 서 있던 마라검마가 별안간
침중한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들을 놓아주시오.”
이 말이 떨어지자 채숙아는 물론 황의 미부도 역시 뜻밖이란 듯
어안이벙벙해졌다.
황의 미부는 만면에 짙은 미혹의 빛을 떠올렸지만 감히 명령을 거역할
수없었는지라 옆으로 몇 걸음 이동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채숙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라검마를 힐끗 쳐다본 후 재빨리 몸을
솟구치더니황의 미부의 옆을 스치며 질풍처럼 떠나갔다.
마라검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지었다.
황의 미부가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마라검마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 그들을 좋아주셨습니까?”
마라검마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들은 이미 나의 유엽검에 부상을 입었으니 세 시간 안에 반드시
독기가전신으로 번지게 되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설령 천하에서 첫손을
꼽는명의(名醫)라 해도 절대 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없소.”
그의 말이 막 끝나는 찰나 별안간 황의 노인이 긴장에 가득한 표정으로
쏜살처럼용각봉 위로 날아 올라왔다.
마라검마는 그자의 안색을 통해 직감적으로 어떤 변고가 발생했음을
간파하고침중하게 물었다.
“전 당주(全堂主), 무슨 일이 발생했소?”
전 당주는 마라검마의 앞으로 다가선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황과 긴장의
빛을감추지 못했다.
“큰일났습니다.”
마라검마는 얼굴에 한 가닥 오기를 떠올리며 호통을 쳤다.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이야기해 보시오.”
“지옥……지옥마화가…….”
“지옥마화가 어쨌다는 것이오?”
“그녀가 지금 본 보에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무슨 용건으로 왔소?”
전 당주는 공포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가볍게 몸서리를 치며 떨리는
음성으로대답했다.
“만약 왕세열을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본 보를 피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고했습니다.”
마라검마는 안색이 일변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소?”
“입구에 있습니다.”
마라검마는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가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여청주(呂淸珠)는 들으시오.”
황의 미부는 재빨리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예!”
“지금 곧 신호를 발출하여 본 보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제지하지
말도록하시오.”
“예,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
한편 중상을 입고 용각봉에서 벗어난 채숙아는 혼수상태에 빠진 왕세열을
안아들고걸음을 재촉하며 쏜살같이 계곡의 바깥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도 않고 왕세열을 구하기 위해 이토록 발버둥을
치고있는 것은 바로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잠시 후 채숙아는 도중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무사히 계곡 입구에 이르자
내심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자 일순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무릅쓰고 무리를 하여 질주해온 바람에 유혈이
너무심했으므로 몇 번 비틀거리더니 끝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가벼운 신음을
토해내며쓰러졌다.
바로 이때였다.
계곡 바깥쪽에서 별안간 한 줄기 인영이 번쩍이며 유성처럼 그들 모자의
곁으로사뿐히 날아들었다. 그 인영은 지옥마화였다.
지옥마화는 선혈로 얼룩진 왕세열과 채숙아의 등 뒤에 유엽검이 깊이 꽂혀있는
것을발견하고 대경실색했다.
그녀는 재빨리 두 사람의 혈도를 봉쇄 시켜 유혈을 방지한 후 그들을
옆구리에끼어들고 물 찬 제비와 같은 신법을 전개하여 계곡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지옥마화는 단숨에 수 리 밖으로 벗어난 후 한적한 곳을 찾아 그들 모자를
살며시바닥에 눕혔다.
이 무렵 왕세열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러
있었지만그는 철금을 여전히 손아귀에 꼭 움켜쥐어져 있었다.
지옥마화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왕세열을 내려다보며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왕 소협, 내가 한 발 늦게 온 것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었군요.”
처량한 어조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그녀의 두 눈에는 어느새 뜨거운
이슬이가득 맺혀 있었다.
그녀는 지난 번 왕세열과 헤어질 때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취해 왔었지만
사실그녀의 가슴에는 왕세열에 대한 연모의 정이 깊이 싹터 있었다.
지금 왕세열이 극독이 묻은 유엽검에 부상을 입어 그녀와 영원한 사별의
순간을맞이하게 되자 그녀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지옥마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잠시 그를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품속에서 알약 한 개를 꺼냈다.
그녀는 굳게 다물어진 왕세열의 입을 벌려서 알약을 안으로 쑤셔 넣은 후
내공을돋구어 그의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전신의 혈맥을 주물러 주었다.
잠시 후 왕세열은 몸을 꿈틀거리며 서서히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의식을 회복하자 유엽검에 격중된 등 뒤의 상처에서 갑자기 심한
통증이엄습하여 가벼운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그의 정신은 아직 몽롱한 상태였고 시야는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사물을
자세히살펴 볼 수 없었다.
왕세열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한 줄기 희미한 인영이 시야에 비쳐지자 흠칫
놀라며입술을 꿈틀거렸지만 말할 기력조차도 엇는 듯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지옥마화는 그런 광경을 보자 눈시울을 붉히며 목 메인 음성으로 울부짖었다.
“왕 소협……”
그녀는 왕세열의 품 안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왕세열은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모기 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힘겹게 물었다.
“당신, 당신은 누구요?”
“나는 지옥마화예요.”
왕세열은 그 말을 듣자 얼굴에 경악에 빛이 가득 어리며 희미했던 시야가
갑자기밝아졌다.
그는 지옥마화의 눈물로 얼룩진 모습을 자세히 보게 되자 얼굴에 한 가닥
감격의빛이 스쳐가며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귓가로 흘러내렸다.
그가 숨을 거두기전 지옥마화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비관적인 그의 생명에 한
가닥위안을 안겨다 준 것이다.
그는 처량하게 웃으며 가냘픈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 나를 찾아와 주어서 감사하오.”
“제가 한 발 늦었어요.”
왕세열은 애정이 무한한 힘으로 인하여 등에 입은 상처의 통증을 완전히
망각해버린 듯 몽롱했던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그는 가볍게 한 숨을 내쉬며
차분하게물었다.
“낭자가 나를 구해 주었소?”
“아녜요.”
왕세열은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를 구해준 사람이 누구요?”
지옥마화는 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옆에 쓰러져 있는 채숙아를 가리켰다.
“바로 이 여자가 소협을 구출해 가지고 나왔어요.”
왕세열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는 순간 안색이 대변하며 온
몸을부르르 떨었다.
“이 여자가 나를…… 그럴 리가……”
지옥마화는 정색을 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소협을 구해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그녀도 역시 유엽검에
부상을입었어요.”
왕세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격동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이 여자가 어찌 나를 구해줄 리가 있단 말인가?”
지옥마화는 왕세열의 이상한 거동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여자는 누구죠?”
왕세열은 이 순간까지도 그녀가 과연 자신의 생모인지의 여부를 확실히
단정지을수가 없었으므로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나는…… 나는 모르오. 낭자, 어서 이 여자로 하여금 정신을 회복하도록
해주시오.”
지옥마화는 재빨리 다시 알약 한 개를 꺼내어 채숙아의 입 속에다 집어넣은
후내공을 돋구어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숙아는 유엽검에 격중된 후 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무릅쓰고
왕세열을안아든 채 미친 듯이 질주하는 바람에 유혈이 너무 심했으므로 이미
죽음의 문턱에이르게 되어 좀처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지옥마화는 채숙아의 체내로 진기를 주입시켜 한 차례 치료를 해보았지만
그녀는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여자는 이미 가망이 없어진 것 같군요.”
왕세열은 갈망어린 표정으로 지옥마화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해다.
“포기해서는 안 되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로 하여금 정신을
회복하게만들어야하오. 잠시라도 좋소.”
지옥마화는 그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었으므로 다시 공력을 돋구어 서서히
채숙아의체내로 주입시켰다.
초조와 긴장 속에 약 한 시진 정도가 지나자 채숙아는 천천히 정신을
되찾았다.그녀는 눈을 번적 떴다가 다시 사르르 감으며 목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세열아…… 세열아……”
왕세열은 그녀가 정신을 회복하기가 무섭게 자신의 이름을 뇌까리고 있는 것을
보자눈시울을 붉히며 소리 없이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쏟고 있는 채숙아의 진실을 알게 되자 이때야
비로소그녀가 자신의 생모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 순간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과오를 시인했다.
그가 지난 번 소혜문의 일방적인 주장만 믿고 북호봉에서 생모에게 손찌검을
했던일이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가 된 것이다.
그가 비통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채숙아가 가냘픈
음성으로다시 중얼거렸다.
“세열아…… 내 아들 세열아……”
왕세열은 온 몸을 부르르 떨더니 끝내 격동된 마음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크게울부짖었다.
“어머니……”
그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애타게 그를 부르는 모친의 품 안으로 덮쳐들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옥마화는 그런 광경을 보자 코끝이 시큰해지며
자기도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채숙아의 등 뒤에 밝혀있던 유엽검은 왕세열이 몸으로 짓누르는 바람에 완전히
살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녀는 가볍게 신음소리를 토해내더니 곧 이어 가늘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왕세열의얼굴을 더듬었다. 이것은 바로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한순간이나마
사랑하는아들의 얼굴윤곽을 가슴 깊이 새겨 두려는 모정(母情)이리라.
왕세열의 눈에서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은 뺨을 타고 채숙아의 손을 적시며
얼굴로흘러 떨어졌다.
채숙아는 모기소리와 같은 가냘픈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얘야, 너는 울고 있느냐?”
“어머니……”
왕세열은 하고 싶은 말이 가슴 가득히 쌓여 있었지만 일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채숙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물었다.
“너…… 너는 이제…… 내가 네 어미란 것을…… 믿어 주겠지?”
왕세열은 비통한 표정으로 울부짖었다.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난 번 제가…… 제가
어머님께손찌검을 한 것은 천추의 한을 남기게 하는 막대한 불효를 범한
겁니다.”
채숙아는 그 말을 듣자 한 가닥 위안을 얻은 듯 창백한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떠올랐다.
“얘야, 이 어미는 너를 용서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결코 너의
잘못은아니다.”
“어머니, 그래도……”
“더 이상 여러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어미는 너를 위해…… 죽게 될 것을……
매우만족하게 생각한다.”
“어머니……”
왕세열은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며 목이 매어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그들 모자의 애달픈 사별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던 지옥마화도 역시 슬픈
분위기에감염되어 얼굴을 가리고 가볍게 흐느껴 울었다.
채숙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어미는…… 너와 사별을 해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 같구나.”
“아닙니다. 어머니, 힘을 내십시오. 어머니는 반드시 사셔야 합니다.”
채숙아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가망이 없어. 나는 너의 품 안에서 눈을 감게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여한도 없다. 다만 너에게 어미 구실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던 점이
유감스러울따름이다.”
“어머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머니는 저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깊은사랑을 심어 주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나는 너를 낳기만 했을
뿐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주지도 못했는데 어찌 떳떳한 어미라 할 수
있겠느냐?하지만…… 나는 한시도 너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문청, 이 어미를
이해해주겠느냐?”
“어머니, 저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럼…… 나는…… 편히…… 눈……을……감을 수 ……”
가냘픈 그녀의 음성은 점차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아졌다. 이것은
죽음의사자가 이미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녀의 일생은 실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녀는 부친의 강요에 못 이겨 첫사랑이었던 팽북문과 눈물의 결별을 하고
왕세열과강제 결혼을 한 시련을 겪어야했다. 하지만 불행의 그림자는 그것으로
끝나지는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멍들어 있던 첫사랑의 상처가 점차 가시며 단란한 결혼생활에
새로운삶의 낙을 얻게 되었을 무렵 그녀의 가정을 파탄시킨 참극이 발생했다.
남편이 하루아침에 피살되고 아들까지 납치당한 비극은 그녀의 가슴에다
또다시깊은 상처를 남겨 주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녀가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던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두 명의
모친이자식을 쟁탈하는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쳐 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임종을 맞이한 순간 아들에게 자신이 바로 생모임을 인정받게
되자그동안 겪은 모든 시련과 괴로움이 일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왕세열은 의식이 점차 혼미해지는 채숙아의 몸을 흔들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어머니, 힘을 내십시오. 반드시 사셔야 합니다.”
채숙아는 무겁게 내리까는 눈까풀을 가까스로 치켜뜨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어미는 가망이 없다. 만약…… 네가 죽지 않고 목숨을 …… 건지게
된다면……네 아버지를 위해…… 꼭…… 복수를……”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떨구며 숨을 거두었다.
왕세열은 조용히 잠든 채숙아의 시체를 미친 듯이 흔들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그는 슬픔이 극도에 달한 나머지 선혈을 내뿜으며 채숙아의 시체 위에 엎어진
채다시 의식을 잃어버렸다.
지옥마화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재빨리 공력을 돋구어 그의
체내로다시 주입시켰다.
잠시 후 왕세열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넋 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지옥마화를바라보며 물었다.
“나의…… 나의 어머님은 어떻게 되었소?”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렇지,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지…… 어머니는 돌아 가셨어.”
지옥마화는 그가 처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이
들며눈시울을 붉혔다.
“왕 소협, 당신이 아무리 슬퍼한들 이미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법이에요. 그러니 이제 그만 슬픔을 가라앉히세요.”
“그렇소. 인간의 생명은 허무한 것이오. 내 생명의 종말도 가까워졌으니
나도머지않아 어머니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오.”
“아녜요. 소협은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
왕세열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오. 나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지금 내 가슴은
불덩어리처럼타오르고 있고 의식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소.”
지옥마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부짖었다.
“아녜요. 당신은 절대…… 절대 죽지 않아요.”
그녀는 강직한 어조로 이렇게 부르짖었지만 죽음의 사자가 한 발짝씩 왕세열을
향해접근해오고 있다는 현실은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었다.
왕세열은 자신의 생사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잔잔한 호수처럼
사뭇차분한 모습이었다.
“내가 죽게 된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저승에 가면 얼굴도
모르는아버님과 조금 전에 별세하신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어 단란한 생활을
누릴 수있을 게 아닌가.”
지옥마화는 그가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가슴이갈기갈기 찢어져 나가는 듯 했다.
“그만…… 그런 말은 그만 하세요.”
왕세열은 처량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이승에서 가슴 뿌듯한 애정을 얻었는데 죽게 된다 한들 무슨
여한이있겠는가?”
그는 비록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지만 끝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여 두
줄기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옥마화는 이슬이 가득 맺힌 시선으로 그를 잠시 묵묵히 응시하다가
울먹이는음성으로 말했다.
“왕 소협, 용기를 내세요. 당신은 절대로……”
그녀는 여기까지 말한 후 슬픔이 복받쳐 올라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왕세열의가슴에다 머리를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왕세열은 차분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처량한 나의 인생에…… 짧을 한 순간이나마 낭자의…… 애정으로
나에게……환락을 안겨나 준 점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되자
목이메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그를 부등켜안은 채 아쉬움과 슬픔의
눈물만을하염없이 흘렸다.
지옥마화는 왕세열의 호흡이 첨차 가냘프게 변하여 눈꺼풀마저 감겨져 있는
것을발견하고 안색이 대변하여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왕 소협, 왕 소협, 정신을 차려요……”
왕세열은 몸이 축 늘어진 채 말할 기력조차 잃어버린 듯 입술만 꿈틀거릴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지옥마화는 그를 죽음의 사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힘껏 부등켜안은
채대성통곡을 했다.
잠시 후 지옥마화는 갑자기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을
발견하고울음을 뚝 그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는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좌측으로 7, 8 장 가량 떨어진 숲 속에서 한 줄기 회색 인영이
유령처럼솟아나오더니 서서히 그들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 인영은 바로 지난번 왕세열과 만난 적이 있는 약간
창백한안색에 우수의 빛이 가시지 않았던 회의소녀였다.
회의소녀는 여전히 우수의 빛이 은은히 어린 표정으로 지옥마화를 힐끗 쳐다 본
후담담하게 물었다.
“이 사람은 당신의 애인인가요?”
지옥마화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그녀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내쉬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소녀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차분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이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찌 이토록 슬피 울고 있는 건가요?”
지옥마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하지만 곧 숨을 거두게 될 거예요.”
회의소녀는 정기가 번뜩이는 시선으로 왕세열을 한 차례 묵묵히 훑어보고 난
다음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연 절망적인지 아닌지 제가 이 사람의 상처를 한 번 살펴보고
싶은데괜찮겠나요?”
지옥마화는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괜찮고말고요. 수고스럽지만 낭자가 자세한 관찰해 주세요.”
회의소녀는 백옥과 같은 손을 내밀어 왕세열의 맥박을 잠시 짚어본 후
안색이갑자기 침중하게 변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옥마화는 초조한 빛을
감추지못하며 다급히 물었다.
“목숨을 건질 가망이 전혀 없나요?”
회의소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려울 것 같군요.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은 있어요.”
지옥마화는 그 말을 듣자 눈에서 형형한 전광을 발산하며 다그쳐 물었다.
“그게 어떤 방법이지요?”
“이 사람의 목숨을 구하려면 사망전이 있어야 가능해요.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사람을 살릴 수 없을 거예요.”
“뭐라고요? 사망전이라고요?”
지옥마화는 놀람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후 일순 넋 빠진
사람처럼멍청하게 변했다.
회의소녀가 제시한 그 방법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옥마화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청히 회의소녀를 바라보며 거의 자신의
귀를의심할 정도였다.
사망전은 기사화생의 특효를 지닌 영약도 아닌데 왕세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회의소녀는 그녀의 얼굴에 미혹의 빛이 가득 어려 있는 것을 보자 정색을
하고침중하게 말했다.
“제 말은 사실이에요. 사망전 외에는 아무도 이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없을거예요.”
지옥마화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는 낭자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당신은 사망전의 사망마희가 남긴 물건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나요?”
“알고 있어요. 한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사망마희는 무림의 일대 기녀로서 그녀의 무공은 화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어요.사망전에는 그녀가 갇혀있는 장소가 적혀 있어요.”
지옥마화는 이때야 비로소 상대방의 말뜻을 깨닫고 얼굴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을떠올렸다. 그러나 곧이어 다른 한 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쳐가자
금시만면에 짙은 그늘이 어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렁 사망전을 얻게 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예요. 왕 소협은 앞으로
한시진도 목숨을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요.”
회의소녀는 고개를 서서히 저으며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목숨을 열흘 동안 연장 시킬 수 있는데 그 기간 안에는 유엽검에
묻은독기가 체내에서 번지게 되는 것을 방지시킬 수 있으므로 정상적인
사람처럼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만약 함부로 진기를 소모하게
되면생명이 이틀이 나 혹은 닷새가량 단축될 거예요.”
지옥마화는 그 말을 듣자 절망의 그늘로 덮여있던 얼굴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떠올랐다.
만약 왕세열의 생명을 열흘 동안 연장시킬 수 있다면 그 기간 안에 어쩌면
사망전을구할 수 있을는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지옥마화는 격동어린 표정으로 다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어서 왕 소협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세요.”
회의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번뜩이며 왕세열의 전신에 있는 몇
곳의요혈(要穴)을 찌른 후 가루약 한 첩을 꺼내 그의 입 속에다 털어 넣었다.
곧이어그녀가 체내의 진기를 돋구어 조심스럽게 왕세열에게 주입시키자
백지장처럼창백했던 안색이 서서히 혈색을 되찾았다.
회의소녀는 우수가 은은히 어린시선으로 아무 말도 없이 왕세열을
한참동안주시하다가 다시 가루약 한 첩을 꺼내 그의 입에다 쏟아 넣은 후
지옥마화를 향해담담하게 말했다.
“이 사람의 내상은 이미 완쾌되었지만 체내에 있는 독기는 당분간만 억눌려져
있을뿐이에요. 열흘의 기한이 지나면 곧 전신에 독기가 번져서 죽음을 당하게
될거예요.”
“낭자의 말씀을 명심하겠어요.”
“만약 당신이 이 사람의 목숨을 살리려 한다면 열흘 안에 반드시
사망전을입수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당금무림에서는 아무도 이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요.”
지옥마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반드시 사망전을 찾아내고야 말겠어요.”
회의소녀는 왕세열을 힐끗 쳐다본 후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거듭 당부하겠는데 이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 그 기간 안에는 다른 사람과
싸움을벌이지 못하도록 제지시켜야 돼요. 그렇지 않고 함부로 진기를 소모하면
생명이단축될 거예요.”
지옥마화는 이상한 광채가 번뜩이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낭자는 어째서 이 사람을 도와주는 거지요?”
회의소녀는 씁쓸히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나도 역시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구한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심리에서 도와준 것일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낭자의 얼굴에는 항시 우수의 빛이 가시지 않고 있었군요.”
“당신에게도 슬픈 과거가 있겠지요? 다만 당신은 나와는 달리 슬픈
감정을가슴속에 억누르고 웃음으로서 어려 있는 슬픈 빛을 감추고 있는 것
뿐이에요.”
지옥마화는 안색이 일변하며 얼굴에 한 가닥 경악의 빛을 떠올렸다.
“그럼 낭자는 내가 어떤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다는 건가요?”
“예, 알고 있어요.”
지옥마화의 두 눈에 금시 뜨거운 이슬이 맺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는 억지웃음으로 슬픔을 잠시나마 잊어 왔었던 거예요.”
“이 사람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의 뜨거운 애정으로서
위안이되어주길 빌어마지 않겠어요.”
지옥마화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어요.”
회의소녀가 깊은 잠에 빠져있는 왕세열을 내려다본 후 차분하게
작별인사를고했다.
“그럼 두 분의 앞날에 행복이 깃들기를 바라며 저는 이만 물러가겠어요.”
회의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사뿐히 걸음을 옮기며 삽시간에 숲
속으로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지 얼마 안됐을 때 왕세열이 의식을 되찾고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먼저 사방을 둘러본 다음 얼굴에 미혹의 빛을 가득 떠올리며
지옥마화를멍청히 바라보았다.
“내가……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지옥마화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은 살아있는 거예요.”
왕세열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참동안 넋 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앉아 있다가 다시 지옥마화에게
시선을돌렸다.
“누가 나를 구해주었소?”
지옥마화는 난데없이 나타난 회의소녀가 그를 구해준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준후 끝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지금 쯤 이미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왕세열의 입가에 한 가닥 처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나를 구해주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옥마화의 얼굴에 한 가닥 괴로움의 그늘이 어렸다.
“하지만…… 하지만 소협은 오직 열흘밖에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왕세열은 온 몸을 부르르 떨며 경악이 충만된 시선으로 지옥마화를 바라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지옥마화는 비통한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내상은 비록 완쾌되었지만 유엽검에 묻어있던 독기는 아직 당신의
체내에잠복해 있어요. 열흘이 지나면 억눌려져 있던 독기가 전신으로 번지게
될거예요.”
왕세열은 그 말을 듣자 일순 절망의 구렁텅이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결국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오?”
“아녜요. 그렇지는 않아요. 당신의 생명이 열흘간 연장된 바람에 한 가닥
희망을얻게 되었어요.”
“그게 어떤 희망이오?”
“사망진을 찾게되면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가 있어요.”
왕세열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사망전을 가지고 어떻게 나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오?”
지옥마화는 숙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당금 무림에서 당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사망마회밖에
없는데그녀가 갇혀있는 곳이 사망전에 적혀 있어요.”
왕세열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사망전을 찾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요.”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 생긴 셈이 아닌가요?”
“그렇소. 희망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오. 절망보다는 한
가닥희망이라도 얻게 된 것이 한결 났소.”
지옥마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왕 소협, 낙심하지 마세요. 저는 반드시 당신을 위해 사망전을
찾아내고야말겠어요.”
왕세열은 씁쓸히 웃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의 은혜에 나는 어떻게 보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듣기 거북한 그런 말은 하지마세요.”
욍문청은 잠시 그녀를 묵묵히 응시하다가 차분하게 물었다.
“낭자의 이름을 이제 알려줄 수 있겠소?”
“나는 진봉봉(陣鳳鳳)이라 해요.”
“진 낭자, 나는……”
그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우연히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싸늘하게 굳은
채숙아의시체가 눈에 띄었다. 그는 감전된 사람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떨며 금시 두
눈에뜨거운 이슬이 가득 맺혔다.
지옥마화는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 것을 보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게위로 했다.
“왕 소협, 이제 그만 슬픔을 잊으세요.”
왕세열은 채숙아의 시신을 멍청히 내려다보며 목 메인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다 못을 박아놓은 불효막심한 자식이오.”
“자당(慈堂)께서는 당신을 용서한다고 했으니 너무 죄책감을 갖지 마세요.
우리는어서 자당의 시신을 안장시키고 이곳을 떠납시다.”
왕세열의 눈에서 갑자기 분노의 화염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나는 곧 소혜문을 찾아가서 그녀를 처단해 버리겠소. 모든 참극을
불러일으킨장본인은 바로 그녀였소. 나는 독사처럼 악독한 그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속이 풀리지 않을 것이오.”
지옥마화는 그의 얼굴에 짙은 살기가 떠올라있는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며
재빨리만류했다.
“안돼요. 당신은 남과 싸울 생각을 가져서는 안돼요.”
왕세열은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오?”
지옥마화는 정색을 하고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당신이 남과 싸워 진기를 소모하게 된다면 생명의 기한이 닷새로
단축될거예요.”
왕세열의 입가에 한 가닥 냉소가 스쳐가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는 자신의 생사에 대해서는 이미 개의치 않고 있소. 다만 소혜문에게 복수를
할수만 있다면 설령 내가 지금 당장 목숨을 잃게 된다 해도 역시 주저하지
않을것이오.”
지옥마화는 그의 결심을 도저히 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길게
한숨을내쉬었다.
“당신의 결심이 이미 굳어졌다면 더 이상 만류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가급적이면그녀가 주의하지 않고 있을 때를 틈타 처단해 버리는 방법을
채택하세요. 그럼당신은 생명을 단축시키는 댓가를 치를 필요가 없게 되는
거예요.”
“알겠소. 낭자의 충고에 따르도록 노력하겠소.”
“좋아요. 그럼 자당의 시신을 안장시키고 떠납시다.”
잠시 후 그들은 양지바른 곳을 택해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마친 채숙아의
시신을안장시켰다.
채숙아의 잔혹하고 기구한 운명은 그녀의 죽음을 따라 결말을 맺게 된 셈이었다.
왕세열은 그녀의 무덤앞에 멍청히 서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묵념에 잠겼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드리겠으니 편히 잠드십시오.”
그는 눈물의 작별인사를 고한 다음 지옥마화와 함께 무덩을 등 뒤로 돌리고
무거운발길을 옮기며 떠났다.
첫댓글 즐독합니다,
즐독입니다
즐감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
즐감했습니다..
만나자 마자 이별 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