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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순수 감각과 관념의 지도>
우리가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이 글의 관념이거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의 신체적 관념이나, 지금 이 장소의 관념, 또는 주위 상황의 관념이다. 이 모든 것은 실제로 감각되고 있는 것[빠라맛타, paramattha]이 아니라 관념[빤냣띠, paññatti]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며, 관념들이 연결되어 세계와 사물에 대한 지도 같은 것을 마음 속에 만들어 그 지도 속에서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관념으로 이루어진 마음 속 지도를 '관념의 지도,' '관념으로 만든 지도,' '관념적 지도,' 또는 '관념 지도'라고 불러보자. 사실 실제 오감으로 들어오는 것은, 쌍안경과 같은 시야와 형태를 알 수 없는 소리들, 촉감들, 때로는 맛이나 냄새까지 포함된 것이다. 이 물질 감각 어디에도, 지금 이 글이 적혀 있는 스크린이나, 스크린이 놓인 곳의 모습이나, 이 글과 스크린이 있는 장소의 전체적인 모습은 없다. 지금 내가 이러이러한 장소에서 이렇게 생긴 몸을 앉히고 이렇게 생긴 스크린 위에 있는 글을 읽고 있다는 인식 자체가 벌써, 관념으로 만든 지도[관념적 지도] 속에 이 글을 자리잡게 하거나, 내 몸을 자리잡게 하고 있는 것이며, 관념적 지도 안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감각의 여과는 필수적이며, 우리는 순간순간 감각 입력 중에서 극히 일부분에만 선택적으로 초점을 가하여 관념적 해석을 하고, 그 해석 속에 푹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관념적 지도에 때로 도움 받으면서도 동시에 관념적 지도에 의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 순간 감각은 명멸하고 있다―시각은 쌍안경 적인 평면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일부 물체의 앞면의 평면적 모습만 받아들이고 있으며, 청각은 정확히 어떤 물체나 존재에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소리들로 가득 차 있고, 닿는 촉감들이 명멸한다―관념이 최소화된 상태에서의 1차적인 촉감은, 거의 몸의 테두리로 한정된다. 사실은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음이 물질을 어렴풋이나마 의식하는 최소 단위인 17 찰나에는, 오감 중 한 감각의 초점 잡힌 부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예컨대 한 17 찰나에 시야의 한 부분을 볼 때, 그것 밖에 보지 못하며, 시야의 다른 부분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찰나(khaṇa)는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에 따르면 1조분의 1초 이하라는 극미의 시간이므로, 실제로는 한 순간에 여러 감각과 생각을 한꺼번에 느끼는 걸로 착각한다 - 눈깜빡하는 사이인 한 순간은 0.1초내지 0.15초 걸리므로 0.15초로 잡은 한 순간은 대략 88억 개 이상의 17찰나로 나눠진다. 실제로 들어오고 있는 물질 감각의 영역과, 관념의 지도 안에서의 파악을, 그림으로 설명해보자. 자, 관념을 버리고 마음을 오감에 일치시켜, 오감을 팔을 벌리고 환영하며, 스스로 나타나는 감각 그대로 순수히 체험해보자. 이 명멸하는 감각의 바다를 순수 체험하는 순간에, 명멸하는 오감의 영역들을 몸 뒤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면 그림 1과 같다.
그림 1. 오감으로 파악된 물질의 영역: 신체의 테두리와 그 테두리 안에 쌍안경적 시야가 들어온 모습
그림 1에서 몸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으로 청각영역과 후각영역을 표시해보았다. 실제로는 후각 영역과 청각 영역은 보다 넓은 편이고 완전한 동심원이라 할 수 없지만, 편의상 작게 동심원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렸다. 미각 영역은 혀 주변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따로 그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쌍안경에서 보이는 모양의 시야에 가깝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오감의 영역을 몸 뒤에서 살펴보면, 시야가 엄청 작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볼려고 해도 자기 눈썹끝을 보지 못한다. 시야는 얼굴보다 크지 못하는 것이다―물론 얼굴 앞으로 펼쳐지는 시야각은 넓어서 자기 앞의 상당 부분이 시야로 들어온다. 이런 작은 시야가 관념의 지도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머리의 관념을 비워 마음을 몸의 감각과 일치시키고, 시야의 특정 부분에 맺힌 초점에 마음이 갇히지 않는 순수 감각의 상태에서, 비로소 알아차림이 일어난다. 걷기 명상에서와 같이 몸을 움직일 때는, 마음이 관념적으로 몸에 앞서가지 않도록 해서, 몸의 현재 순간순간의 움직임에 마음이 몰입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그림 1에서 도해된 감각 영역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기 육체가 있는 자리의 지도도 관념적으로 그려낸다. 여기에는 보통 시각적 이미지가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특정 장소에서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관념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우리가 특정의 장소에서 특정의 것을 보고 있다는 관념의 지도는 어떻게 생기는가? 그림 2로 알아보자.
그림 2. 가운데 사람은 자신의 지금 시야 외의 것도 관념으로 보충한다
그림 2의 사진에서 나무 그늘 밑에서 가운데 있는 사람이, 관념적으로 자신 자신의 위치를 그려내는 모습을 나타내보았다. 이 경우,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나무 뒤에서 무엇을 메모하며 보고 있는 실제의 시각적 시야는, 이 그림에서 테두리를 흰색으로 약간 굵게 하여 원색으로 밝게 표시한 부분 뿐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 마음 속으로 알 때는, 이전에 본 쌍안경적 시야의 시각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관념적으로 구성해낸, 관념의 지도 속에 자신이 자리잡게 한다―그림에서 이전에 본 쌍안경적 시야의 범위는, 편의상, 같은 크기로 흰 테두리를 약간 작게 하여 표시하였다. 즉 어둡고 흑백으로 처리하여 표시한 풍경의 다른 부분도, 이전에 본 시야의 시각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모자이크하듯이 관념적으로 재구성한다―자신의 몸이 있는 장소를 관념적으로 그려내어 자신을 관념의 지도 안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지금 가운데 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사진과 같은 곳에서 자기가 앉아 있는 것을, 사진과 유사한 모습으로 그려낼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기의 뒷모습은 어떻게 그려낼까? 이전에 거울에서 본 자신의 모습을 중심으로 그려낼 것이다. 결국 자신이 있는 장소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데서도, 시각적 이미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관념의 지도를 그려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관념의 지도는 현재의 시야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나머지는 과거의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관념으로 재구성해낸 것이다. 현재의 시야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조차도, 이미 아무리 빨라도 14찰나 이전의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므로, 관념의 지도는 근본적으로 과거의 상황에 대한 관념의 지도이다. 관념과 현재 상황과의 괴리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지언정, 필연적이다.
이렇게 현재 감각이 아닌 부분을 시각적 관념을 중심으로 그려내어, 보이는 세계에 대한 관념 지도를 그려, 그 관념 지도에 빠짐으로써, 이 순간에 드러나 있는 실제 세계에서 멀어질 뿐 아니라, 오감으로 측정되지 않는 영역까지, 시각적 관념을 중심으로 관념 지도를 그려, 그 속에 빠짐으로써, 살아 있는 현실과 더욱더 멀어진다. 현실을 관념 안에서 파악하는 이 0.1초 이하의 과정은 중생에게는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되나, 알아차림이 예리하고 빨라질 수록 엄청나게 많은 과정이 누적되어 일어나는 것임이 분명해진다.
물질을 감각으로 알아차릴 때, 물질을 아는 것은 마음 즉 정신[윈냐나]이다. 이 때 정신의 대상은 물질[루빠]이다. 정신이 물질을 알아차릴 때, 알아차림의 대상인 감각되는 물질과 알아차림 자체인 정신이 명확히 구분되어 관념적 연결이 끊어지기 시작하는것, 이것이 위빳사나 지혜의 시작인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이다.
그러나 이 모든 그림들과 설명 역시 빤냣띠임을 잊지 말라. 참된 것을 담고 있는 빤냣띠일 뿐이다. 여기서는 2차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사용하였고, 그 그림은 공간 개념을 사용하여 전달하려고 하고 있다. 실제 위빳사나 수행에서 허공은 알아차림의 대상이 아니다. 공간과 거리 관념을 내려 놓고, 실제 위빳사나 알아차림의 대상인 구체적인 물질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다섯 가지 감각으로 아는 것[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과 마음 만으로 아는 것[意識]을 합쳐 석존(釋尊)께선 육식(六識=6식)이라고 불렀고, 모든 것은 6식 안에 있다고 강조하셨다. 석존께서 설파하신 충격적인 선언 중 하나는 한 번[한 인식 단위시간]에 이 여섯 가지 인식 중 한 가지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말소리를 들으며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볼 때는 듣거나 생각하지 못하며, 들을 때는 보거나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할 때는 보거나 듣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 활동이 한 때에 한 활동만 일어나지만, 1초에 수십 수백 번 엄청나게 빨리 교대로 일어난다. 그래서, 관념 지도 안에서 파악하는 중생은 자신이 한꺼번에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을 씹으며 맛보고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씹는 촉감, 맛, 생각이 한 번에 한 가지만 일어나 사라지면서 엄청나게 빠르게 교대로 생멸하는 것이다. 아마도 훗설을 비롯한 서양 철학자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선언이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믿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중생의 인식 능력이 너무 느리고 멍하기 때문에 이런 식(識)의 교대를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은 1초에 몇 번정도밖에 알아차리지 못하며 심하면 10초에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멍한 상태일 경우가 보통이다. 우리가 최대한 빠르게 이해하는 단어의 수가 1분에 400~800단어 정도라는 관찰을 신뢰한다면, 관념으로 아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1초에 13.33번을 넘기지 못한다. 관념을 넘어선 직접 관찰, 바로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그러면 한 때에 6식 중 한 가지 인식만 있음이 드러나는 것은 어떤 경지인가? 말룬꺄뿓따(Malunkyaputta) 경(S35:95)에 나온 석존의 다음 말씀 속에서 관념적으로나마 짐작해볼 순 있을 것이다.
When for you there will be only the seen in reference to the seen, only the heard in reference to the heard, only the sensed in reference to the sensed, only the cognized in reference to the cognized, then, Malunkyaputta, there is no you in connection with that. When there is no you in connection with that, there is no you there. When there is no you there, you are neither here nor yonder nor between the two. This, just this, is the end of stress."
https://www.accesstoinsight.org/tipitaka/sn/sn35/sn35.095.tha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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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섯 가지 감각으로 아는 것[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과 마음 만으로 아는 것[意識]~참으로 어렵구나!>를 첨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