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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그를 조심하라
이튿날 어둠의 장막이 내리깔린 이경(二更)무렵 왕세열 등 세 사람은 낙양성 밖에있는 심가장에 당도했다.
쥐죽은 듯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심가장 주변에 펼쳐진 수림 일대에서는무수한 그림자가 이따금 소리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오호조웅은 사방을 묵묵히 한 번 둘러본 다음 왕세열에게 나직이 말했다.
“두 분은 이곳에 남아서 동정을 살피도록 하시오. 노부는 안으로 들어가서심장주를 만나보겠소.”
그는 가볍게 몸을 솟구치며 한 줄기 연기처럼 폭풍전야의 고요에 묻힌 심가장안으로 사라졌다.
숨 막힐 듯한 긴장과 무거운 적막이 지속되고 있을 때 갑자기 왼쪽 숲 속에서단발마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악!”
왕세열은 허공을 찢을 듯 크게 울려 퍼진 그 비명 소리를 듣자 안색이 일변하며거의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해 몸을 솟구쳤다.
지옥마화의 얼굴에도 한 가닥 긴장과 격도의 빛이 스쳐가며 전광석화처럼 그의 뒤를따랐다.
앞장서서 숲 속으로 몸을 솟구친 왕세열은 10 장 가량 달려 들어간 후 갑자기 흠칫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1 장 전망에는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온몸이 시커멓게 변한 한 구의 시체가나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왕세열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청히 서 있을 때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잇달아 들려오며 삽시간에 수십 줄기의 인영이 벌 떼처럼 장중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소문을 듣고 각처에서 몰려온 무림고수들이었고 게 중에는 구대문파의제자들도 내포되어 있었다.
중인들 틈 속에 끼어있던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노인 한 명이 갑자기 경악에 찬음성으로 낭랑하게 외쳤다.
“드디어 여섯 번째 희생자가 나타났구려.”
중인들은 모두 가슴이 섬뜩해지며 일제히 그 백발노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왕세열이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물었다.
“뭐가 여섯 번째 희생자란 말입니까?”
백발노인은 그를 힐끗 쳐다본 후 침중하게 말했다.
“이런 장력에 피살당한 자가 모두 여섯 명이 되었다는 것일세.”
“이게 어떤 장법입니까?”
백발노인은 냉소를 머금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네.”
그는 서서히 발길을 옮기며 장중에서 떠나갔다.
이때 칠순 가량 되어 보이는 늙은 노인이 왕세열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냉담하게물었다.
“자네가 귀금마자의 제자인가?”
왕세열은 적의가 은은히 어린 상대방의 퉁명스런 말투에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
“그럼 추풍보 밖에서 구대문의 제자 수십 명을 살해한 것 역시 자네의소행이었는가?”
왕세열은 늠름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불초가 그들을 살해했습니다.”
늙은 노인의 안색이 일순 서릿발처럼 싸늘하게 굳어졌다.
“좋네, 우린 자네의 영사부터 만나본 다음 곧 자네에게 그 사건의 대가를 치르게할 것일세.”
그는 말을 끝마친 후 더 이상 왕세열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서서히 걸음을 옮기며장중에서 물러갔다.
중인들 틈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왕세열에게 말을 건넸다.
“귀하는 유엽검에 부상을 입었다고 하던데……”
왕세열은 흠칫 놀라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당신이 유엽검에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은 이미 강호에 파다하게 퍼져 있소.”
왕세열은 강호의 소문이 이토록 빨리 퍼지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상상도못했었는지라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어둠의 장막이 덮인 심가장은 여전히 변함없이 무거운 적막에 잠겨있다. 하지만이것은 언제 폭발할는지 모르는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공포가 충만된 일촉즉발의정적이었다.
삼 경이 막 지났을 무렵 난데없이 소름을 끼치게 하는 싸늘한 웃음소리가 밤하늘의정적을 깨뜨리며 은은히 들려왔다.
심가장의 주변에 펼쳐진 숲 속에 잠복해 있던 중인들은 음산한 웃음소리를 듣자모두 안색이 일변하며 얼굴에 긴장의 빛을 가득 떠올렸다.
예리한 정광을 번뜩이는 중인들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을때 갑자기 한 줄기 흑영이 허공을 헤치며 심가장의 대문 앞으로 유성처럼날아들었다.
두리번거리고 있던 중인들의 시선은 동시에 그 흑영에게 집중되었다.
왕세열도 역시 바람처럼 나타난 그 흑영에게 시선을 돌려보는 순간 안색이일변했다.
심가장의 대문 앞에 나타난 흑영은 바로 흑의차림에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귀금마자였다.
이때 굳게 닫혀져 있던 심가장의 대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더니 코밑에 엷은 팔 자수염을 기른 노인이 경장차림을 한 네 명의 장한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걸어 나왔다.
귀금마자를 맞이해 나온 노인이 바로 심가장주 심정이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심정은 태연히 귀금마자의 앞으로 다가와서 걸음을 멈추고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귀하는 과연 약속대로 나타났구려.”
귀금마자의 태도는 사뭇 오만했다.
“심 장주, 어서 그 물건을 내놓으시오.”
심정의 안색이 일순 싸늘하게 굳어졌다.
“분명히 말해주겠는데 귀하의 그런 요구는 절대 들어줄 수 없소.”
귀금마자는 화가 치밀어 오른 듯 살기가 충만된 음성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뭐라고? 당신은 죽음을 자초하겠다는 것인가?”
심정은 조금도 위축된 빛을 보이지 않고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설령 내가 목숨을 잃게 된다 해도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가보를 귀하에게 내줄 수는 없소.”
“흥! 좋소, 그럼 후회하지 마시오.”
귀금마자는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이런 말을 내뱉은 후 느닷없이 심정을 향해덮쳐가며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으로 1 장을 맹렬히 휘둘렀다.
바로 이때였다. 별안간 고막을 찢을 듯한 우렁찬 외침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을 멈추시오!”
곧 이어 허공을 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심가장 주변의 숲 기슭에서 수십 줄기의인영이 솟아나오더니 삽시간에 귀금마자의 주위를 에워싸 버렸다.
그들은 바로 땅거미가 내리기 전부터 숲 속에 잠복해 있던 구대문파의고수들이었다.
귀금마자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사방을 포위한 구대문파의 제자들을 묵묵히 둘러본후 냉랭히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은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그의 맞은편에 서 있던 의젓하게 생긴 노승 한 명이 앞으로 성큼 두 걸음 나서며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가 이곳에 나타난 의도는 귀하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 믿소. 수십 년 전귀하가 훔쳐간 구대문파의 비급을 오늘 우리에게 되돌려 주기 바라오.”
귀금마자는 여유 만만한 태도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흥! 만약 내가 거절하겠다면 어쩌겠소?”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 안색이 일변하며 두눈에서 분노의 화염을 번뜩였다.
노승의 얼굴에 한 차례 가벼운 경련이 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럼 귀하는 오늘 이곳을 무사히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오.”
귀금마자는 그들을 안중에 두지도 않고 있는 듯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당신들에게 과연 그만한 능력이 있을까?”
노승은 조롱기가 다분히 어린 그 말을 듣자 안색이 푸르락붉으락해진 채 갑자기벽력과 같은 함성을 지르며 성난 야수처럼 귀금마자를 향해 무섭게 덮쳐들었다.
귀금마자는 노도처럼 몰아쳐온 강맹한 장력을 감히 맞받아 치지 못하고 재빨리 몸을퉁기며 옆으로 피했다.
그가 미처 숨을 돌리지도 못했을 때 이번에는 왼쪽에서 싸늘한 광망이 번뜩였다.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늙은 도인 한 명이 번개같이 장검을 휘두르며 날카롭게공격해온 것이다.
바로 이때였다.
띵! 띵! 띵!
별안간 심금을 진동시키는 금음(琴音)이 잇달아 세 번 울려 퍼지자 구대문파의제자들은 모두 가슴의 혈기가 은은히 격탕되는 것을 의식하고 흠칫 놀라며 일제히서너 발짝씩 물러났다.
맑은 음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철금을 두 손으로 받쳐 든 왕세열이 허공에서 사뿐히떨어져 내려섰다.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모두 안색이 일변하며 적의가 가득 어린 시선을 동시에왕세열에게 집중시켰다.
왕세열은 중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전혀 개의치 않고 만면에 공포스런 살기를떠올리며 귀금마자를 응시했다.
“귀금마자, 나는 당신과 다시 대면하게 되기를 학수고대해 왔었소.”
귀금마자는 왕세열의 갑작스런 출현에 약간 놀라는 것 같았으나 곧 이어 태연한모습을 되찾았다.
“너는 어쩌겠다는 것이냐?”
왕세열은 격동이 충만된 음성으로 날카롭게 외쳤다.
“귀금마자, 당신이 무엇 때문에 나의 부친을 해쳤는지 그 이유를 말해 보시오.”
귀금마자는 고개를 저으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네가 알 필요가 없다.”
그의 말이 막 끝나는 순간, 지옥마화가 뒤따라 유성처럼 장중으로 날아들며침중하게 말을 받았다.
“귀금마자, 그럼 사망전이라도 내주시기 바라겠어요.”
“그 물건은 왜 요구하는 것이지?”
“왕 소협은 유협검에 부상을 입어 독기가 체내로 침투해 들어갔는데 그의 목숨을구하려면 사망전이 있어야 돼요.”
귀금마자는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뭐라고? 그가 유엽검에 부상을 입었단 말이냐?”
“예, 그래요. 그러니 어서 사망전을 내주시기 바라겠어요.”
귀금마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니 그 물건을 내줄 수는 없다.”
왕세열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격동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귀금마자, 나는 생명에 미련이 없는 몸이니 구차하게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는않겠소. 하지만 무슨 까닭으로 나의 아버님을 살해했는지 그 이유만은 분명히 알고싶소.”
“그것도 이야기해 줄 수 없다.”
“흥! 좋소. 피의 빚은 피로서 갚아야 하는 법이니 당신은 오늘 나에게 목숨을바쳐야 할 것이오.”
왕세열은 침중한 어조로 말을 끝마친 후 두 눈에서 예리한 살기를 번뜩이며 철금을움켜쥔 채 한 발짝씩 귀금마자를 향해 다가갔다.
삽시간에 일촉즉발의 긴장이 장중을 뒤덮었다.
왕세열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귀금마자를 향해 서너 발짝 접근해 갔을 때 갑자기지옥마화가 몸을 번쩍이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왕 소협, 진정 하세요.”
왕세열은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버럭 노성을 질렀다.
“무엇때문에 나를 막는 것이오? 낭자는 어서 비켜서시오.”
“안돼요. 소협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을 가져서는 안돼요.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기한이 다시 단축……”
왕세열은 냉랭히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어서 비켜서시오. 설령 내가 지금 당장 목숨을 잃게 된다 해도 절대 저자를살려둘 수는 없소.”
지옥마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대신 저자에게 복수를 해드리겠어요.”
왕세열은 힘껏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저자는 내손으로 직접 처단하겠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금마자가 별안간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1 장을 맹렬히휘두르더니 포위망을 뚫고 쏜살같이 숲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시종 당당한 모습을 취해왔던 귀금마자가 갑자기 목적도 달성하기 전에 떠나갈 줄은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왕세열은 물론이거니와 장중에 있던 구대문파의 고수들도 갑작스런 변고에 모두어안이 벙벙해졌다.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이어 일제히 노성을 지르며귀금마자의 뒤를 추격해 갔다.
지옥마화가 다급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그들의 뒤를 따르려했을 때 왕세열이침종하게 외쳤다.
“진 낭자, 그를 뒤쫓을 필요는 없소.”
지옥마화는 걸음을 멈칫하며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나를 제지하는 거지요?”
왕세열은 씁쓸히 웃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이곳에 나타났던 사람은 귀금마자가 아니기 때문이오.”
지옥마화는 안색이 일변하며 얼굴에 경악의 빛을 역력히 떠올렸다.
“뭐라고요? 그가 귀금마자가 아니란 말인가요?”
“그렇소. 그는 귀금마자가 아니오. 다만 귀금마자의 이름을 빌어 그를 가장하고있는 것뿐이오.”
지옥마화는 미혹이 가득 어린 표정으로 그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귀금마자는 전혀 왼손을 사용하는 법이 없었는데 조금 전 그자는 포위망을 뚫고도주할 때 왼손으로 초식을 펼쳐내었소. 이것은 귀금마자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일이오.”
지옥마화는 그 말을 듣자 일순 넋 빠진 사람처럼 멍청하게 변했다.
왕세열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귀금마자로 가장했던 그 사람은 여자임이 틀림없는 것 같았소. 아까 그 사람이왼손을 휘두를 때 얼핏 보았는데 백설처럼 희고 고운 여자의 손이었소.”
“그렇다면 그 여자가 영사로 가장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요?”
왕세열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은은히 어리며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것은 나도 역시 이해할 수가 없소.”
그는 여기가지 말한 다음 얼굴에 어두운 그늘을 깔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강호에 출현하지는 않을 것이오. 영원히 말이오.”
지옥마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일순 가슴에싹터있던 한 가닥 희망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을 의식했다. 만약 귀금마자를찾아내지 못한다면 왕세열의 목숨은 전혀 살린 가망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왕세열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옥마화에게 조용히 물었다.
“진 낭자, 나는 앞으로 목숨을 얼마나 더 유지하게 될 것 같소?”
“아마 3 일이나 혹은 5 일밖에 안 남았을 거예요.”
왕세열은 씁쓸히 웃었다.
“그렇다면 나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것 같구려.”
“장기적인 계획이라고요?”
“그렇소. 나의 생명이 곧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오.3일이란 짧은 시간은 곧 흘러가 버릴 테니 나는 미래를 위한 생각을 안 할 수가없소.”
지옥마화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미래를 위한 생각이라고요?”
“그렇소. 진 낭자, 내가 곧 죽을 목숨이란 것은 당신도 부이할 수 없을 것이라믿는데 그렇지 않소?”
지옥마화의 두 눈에 뜨거운 이슬이 은은히 맺히며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아녜요. 당신은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
왕세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정색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런 위안의 말을 할 때가 아니오. 진 낭자, 낭자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싶은 일이 있는데 낭자가 과연 수락할는지 모르겠구려.”
“무슨 일이죠?”
왕세열은 정기가 은은히 번뜩이는 시선으로 그녀를 한참동안 응시하다가 담담하게말했다.
“나의 아내가 되어달라는 부탁이오.”
“뭐라고요? 그럼 결혼을 하자는 건가요?”
지옥마화는 뜻밖에 그에게 청혼을 받게 되자 가슴이 털컹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들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세열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이승을 떠나기 전에 낭자와 부부로 맺어지고 싶소. 비록 이것은당신에게 몹시 잔혹한 일이 되겠지만 나는 당신의 몸을 통해 나의 이 세를 잉태하게하여 그 아이로 하여금 나를 대신해서 복수임무를 완수케 하려는 것이오.”
그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두 눈에 한 가닥 갈망의 빛을 떠올리며 그녀를 뚫어지게바라보았다.
“낭자의 의향은 어떻소? 나의 청혼을 수락해 주겠소?”
지옥마화는 이 순간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 빠진 채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시종 침묵만을 지켰다.
그녀는 혈해랑자에게 몸을 짓밟힌 쓰라린 상처가 가슴 깊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차마왕세열의 청혼을 수락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왕세열은 지옥마화가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고 있는것을 보자 애원하듯 다시 물었다.
“진 낭자, 나의 청혼을 수락해 주겠소?”
“나는…… 나는……”
지옥마화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여 갑자기 왕세열의 품안으로 달려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왕세열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차분하게 말했다.
“갑자기 왜 우는 것이오? 낭자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아녜요. 나에게…… 나에게…… 고려할 수 있는 여유를 주세요.”
지옥마화는 목 메인 음성으로 말을 끝마친 후 다시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울었다.
그녀는 비록 왕세열에게 깊은 애정을 쏟고 있었지만 이미 몸을 더럽힌 자신은왕세열과 결합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왕세열에게 절망감을 안겨다줄 수가 없었으므로 일부러 구실을 붙여 시간을 지연하려 했던 것뿐이다.
왕세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우리 조용한 장소를 찾아 떠납시다. 그곳에 가사 신중히 고려해 보도록하시오. 나는 낭자가 마음의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겠소.”
“싫어요.”
“진 낭자, 그럼…… 거절하겠다는 것이오?”
“나는…… 나는……”
왕세열의 얼굴에 실의의 그늘이 가득 어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가 거절하겠다면 나는 더 이상 간청하지 않겠소. 비록 낭자는 나를사랑한다는 말을 했었고 또한 나의 생명도 구해준 적이 있었지만 나에게 숨기고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나는 이미 간파했었소.”
지옥마화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쳐들고 울부짖었다.
“왕 소협, 그건…… 그건……”
“더 이상 여러 말할 필요 없소.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우리는 이만헤어집시다.”
왕세열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끝마친 후 등을 돌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떠났다.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억눌려져 있던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흘러내렸다.
그는 결코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에 미련이 남아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믿어왔던 애정의 배신으로 자신이 한없이 처량해진 느낌이 들어 무의식중에흘리는 통한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옥마화가 그를 구하기 위해 육체를 짓밟혔다는 사실을 어찌 꿈엔들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지옥마화는 왕세열이 혼자 떠나려 하는 것을 보자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고통의경련을 일으키며 크게 울부짖었다.
“왕 소협, 당신은……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왕세열은 고개조차 돌려보지도 않고 계속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소. 나는 낭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앞으로도 영원히 이해할 수 있는기회가 없을 것이오.”
“왕 소협, 나로 하여금 당신 곁에 있도록 해주세요.”
“그것은 피차의 고통만 더욱 크게 만들어 줄 것이니 차라리 지금 이곳에서헤어지는 것이 났소.”
그의 말이 막 끝나는 찰라 별안간 숲 속에서 격전을 벌이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왕세열은 무한한 고통과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는 지옥마화를 홀로 남겨둔 채재빨리 몸을 솟구치며 함성이 새어나온 쪽으로 유성처럼 날아갔다.
***
왕세열이 숲 속으로 20여 장 가량 달려 들어가자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귀금마자로가장한 복면여인을 둘러싸고 맹렬한 포위공격을 펼치고 있는 광경이 시야에들어왔다.
왕세열이 싸움테두리 부근에 막 이르렀을 때 갑자기 얼음장 같은 차가운 외침소리가울려 퍼졌다.
“싸움을 멈추시오.”
고막을 진동시키는 벽력과 같은 우렁찬 외침소리에는 불가항거의 위엄이 깃들어있는 것 같았다.
광풍폭우와 같은 맹렬한 공격을 펼치고 있던 구대문파의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일변하며 공세를 멈추고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중인들은 경악이 어린 시선으로 총총히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쥐죽은 듯한 적막만이흐르고 있을 뿐 인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중인들 틈 속에서 누군가 낭랑하게 외쳤다.
“누구요? 숨어있지만 말고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내시오.”
“나는 귀금마자요.”
얼음장 같은 말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5 장 밖에서 갑자기 한 줄기 흑영이번쩍이더니 유령처럼 장중으로 사뿐히 날아들었다.
그도 역시 귀금마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흑의차림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있었다.
난데없이 또 다른 한 명의 귀금마자가 출현하자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물론싸움테두리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왕세열도 안색이 일변했다.
귀금마자는 중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복면여인의 앞으로 다가가서침중하게 외쳤다.
“너는 누군데 감히 나의 형세를 하고 다니느냐?”
복면여인은 격동어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당신이 정말 귀금마자란 말인가요?”
“그렇다. 너는 무엇 때문에 나의 가장하고 뭇사람들을 속여 왔느냐?”
복면여인은 가볍게 냉소를 쳤다.
“흥! 귀금마자, 나는 당신을 유인해내기 위해 당신의 이름을 빌려 행세해 왔던것인데 드디어 오늘 그 결실을 맺게 된 셈이군요.”
귀금마자는 놀람이 가득 찬 음성으로 외쳤다.
“뭐라고? 너는…… 너는 대체…… 누구냐?”
복면여인은 가늘게 떨리는 상대방의 음성을 통해 그가 몹시 당황하고 있음을간파하고 갑자기 은방울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궁금하다면 얼굴을 보여드리지요.”
가짜 귀금마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서서히 벗었다.
순간 중인들 틈 속에서 놀람에 찬 외마디 소리가 잇달아 울려 퍼지며 하나같이 모두얼굴에 경악의 빛을 역력히 떠올렸다. 물론 한쪽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왕세열도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복면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남숙령이었던 것이다.
귀금마자는 침중하게 버럭 노성을 질렀다.
“네가 나를 유인해낸 의도는 무엇이냐?”
남숙령은 싸늘한 광망이 번뜩이는 시선으로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귀금마자, 당신은 무슨 이유로 자기 제자의 부친을 해쳤지요? 또한 어째서 왕소협과 만나는 것을 회피하고 있나요?”
왕세열은 남숙령이 귀금마자를 가장한 목적을 자신을 위해서였음을 알게 되자 크게감동했다.
귀금마자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아무 말도 없이 멍청히 서 있었다.
이때 구대문파 고수 중의 노승 한 명이 성큼 한 걸음 나서며 귀금마자를 향해낭랑하게 물었다.
“귀하가 정말 귀금마자가오?”
“그렇소.”
“그렇다면 귀하가 훔쳐간 구대문파의 비급을 되돌려 주시기 바라오.”
“나 귀금마자는 1 년 안에 반드시 돌려줄 것을 약속하겠소.”
노승의 얼굴에 한 가닥 노기가 스쳐갔다.
“귀하가 지난달 구대문파의 비급을 훔쳐간 원인은 무엇이오?”
귀금마자의 태도는 사뭇 냉담했다.
“그것은 대사가 알 필요 없는 일이오.”
노승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안색이 푸르락붉으락해졌다.
“귀금마자, 당신이 만약 비급을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오늘 이곳에서 무사히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오.”
그는 노기충천한 모습으로 이렇게 부르짖은 후 느닷없이 우뢰와 같은 파공성을동반한 강맹한 장력을 뻗어냈다.
바로 이때였다. 별안간 벽력과 같은 외침소리가 노승의 귓전을 사정없이 때렸다.
“손을 멈추시오!”
곧이어 허공에서 한 줄기 인영이 번쩍이더니 유성처럼 귀금마자의 앞으로 사뿐히날아들었다.
귀금마자는 그 인영의 모습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의식중에 뒤로 몇걸음 물러났다.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 인영은 바로 한쪽 옆에서 관전을 하고있던 왕세열이었다.
왕세열은 안색이 서릿발같이 싸늘하게 굳어진 채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귀금마자, 나는 당신과 다시 만나게 되기를 몹시 고대해 왔었소. 거추장스런복면은 이제 그만 벗어버리는 것이 어떻소?”
귀금마자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왕세열은 예리한 정광이 발산되는 시선으로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날카롭게소리를 질렀다.
“귀금마자, 당신이 나의 아버님을 살해했소?”
귀금마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너의 아버지를 해친 흉수는 바로 나다.”
왕세열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대체 무슨 이유로 나의 아버님을 살해했다는 것이오?”
귀금마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그 이유를 알고 싶으냐?”
“그렇소. 어서 대답해 주시오.”
“그럼 우선 그 철금을 나에게 다오.”
왕세열의 얼굴에 한 가닥 의혹이 빛이 스쳐가며 냉랭히 물었다.
“갑자기 철금은 왜 달라는 것이오?”
“내가 목숨을 잃지 않아야 네 아버지를 살해한 원인을 너에게 얘기해 줄 수 있을게 아니냐?”
“그럼 당신은 이 철금을 가지고 사람들을……”
왕세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가항거의 위엄이 어린 귀금마자의 호령이떨어졌다.
“잔말 말고 어서 철금을 내놓지 못 하겠느냐?”
왕세열은 일순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멍청히 철금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그에게건네주었다. 귀금마자는 철금을 받아들고 늠름하게 구대문파의 고수들을 둘러본 후침중하게 외쳤다.
“나는 1 년 안에 비급을 구대문파에 되돌려줄 것을 약소했는데 만약 당신들이그래도 만족을 모르고 서툰 행동을 한다면 죽음의 화를 면치 못할 것이오.”
중인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 안색이 일변하며 간담이 서늘해졌다.
귀금마자는 중인들에게 한 마디 경고를 던진 후 왕세열을 향해 낭랑하게 외쳤다.
“넌 이만 떠나자.”
그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재빨리 몸을 솟구치며 장중에서 떠났다.
멍청히 서 있던 왕세열은 이때야 비로소 제 정신을 차리고 번개같이 땅을 박차며그의 뒤를 따랐다.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분분히 노성을 지르며 뒤를 추적하려 했을 때 별안간 심금을진동시키는 금음이 울려 퍼졌다.
띵! 띵! 띵!
중인들은 예리한 비수처럼 가슴속을 파고드는 금음을 듣자 모두 멈칫하며 온 몸을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모두 불가항력의 위력을 지닌 금음에 위축되어 감히 더 이상추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이 멍청히 서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귀금마자와 왕세열의 모습은 눈 깜박할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물 찬 제비와 같은 신법으로 떠나간 귀금마자와 왕세열이 3 리가량 벗어났을 때갑자기 소름을 끼치게 하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헤치며 들려왔다.
“흐흐흐…… 귀금마자, 우리는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었구려.”
귀금마자는 멈칫하여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친구, 어서 모습을 드러내시오.”
그는 놀람이 극도에 달한 듯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왕세열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내심 깊은 의혹에 빠져 들었다.
‘대체 어떤 인물이 나타났기에 귀금마자가 이토록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는것일까?’
그가 속으로 이렇게 뇌까리고 있을 때 상대방의 얼음장 같은 음성이 다시 귓가에전해 왔다.
“귀금마자, 그동안 당신은 용케도 나의 눈을 피해 숨어서 지내왔지만 끝내 우리는이렇게 만나게 되고 말았소. 10여 년간 당신을 찾아 헤맨 나의 고생이 결코 헛된셈은 아니구려.”
귀금마자는 침중하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만나서 어쩌겠다는 것이오?”
“흐흐흐…… 안된 이야기지만 당신은 내손에 죽어줘야겠소.”
“무슨 이유로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오?”
“이유는 간단하오. 당신을 나를 해치려하게 될 날이 올 것이오. 그렇지 않소?”
귀금마자는 냉소를 쳤다.
“흥! 솔직히 말한다면 그렇소.”
“흐흐흐…… 과연 당신은 떳떳한 대장부요. 참! 당신 곁에 있는 그 젊은이가 바로당신의 제자요?”
“그렇소.”
“그럼 그가 바로 왕세열의 아들이란 말이오?”
“그렇소.”
“흐흐흐…… 그렇다면 잘 됐군. 귀금마자, 당신은 끝으로 남기고 싶은 유언은없소?”
귀금마자는 무의식중에 가볍게 몸서리를 치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없소. 어서 모습을 드러내서 승부를 판가름 집시다.”
이때 왕세열이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여 귀금마자를 향해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물었다.
“지금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누구요?”
귀금마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나중에 이야기해 주마.”
그는 묵묵히 사방을 한 번 둘러본 다음 철금을 불끈 움켜쥐고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자는 너까지도 해치려하고 있으니 절대 방심을 하지 말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있어야 한다.”
왕세열은 그 말을 듣자 간담이 서늘해지며 내심 더욱 깊은 의혹에 빠져들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귀금마자가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보니 귀금마자가 그동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저자를 회피하기위해서였던 것 같구나.’
잠시 숨 막힐 듯한 긴장과 적막이 흐른 후 별안간 귀금마자가 날카롭게 외쳤다.
“친구, 어서 공격을 펼치지 않고 무엇하고 있소?”
그의 말이 막 끝나는 찰나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한줄기 백영이 섬광처럼 귀금마자를 향해 격사되어 왔다.
귀금마자는 옆으로 살짝 두 걸음 이동하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든 백영을 향해번개같이 철금을 휘둘렀다.
두 줄기 인영이 교차되며 스치는 순간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허공을 찢을 듯크게 울려 퍼졌다.
“커헉!”
귀금마자는 몸을 한 번 휘청거리더니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반면에 백영은 다시 번쩍이며 전광석화처럼 7, 8 장 밖으로 물러갔다. 그 백영의신법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쾌속했기 때문에 얼굴 모습조차 자세히 알아볼 수가없었다.
왕세열은 귀금마자가 죽은 듯이 바닥에 축 늘어진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보자 대경실색했다.
“사부님……”
그는 귀금마자에 대한 미움을 일순 모두 잊어버리고 경악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외치며 미친 듯 귀금마자의 곁으로 달려갔다.
이때 물러난 백의괴인의 싸늘한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그는 이미 죽었다!”
왕세열은 그 말을 듣자 마치 쇠망치로 뒤통수로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지는느낌이 들며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의괴인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흐흐흐…… 이번에는 너의 목숨을 거두어 갈 차례다.”
말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한 줄기 백영이 번쩍이며 멍청히 서 있는 왕세열을 향해무섭게 격사되어 왔다.
바로 이때였다. 돌연 측면에서 벽력과 같은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며 한 줄기 인영이유성처럼 백영을 향해 날아들었다.
펑!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 줄기 인영은 번개같이흩어졌다.
다시 뒤쪽으로 퉁겨져나간 인영은 물 찬 제비처럼 몸을 솟구치며 눈 깜박할 사이에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난데없이 장중에 나타난 인영은 바로 심가장 주변의 숲 속에서 왕세열과 만난 적이있었던 백발노인이었다.
백영이 사라진 방향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 백발노인의 안색은 약간 창백한 빛을띠고 있었다.
왕세열은 그들 쌍방의 승부가 어떻게 판가름 났는지 자세히 알아보지는 못했지만백발노인이 백의괴인의 일격을 무사히 받아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람을 금치못했다.
백발노인은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서서히 왕세열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 사부는 어쩌면 아직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니 어서 확인해 보게.”
경악이 가득어린 표정으로 멍청히 서있던 왕세열은 이때 제정신을 차리고 얼른귀금마자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복면을 벗기자 50세 가량 되어 보이는 오관이단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입가에서는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안색이 약간꺼멓게 변해 있었지만 숨은 아직 붙어있었다.
왕세열은 격동에 찬 음성으로 크게 외쳤다.
“사부님, 정신 차리십시오.”
귀금마자는 의식을 잃은 채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백발노인은 품속에서 알약 한 개를 꺼내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귀금마자에게복용시킨 후 서서히 그의 체내로 공력을 주입시키며 내상을 치료해 주었다.
왕세열은 비통한 표정으로 귀금마자의 안색만을 초조히 지켜보고 있었다.
약 반 시진이 지나자 송장처럼 누워있던 귀금마자가 몸을 꿈틀거리며 서서히 의식을되찾았다.
왕세열은 그가 깨어난 것을 보자 만면에 격동과 희열의 빛을 떠올리며 크게외쳤다.
“사부님……”
귀금마자는 비록 그의 부친을 살해한 원수였지만 15 년 동안이나 그를 보살펴주고또한 일신의 절기까지 전수해준 하해와 같은 깊은 은혜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던것이다.
귀금마자는 왕세열이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을 보자 눈에 뜨거운이슬이 은은히 어리며 입가에 한 가닥 위안의 미소를 떠올렸다.
빛 잃은 그의 시선이 백발노인의 얼굴로 옮겨지는 순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선배님은!”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즐독입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