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 검증하는 모습.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10·26 사건에 대한 재심이 40년 만에 청구됩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유족은 26일 서울고등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했는데요. 유족은 입장문을 통해 "재심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바는 판결이라기보다는 역사"라며 "재심 과정에서 10.26과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논의의 수준이 진화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전 청와대 경호실장을 살해한 뒤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기소됐는데요. 기소된 지 6개월 만인 이듬해 5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후 40년 동안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엇갈려왔는데요. 재심을 통해 새로운 사법적 판단과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재판 위법성·새로운 증거 발견시 재심 청구 가능
최근 한 언론사가 10·26 사건 재판 당시 육성이 담긴 테이프를 공개했습니다. 녹음테이프에는 당시 보안사령부가 재판 내용을 불법 녹음하면서 재판에 개입한 정황이 담겼는데요. 법정에서 진술하는 김재규 목소리 위로 정체불명의 목소리들이 겹쳐 녹음된 겁니다. 이들은 “김재규 말이 녹음이 잘 안 된다”며 일병을 부르거나 범행동기를 증언하는 김재규를 ‘영웅’이라며 비꼬기도 합니다.
또 보안사가 재판부에 쪽지를 건네며 판결에 영향을 미치려 한 정황도 드러났습니다. 당시 법정에서 쪽지 전달을 항의하는 변호사의 목소리가 녹음된 건데요. 공판조서에는 녹음된 김재규의 발언 등이 그대로 기록되지 않은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형사소송법은 법에서 규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요. 확정판결 이후에 수사·재판 과정 중 사법기관의 위법행위가 밝혀지거나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는 경우,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재심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이에 김재규 유족과 재심 변호인단은 녹음테이프를 토대로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녹음테이프 내용이 재심 청구 사유인 새로운 증거에 해당하는데다, 재판이 불법 녹음되고 공판조서가 위조되는 등 재판 과정의 위법성도 확인됐다는 겁니다.
10.26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동아일보)기사 자료
◇10·26사건 쟁점은 '내란목적 살인 VS 단순 살인'
재심사유가 인정되면 법원은 재심 개시를 결정해야 합니다. 재심이 확정되면 법원은 다시 1심부터 김재규의 범죄 혐의를 따지게 됩니다.
하지만 10·26 사건의 재심은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이나 무기수 김신혜 사건처럼 유·무죄를 따지는 것은 아닙니다. 김재규가 박 전 대통령을 살해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인데요.
10·26 사건 재심은 김재규의 혐의가 내란목적 살인죄인지 아니면 단순 살인죄인지 여부를 가리는 것이 쟁점이 될 전망입니다. 실제로 김재규 재판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이를 두고 팽팽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요. 결국 8대6의 의견으로 내란목적 살인죄가 인정됐습니다.
형법은 내란목적 살인죄와 단순 살인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내란목적 살인죄는 국토를 참절하고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경우 성립하는데요. 법정형은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로 단순 살인죄보다 중한 처벌을 받습니다. 단순 살인죄의 법정형은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입니다.
내란목적 살인죄가 성립하려면 국토참절과 국헌문란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국토참절이란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불법지배를 통해 영토고권을 배제하려는 것을 뜻하며, 국헌문란이란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불법적으로 소멸시키고 헌법기관을 폭력으로 전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김재규 재판에서는 대통령 살해가 국헌문란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됐는데요. 당시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 6명은 “대통령직에 있는 자연인을 살해한 것이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 자체를 전복한 것이라는 견해는 비약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 8명은 “국헌문란의 목적은 미필적 인식만 있으면 족하다”며 김재규의 내란목적 살인죄를 인정했습니다.
이에 재심을 청구한 변호인단은 "박 전 대통령을 살해한 행위는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것으로 법률상 단순 살인 의미 이상은 없는 것"이라며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였을 뿐 국헌을 문란할 목적도 없었고,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의 폭동행위에 이르지 못했다"고 지적했는데요. 재심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쓰이게 될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