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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남쪽 자락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며
안양을 굽어보고 있는 ~ 삼성산 염불사(念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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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깃든 염불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삼성산에서 삼막사(三幕
寺, ☞
관련글 보기) 다음으로 큰 절이다. 오랫동안 삼막사의 부속 암자로 있으면서 염불암(
念佛庵)이라 불렸으나 근래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 '암(庵)'에서 '사(寺)'로 칭호를 높였다.
절의 이름은 신라 중기에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윤필(潤筆)이 이곳에 있던 토굴(土窟)에
서 불도를 닦으며 염불을 올렸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 전한다. 윤필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
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으나 다들 신빙성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
다.
또한 926년(또는 936년)에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치고자 삼성산 옆을 지나다가
안양사 창건설화(☞ 관련글 보기)에도 등장하는 능정(能正)이 삼성산
자락에서 좌선(坐禪)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염불사의 전신(前身)인 안흥사(安興寺)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 때 유물이 전혀 없고 안양사(安養寺) 창건 설화와도 상당수 비슷해
이 역시 신빙
성은 떨어진다. 1407년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왕명으로 관악산의 여러
절과 함께
중창했다고 전하는데, 경내에 500년 묵은 보리수나무가 있어 이때쯤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
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이 없다가
1857년에 이르러 청허(淸虛)와 도인(道人)이 칠성각을 세
웠다. 1904년과 1927년에 중수했으며,
1930년에는 세심루(洗心樓)를 세우고, 1932년에 산신각
, 1941년에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 그리고
1964년에 미륵불을 세우고, 1992년에 대웅전
을 옮겨 크게 중창했으며, 2000년에 나한전을,
2008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지었다.
석축을 높게 다져 크고 작은 건물을 심었는데, 칠성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20세기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에서 풍기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다. 소장문화유산은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500년 묵은 보리수와 19세기에 조성된 승탑(부도) 3기,
바위에 새겨진 마애승탑(磨崖僧塔, 마
애부도) 2기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마애부도는 못봤음)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나한전, 염불전, 칠성각, 영산전, 산신각 등 약
10동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뒷쪽에는 소나무가 솟은 멋드러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데,
그 벼랑에도 조그만 건물과 미륵불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그렇다고 요
란하게 벼랑을 밀어버린 것은 아니며 약간의 손질만 가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안양예술공원에서 삼막사, 삼성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황금 길목이라 자연히 절을 둘러보는 수
요도 제법 되는 편이며, 벼랑에 닦여진 산신각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삼성산과 안양시내 풍
경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어루만져준다.
* 염불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2 (예술공원로245번길 150, ☎ 031-
471-2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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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대웅전 자리에 세워진 염불전(念佛殿) |
▲ 염불전 앞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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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寮舍) 앞뜨락과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장독대들(왼쪽)
장독대에는 어떤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그 속살을 들춰보고 싶다.
▲ 염불사 대웅전(大雄殿) |
돌계단을 타고 경내로 들어서면 남쪽을 굽어보는 대웅전과 염불전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그 우측 염불전 자리에 있
었는데, 1992년에 주지
성수화상이 의상과 원효, 윤필 3명의 고승이 수도를 했던 터로
여겨진
다는 현재 자리로 옮겨 크게 지었다.
현재 염불사의 사세를 보여주듯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을 받치며 촘촘히 박혀있는 공포
는 그 아름다운 섬세함에 감탄이 새어 나오게 한다. 건물 주변으로 하얀 피부의 난간석을 둘
렀으며, 계단 앞에는 석사자 2기를 배치해 혹시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 대비했다.
대웅전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석가여래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
스처를 취한 석가여래 좌우로 수려한 자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시
립(侍立)해 있는데, 이들은 1992년에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며,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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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좌측 석조관세음보살상 |
대웅전 좌측에는 2008년에 새로 지은 석조관세음보살상이 있다.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한 하얀 피부를 지닌 그의 좌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쥐어든 지장보살(地
藏菩薩)이 관세음보살보다 훨씬 낮은 연화대(蓮花臺)에 서 있고, 우측에는 산신(山神)이 의자
에
앉아 있다. 그들 뒤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병풍처럼 들러져 있는데, 벼랑 윗쪽 소나무
사이로 독성각이 아찔하게 버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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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 3층석탑 |
대웅전 앞뜰에는 독특한 모습을 지닌 새하얀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8각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조그만 기단을 깔고, 그 위로 부처가 새겨진 8각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했는데,
그가 있기 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조차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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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불사 보리수(菩提樹)
탑 옆에는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보리
수가 자라고 있다.
보리수의 원래 이름은 '보디 브리크샤(Bodhivr
iksa)'로 부처가
붓다가야 보리사에 있는 보리
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불교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무화과와 흡사한
뽕나무과 상록수로 인도대륙 힌두교에서도 신
성시 여기는 나무이기도 하다.
보리수는 우리나라에는 그리 많지 않은 나무로
아무리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심장한
나무라고 해도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예외가
없
다. 제국의 시련을 겪어야 되기 때문이다. 나
무를 감싸던 푸른 잎들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간절
히
염원한다. |
이 나무는 15세기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승려가 심었다고 전하며, 이를 통해 적어도 조선 초기
에
염불사가 숨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500년의 장대한 나이를
먹었지만 높이 12m,
둘레 1.2m로 비슷한 나이의 다른 나무에 비해 체격은 조그만 편이며, 안
양시 보호수 5-2호의 작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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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전(羅漢殿)
염불전 뒤쪽에는 1990년대에 지어진 나한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0년에 조성된 500나한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 염불사
산신각(山神閣) |
대웅전과 나한전 뒤쪽에는 기암괴석으로 그윽한 높은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염불사의
든든한 후광이자 절을 더욱 장엄하게 꾸며주는 그 벼랑에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 영산전,
미륵불 등이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미륵불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마치 천
하가 내 발 밑에 펼쳐진 듯, 천하 일품을 자랑한다.
대웅전 뒷쪽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제일 먼저 절벽
사이 좁은 공간에 들어앉은
산신
각을 만나게 된다. 경내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집으로 조선
후
기부터 전해오던 것을 1932년에 중수했다. 지붕은 목조이나 건물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1970년대 후반에 그려진 산신도가 걸려 있다.
이곳에 서면 경내는 물론이고 삼성산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과 안양을 서쪽에서 보듬은
수리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삼성산 남쪽 산자락과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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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
▲ 독성각(獨聖閣) |
산신각에서 동쪽으로 난 조그만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벼랑 위에 조마조마하게 버티고 앉
은 독성각이 나온다. 석조관세음보살상 바로 뒷쪽
벼랑으로 경내에서 가장 궁색하고 위험한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많은 자리 가운데 굳이 이곳에 힘들게 독성각을 닦았는지 의문이다.
독실한 불심(佛心)이 낳은 결과일까? 아니면 경내의
명물로 키우려는 욕심의 산물일까?
독성각은 산신각과 거의 쌍둥이꼴 모습으로 1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은 목조로 이루어
져 있고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바로 앞이 천길 낭떠러지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
다. 비록 난간이 둘러져 있긴 해도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으며 촘촘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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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과 비슷한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
며, 건물 내부에는 근래에 그려진 독성탱이
걸
려있다.
독성탱에는 독성(獨聖) 할배와
동자, 사슴, 소
나무, 그의 본거지인 천태산(天台山)이 담겨져
있다.
◀ 독성 가족의 단란함이 깃든 독성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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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을 지나면 절벽에 등을 대며 남쪽을 바
라보고 선 석조미륵불이 모습을 비춘다.
1960
년에 주지인 기석화상의 꿈속에
미륵불이
나타
나 이마를 쓱쓱 어루만지며
'마애석불을
만들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라'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당시 기석은 낡고 퇴락한 염불암을 다시 일으
킬 궁리를 했었는데, 미륵불의 현신에 용기를
얻고 1964년부터 5년간
공을 들여 석불을
완성
하고 공덕비를 세웠다.
미륵불은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 위에
서 있으
며, 전체적으로 풍만한 느낌을 던진다.
머리에
는 2중으로 된 보관(寶冠)을
썼고, 얼굴은 다
소 경직되어 보이며, 입가에는 넌지시 미소가
드리워져 중생을 살짝 위로한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 왼손으로 여원인을 취하
며 안양
시내를
굽어보는 미륵불 옆에는 산신
각과 쌍둥이
꼴인
영산전이 있다. |
▲
염불사 석조미륵불 |
|
미륵불에서 더 올라가면 그 계단의 끝에 칠성
각이 수비병처럼 자리해 경내를 굽어본다.
칠성각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겉보기와 다르게 1857년에 지어져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벼랑 사이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앉았으나 산신
각과 독성각보다는 조금은 여유로워 정면 2칸,
측면 1칸의 구조를 지녔으며, 내부에는 1979년
에 제작된 칠성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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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에 자리한 칠성각(七星閣) |
▲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펼쳐진 칠성각 칠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앞서 산신각보다 조망의 품질이
조금은 높아졌다. (그래봐야 보이는 범위는 비슷함)
▲
19세기에 조성된 염불사 부도(승탑)들 |
영산전에서 대웅전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나한전 서쪽에 자리한 부도
<浮屠, 승탑(僧塔)> 3형제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부터 도일당(道日堂), 인봉당(印奉堂), 서영
당(西影堂) 탑인데,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싹 집합시킨 것이다. 그들
모두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탑신 피부에 탑 주인과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조
성 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단 도일당은 조성 시기 부분이 마멸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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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당탑 |
▲
인봉당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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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당탑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
왼쪽에 자리한 도일당탑은 높이 167cm로 바닥돌은 없다. 장대한 세월의 무심한 장난으로 탑이
두 동강이 난 것을 다시 붙였는데, 중간에 난 금이 그 흔적이다. 탑 중앙에는 얇게 홈을 파서
깨알처럼 글씨를 넣었으나 마멸이 심하며 탑 꼭대기에는 동그란 보주(寶珠)를 두었다.
중앙에 있는 인봉당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늘씬한 자태에 탑신을 올리고 반구형 보주로 마
무리를 지은 탑으로 높이 143cm, 조성 시기는 1816년이다. 도일당탑처럼 탑 앞쪽을 다듬어
글
씨를 넣었는데, 글씨가 아직은 선명하여 한자를 조금 안다면 알아보는데 그리 무리는 없다.
그리고
오른쪽에 자리한 서영당탑은 1810년에 조성된 것으로 바닥돌이 탑의 거의 2/3를 차지
할 정도로 무척 크고 견고하다. 자연석을 가져와서 조금 손질을 가해 바닥돌로 깔고 탑과 반
구형 보주를 올렸는데, 옆에 있는 승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들은 19세기 초반 염불사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존재이자 경내에서 보리수 다음으
로 오래된 존재로 이들 외에도 경내 부근에 바위에 새겨진 19세기 마애승탑 2기가 있으나
인
연이 닿지 못해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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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를 뒤로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