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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장 나와 결혼해 주시오
백발노인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답례를 했다.
귀금마자는 다시 왕세열에게 고개를 돌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나를…… 용서해 다오.”
왕세열의 얼굴에 격동의 경련이 일며 울먹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님, 무슨 까닭으로 저의 아버님을 살해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이제는 나도 곧 죽게 될 몸이니 모든 것을 얘기해 주마. 다만 나의 뜻을이루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아닙니다. 사부님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귀금마자는 처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나는 가망이 없다. 나는 그자를 15 년 동안이나 피해왔는데 끝내 그의독수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그자는 누구입니까?”
“이름은 모른다. 그저 백마(白魔)라고만 알 뿐이다.”
“백마……”
-백마(白魔)!
하dis 악마.
왕세열은 문득 짚이는 바가 있는 듯 얼굴에 경악의 빛이 스쳐갔다.
“혹시 그자가 바로 검해육우를 살해한 흉수가 아닙니까?”
백발노인이 갑자기 말을 받았다.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뇌전수는 숨을 거두기전 자기들을 해친 흉수 이름의 첫자를 남기고 죽었습니다.당시 그가 말했던 삼(三)자로 저는 그 흉수가 삼수흑호라 믿었고, 저 뿐만 아니라모든 사람이 그리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흉수로 단정 지었던 삼수흑호의 무공으로그들을 살해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일입니다. 더욱 삼수흑호는 혈해랑자등곤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등곤이 그녀를 살해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드뭅니다. 등곤은 삼수흑호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죽였는데, 어쩌면 이 모든 뒤에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부님이 사망전을 계속 찾고다니는 것에서……”
귀금마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의 추측이 옳았다. 검해육우를 살해한 것은 바로 백마의 소행이다.”
왕세열은 비통한 표정으로 귀금마자를 주시했다.
“사부님, 사부님이 무엇 때문에 저의 아버님을 살해했는지 이제 그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귀금마자의 표정이 금시 어둡게 변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건이 발생한 동기가 바로 애정문제 때문이었다.”
“애정문제 때문이라고요?”
“그렇다. 사실 나는 소혜문과 깊은 정을 나누었던 사이다.”
왕세열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말을 듣자 만면에 경악의 빛을 가득 떠올렸다.
귀금마자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왕세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계속했다.
“물론 너에게는 몹시 놀랄만한 소식이 되겠지.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왕세열은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으며 격동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사부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금마자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천천히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지난날 귀금마자과 소혜문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사이였다.
그들은 사소한 다툼으로 헤어지게 된 시련을 겪었다.
그 뒤 소혜문과 왕세열이 결혼하게 되자 귀금마자는 세상만사를 증오하게 되어그때부터 무자비한 살생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미 왕세열의 아내가 된 소혜문이 귀금마자의 앞에 나타나 눈물로용서를 빌며 다시 지난날의 연인사이로 되돌아갈 것을 애원했다.
그녀는 일부이처의 가정생활에 불만을 느꼈으므로 옛 애인인 귀금마자를 찾아와서신세한탄을 하며 단 둘만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자고 눈물로 하소연했다.
귀금마자는 소혜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처지였는지라 그녀의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끝내 동의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의 결합에 결정적인 장애물로 부각된 것이 바로 소혜문의 남편왕문청이었다. 때문에 귀금마자는 무림에서 제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는 왕문청을제거해 버리기 위해 구대문파의 비급을 훔친 후 곧바로 잠적하여 피땀을 흘리며열심히 무공을 연마했다.
그가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동안 소혜문은 열흘이나 혹은 보름간격으로 그를찾아와서 정을 통해 왔었다.
드디어 귀금마자가 구대문파의 비급을 완전히 습득하게 되자 소혜문이 다시 그를찾아와서 왕문청을 제거해 버리기 위한 세밀한 계획을 세웠다.
사건이 발생하던 날 소혜문은 계획대로 사전에 왕문청에게 무서운 독약을복용시킨다. 그로 인해 귀금마자는 간단하게 그를 제거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귀금마자는 오랜 숙원을 달성하게 되자 흥분을 금치 못하여 곧바로 소혜문이기다리고 있는 왕문청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때 마침 밖으로 달려 나온 채숙아와 맞닥뜨리게 되어 그녀마저 귀금마자에 의해부상을 입고 쓰러지게 되었다.
귀금마자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마당 안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소혜문의 방안에서웬 사내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혜문, 잠시 후 귀금마자가 왕문청을 살해하고 이곳으로 찾아왔을 때 우리가 다시그 얼간이 친구를 없애버리면 만사가 모두 해결이 날 것이오. 후일 당신이 남편을위해 복수를 했다는 구실을 내세운다면 강호에서는 아무도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게아니오?”
귀금마자는 그 말을 듣자 이때야 비로소 소혜문의 간교하고 음흉한 속셈을 간파하고치밀어 오르는 울분에 치를 떨었다.
이때 방 안에서 소혜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당신은 귀금마자를 처지 할 자신이 있나요?”
“흐흐흐…… 나는 그런 얼간이 친구쯤은 안중에 두지도 않고 있소. 설령왕문청이라 하더라도 역시 나의 적수가 못될 것이오.”
“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는 군요.”
그들이 이런 말을 나누고 있을 때 방안에서 별안간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새어나왔다.
곧이어 소혜문의 짜증스런 말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 어린 녀석은 어떻게 하지요?”
“처치해 버리면 되지 않소.”
“그건 안돼요.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왕문청이 저 아이의 몸에다 한 가지비급을 숨겨놓았어요.”
“그럼 우선 저놈을 데리고 함께 떠났다가 나중에 그 비급을 찾은 후 처단해버리도록 합시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방문 밖에서 엿듣고 있던 귀금마자는 그 말을 듣자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느닷없이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린 아이를 낚아채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가 미처 마당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을 때 소혜문과 함께 방안에 있던 30세 남짓되어 보이는 중년사내가 유성처럼 뒤쫓아 나와 귀금마자의 앞을 가로 막았다.
“핫하하…… 귀금마자, 당신은 나 백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백마라 자칭하는 중년사내는 한 차례 광소를 터뜨린 후 광풍폭우와 같은 맹렬한공격을 퍼부었다.
그의 무공은 과연 경이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었는지라 귀금마자는 3 초도 넘지못하고 1 장을 얻어맞아 심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귀금마자는 선혈을 토해내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난 후 노기충천한 모습으로 날카롭게외쳤다.
“이 개만도 못한 것들아, 후일 나는 너희들에게 보복을 하고야 말 것이다.”
백마는 음산하게 웃으며 서서히 그를 향하여 다가왔다.
“흐흐흐…… 친구, 잠꼬대 같은 소리 마시오. 당신은 오늘 살아서 이 곳을 벗어날수 없을 텐데 어찌 복수를 할 기회가 있겠소?”
귀금마자는 상대방이 방심을 하고 있을 때를 틈타 전신의 공력을 돋구어 3 초의맹공을 펼칠 후 쏜살처럼 몸을 솟구치며 담장너머로 빠져나갔다.
백마는 찰거머리처럼 그의 뒤를 바싹 쫓았다.
낭패한 꼴로 도주한 귀금마자는 어느 절벽에 이르게 되자 이판사판이란 생각이 들어마음을 독하게 먹고 상대방의 추격을 떼어버리기 위해 천야만야한 절벽 밑으로 몸을던졌다.
결국 그는 왼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어어린아이였던 왕세열을 안아들고 귀왕곡으로 가서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 * *
귀금마자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운명할 시간이 다가온 듯 호흡이 가냘프게변했다.
왕세열은 착잡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물었다.
“그럼 아버님의 죽음은 호보주 마라검마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겁니까?”
“그렇다. 나는 그자와 전혀 안면도 없는 사이다.”
“구대문파에서 훔쳐낸 비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귀금마자는 한 차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난 다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는 너를 귀왕곡에 데려다 놓은 후 내가 원래 거주하며 무예를 연마했던 곳으로돌아가 보았지만 이미 소혜문과 백마가 한 발 앞서서 비급을 가지고 종적을 감추어버렸지. 그래서 나는 너를 무림의 절정적인 고수로 키워서 복수를 하게끔 만들기로굳게 맹세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얼굴에 가벼운 고통의 경련을 일으키며 나직이 말을이었다.
“8 년 전 나는 소혜문이 신녀곡에서 겨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복수를하기위해 그녀를 찾아갔었지만 결국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못했다. 복수의 집념에 불타던 나는 문득 사망마회의 은신처가 적혀있는 사망전에생각을 돌리게 되었지. 사망마회를 찾게 된다면 어쩌면 일신의 절기를 터득할 수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부님은 사망전을 구하기 위해서 제 곁을 떠나셨던 겁니까?”
“그렇다. 내가 너보고 무공연마를 끝마치는 날 추풍보를 찾아가라고 지시했던 것은추풍보를 통해 모든 진상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제까지내가 너와 만나는 것을 회피해왔던 점을 용서해 다오. 사실 나는 복수의 염원을달성한 후 네 앞에 나타나서 사죄를 할 생각이었다.”
왕세열은 뜨거운 이슬이 가득 맺힌 눈으로 귀금마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귀금마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없이 말을 계속했다.
“이제 너는 모든 진상을 알게 되었으니 복수의 중임은 네가 맡아야 한다.”
왕세열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저의 아버님에게 신주혈괴란 친구가 있다고 하던데 혹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없습니까?”
“나는 그자를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다. 듣자하니 그는남해로 떠난 후 소식이 없어졌다고 하더군.”
“사부님은 제가 몸에 용패 하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너의 부친이 그 용패와 짝이 되는 봉패를 교분이두터운 어느 친구에게 주었다고 하던데 그 봉패를 소유한 사람이 바로 너의 아내가된다고 하더라.”
왕세열은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금시초문입니다. 제가 지니고 있는 이 봉패에 그런 내력이 있다면 저의어머님께서 어찌하여 말씀해 주시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그것은 아마 깜박 잊으셨던 모양인 것 같구나.”
왕세열은 침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귀금마자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열었다.
“참, 소문을 듣자하니 너는 마라검마의 유엽검에 부상을 입어 생명이 위태롭게되었다고 하던데 상처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구나. 사실 내가 다시 강호에나타난 것도 바로 그런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왕세열은 감격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씁쓸히 웃었다.
“절망적인 상처는 아니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망전을 얻게만 된다면 아마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겁니다.”
귀금마자는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품속에서 두 개의 사망전을 꺼내어왕세열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운명의 순간이 가까워진 듯 얼굴에 변화가 일어 차츰 변하면서 호흡이가빠졌다.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말씀해 보십시오. 저의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양하지않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내 대신 구대문파의 비급을 탈환해 주기 바란다.”
왕세열은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정도라면 제가해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반드시 그 비급을 탈환해서구대문파에 되돌려 주겠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는구나.”
귀금마자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한참동안 숨을 가쁘게 몰아쉬더니 더듬거리며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를…… 나를 용서해…… 주겠느냐?”
왕세열은 단장의 비애를 느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찌할 것인가? 부친을 죽인 원수,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있어서 생전에 다시없는은인이 아닌가.
그는 멍한 시선을 허공에 던진 채 얼마동안을 사색에 잠겨 있다가 길게 한숨을내쉬었다.
“사부님, 저는 세상에 다시없는 불효자가 아니 될 수 없군요. 당신은 나의원수이기 전에 은인이었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날까지 존재하지 못했을겁니다. 그러니어찌 내가 당신을 원수라 하여 당신의 가슴에 칼을 겨눌 수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지나간 일, 잊기로 하겠습니다.”
귀금마자의 입가에 한 가닥 위안의 미소가 스쳐가더니 곧이어 고개가 옆으로돌아가며 숨을 거두었다.
멍청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왕세열의 두 눈에서는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귀금마자는 비록 왕세열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범했지만 그 이면에는 남모를고충이 있었고, 또 지금에 와서는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그에게 은혜를베풀었으니 나름대로의 속죄는 했다고 볼 수 있다.
백발노인은 숯덩어리처럼 시커멓게 변해버린 귀금마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길게한숨을 내쉬었다.
“영웅의 말로가 비참하다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왕세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노 선배님, 아까 저의 목숨을 구해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네.”
백발노인의 말이 막 끝나는 찰나 별안간 경미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왕세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시녀차림을 한 두 명의 남의 소녀가 다가오고있지 않은가.
왕세열은 그녀들을 힐끗 쳐다본 후 관심이 없다는 듯 아예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는귀금마자의 시체를 안아들고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두 줄기 인영이 번뜩하며 방금 나타난 남의소녀들이 그의 앞을 가로 막아서며도도하기 짝이 없는 자세를 취했다.
왕세열은 안색이 일변하며 불길이라도 솟을 듯한 눈초리로 그녀들을 주시하더니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스쳐가며 일장을 내질렀다.
“뭐요? 왜 남의 앞길을 막는 거요?”
좌측에 선 남의시녀가 그의 이런 태도에 아랑곳없이 태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귀하가 바로 왕세열인가요?”
“그렇소……”
“우리 아씨께서 귀하를 모셔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왕세열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는 당신에 아씨와 안면도 없는 사인데 무엇 때문에 나를 청하는 거요?”
“그 이유는 귀하가 저희들을 따라가 보시면 곧 알게 될 거예요.”
왕세열은 일순 오리무중에 처한 느낌이 들어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들의 아씨란 도대체 누구요?”
남의시녀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했다.
“가보시면 금방 알게 될 거예요.”
왕세열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의 아씨가 누군지 먼저 밝히기 전에는 나도 그녀의 초청에 응하지않겠소.”
시종 침묵만을 지키고 있던 오른쪽의 남의시녀가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냉랭하게일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얘기해 드리죠. 우리 아씨는 바로 비마방(飛魔幇)에 몸을 담고 있는은나찰(銀羅刹)이에요.”
왕세열은 비마방이란 이름이 생소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뒤에 서 있는 백발노인은 안색이 대변일색하며 공포와 경악으로 가득 찬 눈을 들어두 남의시녀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왕세열은 뒤늦게나마 노인의 그러한 기미를 알아차렸던지 돌연 냉랭하게 코웃음을쳤다.
“흥! 나는 당신에 아씨와는 생면부지이므로 절대 가지 않겠소.”
“꼭 가야합니다.”
왕세열의 입가에 한 가닥 냉소가 스쳐갔다.
“두 분은 강제로 나를 끌고 가겠다는 것이오?”
“우리 아씨에게 초청을 받은 사람은 감사를 젖혀두고라도 반드시 응해야 해요.”
왕세열의 눈에서 한 가닥 분노의 화염이 번뜩이며 당돌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그녀의 초청에 응할 수 없소.”
이 말이 떨어지자 두 남의시녀의 안색이 서릿발처럼 싸늘하게 굳어졌다.
“귀빈 대접이 싫어 스스로 곤욕을 치르겠다는 건가요?”
오른쪽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들리며 수십 줄기의 인영이 벌 떼처럼 들이닥쳤다.
밀물처럼 몰려온 그들은 구대문파의 제자들이었는데 장중에 당도하기가 무섭게일사불란하게 사방으로 흩어지며 왕세열을 겹겹으로 에워쌌다.
왕세열은 그들이 난데없이 출현한 것을 보자 안색이 약간 변했지만 결코 당황하는기색 없이 그들을 한 차례 쭉 쓸어 보았다.
구대문파의 제자들 중 수뇌인물인 듯한 70세 남짓 되어 보이는 노승이 앞으로 성큼두 걸음 나서더니 귀금마자의 시체를 힐끗 쳐다본 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사부는 죽었는가?”
왕세열은 얼음장같이 쌀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이미 타계하셨소.”
“그럼 그가 훔쳐간 비급은 어떻게 되었는가?”
“너무 조급히 서둘 것 없소.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앞으로 1년 내에 비급을당신에 구대문파에게 되돌려 주겠소.”
이때 무당의 고수인 듯한 노도사 하나가 나섰다.
“그렇다면 자네가 구대문파의 제자 수십 명을 참살한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해결을 짓겠는가?”
왕세열은 안색이 변하며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당신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오?”
맨 먼저 입을 열었던 노승이 가볍게 기침을 하며 왕세열에게 눈길을 돌렸다.
“우리는 다만 자네가 구대문파의 비급을 되돌려 주기만 바라고 있네.”
“그것은 1년 내에 되돌려 드리겠다고 아까 이미 말했지 않소?”
“우리는 지금 당장 되돌려 받고 싶네.”
“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당신들은 어쩌겠다는 것이오?”
이 말이 떨어지자 장중의 분위기는 더욱 긴장이 고조되며 일촉즉발의 기미까지보였다.
노도사의 얼굴에 한 가닥 노기가 은은히 떠올랐다.
“그렇다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세열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사뭇 태연한 모습을 유지했다.
“자신이 있다면 얼마든지 무력을 사용해도 좋소.”
노도사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안색이 푸르락붉으락해지더니 별안간벽력과 같은 노성을 지르며 풍협잔운(風狹殘雲) 초식을 전개하여 왕세열의 가슴을향해 장검을 날카롭게 뻗어냈다.
그가 공격을 펼친 것과 거의 같은 시각에 오른쪽에 서있던 남의시녀가 앙칼지게외쳤다.
“죽고 싶지 않다면 경솔한 행동을 삼가세요!”
그녀는 번개같이 몸을 솟구치며 쌍장을 휘두르자 노도사가 뻗어낸 장검은 마치무형의 담장에 부딪친 듯 막강한 탄력에 의해 뒤로 퉁겨졌다.
왕세열은 그런 광경을 보자 비로소 남의시녀의 무공이 얕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있음을 간파하고 가슴이 섬뜩해 졌다.
남의시녀는 가볍게 노도사의 공력을 물리친 후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호통을질렀다.
“더 이상 경거망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가차 없이 목숨을 앗아버리겠어요.”
노승은 안색이 확 달라지며 경악이 충만된 시선으로 그녀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여 시주는 누구요?”
“우리는 비마방 은나찰의 휘하에 있는 시녀들이에요.”
장중에 있던 구대문파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중인들의 얼굴에 역력히 어린 놀랍고 공포의 빛을 통해 비마방이 보통조직이 아님을한눈에 엿볼 수 있었다.
남의시녀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말은 계속했다.
“왕세열은 본방의 방주가 초청한 사람인데 만약 당신들이 그의 몸에 있는 털끝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내 손에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믿지 못한다면 얼마든지시험해 보아도 좋아요.”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위험의 성질이 다분히 어린 그 말을 듣자 모두 전전긍긍한모습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른 한 명의 남의시녀가 마치 명령을 하듯이 왕세열에게 냉담하게 말했다.
“이만 떠납시다.”
왕세열은 냉소를 머금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나는 생판도 모르는 사람의 초청을 거절하겠다고 이미 말했었지 않소?”
“귀하는 끝내 고집을 부리겠다는 것인가요?”
“그렇소.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당신들의 초청을 거절하겠소.”
그들이 이런 말을 나누고 있을 때 왕세열의 맞은편에 서있던 노승이 갑자기 노성을질렀다.
“비마방은 비록 당금 무림의 사람들에게 공포스런 명사로 부각되어 있지만 우리구대문파의 사람들은 비마방을 두려워하지 않소.”
고막을 찢을 듯한 우렁찬 외침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는 느닷없이 몸을솟구치며 이성을 잃은 야수처럼 왕세열을 향해 덮쳐들었다.
조금 전 노도사를 물리쳤던 남의시녀가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며 번개같이 1 장을휘둘러 그의 공격을 차단시켰다.
이 무렵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수십 명의 고수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을 지르며일제히 왕세열을 향해 노도처럼 공격해왔다.
나머지 한 명의 남의시녀는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날렵하게 허공으로 치솟아오르더니 쌍장으로 원을 그리며 맹렬히 휘둘렀다.
“으악!”
“윽!”
밤하늘의 경적을 깨뜨리는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잇달아 울려 퍼지는 가운데아비규환의 참상이 펼쳐졌다.
이내 한쪽 옆에 처져서 시종 방관을 하고 있던 백발노인이 별안간 왼손으로왕세열의 허리를 휘어 감으며 다급히 외쳤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으니 어서 떠나세.”
그는 외침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왕세열을 옆구리에 끼어들고 허공으로 몸을솟구치며 박쥐처럼 포위망 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의 신법은 비할 데 없이 쾌속했으나 불과 서너 번 몸을 솟구치는 사이에 이미수십 장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백발노인은 건너편 산봉을 향해 단숨에 1 장 가량 치달려 간 후 왕세열을 바닥에살며시 내려놓았다.
왕세열은 의혹이 가득 어린 표정으로 백발노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선배님, 비마방은 대체 어떤 조직입니까?”
백발노인의 얼굴에 금시 어두운 그늘이 덮였다.
“비마방은 몇 달 전에 새로이 강호에 등장한 신비스런 조직인데 당금 무림에서 그조직의 내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비마방은 중원 무림이 아닌 외지에서 온 세력이며 그 신비스런 조직을 통솔하고있는 방주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번도 없었네. 그러나 풍문에 따르면비마방주의 무공은 화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지라 누구도 비마방주를 맞이하여 3초를 넘기지 못한다고 하더군.”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백발을 바람에 날리며 잠시 숨을 돌리고 다음 말을계속했다.
“비마방이 그동안 무림에서 몇 차례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었네. 청의방(靑依?)과뇌풍교(雷風敎)가 비마방에 가입을 종용받고 이에 항거하다가 멸문의 화를 입게 된것일세.”
왕세열은 그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그 뿐만이 아닐세. 중주쌍검(中州?劍), 옥면괴객(玉面怪客),오막신개(五?神?) 등 무림의 쟁쟁한 일류 고수들이 모두 비마방의 독수를 받고비명에 가고 말았네.”
왕세열은 의분을 금치 못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실로 진악 무도한 무리들이군요.”
백발노인은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잔혹한 수법도 서슴지 않고자행해 왔었네. 때문에 당금 강호의 무수한 고수들이 모두 그들의 협박에 못 이겨비마방에 가입하고 있는 심정일세.”
왕세열의 얼굴에 짙은 의혹의 빛이 스쳐갔다.
“비마방주가 무엇 때문에 나를 만나려 했는지 궁금하군요.”
“그것은 아마 포섭대상으로 점 찍혀 있기 때문일 걸세.”
왕세열은 냉소를 머금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대상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나 왕세열은 결코 그런 협박에 넘어갈겁쟁이는 아닙니다.”
백발노인은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띠며 왕세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화제를 바꾸었다.
“비마방 외에도 최근 또 다른 하나의 조직이 강호에 출현했네.”
“그게 어떤 조직입니까?”
“그것은 다만 이름만 알려졌을 뿐이지…… 소속된 수하 인물들은 아직껏 강호에서활동한 적이 없고 다만 그 대표적인 인물인 유령인(幽靈人)만이 몇 차례 출현하여중원무림에서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네. 그런데 그 유령인이라는 자가 이름 그대로유령인지 아니면 사람인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네.”
“음……”
왕세열은 그 말을 듣고 신음 비슷한 한숨을 불어냈다. 백발노인이 느릿느릿 말을이었다.
“무림에는 머지않아 일대의 살겁(殺劫)이 일게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네.”
왕세열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조용히 물었다.
“선배님의 존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백발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다.
“노인의 이름은 물을 필요가 없네. 나는 아까 백마와 일장을 겨루었을 때 내상을입었는데 이만 자네와 작별을 하고 상처를 치료해야겠네.”
왕세열은 그 말을 듣자 대경실색해졌다.
“선배님, 왜 진작 제가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자네에게 알린 겨를이 없어 말을 하지 않은 것인데 예상외로 상세가 중해 급히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니 이만 가봐야겠네.”
백발노인은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땅을 박차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허공 멀리사라져갔다.
왕세열은 싸늘하게 굳은 귀금마자의 시체를 안장시킨 후 사망전 여섯 개를 꺼내어순서대로 나열해 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형성되었다.
<천산매령황성(天山梅嶺皇城)>
왕세열은 이것을 바라본 순간 얼굴에 실망의 빛이 가득 어렸다.
‘아……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구나. 나의 생명은 고작 3일 정도 밖에 남지않았는데 어떻게 그 기한 안에 천산으로 가서 사망마희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이곳에서 천산까지 가려면 적어도 열흘은 소비해야 되지 않은가.’
가슴에 움터있던 한 가닥 희망이 무참히 사그라져 버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무한한좌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렇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오직 죽음의 순간만을 조용히 기다리는것뿐이다.
왕문이 실의에 가득 젖은 표정으로 멍청히 서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꾀꼬리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왕 소협……”
왕세열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나타났는지 귀금마자로 가장했던남숙령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남숙령은 우수의 빛이 은은히 어린 표정으로 귀금마자의 무덤을 힐끗 쳐다보고 난다음 조용히 물었다.
“영사께서는 별세하셨나요?”
“그러소. 돌아가셨소.”
“영사는 저 때문에 죽게 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저를 용서해 주세요.”
남숙령은 목 메인 음성으로 말을 끝마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왕세열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낭자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오. 오히려 내가 낭자에게 감사를 드려야옳은 것이오. 만약 낭자가 가사의 이름을 빌어 행세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분을 만나뵙지 못했을 것이오.”
남숙령은 눈물이 가득 어린 시선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소협은 정말 절 원망하지 않으시나요?”
“물론이오. 방금도 얘기했듯이 나는 오히려 낭자의 호의에 깊이 감사하고 있소.”
“왕 소협……”
남숙령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갑자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울음을 터뜨렸다.
두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그가 용서를 해주었다는데 대한 감사의눈물일까, 아니면 그를 향한 애정을 표시하는 눈물일까.
왕세열은 내심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묵묵히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껴 울던 남숙령은 한참 후에야 울음을 그치고천천히 고개를 쳐들어 왕세열을 바라보았다.
왕세열은 비에 젖은 백화 꽃을 연상케 하는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모습을 대하자무한한 유혹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갖다 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한데 포개지는 순간 남숙령은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온 몸을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경험해보는 뜨거운 입맞춤에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어 일순무한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한참 후 그녀는 살며시 왕세열의 입술을 떼어내며 얼굴에 한 가닥 홍조를떠올렸다.
“왕 소협, 당신은…… 저를 사랑하시나요?”
왕세열은 멍청히 그녀를 주시하며 일시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는지옥마화를 제외한 다른 여자에게는 아직까지 사랑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때문이다.
왕세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씁쓸히 웃었다.
“그것은…… 나도 잘 모르겠소.”
“뭐라고요? 모르겠다고요?”
왕세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조금 전의 입맞춤이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면 나는 낭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같소.”
남숙령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은은히 스쳐갔다.
“그것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진심이오.”
남숙령은 무한한 희열과 격동이 엇갈린 시선으로 왕세열을 응시하며 입술을 몇 번꿈틀 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알 수 없었던 것이다.
왕세열은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눈에서 이상한 광채를 번뜩이며 그녀를뚫어지게 응시했다.
“남 낭자, 낭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소?”
“예, 사랑해요.”
“그럼 낭자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들어 주시겠소?”
“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사양하지 않겠어요.”
왕세열은 갈망과 초조한 빛이 교차된 시선으로 그녀를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더니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와 결혼을 해 주기 바라오.”
“뭐라고요?”
남숙령은 놀람에 가득 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치며 무의식중에 뒤로 세 걸음 물러선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는 왕세열에게 뜻밖의 청혼을 받게 되자 내심 놀람을금치 못하며 넋 빠진 사람처럼 멍청하게 변했다.
왕세열은 숙연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낭자의 의향은 어떻소?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소?”
남숙령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째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왕세열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덮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는 혹시 내가 유엽검에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남숙령은 놀람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어요.”
“그럼 내 생의 기한이 3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을 것이라믿소. 때문에 나는 이세를 탄생시켜 나를 위해 복수를 해주게 되기를 바라고있소.”
그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이것은 몹시 비합리적인 요구란 것을 잘 알지만 나는 부득이 그렇게 할 수 밖에없는 것이오. 만약 낭자가 나를 위해 희생해 주겠다면 나는 저승에 가서도 영원히낭자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이오.”
남숙령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사망전을 이미 입수하게 되었지 않은가요?”
“그렇소. 나는 여섯 개의 사망전을 모두 얻었소.”
“그럼 당신은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이토록 자포자기하는건가요?”
왕세열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시간적 여유가 없소. 사망마희를 만나려면 천산까지 찾아가야하는데 이곳에서 천산까지 가려면 적어도 열흘은 소요해야 될 것이오.”
남숙령은 이맞살을 잔뜩 찌푸린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왕세열이 암담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는 낭자에게 당돌한 청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오. 이것은 낭자에게있어서는 몹시 잔혹한 일인데 나의 청혼에 승낙해 주겠소?”
남숙령은 눈살을 찌푸리며 머뭇거렸다.
“나는…… 나는……”
왕세열의 얼굴에 실망의 그늘이 가득 어리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길게내쉬었다.
“낭자가 싫다면 더 이상 간청하지 않겠소.”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이던 남숙령은 드디어 어떤 결단을 내린 듯 입술을지그시 깨물었다.
“좋아요. 저는 당신과의 결혼을 승낙하겠어요.”
실의에 젖어 있던 왕세열의 얼굴에 희망과 격동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게 정말이오?”
남숙령은 갑자기 왕세열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울음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나는 어떠한 희생도 치를 용의가 있어요.”
왕세열은 그 말에 몹시 감격한 듯 두 눈에 금시 뜨거운 이슬이 가득 맺히더니곧이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다! 이것은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일생 행복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여자가 과연천하에 얼마나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한참 동안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왕세열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열었다.
“우리는 이만 떠납시다.”
“어디로 가는 거죠?”
“3일 간 같이 지낼 우리의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오.”
남숙령의 얼굴에 우수의 빛이 은은히 어렸다.
“만약 그 기한 안에 제가 잉태를 하지 못한다면 어쩌지요?”
왕세열은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나에게 그토록 가혹한 운명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오.”
“그럼 이제 그만 떠나요.”
왕세열은 땅에 놓여 있던 철금을 주워들고 그녀와 함께 서서히 떠났다. 그들은발길이 닿는 대로 맹목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ㄳ
잘 읽었습니다.
즐독입니다 ~~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