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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요함의 목적
나는 예수님께서 부요하셨다는 것을 왜 믿는지 조심해서 여러분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부요함은 많은 부와 세상의 소유를 쌓아둔 것으로 측량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들판의 양과 가축들을 굽어볼 수 있는, 방마다 금이 가득한 왕궁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삶의 양식은 화려하지도 낭비하지도 않았으며 그분은 소유욕과 탐심을 따라 살지도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로마의 강한 권력이 다스리는 작은 마을에서 예수님의 개인적인 필요는 충족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유롭게 온 나라를 두루 다니며 그분의 아버지의 사업을 하셨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갈릴리 지방과 이웃 지역에까지 그분과 함께 여행을 했던 열두 명의 제자들 모두의 필요와 경비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비교적 풍성한 자원을 가지셨을까요? 이런 자원이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하나님이 인도하는 곳에는 그분이 공급도 하신다"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요함의 목적은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요한복음 3장 6절과 17절은 그것을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최우선 관심은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고 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은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모범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14:12).
※ 당신의 동기를 확립하라
우리가 부요하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부요하게 되고자하는 우리의 동기도 예수님의 것과 똑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설교자들을 포함해서 그분의 사람들이 세계의 도시와 마을을 다니며 가르치고 설교하고 다른 사람들도 갈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소유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경제에 있어서 부요함은 한 목표, 즉 세계 복음화를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왜 부요하기를 원합니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과 자신을 위한 것 중에 어느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큰 집과 뽐내고 싶은 자동차, 비싼 옷, 고급 음식, 화려한 오락과 같은 삶의 사치스러운 것들을 즐기기 위해서 입니까? 왜 부요하기를 바랍니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빈약하고 여유가 전혀 없는 겨우겨우 사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구약성경의 구절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부요함, 즉 풍성함, 차고 넘치는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편 35편 27절은 "그의 종의 평안함(prosperity, 부요함, 형통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쓰레기를 주우며 그날 벌어서 그날 먹고 사는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신의 관심과 시간이 오직 돈과 세상의 소유에만 초점을 맞추고 화려하게 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물질적인 삶에도 균형과 상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공부해 보면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가든지 자기 비용을 스스로 치르면서 보통 사람들과 편안히 섞이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한 사람을 우리는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요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면서도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세리 삭개오 같은 죄인들의 집은 물론 바리새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집에도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록된 기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 장소였는데 그곳에서 그분은 여러 개의 큰 항아리의 물을 잔치를 위해서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요한복음 2장을 보십시오).
산 위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2-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계속해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질 수 있을지 한계를 정하시는 것 같이 들립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단지 우리가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기를 바랄뿐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풍성하심(riches)은 결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분께 속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일에 너그럽게 즐겁게 드리기를 촉구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필요한 모든 것과 그 이상을 주시므로 여러분이 낸 것을 보충하여 주실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필요가 넉넉히 채워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즐겁게 주고 남을 만큼 충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고후9:8 TLB번역)라고 말했습니다.
※ 위대한 사명을 달성하려면 하나님의 백성은 부요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부요함을 구할 때 우리는 복을 받을 것과 부요하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관하여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같은 사명을 실행하도록 임무을 주어 세우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온 창조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신이 온 세상에 다니며 모든 창조 세계에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므로 우리에겐 해야 할 아주 거대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재정을 확보하려면 우리는 물론 부요한 가운데 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의 위대한 사명을 수행하려면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지적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선 우리는 우리의 예루살렘, 즉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순절날 그 다락방에 모였었던 120명 대부분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그들의 동네였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유대, 즉 우리 지역에 증인이 되어햐 하고 그 다음에는 이웃 지방, 즉 우리의 사마리아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땅 끝까지도 복음을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은 위대한 사명을 달성할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재정이 없이는 그들이 온 세상에 다니기도 어렵고 다른 사람들을 보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이 부요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뜻이요 그분의 계획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십일조와 헌물을 통해서 재정이 후원되는 것이 전형적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수확한 것이나 곡물 혹은 증가한 것의 십분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드린 것으로 하나님의 집과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돌보게 하였고 땅위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였습니다. 십일조라는 주제에 관한 한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성경 본문은 말라기서에서 발견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3:10-12)
이 말씀에서 우리는 십일조가 부요함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수입에서 십일조를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 한없는 복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확의 풍성함과 그의 소산물이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십일조를 드린 자를 복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음을 주의하십시오. 말라기 3장 11절은 흠정역으로 "내가 너를 위하여 삼키는 자를 쫓아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십일조는 교회와 교회의 구원 사역을 재정 후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 왜 우리는 이런 축복을 경험할까요? 물론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어떤 것이나 그 돈이 하나님께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고 있는 일에 참여하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한 회중의 십일조를 합하면 한 교회의 전도를 후원하는 재정을 넉넉히 공급하게 됩니다. 즉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며, 선교 사역을 후원하고, 때로는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들입니다.
일반적인 원칙으로써 나는 사람들이 그들이 다니는 지역교회에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역교회야말로 하나님께서 땅 위의 사람들을 축복하시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사용하시는 통로라고 나는 항상 믿고 또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사역들은 개인들이나 교회들로부터 나오는 다른 헌금과 여러 형태의 재정적인 후원에 의해 후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십일조는 자기가 다니는 지역교회에 드려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목적과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수행하시는데 동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큰 성취감과 만족감을 가져다 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한 물질적 복을 부어주시도록 하는 창문들을 여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대해 내가 발견한 가장 흥미로운 가르침은 '부에 이르는 길(The Path to Wealth)'이란 제목의 1888년 티. 에스. 린스캇(T. S. Linscott)이 출판한 책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영적인 복이나 현세적인 복 모두가 하늘로부터 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 하늘이 있는데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나는 곳으로서 우리의 대기권이며 또 하나는 태양과 별들이 있는 하늘이고 마지막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세적 축복, 즉 모든 개인의 부요나 국가적 부요함, 모든 물질적 부, 한마디로 우리의 부요함은 땅과 하늘들로부터 옵니다. 땅의 소산이 전적으로 공기의 이슬과 비와 하늘의 태양 볕에 달렸듯이 우리는 실제적으로 우리의 모든 현세적 축복이 하늘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맹세하시기를 하나님의 축복, 즉 넘치는 복을 '쌓아두고, 누르고, 흔들어 쏟아 붓도록' 하늘 창문들을 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현세의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맹세가 있습니다. 나는 이 맹세를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이라서 이 조건을 만족시키고 그 결과를 기대하는 모험을 감수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부요함을 주거나 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는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천국에 저장된 것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요하게 할 만큼 충분한 부이며 내가 맹세를 받은 나의 하나님은 언제든지 작은 창문 하나를 열고 그분의 부드러운 축복의 소낙비를 내게 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면 그 축복은 우리가 물질적인 것들이 필요한 한은 나의 소유로서 나의 필요를 공급해 줄 것입니다.
이런 풍성하고 귀한 약속들은 우리가 그 조건에 맞고 우리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 때만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생각과 설교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헌신에 관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거나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 수증기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을 갖게 합니다. 불신앙은 문자 그대로의 현재 시제의 약속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 약속들은 문자 그대로 의미하는 것이며 물질적인 것이며 지금 여기 즉 땅위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들은 우리에게 도전을 하게 하거나 하나님과 타협을 하게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돈을 드린 것에 대해서는 돈으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십분의 일을 내면 내가 땅 위의 물질적 축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손에 기계를 잘 만지는 기술을 주어 네 고용주가 네 편이 되게 하며 너는 최고의 임금을 받게 되고 파업이 네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내가 너와 함께 하므로 너의 필요가 공급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사업가로서 부요케 하겠다. 내가 너를 어디에 수익성이 좋은 사업 기회가 있는지 이끌어 줄 것이며 사람들을 네게 보내서 물건을 사도록 하고 네 옆집에 사는 나를 무시하는 그 사람은 부도를 낼지라도 그런 저주가 네게 임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너의 청구서의 지불 날짜가 다가오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가 너의 은행 구좌에 그것을 지불할 넉넉한 돈이 있도록 해 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너의 동업자로서 네 사업의 이익을 위해 주의해 볼 것이다. 또한 머리를 써서 생활비를 벌고 있는 지식 산업 종사자들아! 나는 너희 생각을 분명하게 하도록 해 주겠다. 나는 네게 '살아 숨쉬는 생각들과 훨훨 불타오르는 말'을 착안하도록 하는 거룩한 자극을 주고 네가 말하거나 쓰는 것은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시키며 네 작품이 잘 팔리게 하며 사람들이 네 가슴과 머리에서 나온 작품들을 사도록 만들겠다. 너는 단지 너의 십일조를 내게 지불하면 너는 나의 돌봄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 농부들아! 씨 뿌리는 시기와 추수하는 시기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내가 너희 농작물을 축복할 것이며 너의 가축들을 배가시키고 네 농장을 잎마름병과 흰가루병에서 지켜 주겠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임을 기억하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한 것처럼 네게 축복할 것이니 그들처럼 너는 나를 기억하라. 내가 너희 모두에게 건강을 주어 죽음이 네 어린 자식들을 빼앗지 못하게 하며 네 자식들이 나이가 많이 들도록 살도록 할 것이며 내가 하늘 창문들을 열고 복을 받아 둘 곳이 부족하도록 복을 줄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성경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 오늘 십분의 일을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제 친숙해진 이 성경 구절들과 성경의 다른 곳에 약속된 이 놀라운 축복은 순종에 대한 대가로서 그저 단순한 현세적인 부요함 이상을 의미합니다. 물질적 부가 쏟아지는 하늘 창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위 하늘 즉 하늘나라의 중심을 여시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충만함으로부터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영광으로 가득찬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