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효자, 다큐멘터리 행촌수필문학회
앞집, 홍 선생님 댁이 30년 남짓 이웃사촌으로 정을 나누다 이사하셨다. 한쪽 날개가 부러진 듯 했다. 누가 새 이웃이 되려나? 노부부가 올까? 젊은 부부면 자녀는 몇 일까? 아니면 대학교 유학생일까? 그림을 몇 장 그려보았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이웃집이 삥 둘러 있어도 앞이 휑하니 외딴집 같았다. 좋은 이웃이 오길 소원했다.
앞집에도 따스한 봄볕이 내려앉은 날, 키가 훤칠하고 몸집이 큰 남자 분이 나타난 게 아닌가? 예순이 넘어 보였다. 나는 김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자가용에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싣고 왔다. 새 학기라 자녀들 거처를 마련해주려니 싶었다. 사흘이 지나도 자녀들은 보이지 않고 주방기구와 간이가구 택배들만 찾아오고 있었다. 사장님은 정리하느라 바빴다.
사장님은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사장님은 무주가 고향인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해외에 나가 몇 년간 근무했다. 귀국하여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정년퇴임을 했다. 노인요양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나 잠을 편히 못 자고, 몸이 아프기도 했었다. 퇴임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로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단독주택을 통째로 전세를 얻었다.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이사를 왔다. 둘째 아들인데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이 장했다. 내 가슴이 찡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자기 꿈을 이루려 가수 남진의 노래 ‘님과 함께’ 가사와 같이 고향 마을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살려고 땅을 사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니에게 슬그머니 치매가 찾아왔다. 그 꿈을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택한 길이란다. 어머니는 고향에 계신 형님이랑 사셨는데 형님이 편찮으셔서 어쩔 수 없이 노인요양원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과거 일은 기억하지만 지금 일은 금방 잊어버리신다고 한다. 예쁜 치매라 어린 아이와 같으시다. 내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릴 때마다 “감사합니다.” 로 답례를 하신다.
사장님보다 부인은 더 효부孝婦다. 남편과 떨어져 살림하며 자녀들을 돌봐야 하는데 얼마나 힘들고 외롭겠는가? 그러나 부인은 그걸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의 효심을 받들며 내조하길 각오했을 게다. 농담으로 며느리들은 시집의 ‘ㅅ’자도 싫어한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날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본보기로 삼아야할 성싶다. 부인은 마음씨가 곱게 자란 전주 아가씨다. 아가씨의 이웃에 사는 이모님이 중매를 섰으니 얼마나 눈독을 들이셨을까. 한마디로 하늘이 태초부터 예정한 배필配匹임에 틀림없다.
사장님은 퇴임 후 이루고 싶은 걸 하며 제 2의 인생을 멋지게 보내고 싶지 않겠는가? 노인요양병원에서 어머니를 잘 돌보고 있으니까 …. 그러나 자기의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았을 것이다. 오직 홀어머니 여생의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싶은 효심에서 우러나온 거라 생각한다. 그 효심은 꽃을 즐겁게 가꾸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의 돌보심을 받으며 자랐는데 이제는 역할이 바꾸어졌다. 옷도 깨끗하게 갈아입힌다. 마치 엄마가 자녀를 어린이집 차에 태워주고 해질 무렵엔 차가 오면 맞이한 것처럼 아들은 어머니가 노인주간보호센터에 잘 다니도록 돌보고 있다. 그 사이도 어머니 생각뿐일 것이다. 주말엔 가끔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다녀오고, 고향에도 가서 밭일을 한단다. 효자로 귀감이 된 김 사장님과 이웃이 되다니 감사할 뿐이다. 사장님과 빨리 길들여지려 용기내서 내 세 번째 수필집을 주었다.
KBS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인간시대’ 가운데 아들이 퇴임하고 가족을 떠나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나 아버지와 사는 실화를 보았다. 지금은 매일 코앞에서 특집 ‘현대판 효자, 김 사장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있다. 어머니 손을 붙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대문 앞을 지날 때면 재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내 불효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마음이 쓰리고 아렸다.
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같이 살았다. 그러다 어머니는 대퇴골 골절로 8년 동안 노인요양병원에서 고생하시다 100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출타할 때를 빼놓고는 아내랑 날마다 번갈아 간식을 가지고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그래도 마음에 걸린 게 많다. 꼭 한 가지가 더 그렇다. 병원에 가면 어머니가 집에 대한 기억이 있을 때까지는 “집에 가자.” 고 노래를 부르셨다. 움직일 수 없다는 핑계로 얼버무려 넘겼다. 운명하시고 나서야 장례예식장으로 모시고 가는 길에 우리 집 골목으로 지나갔다. 그게 효행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설과 추석 명절 때라도 집에 모시고 왔으면 떳떳했을 덴데 …. 불효자로서 흔적은 죽을 때도 지워지지 않을게다. 어머니를 꿈에라도 본다면 그 때 잘못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