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1)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이 나이에 무슨 스승이냐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존경하는 한 분도 없다면
그도 참 허망한 일이 아닐까?
생존해 계시든 타계하셨든 마찬가지일 테지만
한 번쯤 회상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삶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본다면
하나는 고립이요, 둘은 군림이요
셋은 섬김이라 할 수 있겠다.
고립은 홀로 독야청청함이니
이웃에 도움도 해도 끼치지 않는다.
군림은 남위에 올라서는 것이니
남의 몫을 빼앗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섬김은 남을 위한 것이니 헌신의 길이라 하겠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경제적 수단이 되고 있을지언정
진정으로 사랑을 바쳤다면 그런 게 아닐까?
그래서 직업인으로서의 교직이라 하더라도
나는 스승의 길을 숭고한 헌신의 길이라 생각한다.
물론 인생을 살아나감에 있어
성직이나 교직만이 성스러운 건 아닐 게다.
자신의 하는 일이나 이웃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
신뢰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복종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삶은 성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을게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건 나의 학창 시절 시행되던 교육법 제1조 대강의 내용이다.
맹자는 군자가 살아나감에 있어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으니
그중 하나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그 하나라 했다.
맹자의 교육론과 우리의 교육이념을 비교해 보면
맹자의 것은 다분히 귀족적이지만
우리의 것은 단군 이래의 홍익인간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편적 인간애에 닿아있어 훨씬 앞섰다고 하겠다.
모든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향유할 천부의 권리가 있다.
영재에겐 영재교육을 시킬 이유가 있다지만
보통사람들에 대한 교육도
한 치 소홀할 수 없는 이치가 아닌가.
내 친구 영식이,
그는 청양의 칠갑산 기슭에서 하늘만 쳐다보며 자랐다.
학교를 마친 후
고향인 그곳 산자락에 있는 초등학교에 지원하여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개성이 남다른 터라 어찌 생활하는지 궁금하여
어느 겨울, 눈이 소복이 내리던 날 밤
나는 그 학교를 찾아가 보았다.
마침 학교 숙직실에 살림을 들어앉히고
먹고 자고 앉은자리에서 출근하는 형편이었다.
저녁 일곱 시쯤 되니
학교 사무원이 어디서 산토끼를 잡아왔다.
이걸 볶아놓고 막걸리를 부어가며
밤늦게까지 섣부른 인생론에 들어갔다.
이 친구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야학을 개설했다.
동네의 문맹자들을 모아놓고 문맹 해득을 시키는 것이었다.
바로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중의 한 여인을 택해 아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한 인간을 철저히 개화시켜 구제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바로 학창 시절에 배운 홍익인간의 이념을
몸소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부인은 눈을 뜨자 시골생활을 못하겠다며 상경하게 된다.
이 친구도 교직을 버리고 부인을 따라 상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인의 눈은 뜨게 했지만
실상 자신에 대한 재교육은 소홀히 해
서울 하늘 아래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었다.
부인이 외판원과 보험회사에 다니며
가정경제를 꾸려나가게 되고
그 아래서 무위도식하던 영식이~
언제부턴가 머리가 조금씩 돌더니
나라를 개벽시키겠다고 나섰다.
이상형의 국가체제를 만들고
친구들을 개각명단에 넣어 조각까지 했다.
나를 어찌 보았던지 문교부장관에 임명한다고 했는데
그런 그가 개벽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더니
강원도 어느 탄광의 막장으로 갔다.
거기 있는 막장 인부들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소식이 없으니 승천했는지
아니면 막장에 갇혔는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교육은 확대 재생산하는데 묘미가 있다.
하나를 희생해 하나를 길러낸다면
그건 교육으로서의 의미가 덜 할 게다.
따라서 자신이 교육받은 것만큼 이 아니라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하면서 교육하는 게 바람직하리라.
이런 맥락만을 보더라도 교사들에 대한 재평가는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걸 싫다고 하면 철밥통만 챙기는 꼴이 되지 않을까?
물론 방법론상으로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함께 고민하면서 풀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회원들 중엔 교직에 몸담았던 이들도 있을 터요
당시의 제자들과 따뜻한 교감을 나누고 있기도 하리라.
그분들에게 존경의 꽃 한 송이씩 달아드리고 싶다.
그런데 난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의
그 앳된 여선생님 얼굴만 떠오르니 이걸 어쩌랴.
(지난날의 단상)
(2)
동이와 정이는 내가 초등학교 교사시절 같은 반 제자이다.
그중 동이네는 당시 낙산 기슭에서
어렵게 구멍가게를 하며 살아갔다.
당시엔 초등학교 과외 열풍이 거센 때인지라
생활이 어려워도 과외는 꼭 시키는 상황이었다.
내가 대학에 다니며 신촌 어느 집에 입주과외를 할 때
동이가 애처로워 나는 주인의 양해를 얻어내고
주인집 아들과 동이를 같이 공부시키게 되었다.
그러노라니 동이는 낙산기슭에서 신촌까지 왔다가
밤중에 집에 가곤 했다.
그런 동이가 다 커서 YTN에 입사하더니
나를 닮았는지 입시학원을 차렸지만
곧 망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자금이 필요하다 하여 3천만 원을 빌려줬는데
그걸 주식투자에 쓸어 넣었다가 그도 다 날리고 말았다.
그런 동이가 매년 스승의 날에 나를 찾는데
이번엔 지난 13일에 함께 강릉 경포대에 들러보자 했다.
경포백사장을 거니노라니 비가 내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하여 인근 카페에 들려 차 한 잔 시켜놓고 옛이야기를 나눴다.
간식이라며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여니
빵이며 쿠키며 과일들이 예쁘게 담겨있었다.
그건 부인 정이가 준비한 것이라 했는데
정이도 내 제자인데 왜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까?
차를 다 마신 나는 극작가 신봉승 선생이 생각나서
그의 유품이 전시된 영화박물관엘 들려봤다.
선생은 강릉사범을 나온 나의 10년 위 선배요
내가 사부님으로 모시던 분이었다.
이렇게 해서 두 제자로부터 스승의 날 축하를 받고
한 스승을 추모하는 게기가 되었지만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허전하듯
스승님들이 다 떠나가 허전하기만 한데
한 분 살아계신 사부님을 뵈러
모레는 혜화동에 들러봐야겠다./ 2022년 5월 15일의 단상
(3)
해를 건너뛰어 오늘이 2024년도 스승의 날이다.
한 분 계신 사부님은 요양병원에 누워계시고
제자 동이가 찾아왔다.
56년 잔나비띠인데, 머리는 나보다 더 벗겨졌구나.
"네 처 정이와 함께 가까운 해외여행이라도 해볼까?"
"죄송합니다. 아직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서요..."
"그래, 불러주는 학생들이 있으면 해야지."
유채꽃 노랗게 핀 구리 한강부지를 찾아 둘이 거닐었다.
저 꽃들은 곧 지고 말겠지만, 밑거름도 되는 법,
나는 누구에게 무얼로 밑거름이 되려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돌아오고 말았다.
첫댓글 헨리 벤 다이크가 노래한 것처럼 ‘선생님을 위해 부는 나팔 없고,
선생님을 태우고자 기다리는 황금마차 없어도,
선생님 앞에 있는 아이들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나는
수많은 촛불 되어 이 세상을 밝혀갈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재벌 되는 일도,
화려한 무대에서 명성을 날리는 명배우 명가수가 되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그러한 자리에 이르는 사람을 키워주는 분이시니
그보다 더 큰 일을 하는 분은 이 세상에 없다’ 하겠습니다.
온 산하가 초목의 푸름으로 덮인 오월,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들 가슴 속에 태양처럼 빛나는 선생님의 그 높은 은혜를 기리고
마음으로나마 고마움의 카네이션을 달아 드립니다.
좋은말씀이네요.
마음속으로나마 고마움의 꽃을 달아드려야지요.
사실 현실의 안전을 위해 경찰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미래를 위해 선생님들은 반드시 계셔야지요.
요즘 선생님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열심이시고
열성임을 종종 느낍니다
오히려 부모보다 더
아이의 문제를 알아내기도 하구요
며칠전 아이들 급식재료를 빼돌려
당근에 매매한 교사도 있지만
이 땅에 모든 선생님들
마음에 평화있기를
기원합니다🙏🙏
맞아요.
일부 몰지각한 분들도 있긴 하죠.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그 선생님 보면서 꿈을 키웠던거 같아요
한번 찾아보는것도 좋을텐데요.
@석촌 작고 하셔서 뵙고 싶어도 뵐수가 없답니다 ㅠ
@홍실이 그러시군요.ㅠ
선생님을 해보셔서 '스승의 날'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스승님과 두 제자에대한 추억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무얼로 밑거름이 되려나...?"
겨우 3년 해본걸요.
스승의 날!
존경하는 스승한분 없는 허망한 모습이라 민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교직에 몸담았던 시절을 떠올리면 더욱 마음이 오그라듭니다
당시 너무도 무지했구나를 살아오면서 너무도 많이 느끼고 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부끄러워 그런시절이 있었노라고 말하고싶지 않기도하고요ㅎ
먼나라에 떨어져 살다보니 그런 시절을 까마득 잊고 살긴하지요
인터넷으로 우연히 당시의 제자들과 연결이 되긴했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말로 얽어매고싶지 않아서~
코빗전 50년전 교무실에서 얼굴 맞대어 같이 일했던 분이
이곳에 여행오셔서 50년전의 제 모습을 얘기해 주실때엔
왠지 눈물이 나더군요~ 아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오늘 선생님 글을 읽으며
제 허망한 모습에 또 눈물납니다
건강하세요!
교무실이란 단어가 저에게도 먼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의 못난 글이 캔디님에게도 먼 기억을 떠올리게 해드린 것 같고요.
피장파장인데, 그로인해 동질감도 느끼게 되니 이건 글나눔의 덕이라 해야겠지요.
종종 좋은 글 올려보시고요 앉은자리에서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학교 다닌 경험이 전무한 저에겐 스승과 제자 사이의 따뜻한 교감을 다 이해 할수는 없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쌓아온 정감의 느낌은 일반적 정 과는 다를 듯합니다 좋은 시간 되셨군요
다르긴 해도 그거나 저거나
어울려서 서로 위안을 받는다는건 마찬가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