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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 가야산해인사 /법보사찰 (法寶寺刹)
합천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순응과 이정이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되었다. 의상의 화엄 10찰 중의 하나이고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의상의 법손 순응이 화엄사상을 펴고자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사찰의 이름을 따왔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팔만대장경을 이곳에 옮김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의 요람이 되었다.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한 장경각은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건물로 평가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장경판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200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역사적 변천
의상(義湘)의 화엄10찰(華嚴十刹)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주1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佛事)를 도와 전지(田地) 2,500결(結)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法孫)주2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創寺)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福田)주3이었던 희랑(希朗)이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寺刊藏經) 중에 화엄 관련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寺宇)주4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뒤 세조는 장경각(藏經閣)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仁粹王妃)와 인혜왕비(仁惠王妃)가 학조(學祖)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寮舍: 사찰의 승려들이 사는 집)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에 화재로 여러 요사와 만월당(滿月堂) · 원음루(圓音樓)가 불탔으며,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無說殿)이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또 화재로 인해 큰 축대 아래 수백 칸이 불타 버렸지만,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의 도움으로 능운(凌雲)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수로 불이 났으나 관찰사 김상철(金尙喆)의 협조로 설파(雪坡)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惺坡)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천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金露敬)의 도움으로 영월(影月) · 연월(淵月)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법성료(法性寮)가 다시 불에 탔다. 이와 같이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敎宗) 18개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元興寺)를 전국의 수사찰(首寺刹)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中法山)을 두었을 때는 영남 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0본산(本山)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현황>
현재는 말사 172개와 부속 암자 16개를 거느리고 있는 법보종찰이며, 선원(禪院) · 강원(講院) · 율원(律院) 등을 갖춘 총림(叢林)으로서 한국불교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 · 극락전 · 관음전 · 응진전 · 조사전 · 퇴설당(堆雪堂) · 청화당(淸和堂) · 궁현당(窮玄堂) · 구광루(九光樓) · 경학원(經學院) · 선원 · 우화당 · 보경당 · 적묵당 · 선열당 · 사운당(四雲堂) · 독성각 · 해탈문 · 봉황문(鳳皇門) · 일주문(一柱門) 등이 있다.
이 절에 소장된 중요 문화재로는 대장경판(국보, 1962년 지정)과 장경판전(국보, 1962년 지정),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13](국보, 1991년 지정),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74(국보, 1993년 지정),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국보, 1982년 지정. 보물, 1982년 지정),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 원당암(願堂庵)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1970년 지정),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보물, 1963년 지정),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국보, 2020년 지정), 해인사 영산회상도(보물, 1997년 지정), 사간장경 중의 보물 다수 등이 있다.
① 대적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대적광전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중심 법당이다. 창건 이후 건물의 자세한 내력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현 건물은 1817년(순조 17) 제월(霽月)과 성안(聖岸)이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 봉안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은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삼존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으로 불린다.
본래 성주군 금당사(金塘寺)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이 절이 폐사될 때에 용기사(龍起寺)로 옮겨졌다가 1897년 범운(梵雲)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봉안되었으며, 원래부터 있던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 지장보살 · 보현보살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1996년 9월에는 비로자나불상 등에서 1326년(충숙왕 1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의복, 지공(指空)의 「문수최상승무생계법」계첩(戒帖)을 비롯한 여러 유물과 불단 진단구(鎭壇具)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2점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② 장경각
장경각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기본 정신을 대변해 주는 건물이다.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해 둔 2개의 판전으로서, 경판의 보관을 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걸작으로 인정받는 건물이다. 이 장경각은 1995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안에 소장된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고려대장경판의 영인본은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된 전산화 작업을 통해 디지털화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③ 기타 전각
명부전은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목조지장보살 및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19평으로 1873년(고종 10)에 담화대사(曇華大師)가 옛 금탑전(金塔殿) 자리에 신축하고, 경상남도 웅천(熊川)의 성흥사(聖興寺)에서 옮겨온 시왕상을 봉안하였다. 지금 건물은 1873년(고종 10)에 지어졌다.
현재 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극락전은 독립된 산내 암자로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1965년에 자운스님께서 화주가 되어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여 지금의 선원 자리에 중수하였고, 그 뒤에 다시 1973년에 봉주화상이 주지로 있을 때 대장경판전을 신축하기 위하여 건물을 지금의 자리인 100자 아래 지점에 새로이 옮겨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율원으로 쓰이는 한편 한주 스님들의 거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관음전(觀音殿)은 심검당(尋劍堂)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3동 80칸으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현재 건물은 1908년 회광(晦光)이 천상궁(千尙宮)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현재 강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 100여 명의 스님들이 경전을 연마하고 있다.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는 응진전은 1488년(성종 19) 학조대사가 창건하여 역대선사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현재 건물은 1817년 성안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처음에는 역대 선사의 영정만을 봉안했는데, 소조(塑造) 석가여래와 1918년에 판전 서재(西齋)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명 조사전이라고도 불리는 해행당(解行堂)은 1817년에 제월선사가 퇴설당을 중창할 때 함께 중창하고 수선사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처음에는 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이회광이 주지로 있을 때 선객들이 드세다 하여 수선사를 폐하고 조사전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개산조 이하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셔 왔다.
1967년 목조 희랑조사상을 보장전(寶藏殿)으로 사용하는 구광루로 옮기고 이듬해에 해인총림을 설치하여 영정을 모두 경학원에 봉안하고서부터는 다시 상선원으로 사용해 오다가, 현재는 방장 부속실로 사용하고 있다.
퇴설당을 처음 창건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817년에 불에 모두 타 버리자 제월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시 1965년에 근담화상이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퇴설당은 최근까지 상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1899년에 경허 대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동수정혜결사를 실천한 장소였던 점에서 역사적인 수행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서의 의미가 깊다. 선원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됨에 따라 현재는 총림 방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궁현당의 창건년도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쳐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완전 복원된 건물로서 해인사 승가대학(강원)의 교사(校舍)로 사용되고 있다. 선불장(選佛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구광루는 1818년 감사(監司) 김이재(金履載)의 주선으로 건립되었다. 크기는 67평으로 본래는 재식시(齋式時) 법요(法要)주5를 집행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사중의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쪽 한칸은 종고루(鐘鼓樓)로 사용되고 있다.
경학원은 경홍전(景洪殿)이라고도 하며 크기는 34칸이다. 1892년 민형탁(閔炯托)의 뜻에 의하여 범운화상이 건립하였다. 본디 왕, 왕후, 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삼전위축소(三殿爲祝所)로 건립되었다. 그 뒤에 1946년에 이르러 환경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손수 경학원이라고 글씨를 써서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고, 1968년에 지월화상이 중수하여 이듬해부터는 해행당에 봉안되어 있던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옮겨 모셨다가, 1975년부터 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선열당은 종래에 하선원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노전실과 부방장실과 영정 안치실로 쓰이고 있다. 특별히 노전실은 응향각이라고도 하는데 응향각은 향을 사른다는 뜻이고 노전은 의식을 집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운당의 크기는 146평으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490년 설호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몇 차례 중수되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84년에 중수된 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임자들의 방사(房舍)로 사용되고 있다.
해탈문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1817년 중건하였고, 1899년 범운대사가, 1940년 사중에서 중수하였다. 봉황문은 1817년 건립하였으며, 사천왕탱(四天王幀)이 안치되어 있다. 일주문은 1940년에 건립되었다.
④ 기타 문화재
이 밖에 해인사의 성보(聖寶)로는 합천 해인사 길상탑(보물, 1996년 지정), 해인사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보물, 2000년 지정), 해인사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해인사 동종(보물, 1997년 지정)과 같은 지정문화재와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 금은자사경(金銀字寫經) · 세조영정(世祖影幀) 등이 있다.
또 상탑향로(象塔香爐) · 무공수정(無孔水晶) · 옥등잔(玉燈盞) · 진주등(眞珠燈) · 순은화병(純銀花甁) · 관욕소관(灌浴哨罐) · 오동향로(烏銅香爐) · 순은다기(純銀茶器) · 순은향로(純銀香爐) · 순은방향로(純銀方香爐) · 향로개(香爐蓋) · 요령(搖鈴) · 감로병(甘露甁) · 일영의(日影儀) · 봉촉대(鳳燭臺) · 귀형촉대(龜形燭臺) · 관복(官服) · 오조어필첩(五朝御筆帖) · 법라(法螺) · 옥제조화(玉製造花) ·
금강저(金剛杵) · 각사인(各寺印) · 헌종어필(憲宗御筆) · 삼보인(三寶印) · 계첩석판(戒牒石版) · 팔상병(八相屛) · 33조사영병(祖師影屛) · 복수수병(福壽繡屛) · 숙종어필(肅宗御筆) · 화초수병(花草繡屛) · 화조오채병(花鳥五彩屛) · 흑판복수병(黑板福壽屛) · 복수채병(福壽彩屛) · 대화로(大火爐) · 금산첩(禁山牒) · 방울 · 대종(大鐘) · 소종(小鐘) · 경허(鏡虛)친필 · 명문와(銘文瓦) · 향합(香盒) 등이 있다.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던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는 사명대사(四溟大師) · 선수(善修) · 희언(熙彦) · 각성(覺性) 등이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맥을 따질 때,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 · 희랑 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의천(義天) · 경남(敬南)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학조 · 체정(體淨) · 유기(有璣) · 유일(有一) · 상언(尙彦) · 유안(油安) · 성여(性如) 등 유명한 승려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또한, 역대 명인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다른 사찰들에 비하여 두드러진 점이다.
말년에 가야산에 들어와 생애를 마친 최치원(崔致遠)이라든가 대장경 조성에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긴 이거인(李居仁),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홍길동으로 알려져 있는 정인홍(鄭仁弘) 등은 모두 이 절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산내 암자 중 유서가 깊거나 규모가 큰 것은 신라왕실의 원찰(願刹)로 전해지는 원당암(願堂庵)을 비롯하여, 고불암(古佛庵) · 고운암(孤雲庵) · 금강암(金剛庵) · 길상암(吉祥庵) · 백련암(白蓮庵) · 보현암(普賢庵) · 지족암(知足庵) · 희랑대(希朗臺) · 국일암(國一庵) · 약수암(藥水庵) · 용탑암(龍塔庵) · 삼선암(三仙庵) · 금선암(金仙庵) · 청량사(淸凉寺) · 홍제암(弘濟庵)이 있다.
주석
주1(법보사찰)
삼보(三寶) 사찰의 하나.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는 해인사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2(법손)
부처님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한 스승으로부터 불법(佛法)을 이어받아 대를 이은 불제자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3(복전)
복을 거두는 밭이라는 뜻으로, 삼보(三寶)ㆍ부모ㆍ가난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삼보를 공양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면 복이 생긴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4(사우)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 우리말샘
주5(법요)
불사를 할 때 행하는 의식. 우리말샘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삼존불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
불상은 원래 금당사(金塘寺)에 있었던 것이며 고종 1년(1897)에 현재 위치로 옮겨서 모시고 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 모양이다. 본존의 왼쪽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오른쪽에는 실천을 통한 자비를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위치하고 있다. 자세가 장중하고 온화한 가운데서도 위엄이 갖추어진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비로자나불은 빛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뜻이며 바로 태양을 뜻하는 부처님이다. 빛으로 밝게 비추기 때문에 전각에 빛 광(光) 자가 들어가 대적광전, 대광명전 또는 비로전이라고 한다. 또는 우주만물을 모두 간직한 연화장의 세계를 의미하여 화엄전이라고도 한다.
건축적 소양이 없어 명칭 등은 알 수 없지만, 대적광전 천장 구조가 다른 전각에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제1779호 >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전적 - 보물 제1780호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과 관련하여 보물로 2건이 지정돼있다.
비로자나불상은 고려 1167년 이전 제작된 것으로 보는데, 고려 말기와 조선 초 각각 왕실 주도하에 개금중수하였다고 한다. 복장유물도 지금까지 발견된 복장유물 중 최대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유물도 고려와 조선 초의 섬유류 유물로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복장전적도 8건 37점의 서적류이다. 호국신앙의 중요 경전인<금광명경> 등 귀중한 판본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료를 보면 지금 대적광전에 계신 삼존불 가운데 바로자나불과 모습이 달라 보인다. 문화재청 사진자료와 아무리봐도 수인의 보습이 다르다. 지금 대적광전에 모신 불상은 쌍둥이 불상이라고 하는데 그 모습도 안보인다.
<대비로전>
2007년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크지 않은 전각이다. 최근에 지었으면서도 역시 치미가 인상적이다.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제1777호 >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전적 - 보물 제1778호>
문화재 명칭에 법보전으로 되어 있어 전각을 찾았으나 볼 수 없었다.
단지 대적광전 측면에 <금강계단>과 <법보단> 현판이 있기는 하지만, 법보전 현판의 전각은 해인사 홈페이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수정)
법보전은 장경판전에 있는 작은 전각의 이름이네요.
남쪽이 수다라장, 북쪽이 법보전 입니다.
그런데, 대비로전에 두 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적광전에서 본 모습이 다른 불상도 이곳에 함께 모셨다. 보물 1777호 와 보물 1779호 비로자나불좌상이 동형쌍불(同形雙佛)로 나란히 모셔져 있는 것이다. 탐방 때는 몰랐고, 자료 정리하면서 겨우 찾았다.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고려 초에 제작된 목조불상으로 1m가 넘는 크기에, 조형성은 물론 조각적인 완성도까지 갖춘 작품이다. 동글동글한 나발, 이상화된 얼굴과 당당한 신체 표현, 신체에 감기듯 팽팽하게 걸쳐 입은 편단우견의 착의형식과 더불어 치켜세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의 형태, 긴장감 넘치게 조각된 옷 주름 등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제작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문화재청)
대적광전의 불상과 법보전 불상은 같은 모습의 쌍둥이 불상으로 나란히 많은 복장 유물이 나왔다. 조선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조각보는 우리나라 조각보의 역사가 500년 이상이었음을 알려주는 등 시대를 구분 짖는 자료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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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각>
독성 용왕 삼신상을 모시고 삼성각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독성 한 분만 모셔 독성각으로 불린다고 한다.
사찰의 제일 높은 곳이나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삼성각과는 달리 독성각이나 국사단이 중심에 놓여 있다.
<명부전>과 <응진전>
학사대 옆을 지나 약간 높은 곳에 대장경판전이 있다. 3층의 축대 모습과 담장이 깔끔하게 잘 가꾸어져 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전 - 국보 제52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장경판전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재청)
해인사 대부분의 전각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 숙정 이후에만 7차례의 화재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장경판전만은 무사하여 팔만대장경을 지킬 수 있었다니 정말로 불심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수다라장' 출입구의 모습이 재미있다. 전체가 둥그스레하다. 달 모습 닮았다고 월문이라고도 한다. 춘분과 추분 때 연꽃 모양의 그림자가 만들어 진다고 하여 많은 사진작가의 표적이 되는 모양이다.
내부의 대장경은 볼 수가 없었다. 창살 사이로 살짝 사진을 찍어 보지만 내부가 어두워 잘 잡히지도 않는다. 아쉽다.
하지만, 다른 문화재와 달리 건물 바깥쪽으로 관람선이 둘러져 있고 24시간 관리인이 배치돼 있다. 처다 보시는 관리인의 눈길이 볼편하기도 했지만, 오래된 유물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한다.
순전히 대장경만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이다. 창살의 앞면과 뒷면의 크기까지 달리하여 통풍을 고려하고, 바닥은 숯과 횟가루, 소금과 모래로 습도를 고려하였다고 하니, 기계적 장치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현대의 기술보다 자연을 이용한 더욱 과학적인 관찰과 지식이 필요하였을 것 같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국보 제32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대장경 판은 고려 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대장경판의 재질은 산벗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돌배나무, 단풍나무 등 조각에 용이한 나무들이 사용되었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이고, 무게는 3㎏ 정도이다. 양면 모두 경판의 보존을 위해 옻칠이 되어 있고, 경판의 양쪽에 마구리를 하고 있는데 경판과 잇는 네 귀퉁이에 금속판을 부착하였다.
대장경 판각은 실제로 12년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 1248년을 대장경판 판각작업의 완료 연도로 보고 있다. 경남 남해에서 제작된 뒤, 강화산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1251년에는 제작을 마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318년에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고려 말기의 빈번한 외침 때문에 1398년에 현재의 해인사로 옮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국왕이 대장경의 이송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용산강(지금의 한강)으로 행차했다고 전해진다.
직접 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밖에 커다란 내부 사진이 있다. 마치 직접 들어서 있는 듯 사진 포즈도 취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