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4 수난: 머리에서 가슴으로 시 118:1-2, 19-29; 사 50:4-9a; 빌 2:5-11; 막 14:1-15:47
오늘은 교회력으로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이면서, 종려주일 혹은 수난주일이라고 합니다. 사순절이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라고 한다면, 종려주일, 수난주일은 주님의 고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극한, 견디기 힘든 고난-수난입니다. 왜 수난일까라는 물음을 이번 사순절 기간 지속적으로 묵상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이 되고, 주님의 수난이 우리의 수난이 됨으로, 주님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길 원했습니다. 많은 경우 그 의미의 동참으로 십자가를 지닙니다. 십자가를 보는 순간 주님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르겠다는 결단과 다짐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십자가는 아름다운 형상, 이미지, 예쁜 장식으로 고난의 의미와는 전혀 상반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게 전혀 다른 쪽으로 바뀌었는지, 아마도 고난 이후의 승리나 성공의 다른 측면이 부각되어서 그럴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십자가도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십자가, 두 개의 이미지, 한 분 하나님, 다른 하나님, 사람에 따라, 해석에 따라 여러 갈래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종려주일은 유대백성을 구원해 주실 왕으로서의 귀환이나 입성의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새로운 유대를 의미합니다. 로마의 강압에서 벗어난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의 입성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합니다. 압제자 로마가 볼 때, 전혀 반란으로 볼 수 없습니다. 힘도 백도 없는 예수, 입성도 조그만 조랑말, 짐도 한번 실어보지 않은 조랑말을 탄 입성입니다. 환호하는 백성의 손에는 창과 칼이 아닌 종려나무 가지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기대는 무엇이었을까요? 힘과 권력, 무력의 변혁이 아닌, 오롯한 예수의 방법-사랑의 변혁, 고난과 수난의 변혁을 알았던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숨죽이고 조롱과 침뱉음 등등의 허무로 막을 내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의 힘없는 환호는 막연한 기대감이었습니다. 일부의 바람잡이, 혹은 그간 예수의 행보나 소문은, 예수의 입성으로 무엇인가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둘 모이면서 군중이 되었지만, 힘없는 무리이고, 막연한 기대입니다. 어차피, 가진 게 없기에 잃을 것도 없는 이들의 집합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며칠 후의 고난, 수난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복음서 본문은 예수의 심정을 십분이해 할 수 있는 장면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는 나병으로 고생하던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물면서 식사중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면 지금 음식이 목으로 넘어 갈까요? 그럼에도 예수의 행보는 나병환자의 집, 본문으로 정확한 해석이 어렵지만, 나병 환자 시몬과 함께 하는 것으로 마지막까지 가장 약한 자와 소외된 자, 외로운자, 고통에 있는 자와 함께 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 순간 한 여인이 매우 값진 순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 위에 붓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이 말하기를,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겠다” 라고 하면서 그 여인을 나무랍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년 치 품삯이라고 합니다. 1년 노동의 대가를 그냥 쏟아버린 것입니다. 말 그대로 허비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그들의 말처럼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더욱이 예수 앞에서 큰 소리 칠 만합니다. 예수의 마지막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항상 예수의 주장이나 가르침은 가난한 자였습니다. 때문에 큰 소리 칠 만 합니다. 저 여인의 행동은 욕먹을 만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녀의 행동을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알려야 할 일이라며 최고의 찬사를 보냅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까울 뿐인데...
최근 아내는 사회복지사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안쓰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한 열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합니다. 이와 동시에 언젠가 모 집사님의 물음은 계속해서 긴장을 줍니다. 교회와 복지단체의 차이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우선순위에 둔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결정적 치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기독교의 독특성,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마지막, 수난 앞에서, 그 수난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 수난은 믿었던 이들에게서의 배신과 배반입니다. 그 수난은 환호했던 이들의 조롱입니다. 사랑하던 이들의 모른다는 부인과 외면, 심지어 저주입니다. 학대, 수모, 치욕, 폭력, 폭언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이런 수난 앞에서 조차, 가난한 자, 소외된 자와 함께 하던 예수입니다. 그의 머리 위에 부어진 혹은 허비된 매우 값진 순나드 한옥합, 이와 대조되는 1년치 노동의 품삯을 가난한자에게...결정적 차이는 마음에 있습니다. 온몸으로 피를 돌게하는 심장에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강력한 생명력입니다.
빌립보서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따르라고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다’ 이해가 됩니까? 말이 됩니까? 세상 그 어느 곳이든, 어느 종교든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다’ 이런 경우는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사이비 교주입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망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아보이지만, 결국 비참하게 끝이 납니다. 그러나 전자 곧 신이 인간이 된 경우는 처음에는 비참해보이고, 말도 안되는 경우 같아 보이지만, 종국에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모자랄 만큼 아름답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고난으로 세상을 보듬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을 녹이며 세상을 밝히는 초와 같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일, 종려주일, 수난주일,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길 다시금 두손모읍니다. 침묵!
240324 시 118:1-2, 19-29; 사 50:4-9a; 빌 2:5-11; 막 14:1-15:47
시 118:1-2, 19-29
1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이스라엘아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여라.
19 정의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20 이것이 주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21 주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22 건축하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23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24 이 날은 주님이 만드신 날, 우리 모두 2)주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25 주님, 간구합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나를 건져내 주십시오.
26 주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
27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다. 3)나뭇가지로 축제의 단을 장식하고, 제단의 뿔도 꾸며라.
28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 기리겠습니다.
29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사 50:4-9a
4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5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6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8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9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빌 2:5-11
5 1)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2)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막 14:3-9
3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3)나병으로 고생하던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무실 때에,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한 여자가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4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는 삼백 4)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
6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가만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7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9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세상 어디든지, 5)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