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기름때문에?
치미님의 넉넉한 마음이라고 봅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동서도 미안해 하리라고....
난 막내 동서입니다.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않는 네 동서가 서로
순서 없이 결혼했기에 더구나 큰형님은
아주버님이 이혼하고 새로들어온 입장이었기에
삼국지가 필요없었죠.
시어머님 역시 길 잡이를 제대로 못했고....
나역시 분수없이 잘난척 많이했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 후회되는 부분도 있답니다.
지금은 음식을 만드는 일이라든가 집안행사는
별 거부감없이 합니다.
죽으면 썩어질 몸.....
내가 움직여 다른사람이 기쁘면 좋다고 생각하기에....
--------------------- [원본 메세지] ---------------------
명절 전부터 아파서 열흘이 넘도록 병원을 다니고 있었다.
골골하는 내게 남편은
그렇게 몸이 안좋아서 명절에 내려가겠냐며 걱정섞인 말을 했었다.
핑게를 대고 쉬고 싶었지만,
일년에 며칠 있는 명절에 하필 아파서란 핑게를 대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친정에 거의 못가든지,
가더라도 서너시간 있다가 오는게 고작인 내게 이번엔 처가에 먼저 들리자는 제안을 했었다.
그래서 시부모님은,
동서네가 모시고 청주로 오기로 하고 우린 먼저 전주로 출발했다.
서울에서 12시간 넘게 걸려 가는 동안 몸이 너무 힘들고 아팠다.
(에라..모르겠다...친정에서 쉬고 남편과 아이들만 청주로 보내야지..)
그런데,
통화를 하는 남편의 얘기를 들으니 어머니가 아프다고 동서도 오지 않고
도련님과 아버님만 청주로 향하고 있었다.
내 생각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내가 안 가면,
일할 사람도 없이 아버님, 남편, 도련님,애들 둘만 가게 된다.
못된 형님의 입장에선,
동서가 항상 어떤 핑게거리만 찾는 기회주의자로 보였다.
임신 5개월이다고 빠지고 애기가 어리다고 빠지고.......
몸이 아팠기에 그런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청주에 가서 시골로 들어갔다.
물론, 일 조금 했다.
하지만, 동서몪까지 해야된다는 생각으로 했다.
"더이상은 못 참는다....서울에 올라가면 내 꼭 한마디 하련다....."
결심을 했건만............
설날 6시에 출발하여 12시 30분쯤 도착을 했다.
도련님 차가 5분정도 먼저 도착을 했는데 어머님만 나와 계셨다.
동서와 조카는 자지 않는다고 하였건만 나와 보지도 않았다.
우리도 큰어머니가 싸 주신 짐만 내려 놓고 아파트로 올라 왔다.
오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까지 끙끙 앓았다.
내려오라는 전화가 왔다.
마음은 내려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남편은 더 자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머리속이 혼란스러웠다.
"내려가서 동서에게 한마디 해야 하는데.......
어른들께 새배 드려야 하는데........
참자........
아니야..........더 이상 못 봐준다......짚고 넘어가야지......
아니야.....수가.... 조금만 더 참아라........."
악을 쓰고 일어나 죽을 끓여서 먹고 약을 먹고 내려갔다
3살된 조카의 재롱이 이뻐서 다들 웃고 분위기가 좋았다.
"그래.....참자....이렇게 행복한데,
한마디 해서 분위기 망칠 필요 있니............ ?
한마디 한들 고쳐질리도 없는데 괜히 가족들 서먹하게 하지 말자....."
그래서 마음속에 접어두고 참았으며, 많이 말하고 웃었다.
동서는 친정에 갈 준비를 하면서 참기름 선물셑트를 건냈다.
거기서,
아무것도 준비못한 형님은 움츠릴수 밖에 없었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도 한마디 하려 했었다.
그런데 동서가 백화점이라면서 애들 옷과 신발 싸이즈를 묻는 전화를 하였고, 윗 사람으로써 그냥 넘어가기로 한 나를 부끄럽게 하였기에 한마디도 못했었다.
폭팔 직전이었던 내 마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참기름 셑트 하나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 참자......지금까지 참았는걸.......
그래도 시골에서 나라도 있었기에,
내 아이들이 기 죽지 않고 주방에 들어와 맘껏 주문하고 먹었는걸...."
며칠전 어떤 드라마에서 얼핏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맞다....
죽으면 썪어 문드러질 육신이거늘 일 안하고 몸 좀 아낀들.........
난 왜 이렇게 물러터졌나?
난 왜 이렇게 뇌물에 약해빠졌나?
내 취함을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 ! (동서 사람이 그러면 못써 !)
날짜 : : 2001. 10. 10.
결혼 11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눈물과 함숨과 보람과 웃음, 그리고 행복을 얻기까지....
이혼의 위기에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서로가 참고 노력하여 이해를 하고 한발씩 양보와 다가감의 댓가로 지금 최상의 파라다이스 같은 행복도 누리게 되었다.
난 지금 친정쪽을 제외하고는 너무 행복하다.
지금 내리는 비 때문인지, 감미로운 음악 때문인지 울적하다.
그래서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왔다.
며칠전 부부동반으로 산행을 할때,
가지고 가려고 준비했다가 잊고 가서 북한산에서 다시 막걸리를 샀었다.
지금 냉장고에 있는 막걸리를 한병 꺼내어 마시고 있다.
비도 오고..오늘따라 남편도 일찍 잠이 들었다.
괜실히 눈물이 핑 돌고 흘러나오는 음악과 마시는 술에 취기가 올라온다.
친정의 일들.........
언제쯤 제자리를 잡을까?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이 제일 무거운 것은 며칠후에 있을 시부모님 생신 때문이다.
생신을 앞두고 동서에게 여러 감정들이 밀려온다.
몇년전 도련님에게 결혼할 여자 친구가 생겼다.
결혼을 앞두고 2년 정도를 집에 드나 들었다.
시어머님이 이제 며느리가(나) 생겼으니,
일을 나눌수 있다고 한시름 놓았듯이 나 역시 많은 일들 중에서 동서가 생겨 일을 나눌수 있겠다라는 마음을 솔직히 갖고 있었다.
난 노량진이나 화곡동에 6년정도 살다가 시댁 근처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다.
멀리 살때도 한달에 보름 이상은 항상 시댁에 왔었다.
물론 힘은 들었지만 단 한가지 이유에서 힘들고 불편했던 것들을 참을수 있었다.
그것은 노인네들이 손주가 보고 싶을것이라는 이유였다.
언젠가는 봄에 갔다가 가을에 온적도 있다.
어느 날이었던가......
그때도 시댁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을때였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동서 될 사람이 놀러 온다면서 저녁을 뭐 해먹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난, 삼겹살이나 구워 먹자고 하였다.
도련님과 여자 친구가 왔고 고기를 사러 나가려 하자,
그녀는 게찌게를 좋아 한다면서 게찌게를 해 달라고 하였다.
나 같으면 "저 아무거나 잘 먹어요...."라고 했을텐데.....
그래서 게를 사다가 찌게를 하였고 난 작은 아이를 업고 어머니와 저녁 준비를 하였는데 그녀는 주방에 와서 일을 전혀 거들지 않았다.
게를 발라 먹고 게껍질을 그대로 식탁 유리위에 올려 놓고 불편해 할까봐 대충 식사를 하고 물러나 주신 어른들을 뒤로 하고 내 몫으로 남겨 놓은 게찌게가 조금 남았을 뿐인데 더 달라고 하였다.
난 내 몫의 게를 다 줬다.
(눈물이 핑 돌았다..친정에 가면 게 좋아한다고 엄마가 해 주셨는데..)
다 먹은 게껍질을 그대로 놓고,
일어나더니 소파에 앉아 도련님에게 "오빠 커피 줘.." 라고 말했다.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시아버지와 시아주버님 될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엉덩이가 다 보이도록
다리를 꼬고 앉아서 커피와 과일을 먹고 그대로 갔다.
설겆이를 도와 준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난, 그들이 커피를 마실때 아이를 업고 게국물에 식어버린 밥을 먹었다.
그런 식으로,
결혼전에 수없이 다녀 가면서도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난 그녀가 시댁에 온다면 짜증부터 났었다.
스트레스가 쌓여 그렇게 자주 가던 시댁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결혼 직전에 시아버님 환갑 잔치를 했었는데,
부페에서 집으로 돌아와 술과 음식을 먹었는데도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도련님 친구들과 술 마시더니 그대로 늦었다면서 몸만 빠져 나갔다.
한번은 결혼전에,
시할머니와 시이모, 시이모부님들을 뵈러 의정부에 갔었다.
저녁을 먹는데,
보신탕을 먹을줄 몰랐기에 그녀와 나는 삼겹살을 먹었다.
결혼도 하기전이고 처음 뵙기에 어려웠을 어른들 앞에서,
그녀는 상추에 고기를 싸더니 "오빠..아."하며 넣어 주었다.
모두가 황당했다.
돌아오는 길에 뒷자리에 앉은 우리 부부를 전혀 의식치 않고,
앞자리에 앉아서 기어에 손을 포개고 운전을 하기도 했다.
결혼하기전,
양쪽 집안 인사를 하기 위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놀랬다.
자신의 두 남동생을 포함한 친정 부모님과 나를 포함한 시댁 식구들이 있었음에도 둘이 손을 잡고 볼에 뽀뽀를 하고 무릎에 앉고 껴안고.....
도련님이 원망스러웠었다. 어떻게 도련님이 날 그렇게 실망시킬수 있을까?
그렇게 많은 일들속에서 내가 그녀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쌓아만 갔다.
머리가 아프고 그녀가 시댁에 온다고 하면 짐을 싸서 우리집으로 가고 싶었고...그러다가 동서 될 사람 때문에 힘들어 하는 내게 친하게 지내 왔던 아주머니가
결혼식장에서 내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자네 동서가 아니라 자네 동생이라 생각해.." (같은 손가)
또, 시이모님은
"근모야....10년만 참아 봐....응?.... 제발......
내가 막내였기에 부담이 없어서 명절때도 늦게 가거나 가지 않았었고, 시댁에 내려가면 힘들다고 겨우 설겆이나 하다가 왔었는데 세월이 10년정도 흐르고 나니 형님이 그동안(10년) 얼마나 나 때문에 속이 상했을까를 알겠더라....
내 주위에 친구들이나 가까운 내 일가 친척들의 형님, 동서 얘기를 보게 되니 그 얄미운 손아래 동서가 내 모습이더라.......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마다 형님이 내게 잔소리를 했더라면 난 형님과 사이가 나빠졌을 것이고 형님에 대한 감사함을 알수 없었을텐데....세월이 흐르면서 내 스스로 알게 되어서야 난 형님을 존경하게 되었어..너도 참아 봐...10 년만......"
갈등은 있었지만 10년을 참기로 했다.
물론, 10년동안 내 속은 숯검정이 될수도 있다.
하지만,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나 하나 꾹 참고 쥐죽은 듯 있기로 하여 동서에겐 한마디도 안했다.
두 사람은 야외촬영도 하고 신혼여행도 해외로 갔다.
시어른은 두 사람에게 말씀 하셨다.
형님네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으라고.......
우린 시댁에서 살다가 분가하여 6년을 아이 데리고 지하에서 살았다.
동서네는 \4,500 만원 아파트에서 신혼을 살았다.
동서가 된지 3년이 넘은 어느 명절날이었다.
시누는 동서에게
"나보다 형님에게 잘 해 드려야 해..."
시부모님은,
"무슨 일이든 형님에게 의논하고 형님이 시키는대로 해...." 라고 했다.
나는 심적 부담은 컸지만,
내 참고 노력한 댓가로 이제 인정을 받는구나 싶어서 흐뭇했었다.
한편으론, 그런 말씀을 하시는 시부모님이 이젠 늙었구나 싶어 마음도 아팠다.
동서가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무심코 이름을 불렀다.
그랬더니,
"형님 ! 이름 부르지 말고 동서라고 불러주세요.." 라고 했다.
난 내 올케에게 아직도 이름을 부르고 있다.
아이까지 있던 내 올케도 그게 언짢았을까?
그래도 "지민아.." 하고 이름 부르는게 친근감 있고 더 좋은데....
동서가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신혼이었을때의 일이다.
시댁 어른들과 시아주버님이 계시는데,
다들 앉아서 T.V를 시청하는데도 동서는 이불을 덮고 누워서 봤다.
겨울에 추워 방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도 물이나 그릇을 가지러 밖으로 가지러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러면 어머니와 내가 항상 일어나야 했다.
새댁이면서 어려워하는 것도 없이,
어른에게 "내가.."란 표현을 쓰며 어영구영,
시부모님과 내 남편에게 반말을 하는 동서를 보노라면 항상 불안 했었다.
많이 잡숴어.... 내가 어쩌구 저쩌구...뭐? ........
밥을 먹다가 일찍 먹은 남편이 담배를 피기 위하여 밖에 나가면
"아주버님... 물병좀 갖다 줘......요" 라고 내 남편을 시킨다.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을때의 일이다.
막내가 쉬고 있을때여서 한달정도 우리집에 있다 갔었다.
대충 짐정리가 되었기에,
막내와 시댁 식구들과 일산사는 동생이 와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상을 두개 펴고,
식사 준비를 하는데도 동서는 주방엔 오지 않았고 동생들이 음식을 날랐다.
준비가 끝나고 거실에 가 보니 어른들은 상 코너에 앉아 계시고 동서가 중앙에 떡하니 앉아서 먹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식사를 하면서 내가 음식을 더 가지러 주방에 가자,
동서는
"형님 혜연이 줄건데 보리차 좀 미지근하게 해서 좀 주세요.." 라고 했다.
정말 기가 막히고 난 동서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동생들이 상을 치우고,
난 설겆이를 하였는데 그때도 주방에 와서 뒷정리 하나 거들지 않았다.
오죽하면 막내가 그랬을까?
"언니네 동서 나보다 나이도 더 먹어가지고 정말 웃긴다....."
난, 그런것 보고 좋지 않게 보이면 너도 저런 모습 닮지 마라고 하였다.
시댁이 내가 살고 있는 근처인지라 동서네가 거의 온다.
동서네가 집을 사서 이사를 했을때 김포에 갔다.
시댁이든, 우리 집이든 오면 일을 하지 않기에 내심 나도 동서네 가서 일을 하지 않을꺼라고 다짐을 했었다.
그냥 앉아 있자니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동서도 같은 입장이 되어 보라고 앉아 있기로 했었는데........
동서는
"형님 ! 전에 정릉(시댁)에 가니 장조림이 있었는데 형님이 해서 갖고 왔다고 하던데 맛있었어.....좀 해 주고 가..네?...하는김에 멸치볶음도......"
나?
다 해주고 왔다. 웃어른이 마음을 잘못 썼다고 후회하였다.(ㅎㅎ)
올 여름에 다시 김포를 가게 되었다.
못된 형님은 또 다시 "음...이번엔 정말...." 하고 갔었다.
남편과 아이의 생일을 겸해서 식사 준비를 했었는데 음식이란게 (딱 세가지)
시댁에서 담근 김치 하나와 샤브샤브, 그리고 갈비였다.
다 먹고 분위기가 그래서 결국 일어나서 설겆이를 하려고 고무장갑을 찾자 동서는 내게 왜 그러냐고 하였다.
설겆이 해 준다는 나의 말에 괜찮다면서 서랍을 열더니 그릇을 다 그곳에 넣었다.
난 그게 뭔지 몰랐다. 동서가 버튼을 누르니 작동이 되었다.
식기세척기였다.......
ㅎㅎㅎㅎ 내 머리위에 있는 동서 ! 그리고 못된 형님......
동서가 결혼할때,
신혼집에 이사를 할때,
우리보다 먼저 집을 사서 이사를 할때,
아이의 백일이나 돌때.... 우린 인사를 다 했다.
우린 맏이라 그런 것이 없었으며 항상 더 많이 베푼다.
인사로 뭐 필요한 것 없냐고 남편이 물으면,
항상 뭔가를 지목하여 사 달라고 하여 애 둘 데리고 힘들게 살면서도 다 사 줬다.
우리 집 사서 이사할때,
자기네 집에 있는 소파처럼 생긴 것을 사면 공간이 좁은곳에 좋다고 하였다.
소파 사 줄것처럼.....
그런데 빨래하는 세제 하나 달랑 사 가지고 왔다.
나이 먹은 웃 어른이 못 받아서 서운한게 아니다.....
그저....동서가 조금 얄미울뿐....
작년 여름엔,
메리야스를 입고 우리 가족을 배웅하는 아버님의 배를 두번 툭툭 치면서
"아유 이 똥배 좀 봐...배 좀 집어 넣어어어...."
너무 황당했다.
우리가 분가하여 몇년을 살았을 때의 일이다.
임신한 동서는 내게 어른들과 살아보니 어떻냐고 물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남의 집에 며느리로 들어온 같은 처지라지만 손아래 동서와 시어른 흉을 볼수는 없었다.
그래서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 라고만 했다.
동서는 이사를 할 시기에,
전세금을 빼서 이자돈을 굴리고 시댁에 들어와서 살면서 애를 어머니에게 맡기면서 자신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동서는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속은 너무나 영악한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이해하기 힘든 동서의 행동들...
동서가 결혼하고 처음 맞이한 명절 (시골 큰댁)
가자 마자 인사하고 부엌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어른들 술상을 봐서 안방에 갖다 드리고 동서를 찾아 보니 없었다.
내딴엔 처음 와서 낯설까봐 챙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동서는 안방에서,
오랫만에 만난 어르신들이 약주드시는 옆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수원에 사시는 큰댁 형님이 동서에게 말했다.
"동서 다음에도 그런 식으로 할꺼면 오지 마 !.."
난 속으로 통쾌하였지만 내 동서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형님이 조금은 미웠다.
그래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나 보다.
그리고 그 다음 명절엔 아프다고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명절땐 친정에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명절에 밖에서 있었고, 엄마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여 혼자 계실테고, 남동생 부부는 아직 남은 어떤 앙금으로 인하여 오지 않을 상황이었다.
난,
큰딸이라선지 마음이 바늘 방석이었다. 그래도 구정인데.......
몸이 불편한데도 명절이라고 퇴원을 하여 집에 계신 엄마와 막내만이 명절을 보낼 생각을 하니 너무도 화목한 시댁앞에서 내 자신이 초라해졌다.
맨스중이었으며, 차는 막힐테고, 친정은 그런 상황이고, ..........
너무나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힘들때 시부모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에미는 절대 부담갖지 말고(시골에 갈 생각하지 말고) 친정에 갈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너무나 감사했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너무도 기가 막혔다.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서 장시간 앉아서 못 가신다고 하고
동서는 또 몸이 아프다고 시골을 가지 않는단다.
어머니에 며느리가 둘이나 되는데 어떻게 시아버니, 남편, 시동생과 우리 애 둘만 보낼까를 생각하니 친정으로 발길을 돌리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난 괜찮다고 하고 시골을 따라 갔다.
말씀은 없었지만 아버님은 내게 고마워함이 느껴졌다.
시아버님은 시골에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한다.
그런 아버님이 여자들 하나 없이 남자들만 데리고 명절에 나타나면 아버님의 체면은 뭐가 될까를 염려했기에 갈수 있었다.
수원 형님이,
작은엄마(시어머니)의 안부를 묻어니 동서는 왜 안 왔냐고 했다.
난,
동서가 임신 개월수에 비하여 배도 너무 불렀고 허리통증이 너무 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지금부터 허리 아프면 애 낳을때 많이 아프겠죠? 라고 했다.
그러나 형님은,
"난 그 동서 이번에 어떤 핑게를 대더라도 안 올줄 알았어..." 하였다.
내심, 내가 속이 상했다.
도련님에게 말했다.
수원형님이 동서 안왔다고 해서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라고 하였다.
조금 편하면 그렇게 좋을까?
조금 힘들어도 함께(다들 며느리...)일하면서 얼굴 보면 좋을텐데...
형님을 비롯한 내가 다 동서처럼 생각한다면 이 나라의 명절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시골에 가서 구정날 서울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내 생각엔 동서와 둘이서 떡국을 끓여 먹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동서는,
전날 도련님과 왔다가 우리 일행을 배웅하고 바로 친정으로 갔단다.
어머니 혼자 구정을 맞이했고,
동서는 그 다음날 시골에 갔던 우리들이 도착한 후에야 시댁으로 왔다.
어머니가 불쌍했다.......그때의 느낌은.....
내 친정 어머니는,
시어머니 혼자 계시니 시댁에 가라고 딸의 등을 떠밀지 않았을까 싶다.
울 엄마는 말로 계속 사람을 귀찮게 했을텐데.....
언젠가 동서는 시부모님과 형님 내외 앞에서 도련님을 가리키며
"오빠는 참 장가를 잘 들었다..나 같은 직업 가진 여자 얻어서..."
"오빠가 얼마나 벌어? 나보다 조금 벌면서..."
"돈 몇푼 못 벌면서...주는 대로 쓰긴..."
도련님이 안스럽다.
이제 난 내일 이후로 며칠 힘들것이다.
이 나라의 며느리들이 겪었을 명절의 부담보다도 더 힘든
시부모님 두 분의 생신을 치룰 걱정으로 이 밤에 마음이 무겁다.
결혼하고 시부모님의 첫 생신때 난 임신중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잠을 너무나 많이 잤었다.
아침에 남편 출근 시키고 다시 누웠다가 눈을 뜨면 밖은 어둠이 깔렸었고 어떤때는 3 ~ 5시에 눈을 뜰 정도로 잠을 많이 잤었다.
시부모님 첫 생신을 앞두었을때도 잠이 많았었다.
임신중이었고 잠은 많았고,
이사를 한지 며칠 되지 않았던지라 피곤함에 몸의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며칠 전에 가지 못하고 생신 전날까지 몸을 추스리다가 몸이 좋지 않아
잠깐만 누워 있다가 시댁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누워 있다가 눈을 뜨니
5시가 넘었었고 깜짝 놀라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먼저 갈테니 퇴근하고 시댁으로 오라고.....
남편은 어차피 늦었으니 퇴근하고 집으로 데리러 온다면서 함께 가자고 하였지만 난 늦었음에 마음이 급하였지만 돈을 아껴야 했으므로 버스를 3번 갈아타고 시댁으로 갔다.
죄책감에 기가 죽어 들어서는 내게 어머니는 현관에서,
"이제서 뭐하러 오냐? 차라리 내일 오지.... 아파서 누워 있더라도 일찍 와서 여기서 누워 있지..... 얼마나 죽을 정도로 아파서 시아버지 생신에 며느리가 이제서야 나타나니?....."
물론,
큰아버님의 며느리인 형님이 나보다 먼저 와 있어서 어머니는 그 형님 앞에서 미안한 마음에 내게 한마디 하셨겠지만 그때는 너무나 서운했었다.
(지금은 충분히 그 입장을 이해한다.)
시어머니와 아버님의 생신은 5일 차이고,
아버님의 생신은 며칠 앞당겨 주말을 정하여 치루게 되었다.
친정에서 겪었던 것보다 시부모님의 생신 분위기는 달랐다.,
시아버님의 생신때는,
청주(보은, 해인)나 수원, 의정부 등지에서 손님들이 많이 방문을 한다.
40~50 명정도의 손님으로 인하여 너무나 바쁘고 정신이 없으며 거실과 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찬다.
난 시아버님을 존경하고 아주 좋아한다.
아버님은,
가족끼리 저녁만 먹는다고 아무리 오지 마라고 하셔도 온다.
그러면 찾아와 주시는 손님들을,
소홀히 할수는 없기에 준비를 부족함 없이 해야한다.
아버님은 일단 방문한 손님들에게는
최상의 접대를 하기를 원하시기에 매년 생신때면 무척 힘이 든다.
지금 결혼한지 11년.
자신의 생일에,
쉴수 있는 혜택을 주는 회사에 남편은 시아버님 생신 날짜를 적어서 낸다.
그리고 그날 쉬면서 새벽 시장 보는 것과 어머니와 나를 돕는다.
항상 내가 어디에 살았든 어머니 생신 전날부터 시댁에 와서 아버님 생신을 치루고 뒷정리를 다 한후에 내 집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어머니 생신 다음날부터,
방 4개의 커텐과 거실 커텐을 다 빨고 겨울용으로 다시 달고,
그릇 정리에 대청소....
많은 종류의 음식을 제대로 잠도 못자고 준비하면서
토요일 점심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상차리기와 청소와 설겆이의 반복...
그리고 손님들이 가신후엔,
그들이 입고 덮었던 의류와 이불을 정리하고 그릇과 수저를 닦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마지막으로 방과 거실의 뒷정리와 세탁기를 돌린다....
명절보다 더 힘든 두 분 생신이 있는 이 가을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시부모님이지만 힘은 든다.
11일 어머니 생신을 앞당겨 동서네랑 6 일에 식사를 미리 했지만
가까이 사는 나는 생신 당일날 새벽에,
시댁에 가서 미역국에 간단한 반찬을 준비하여 아침을 차려 드린다.
6 일날 식사를 한후에 도련님은 내 눈치를 보며 상품권을 하나를 건냈다.
작은 것이지만 형수님 필요한 것 사서 쓰시라고 말하면서,
곧 일본 출장을 가는데 필요한 것을 말하라고 하였다.
난 속으로 "그냥 도련님이 잘 사시는게 저 위하는 거예요..." 라고 했다.
도련님을 20살때부터 지켜 봤었다.
너무나 착한 시동생....
함께 살때 무척 더웠던 여름날 샤워를 맨 마지막으로 하러 들어가면
"형수 가게에 담배 사러 가는데 캔맥주 하나씩 마실까요?" 라고 하며 어른들을 어려워하는 신혼이었던 나를 위한 배려를 자주 해 줬었다.
가끔 전화를 하여 "영숙씨 저예요.." 라고 하면
난 목소리를 야시시하게 내며,
"오머나..서방님. 보고 싶었어요..어쩌면 한번도 찾아주시지 않나요?"
라고 말할 정도로 우린 친하고 서로 잘 웃는다.
도련님은 상품권을 내게 건네며 조심스럽게 ,
형수 미안한데요.... 토요일에 친구 돌집에 저만 가려고 했더니
소영이가 꼭 따라 가고 싶다고 해서요....."
난 뭐라 할말이 없었다.
지금부터 난 시댁을 자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런데 토요일에 돌집에 가면 밤 늦게나 온다는 말인데....
내 생각엔 동서가 처음 맞는 시어른의 생신이 아니고 벌써 5년째 지켜 봤으므로 상황을 봐서 금요일에 일 끝나자 마자 와도 난 목요일 이후론 어머니와 시댁에서 너무나 바쁘게 준비를 하고 있을텐데 어떻게 손님들이 많이 와 있을 토요일 저녁에 돌집에 간다는 생각을 과연 할수 있을까?
돌집에 간들 그들이 감사하다고,
겉으로는 말을 할지라도 속으로 비웃는 것을 왜 모를까?
시아버지 생신 전날 준비하지 않고 며느리가 돌집을 찾았다고...
남편은 그런 말을 하는 시동생에게
준비할게 많으니 일찍 왔다가 저녁에 잠깐 다녀오라고 하였다.
한편으론,
그런 동서에게,
지금까지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은 시부모님에게 서운함도 있었다.
며칠전 산을 가기 위하여(7일) 집을 나섰다가 어머니를 만났다.
난 동서 토요일 늦게나 올지도 모르는데 둘이 준비할수 있을까를 여쭈었다.
얘기 끝에 어머니는,
"말해봤자 생각이 없는 철부지에게 무슨 말을 하겠니?
도리어 말하는 사람에게 서운하다고 생각할텐데.....
네가 말 안해도 엄마는 다 알고 있어......"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철부지 동서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손을 놓고 싶지만 내가 손을 놓으면 어머님이 힘이 드시는데....
형님과 시부모님 앞에서,
미국에 가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피아노 개인 레슨하는 사람들이 돈을 아주 잘 번다면서 이민 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동서.....
도련님을 가리키며
"난 오빠가 장남이었으면 시집 안 왔어.........
부모님 모실 부담없는 둘째라 온거야....."
이런 동서에게 한마디의 충고는 아직도 잔소리일까?
10년.........
그래 10년의 기다림을 난 동서에게 주련다.
"동서"라 생각지 않고 "동생"이라 생각하리라.
지도 10년 살아보면,
자신의 주변에서 친구들을 보며 형님과 동서와의 일들을 많이 접하게 되겠지....그러면서 시이모님처럼 스스로 느끼고 고치겠지.....
나를 기준으로 지켜 본 수없이 많은 동서와의 일들...
흐흐..나도 어쩔수 없나보다.
술 한잔 마시니 내 허물보다 동서의 흉을 들춰 냈으니..
이 밤에 누워서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아침이면 후회할 부질없는 짓을 나이 먹어서 하고 말았음에.....
이번에도 분명 나는 몸으로,
동서는 봉투로 대신하겠지만 시부모님은 그 진실을 알아 주시리라...
세상 살아가는데 있어 인간 관계는 서로 상대적이라고
내 입장은 이렇지만 동서는 할 말은 많으리라....
에구구...이제 며칠동안 수기는 죽었다..... 빨리 15일이 왔으면...
끄윽...취한다...
이 늦은 밤 내 취함을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 (이순신)
제목: 동서 사람이 그러면 못써 ! 조회:324 날짜:2001.10.15 .
사람들중엔 다 본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할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참고 살아야지 그래도 어쩌겠냐라고 말하겠지만
난 지금 꽤 혼란스럽다.
그저 이곳에 나도 하소연이라도 하는수밖에...
어떤 글과 내용으로 이 하얀 면을 채울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을 쓰면서 한잔씩 마시게 될 이 백세주에 또 취기가 오르리라....
아이들은 학원에 갔다.
5시가 넘어서 올테니 그 안엔 술이 깨겠지.....
그리고 술이 깬 후엔 모든것 잊고 다시 시작하리라...
나이값을 할 줄 아는 형님으로 돌아가리라...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겐 부끄러움뿐......
(난 아직 사람이 되려면 멀었나보다.)
11일은 어머니 생신이었다.
동서네를 비롯한 가족들이 미리 식사를 하였으므로 별 부담이야 없었지만, 그래도 당사자인 시어머니는 생신 당일엔 서운하실거란 생각에 다른때처럼 아침 일찍 내려가서 미역국이라도 끓여드리려 했으나 전날 친구들
(양말)과 마신 소주 한병이 심적 부담이 컸던 내겐 독약처럼 온 몸을 힘들게 하고야 말았다.
결국,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저녁에 두분과 우리 가족이 외식을 하였다.
아버님은 내게 몇번을 소주를 권하셨다.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아버님이 주시는 술이라 4잔을 마셨다. 아버님은 사람을 한두명 사라고 하였지만........
막내가(내동생) 서울에 놀러오면서 일 도와준다고 하였지만
아버님은 사람을 사서 쓰되 나이는 어려도 사돈은 안된다고 하셨다.
다음날인 금요일엔 시댁에 가서 청소.. 커텐에...
물김치 담고 야채 손질, 소갈비 24근 양념하고, 고추 30근 손질해서 방앗간에 가서 빻아 오고....저녁 해 먹고 올라 왔다.
13일 토요일.
남편은 아버님 생신 전날을 자신의 생일이라 적어 냈기에 쉬는 날이었다.
아이들 등교길에 함께 나가서 시댁에 갔고 난 대충 집안일을 마치고 내려갔다.
오징어 15 마리를 남편이 껍질 벗기면서 손질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물을 마당으로 가지고 내려와서 시작을 했다.
수십번 오르락 내리락...
가스불 세개에서,
튀김과 전을 4가지 했는데 거의 끝내가는 3시쯤에 동서가 왔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차려 입고 왔다.
오더니 애기 밥을 먹인다고 3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몇가지 쟁반에 담아 먹으라고 갖다 주었다.
나 같으면,
마음이 급해서라도 빨리 내려올텐데 50 정도 흐른후에 내려왔다.
4살짜리 애기는 내 딸이 봤다.
시아주버님과 시어머니가 있는 자리에서 동서 한다는 말이
"며칠전에 연이(조카) 동생 만들려고 침대에서 한참 폼 잡고 있는데
연이가 가운데 눕더니 "야 ! 니들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라고 했다면서 연이가 말이 빠르고 눈치가 빠르다고 하였다.
..................................
어머니는 민망했던지,
"너 시아주버님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니... 얘? " 라고 하셨다
동서는 "뭐가 어때요...하하하하.."
옷 버려가면서 뜨거운 기름에 다쳐가면서 일을 거드는 남편이 측은했다.
튀김과 전이 끝나고 내일 쓸 잡채거리와 멸치, 나물을 볶았다.
동서가 윗층에 갔을때 나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돌집 가려고 마음먹고 온것 같은데 늦지 않게 보내주세요....
가봐야 하기에 마음은 급할텐데 일거리 잡고 있으면 속으로 화만 날거예요......너 돌집 간다면서 손 씻고 갔다 와..라고 말씀하세요.." 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내가 윗층에 갔을때 동서가 돌집에 가야 된다고 말을 하기에
"형님 혼자 이 많은 일을 어떻게 하라고 돌집을 가니?" 라고 하셨단다.
그랬더니 동서는 웃으며 빨리 갔다가 온다고....
그렇게 3시에 온 동서는 6시가 안되어 돌집에 간다고 나갔다.
나가면서 "형님, 내가 갔다 와서 일 다할께......"
시골에서 형님들과 아주버님 애들은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저녁을 차려,
먹고 설겆이 하고 술상 보고 ...또 상차리고... 내일 쓸 음식 준비하고..
동서는 11시쯤 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평범하게 들어오면서 인사를 하고....
1시가 넘어 집에 올라와 자려다가 피곤하여 아침에 늦잠을 잘것 같아서 시댁에서 자기로 하였다.
동서는 우리집에 가서 자자고 하였지만 솔직히 동서가 얄밉기도 하였고, 두 며느리가 아침에 늦을수도 있을것 같아서 그냥 시댁에서 자겠다고 하였다.
남자들은 거실에서 놀고, 술 마시고.....
어머니가 안방에 요와 이불을 4개씩 펴 놓았다.
잠이 들려는데 조카가 자지 않았다.
항상 집에서도 한시,두시에 잔다고 하였다.
불을 끈다고 울고...안 잔다고 때리고....애는 또 울고....
그냥 모른척 하고 누워 있자니.....
결국, 조카는 울다가 두번이나 다 토하고..
동서는 짜증과 화를 내면서 밖이 시끄럽다고 잠가기는 다 틀렸다고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련님이 들어왔다.
짜증이 더 심해지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하물며, 요가 짧아서 자신의 발이 방바닥에 닿는다는 말까지 했다.
그때 그 순간,
난 불끈하고 소리를 지를뻔 하였다.
"야!....... 요를 네가 폈니? 요가 짧으면 애들을 밀고 그리 누우면 될것 아냐?.....일을 얼마나 했다고 불평이 그리 많아?.."
하지만 꾹 참고 자는척 했다.
도련님이 옆에 눕자 "저리 가...싫어!..저리 안가?.."
도련님이 측은했다.
이곳에서도 저러니 둘이 있는 집에서는 오죽할까?
아침에 눈을 뜨니 6시 50 분......
후다닥 일어나서 옷을 입는데 보니 동서가 눈을 떳다가 다시 감았다.
난 집에 올라 와서,
이빨을 닦고 애들과 남편이 갈아 입을 옷을 가지고 다시 내려갔다.
시누가 와 있었다.
아침을 준비하여 먹고 동서는 설겆이를 하였다.
좀 쉬려 했으나 시댁에 세를 사는 집중에서 사람이 있는 집4집만 큰 쟁반에 갈비,,식혜,미역국,튀김,북어,야채샐러드를 준비하여 날랐다.
밤을 세워 놀은 남자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깐 잠을 청했다.
동서는 밤에 잠을 못 잤다면서 안방에서 도련님 옆에 누워 잤다.
동서 애와 시누애는 딸이 놀이터에 데리고 나갔다.
마음이 좀 상하여 설겆이를 하겠다는 시누를 끝내 말리면서 동서 자고 일어나면 하라고 놔 두었다.
그리고 애들 실내화를 빨기 위하여 잠깐 집에 오면서 음식물 쓰레기를 20키로 넘게 가지고 왔다가 버렸다.
그리고 내려가 보니, 동서는 그때까지 자고 있었다.
설겆이는 시누나 시어머니가 하셨나보다.
그러다가 점심을 차리고..먹고..동서는 설겆이 하고..
의정부에서 외삼촌과 이모,이모부 오셔서 다시 상차리고 술상 보고.....
동서가 보이지 않아 찾아 보니,
안방에서 "그여자네집"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주방과 안방...
가까운 거리임에 상황을 알텐데도 나오질 않는다.
시이모님이 부르니,
나와서 한잔 받아 마시고 테레비 본다고 다시 들어갔다.
손님이 왔는데....
술은 마시지 않더라도 한자리에 앉아서 얘기라도 해야지....
재방송 두편을 보고 나오더니 설겆이 몇개 해 놓고 또 보이질 않는다.
이번엔 시아버지 침대에서 조카랑 두시간 정도 자고 나왔다.
난 잠시도 앉아 있지를 못해서 발이 너무나 아픈데......
어머니는 허리에 찜질기 대고,
30분 정도 누웠다가 다시 나오는데도 동서는 마냥 잠만 자다 나왔다.
모든 식구들이 다 눈은 있으므로 안다.
청주 아주버님과 수원 아주버님이 보다 못하여 한마디 하셨다.
"재수씨는 미인도 아니면서 잠이 많나 봐요.....
재수씨 힘들죠? 이러다가 몸살 나겠어요..." 물론 가시가 있는 말이다.
그래도 동서는 속이 있는지 없는지, 웃으면서
"맞아요..어떻게 알았어? 나 미인이라 잠이 많아..."
이러니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하와 낙지를,
푸짐하게 넣은 미더덕 찜을 한솥을 해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설겆이를 후다닥 하더니 시간을 맞춰서 또 방으로 들어갔다.
그 여자네 집을 본다고........
동서가 테레비를 보는 동안
나와 어머니는 그릇을 닦아 다시 장식장에 넣었다.
냄비,그릇,찜통,전기 후라이팬등을 닦아서,
다시 제자리에 놓고 작은방부터 청소를 하였다.
마당에 있는 큰 그릇들은 시누가 닦았다.
아직도 손님들은 25 명정도 남아 있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온 동서는 9시쯤 되니,
손님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도련님을 향하여
"아휴...집에 가게 그만해.. 빨리 일어나....도대체 언제까지 할꺼야?"
그래도 못 일어나는 도련님에게 이젠 조카를 보낸다.
"아빠 집에 가...." 하면서 끌어 당긴다.
울화통이 치밀어 더는 못있겠다 싶었다.
갈때는 남은 음식을 이것저것 다 싸 달라고 할게 뻔하였다.
난 조금 남은 음식은 어른들 드시라고 끝까지 사양을 하는데 동서는
"형님 안가져 가면 많이 남으니까 우리 더 싸 줘...엉"
다른때는 시누에게 뭐라도 내가 먼저 싸 주었지만 어젠 정말 화가 나서
시누 가는 것을 보고 올수가 없었다.
애들 책가방을 열어보지도 못했다면서 먼저 올라간다고 인사를 하였다.
올라오면서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폐품 재활용을 분리하여 정리하고 나오는데 동서 한다는 말이(가만히나 있지..)
"형님 수고 많았어...가서 푹 쉬세요..."
허허......
도련님에게 한마디 했다.
"도련님...아주버님들 다 가시면 남아 있다가 뒷정리 좀 하고 청소기 한번 돌리고 가세요..." ===== "네....."
집에 와서 그대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발이 너무 아파서 쿠션에 다리를 올리고 엎드려 있었다.
애들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뜨니 10시 30분.....
묻지나 말것을 이 속좁은 가시네는 묻고야 말았다.
"동서랑 도련님이랑 청소하고 갔어요?. ..."
"수가...그것 꼭 알 필요있니?...."
"그래 난 알아야겠어...."
아이들이 그랬다.
엄마가고 바로 작은 엄마랑 아빠도 갔다고........
아아악.....미쵸.....얄미워.....(도련님을 얼마나 닥달했을까?)
남편은 수고 많았다고 푹 자라고 하였다.
아이들 숙제 봐 주고 거실에 이불 깔고 셋이서 잤다.
난 안방에 혼자 누워서,
이유를 알수없는 눈물 몇방울 흘리다가 잠이 들었다.
15일 월요일
어제 손님 많아서 오지 않은 어머니 친구들이 식사하시러 오신다기에
망설이다가 (유종의 미) 내려갔다.
식사 차려 드리고 설겆이 하고 아버님 상 차려 드리고 올라 왔다.
며칠 지나면 이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을 무척이나 나무라겠지만
지금은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다.
가끔, 말로는 안될것 같기에
MBC 베스트극장 같은데서 동서의 얘기를 드라마로 한다면..?
하고 상상을 할때가 있다.
시청하고 나면 남는게 있겠지란 막연함에......
이제 내년 두분 생신때까지는 난 아무런 근심이 없으리라.....
함께 해 나간다면 참 좋을텐데..
나까지 맥이 풀리게 만든다.
아니,
내가 좀더 성숙된 어른의 자세가 필요할수도 있다.
10년 기회를 준다고 하였으면서도 흔들리기에.......
앞으로 동서에게 주어진 시간은 5년이 조금 더 남았다.
10년......
길다면 길다.
10년안에 사람되겠지........
31살 동서는 철부지.......
난 백세주 세잔으로 마음을 잡았다.
하지만 솔직히 울적한걸.......
엄마가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