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부독재가 대한민국 모든 영역에서 음혹함이 극에 달했던 1976년 잡지 하나가 창간되었다. <뿌리깊은 나무>. 당시 <신동아>가 2만 부 정도 발행되던 시절에 6만에서 많게는 8만 부까지 발행했던 대한민국 잡지사에 길이 남을 잡지였다.
우리 잡지들이 국한문혼용과 세로 쓰기가 정석이던 시절에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전용'과 '가로쓰기'였다. 잡지사의 혁명이라 할까? 이 잡지를 펴낸이가 '한창기'였다.
잡지 형식에만 혁명성을 담은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는 민중까지 담았다. 박정희 군복독재의 엄혹함 속에서도 민중과 민족을 담아 글로 표현했다. 민족과 민중을 문화로 담은 잡지를 신군부는 1980년 8월 폐간조치하였다.
한창기는 굴하지 않고 1984년 <샘이깊은 물>을 펴냈다. 일반 여성잡지와 차원을 달리하는 잡지였다. 군부독재정권이 민중과 민족 문화를 압살하여 <뿌리깊은 나무>를 폐간조치하였지만 한창기는 <샘이깊은 물>을 통하여 부활했다.
쉰아홉명이 모여 한 사람을 기리다
그가 간 지 11년째다. 그를 아는 이들 쉰아홉명이 모여 <특집, 한창기>를 냈다. 참여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이렇다.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 두 잡지의 탄생에서부터 절명까지를 되짚어 본 유재천. "한국 잡지사는<뿌리깊은 나무>이전과 <뿌리깊은 나무> 이후로 구분된다"고까지 한 강준만 교수, 두 잡지 편집장을 지냈던 윤구병, 김형윤, 설호정까지. 특히 이들이 시대별로 쓴 '나의 편집장 시절'은 <뿌리깊은 나무>의 족적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뿌리깊은 나무>기자 출신었던 전 문화부장관 배우 김명곤, 그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편집자'라 평한 <오마이뉴스 >정치부장 김당 등 그 두 잡지 기자 출신들, 박원순 변호사, "동무들이 리영희를 읽을 때 나도 리영희를 읽었지만 동무들이 <사상계>를 읽을 적에 나는 <뿌리깊은 나무>를 읽었다"는 칼럼니스트 김규항을 통하여 우리는 '한창기'를 만날 수 있다.
쉰아홉 사람이 글로 한사람을 기린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11년된 육신은 썩어 문들어졌지만 정신이 남아 있기에 육신 장막이 아직도 세상에 머문 이들이 그를 기리기 위하여 글을 모았고, 그가 갔던 길을 반추했으리라.
"동양 사람 중에 이보다 더 영어 잘하는 사람 못 봤다"
서울 법대를 나와 법조인으로 탄탄대로가 열렸지만 그는 세일즈맨의 삶을 택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지사 창립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직판 세일즈맨 1세대였다. 어쩌면 탁월한 영어 실력이 그로 하여금 법조인이 아니라 세일즈맨, 나중에는 잡지를 통한 문화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영어 천재였다. 브리태니커 부사장이 한창기 영어를 듣고 “동양 사람 중에서 한창기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찬탄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영어 실력인가?
하지만 그는 '우리말'을 팽개치지 않았다. 영어를 잘한다고 우리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말을 사랑했다. 우리말을 사랑한 것뿐만 아니라 잘했다. 국어학자가 그에게 와서 울고 갔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하니 언어에 조예가 깊었다.
영어와 일본어로 죽어가는 우리말을 되살리려 그는 노력했다. 당시 이미 우리말은 영어투 일본어투로 본래 우리말 형식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를 민중말과 본디 우리말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노력했다.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 잡지이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영어에 목숨거는 이들, 한창기를 아는가?
박정희식 사고가 지배하던 시절 그는 조용한 방법으로 저항했다. <뿌리깊은 나무>는 그 방편이었고, 그는 그렇게 살았다. 영어 천재였지만 그는 우리말 살리기에 일생을 보냈다. '한창기'를 떠올리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지금 우리가 '영어몰입교육'에 목숨을 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만이 살 길이라고,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는 길이라고 외치는 이들이 우리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말을 잘하는 것이 다른 나라말도 잘하는 일임을 그들은 왜 모를까? 우리말은 왠지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없는 존재까지 되어버린 우리 시대를 보면 '한창기'는 뭐라 할까?
그는 영어천재였지만 영어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말로도 삶을 풍요롭고 따뜻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살았다. 우리말을 망각하고서는 결코 우리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없음을 또한 보여주었다.
영어몰입교육에 대한민국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한창기'를 아시는가? |
첫댓글 그래 모국어는 모국어이지요. 그런 대접 고맙습니다.
부끄럽군요.
국어사랑, 국어순화 당연히 해야합니다.
근본을 잃지않고 조화롭게 산다는게 참 중요한데 보이지않더라도 그런 영혼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결국은 새시대의 밑거름이 되는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