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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님들의 증언
1992.1.3 이희옥 어머니, 박공순 언님, 조사연 언님, 한영우 장로
오늘 이렇게 귀한 손님이 오셔서 이 선생님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말씀하시기 전에 이 선생님의 기도문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제가 먼저 선창할게 따라 하십시오. ‘아버지 주님의 명령을 못 받들 터이면 이 땅위에 더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진정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쓸데없는 인생이로소이다. 주님 주님만 사랑하게 하소서. 제 마음을 빼앗아 가소서. 온전히 빼앗으사 주님 수중에 두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아멘.’ 예, 다 외우면 좋겠지만 복잡하니까 아버지 주님의 명령을 못 따를 터이면 이 땅위에 더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번 더 따라 읽으시고요. 아버지 주님의 명령을 못 받들 터이면 이 땅위에 더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아버지 주님의 명령을 못 받들 터이면 이 땅위에 더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이 선생님의 이 현필 선생님의 믿음의 높이 모든 생애 가치와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다 두고 생활하시다가 부르심에 기쁘게 응하고 가셨다. 생각됩니다.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아버지 주님의 명령을 못 받을 터이면 이 땅위에 더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한 번 더요. 아버지 주님의 명령을 못 받을 터이면 이 땅위에 더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라고 구하고 알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시간 희옥 씨 어머니께서 귀한 간증 해주시겠습니다.
말할 수도 없게 생긴 죄인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 여기 원에 있는 큰 애기들을 실컷 많이 부려먹고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 때 그 사람들한테 나쁜 마음을 들어야 하겠는데 반가워해줘서 감사하고 어른들 앞에서 말씀을 하라고 하시는데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에 몇 마디 하려고 합니다. 두서도 없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생겼네요. 저는 이 선생님 뵙고 예수님이 그 속에 계셔서 역사해 주시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살았어요. 그러는 동안에 이렇게 이런 집회에 오고 그러면 마음에 있던 것들을 다 말씀해 주세요. 묻지 않아도 그러면 또 받아 가지고 가서 살고 또 계명산에 오셔서 땅 파는 일은 지금까지 판다고 제가 파는 것이 아니고 구경만 하고 살지요. 저는 허물과 죄뿐이고 또 해주신 것은 도와주신거지 저는 아무것도 없는 것뿐인 줄 아는데 무슨 말씀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큰일 났네요.
처음에 이 선생님 뵙고 처음에 이 선생님 제가 서울에서 뵙고 처음에 서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도바울처럼 사시는 분 없을까? 찾다 찾다가 강 순명목사님 뵙고 복희씨 어머니 뵙고 또 이 선생님 뵙고 이 공 제자 이 철승 씨 뵙고 그런데 성경을 모르니까 성경 좀 알았으면, 알았으면 아주 다 소원을 했어요. 한참 그러고 나면 또 성경이 조금 안다고도 모르지만 그렇게 보여 지데요. 그리고 또 소식을 들으면 그때는 이 선생님이 모두 새 옷을 입혀드리면 벗어서 모두 가난한 사람한테 준다고 하는 말도 들리고 해서 한번 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번 능주로 갔더니 서울 가셨다고 그래요. 등광리에 가서 한 두어 달 있으니까 이 선생님 오셨다고 그래요. 가서 뵈니까 참 열심히 봤지요. 파리한 형상이 활동사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형상이 보이데요. 아 저 어른이 참 믿으시는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어른인가 보다. 그리고는 몇 말씀 안하시고 아주 가버리시데요. 그래 저는 또 서울로 갔지요. 10년 동안은 이렇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다가 6.25 사변도 닥치고 그래서 능곡을 찾아가서 식구들을 만나서 예배도 드리고 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참 동광원에 들어오니까 아 이 사람들이 만세전부터 택했다고 하더니 이 사람들인가 보다. 이렇게 기쁘고 좋고 반갑고 누가 동광원 나쁘다고 해도 제게는 그런 소리 들리지 않아요. 그렇게 살다가 이제 사람들을 모아주셔서 잠깐 능곡에 가서 살려고 했더니 이제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내려와서 감 밭에서 조금 지내고 학생들하고 같이 밥 시중해주고 살고 또 도암에 가서 살고 그러는 동안에 이 단체는 참 하나님이 세워주신 단체인줄로 믿고 모두 도와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으로 그 믿어짐에 따라서 알아지는 것을 볼 때 참 신기하게 모여진 단체이다. 그런데서 이 선생님이 하신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그렇게 알아졌어요. 그리고 세상 떠나실 때도 계명산에 오셔서 할 말이 있으면 다 하라고 그래서 하실 말씀이 유언 말씀 다 듣고 그런 후로 거기서 다 살면 그 이후로 윗길로 의인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말씀 순종하고 제가 남원이라도 살라면 살아야 할 텐데 그런 말씀이 있어서 저는 절대로 내려올 마음도 없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는데 요즘 들어보면 그 맨발의 성자라는 책을 보고 찾아오는 이들도 여러분 있고 그래서 생각에 그런 생각이 있어요. 아 이 선생님의 영혼이 지금 이 세대에 움직이시는가 보다 그것밖에 모르니까 이렇게 드리는 거예요. 말씀을 그리고 또 살아갈수록 자신이 할 말도 없고 또 아무것도 아닌 걸 그런걸 알아졌기 때문에 오늘도 안한다. 안한다 했는데 이 자리에 왔고, 말 하려고해도 할 말도 없고 그래서 이 말씀밖에 드릴 것이 없어요. 그리고 눈물 흘려 감사드릴 것뿐이지요. 그런 선생님 또 그런 위대하신 어른을 뵙고 또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그런 덕택으로 양식을 삼아서 살고 있는 것뿐이지요. 다 했습니다.
공순 언니 잠깐 나와서 말씀해주십시오.
(성가)
이 시간에는 공순 언니가 나오시는데요. 희옥 씨 어머니하고 같이 계명산에서 오셨습니다. 한 짐작으로 한 30년 좀 넘었는가 싶었는데 그때 한나 씨 어머니 희옥 씨 어머니 모시고 계명산에 들어가셔서 한 30년 이상을 거기 어머니들 모시고 수고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수고와 희생을 치르시면서 수고하신 언니입니다. 이 선생님 시간제한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말씀 드릴 줄도 모르고 말씀은 드린다 해도, 동으로 왔다 서쪽으로 왔다 그럴 겁니다. 선생님 만난 동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가 선생님 만나기는 19살 때 6.25전에 만났습니다. 뵈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6.25 직전에 선생님이 저를 찾아 오셨어요. 그 전에 두어 번 뵈었는데 뵈옵고 6.25 직전에 찾아오셔서 그때 제가 외롭게 지내던 판인데 선생님 만나 뵈옵고 얼마나 반갑고 참 눈물로 뵈옵고 선생님 떠나시면서 저한테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갖으시는 것 같아요. 가시다가 길을 못가시고 도로 가자고 하시더래요.
그러다가 쉬고 앉아 계시다가 그 길을 떠나셨는데 그 후로 6.25가 났는데 제가 6.25후에 선생님을 아무리 뵈려고 해야 뵈올 길도 없고 내가 예수는 잘 믿고 살아야겠는데 어느 길을 가야할까 방황중인데 어머니께서 교회를 다녀오셨는데 광주는 여자들만 모여서 사는데 직조도 짜고 남자 하나도 없이 그런 데가 있다더라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이야기가 얼마나 귀에 번쩍 뜨이던지 교회도 안 나가고 있다가 그런 다음부터는 이 선생님만 생각하고 그래서 교회도 안 나가고 있었어요. 어머니만 나가시고 그 소리 듣고 귀에다 붙어서 여기저기 알아봐가지고 광주를 나와 가지고는 시골에서는 살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이, 그래서 시내에 나가서 살면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공장 생활이라도 하면서 예수 좀 잘 믿고 살아야지 이 선생님을 만나면 다행인데 못 만나면 어쩌나 그리고 나왔는데 그때 수피아 학교 정문 앞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 참 어려운 때인데 선생님이 아주 어떻게 반가운지 그때 YMCA 양림동 회관인데요. 거기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선생님하고 어떻게 살겠냐고 그래서 쑥 죽만 먹고 사는데 어떻게 살겠냐고 그래서 ‘그래도 살아요.’ 하니까 막 웃으시면서 그래도 살겠냐고 그래서 그때부터 살게 되었는데 그때 고아원이 시작이 되었는데 고아원을 하는데 제가 시골에서 자라서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주 험한 학생들을 한 16명을 저한테 맡기셨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하고 같이 사는데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는데 더 잘하시는 언니들이 있는데 왜 저한테 이런 일을 맡기시냐고 금남언니한테 늘 말씀을 드리면 또 바꿔도 봤다가 또 제가 들어가고 그런데 그 천사들 덕분에 제가 사랑을 선생님한테 특별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들이 늘 사회에서 살면서 잘못 된 일이 많아가지고 저녁이면 각 반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드리면 그 사람들이 다 자복을 해요. 자복을 듣고 이 선생님한테 가서 말씀을 드리면 다 옛날에 잘못된 것들 무엇 좀 가지고 가서 그 댁에 가서 사과하고 오라고 그러고 제가 처음 만나 뵈올 때에도 육이오 직전에 나가시면서 제가 다른 말씀은 기억이 안 나고 나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참 쓸 나무가 되어야 할 텐데 쓸 나무가 되지 못해서 지금까지 의인들의 기도로 제가 오늘 이만큼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나무를 비유 하세요. 그 말씀만 기억이 납니다. 그때 하신 말씀은 넓은 들판에 큰 나무가 있는데 그 사막 같은 길을 가다가 그 나무 밑에 가서 쉬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런 말씀도 하셨고 그 안에 받은 사랑도 많지만 제가 다 말로다 할 수 없고 그리고 선생님이 항상 제가 계명산에 간지가 37년이 되어가는데 선생님이 세상 뜨시겠다고 소식이 오면 저 같은 사람은 뵈옵지도 못하고 세상 뜨시겠다고 해도 눈물로 기도를 드리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계명산에 오셔서 가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윗집에서 세상 뜨셨는데 유언하시기 전에 세상 뜨시러 오셨는데 그 안에 주일날 예배를 드리시면서 고린도전서 7장을 사람들보고 다 돌려가면서 읽으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맑은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주셔서 참 내 마음이 시원하다고 그러시면서 여러분들은 동정 잘 지키라고 가난과 동정을 사랑하고 동정을 잘 지키라고 그런 말씀을 하시고 아 기쁘다고 하시면서 찬송을 부르면 손이 무릎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시고 그러시는데 그때 세상 뜨시기 전에 유언을 하시는데 제가 아랫집에서 올라가고 싶어요. 막, 올라가다가 캄캄하니 암흑 속인데 올라가다가 도로 내려오다가 또 언덕에 올라가니까 그쪽에서 환한 광채가 그렇게 밝을 수가 없어요. 환하게, 제가 넘어졌어요. 그랬다가 또 다시 용기를 내서 올라갔어요. 선생님은 숨이 차서 그렇게 하시면서도 그때 유언을 하셨다고 그래요. 식구들 다 둘러 앉아 있는데 모아놓고 저는 그것도 모르고 가서 봉창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 내가 살아도 영혼이 여기서 살고 죽어도 영혼이 여기서 산다고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기뻐서 아래채로 뛰어 내려왔는데 듣자니까 18일 새벽에 3시에 간다는 말씀이 들려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는 이것이 참말인가? 참말 가실까? 그러면서도 가서 꼭 지켜봤어요. 그날 저녁에 하루 밤이라고 내가 선생님한테 가서 새워야지 하고 지켜보고는 정말 3시 되니까 가시대요. 정말 선생님 세상 뜨시니까 다 그렇게 마음이 칼로 이어내는 것 같이 마음이 아프고 이런 죄인을 위해서 희생하신 것이 생각할 때 이렇게 참 그 시간만큼이라도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말씀을 잘 못하고 이만 그치겠습니다.
(성가)
사연 언니께서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뜻밖에 서울 언니 공순 언니를 뵙고 이 자리에서 또 말씀을 들은 다음에 제가 여기 나오게 되니까 또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앞에서 말씀 하셨지만 계명산 처음 시작할 때 1956년 3월 5일에 희옥 씨 어머니 공순 언니 두 분 들어가서 사셨는데 저는 그해 5월 달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살다가 그때는 일 년에 두 번씩 1월 달이면 정기총회가 있었고 8월 달이면 모임이 있었고 그래서 거기서 살다가 6년 만에 희옥 씨 어머니하고 1월 달 모임에 참석 하느라고 그때 왔었는데 그때는 이 선생님이 도암 분원에 계셨기 때문에 거기서 집회를 모이게 되어서 희옥 씨 어머니와 저는 도암으로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갔었을 때 이 선생님께서는 막을 치고 계셨고 식구들이 많이 모였지만 그때는 장소도 비좁고 이 선생님이 막치고 계신 것을 볼 때 제 생각에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막에 계시지 않으신가? 그런 생각도 해보고 또 한편으로는 평소에 위생관리에 아주 철저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많은 식구들이 모이고 그런 형편이라 당신이 따로 나가계시지 않은가? 그런 생각도 들었고 나름대로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저는 그때 선생님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병세는 아주 심해서 걸음 한발자국도 못 움직이시는 그런 형편이신데 그 추운 막집에 가계시고 또 집회 모임의시간이 되면 그 막집에 나오시는데 걸어 나오시지를 못해요. 그때 매일 매시간 지금 생각해 보면 춘일 양이 많이 업어 모신 것 같았어요. 예배자리 나오시면 시간 가는 줄 모르시고 몇 시간 이고 말씀을 하시는데 참 많은 식구들이 감탄할 수밖에 없을 만큼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했었습니다. 힘이 조금도 없으신 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때 말씀은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제가 이 시간에 기억에 남는 말씀을 골로새 3장 5절 말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그 말씀을 시작으로 해서 또 묵시 2장 24절로 25절 말씀인데 ‘그 두아디라에 남아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느니라.’ 그 말씀 다른 때는 선생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면 평범한 말씀으로 여러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해주셨는데 그때 그 모임의 말씀으로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을 처음 그때 듣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묵시 2장 24절 말씀에서 ‘사탄의 기쁜 것과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이요.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사탄의 비밀이라’고 하시면서 이것을 배우지 않으려면 충동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충동을 받지 않으려면 그때 성경 말씀으로는 시편 119편 9절 말씀에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오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지니라.’ 삼간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이라고, 위에서 해주시지만 내가 할 일은 삼가는 일이라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극장에도 가지 말고 텔레비전도 보지 말고 필요 없는 객기도 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삼가라고 그때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하나님 말씀 안에서 조심하고 살라는 말씀으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이 선생님에게 직접 이렇게 듣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때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며칠 동안에 이 선생님 말씀으로는 끝나고 다음으로 이어서 오 장로님 말씀을 들었는데 저는 그때 처음으로 오 장로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역시 오 장로님도 거기에 이어서 요한복음 16장 9절 말씀을, ‘무엇이 죄냐?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시면서 예수와 나와 떨어지는 것이 불의라고 예수와 나와 합하는 것이 정의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서 하나에서 그치는 것이 의요, 참 신앙이라고 그때 말씀해 주시면서 그 순결에 대해서 이 선생님의 말씀이나 장로님의 말씀이나 그때 처음으로 들었지만 말씀의 골자는 다 일치다. 그런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그리고 수양회가 끝나고 나서 그때 선생님 병세가 아주 위독하셨을 때였기 때문에 그때는 기독병원을 제중병원이라고 하더군요.
제중병원에서 차가 와서 이 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입원시켜 드리고 저도 그때 같이 나가서 저는 예배당 집으로 가 있으라고 그래서 가있는데 순서가 조금 틀렸습니다만 가기 전에 집회 끝나고 저는 희옥 씨 어머니와 같이 선생님께 인사하러 갔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가려고 그랬더니 처음에는 올라가라고 그러시더니 다시 오라고 하시고는 어머니만 올라가고 저는 남으라고 하시면서 광주에서 일 년 수양하고 올라가라고 그런 말씀 하셔서 광주에 나와서 예배당 집에 있게 되었는데 그때는 식구들이 다 병원에 다니기 때문에 예배당 집에 있으면서 종을 쳐도 예배 자리에 나오는 숫자도 없고 저는 또 갑자기 환경이 달라지고 일과가 달라졌기 때문에 아주 답답하고 종만 쳤을 따름이지 식구도 없고 그래서 선생님께 가서 제 답답한 심정을 선생님께 말씀 드렸더니 선생님 말씀은 ‘순종한 시간은 답답하지만 순종하고 보면 뒤에는 깨달아 질 거라’고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무슨 숙제를 내주시냐 하면 광주 식구들이 계명산에 가서도 살 수 있고 계명산 식구들이 광주 와서도 살 수 있으려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수가 있을까? 그 문제를 하루 이틀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살라고 그런 숙제를 주셨어요.
그러면서 자기도 병원에 다녀 보려느냐고 그러셔서 다닐 마음이 없다고 그랬는데 그 뒤에 또 은현 씨 어머니께서 그때 총무님으로 계시고 매점 다 맡아서 물건 구입해 오시고 그러셨던 때 그 총무님이 같이 병원에를 다녀보라고 몇 번 말씀하세요. 그래서 저는 안다닌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누차 그러시기에 그때 이거 순종을 해야 되는가? 안해야 되는가? 제가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그때 당황이 되데요. 그래서 그때 장로님께 여쭈어 봤어요. 위에서 병원에 다니라고 하는데 다녀야 할지 순종인지 제 자신이 이렇게 분간이 안선다고 그랬더니 장로님 말씀이 지금은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지금 다 다니고 있는데 뒤에 가서라도 미련이 있을까봐 후회할까봐 그런 말씀을 하신 거라고 조금 뜻을 비쳐 주시기에 거기서 안다녀도 불순종은 아닌가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거기서 살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병원에서 선생님께서 또 오라고 하셔서 갔어요. 그랬더니 그때는 무슨 말씀 하시느냐 하면 장로님께 무슨 성경 공부를 했냐고 물으시데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1절로 5절 말씀 공부했다고 주로 거기는 남자와 여자 부부관계 그랬는데 거기 성경에 남자는 지도자를 가르쳤고 여자는 피지도자를 가르쳤다.
그러나 여자가 신앙이 강하면 여자도 남자가 될 수 있고 남자가 신앙이 강하면 남자도 될 수 있다. 신앙의 강약에 대해서 약간 말씀 드리고 그랬더니 선생님 말씀이 누가 그 깊은 진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한 사람이나 있겠냐고 그 말씀을 하실 때 선생님 말씀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앞으로 장로님께 여반은 성경 공부를 해야 된다고 지금 여반 수효는 남반 보다 더 많지만 한사람도 서있는 사람이 없다고 내가 새끼손가락으로 한번만 탁 튀기면 다 달아날 사람들이라고 그 말씀을 하시면서 앞으로 장로님께 성경공부를 해야 된다고 그 말씀을 그때 해주셨어요. 그리고 돌아왔는데 또 얼마 있다가 선생님이 오라고 하셔서 갔어요. 그런데 그때는 선생님 시중을 들라고 하시데요. 그런데 저는 계명산에서 몇 년을 살다가 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병원에 있다는 것도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모르는 것뿐인데 선생님 시중을 들라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저 공동 생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같이 앉아서 공부도 하고 지도도 받아왔지만 또 단독으로 선생님 시중을 들면서 선생님이 무슨 교육을 하실 일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순종을 했어요. 그때는 방 순남 언니하고 저하고 두 사람 같이 시중을 들면서 순남 언니는 주방에서 하는 일을 하고 저는 호실에서 하는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선생님이 위독하시고 그러실 때라 일어나시지도 못하고 한쪽으로 누워계시고 말씀도 못하시고 그러실 때가 시중을 혼자서 들지도 못하고 둘이 해야 할 형편도 되었지만 무슨 교육할 일이 있어서 그러실 것만 같았어요. 그래가지고 그때 7월, 8월 두 달 병원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제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산속에서 살다가 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며칠 동안은 어린애 취급을 하시고 가르쳐 주시데요. 그러시더니 며칠 지난 뒤에는 아주 엄격한 교육을 하시면서 시간 일초만 틀려도 아주 엄격하셨고 그런 것을 거기서 직접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직접 거기에서 선생님 뜻은 상대방의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아주 가까이 대해 주셨고요. 또 아주 겁을 쓰실 때는 엄격하셨고 그러나 부드럽게 대해주실 때는 한없이 부드럽게 해주셨고요. 또 남에게 물건을 받았을 때는 꼭 답례를 하라고 하셨고요. 또 그렇게 몸이 아주 쇠약하시고 병석에 계시면서도 날마다 성경보시고 기도하시고 새벽이면 목욕하시고 그런 것을 (끊김)
선생님 제가 아직도 정리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원으로 갈수가 있을까요? 그랬더니 그런 것은 나중에 갔다 와서 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가라고 하시데요. 그래서 그때 가게 되었었는데 자꾸 순서가 뒤바뀌네요. 가기 전에 총회 때 다른 말씀 성경말씀으로 집회가 끝나면 그때는 동광원 회의라고 사흘이면 사흘 나흘이면 나흘 집회가 끝나면 하루는 동광원 회의가 있었는데 그때는 원장님이 다 사회를 맡아 보시고 또 은현 씨 어머니께서 총무로 보셨기 때문에 그때는 아주 세밀히 기록하시고 낭독하시고 그랬는데 제가 1월 달 총회를 계속 하다가 얼마동안 쉬다가 지금 금년에 또 새로 시작하니까 새롭게 그때일이 생각이 나서 그때 생각을 지금 발표한 것인데 총회 시작할 때는 그 인원 출석을 불러가지고 반수 이상이 오면 시작을 하고 반이 못되면 기다려서 시작을 하고 그랬는데 언제나 처음에 시작할 때는 총무님께서 그 동광원 회의록을 낭독하셨어요. 그런데 그때는 동광원 회의록에 동광원 정신을 낭독하시고 또 정회원 자격에 대해서 낭독하시고 그 다음으로 그렇게 살았는지 안 살았는지에 개개인의 소감 발표가 있고 그랬는데 그때는 우리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듯이 동광원 회원증을 각각 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동광원 회원증에는 동광원 정신이 다 기록되어 있고 정회원의 자격이 기록되어 있고 그랬는데
첫째 정절을 지킬 것 둘째 가난하게 사는 것 셋째 순명을 지킬 것 넷째로 깨끗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 다섯째로는 부지런히 일해서 자작자급 하는 것이 동광원 정신이고요. 다음으로 그 정회원의 자격은 동광원의 정신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 두 번째로는 모든 규칙을 잘 지키고 철저히 충고를 받아서 화목을 힘쓰는 사람, 셋째로는 웃어른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자기 직책에 충실한 사람 이것이 정회원의 자격입니다. 총무님께서 이것을 낭독 하시면 다 각 부서에서 온 식구들이 저는 금년 동안에 이 말씀대로 못 살았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보고가 있은 다음, 또 책임자 어르신들이 각 부서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었다든지 좋은 일이 있었다든지 1년 동안에 되어 진 일들을 모두 다 보고하고 또 그 다음으로는 농산물 보고하고 인제 십일조든지 보고하고 그때 눈몸회가 있었는데요. 아마 눈몸회 회장이 춘일 언니 이였던 것 같은데 제가 지금 생각하기로는 그때 눈몸회 회비는 전도비로 많이 써진 것 같고요. 그때 오 장로님께서 전도부 책임을 지고 계셨는데 전도 심방 다니시는데 많이 써드리고 계명산에서 직조하는데 조금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거기에 협조 해드리고 그렇게 그래서 그때는 처음에 수양회를 해서도 은혜스럽고 수양회 끝나고 동광원 총회에서도 그렇게 은혜스럽게 참 저는 은혜스럽게 생각했어요.
1년에 두 번 모이는 것이 그렇게 은혜스럽고 좋았는데 어쩌다가 가다가 중간에 끊어져가지고 뒤늦게나마 작년 재작년부터 8월 달 수양회가 남원에서 있었고 금년에 여기서 다시 시작하게 되어서 그때 일이 생각이 나서 이 시간에 그때 일을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 희옥 씨 어머니 공순 언니가 함께 오신다는 건 참 처음 된 일이고요. 저도 거기에서 살았지만 누가 오든지 한 사람씩 교대로 오시고 같이 오신 적이 없었는데 오셨는데 같이 오시니까 저 역시 또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어머니께도 감사드리고 제가 지금 말씀에 순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주서 살다가 갑자기 계명산에 가서 살라고 하셔서 갔었는데 가서 살고 있는데 자꾸 광주에서 소식이 오기를 다시 와서 선생님 수종을 들라고 다시 오라고 소식이 간접적으로 오라고 소식이 와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선생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자꾸 그렇게 건너온 말씀 같아서 그때 순종을 안 했었어요. 그런데 원장님도 오셔서 말씀을 몇 번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도 제가 순종을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다음해에 그때가 62년도였는데 선생님께서 64년도 3월 12일 날 계명산에 오셨어요.
11일 날 능곡에서 하루를 유하시고 12일 날 계명산에 오셔서 거기에서 한 일주일 유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거기에서 능곡에서 막차로 오시니까 밤중에 오셨어요. 지금같이 교통이 좋고 택시가 있었다면 택시로 모셨을 런지 모르는데 그때는 기차역에서 그 마을에서 자전거 한 대 빌려다가 희옥 씨 어머니하고 성재 씨하고 같이 벽제 기차역으로 가가지고 그 자전거를 끌고 밤중에나 오셨는데 그 인사만 드리고 오려고 그랬는데 그때 베틀 방에 모셨어요. 선생님을 그랬는데 못 가게 하시면서 이야기를 하라고 그러셔요. 그래서 한나 어머님과 같이 지낸 이야기를 하고 광주에서 오라고 그랬는데 불순종 했다고 선생님께서 오라고 하셨다는데 저는 이렇게 불순종을 했다고 그랬더니 선생님 말씀이 내가 오라고 한 적이 없다고 언니들이 오라고 했다고 그래서 그러면 불순종이 아니겠구나 하고 조금 위로를 받았어요. 그리고 하루를 거기서 지내면서 자꾸 저는 선생님 너무나 피곤하시고 그러니까 그냥 가려고 자꾸 일어나려고 그러면 못 가게 하시고 그러시더니 아마 그때 유언이었던가 봐요. 제게다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도 지치지 말고 끝까지 살라고 하시데요.
그리고 이 큰길이 앞으로 길이 메어지게 의인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들어올 것이다. 그러시고 그때 꾀꼬리 봉이라고 떡 번지 위에 길이 그때 안 났었는데 앞으로 길이 나고 거기에 비행기가 앉을 것이다.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요. 그래서 그때는 의심이 들었는데 일주일후에 선생님께서 임종하시고 나니까 그런 것이 다 유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서 하루 지내고 그 위에 현 총무님이 수양 처로 지어놓고 계신 집으로 옮겼어요. 선생님을 장소를 옮기셨어요. 거기 가서 예배드리고 그러면 어떻게 예배 시간이면 기쁘고 감사하고 말씀을 힘 있게 하시고 찬송도 우리가 경건한 찬송을 부르면 그 경건한 찬송 부르지 말고 힘 있게 힘찬 노래를 부르라고 하시면서 지게지고 가면서도 부를 수 있고 노동하면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힘 있게 부르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기뻐 하셨어요. 기쁨을 어떻게 형용 못할 정도로 기뻐하시면서 말씀 하시고 우리 한국에 태어난 것 모두 감사하자고 다른 나라는 일 년을 살아도 달도 못보고 그런 나라도 있는데 우리 한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라고 춘하추동이 있고 달뜨는 나라라고 늘 그러시면서 기뻐하시데요.
앞으로 그렇게 등불이 되라고 한국에 등불이 되라고 어디 가서나 일해서 먹고 사는 것 다 등불 노릇 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씀 하셨어요. 그리고 또 거기서 임종 직전에 선생님께 배울 수 있는 것은 평소에도 외모에 대해서 단정하셨는데 그렇게 숨이 가쁘시고 일분도 당신 혼자는 앉지도 못하고 누워계시지도 못하고 사람이 부축을 해야 앉아계시는 그런 상황에 누여라 일으켜라 누여라 일으켜라 일분 간격으로 그런 관경인데도 임종하시기 전날 밤에 선생님께서 누워계시기 때문에 속옷만 입고 계셨는데 화장실에 가시고 싶다고 겉옷을 다 입혀달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다 입혀 드렸는데 겨우 가까스로 입혀 드렸는데 대님까지 다 매라하시고 옷고름까지 다 매라 하시고 저희들이 생각 할 때는 대님이 뭐고 옷고름이 다 뭐에요?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런데 그렇게 세밀 하시고 철저하시게 그래가지고 화장실에 가신다고 그러셔서 그때는 화장실까지 못가시고 집에 가까운 나뭇간이 있는데 거기에다 큰 널 박지를 놓아두고 판때기 두 개를 올려 놨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보시고 저에게 업으라고 해서 제가 업고 김 선생님이랑 같이 셋이 내리라. 그래서 내리고 저는 밖으로 나가라고 그래서 나오고 김 선생님은 그 안에서 부축하고 다시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가서 업고 방으로 모셨는데 그대로 누우셔도 되지 않아요? 너무너무 힘이 없고 숨결이 가파른데 그 옷을 다 벗기라고 그러세요.
그리고 그 옷 인제 없애지 말고 당신 임종 후에도 없는 사람들 가져다가 입게 하라고 그런 말씀 하시고 그런 모습을 여러 가지를 볼 때 저희들은 그만 못 해도 어디가 조금만 괴로워도 만사가 귀찮고 어디다가 신경 쓸 여유가 없는데 선생님께서는 그 임종 직전 까지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마음을 쓰신다는 것 평소에도 그랬지만 임종 직전까지도 그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 것을 목격 했습니다. 이제 한 가지 또 자꾸 순서가 바뀌는데요. 임종하시기 전에 한나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회개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 살아생전에 선생님께 불순종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 드리니까 선생님 말씀이 선생님 열이 너무 오르고 숨결이 가프니까 말씀을 끝 어리가 잘 알아듣게 그렇게는 못하시고 불순종 아니요. 그러고는 끝났어요. 고린도전서 7장 1절을 보라고 선생님 말씀이 그러니까 개역으로 고린도 전서 7장 1절의 말씀을 읽고 너희의 쓸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각각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너희의 쓸 말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고린도전서 7장 1절 말씀, 그 말씀을 인제 한나 어머니께서 광주에서 계명산 들어오실 때에도 그 얼마나 남녀 문제에서 철두철미하신 어머니께서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조금 병원에도 다니고 이렇게 조금 활동을 하니까 모든 것이 한나 어머니 신앙 면에서는 조금 못 마땅 하셨지요. 선생님들이 하신 일이라 해도 왜 저러셨을까? 했는데 그때 서로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 말씀을 주시지 않았는가? 불가피할 사정으로 선생님들께서 여반을 가까이 하시고 교육상 그러신 것을 그때 그 말씀으로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일 새벽 3시에 가신다고 그 말씀 하시고 18일 새벽 3시이지요. 어쩌면 그렇게 다 가실 때 까지 그렇게 하나하나를 민첩하게 여유 있게 다 하실 수가 있을까? 그런 것을 실제 보고 감탄했습니다. 두서없는 말씀 이만합니다.
감사합니다. 동광원 정신 정회원의 정신 정신강령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저는 성경에 가지고 다니면서도 잊어버렸는데 오늘 사연 언니께서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합니다. 한번 따라서 읽으십시오. 강령 정절을 지킬 것, 가난하게 사는 것, 순명하는 것, 깨끗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 부지런히 일해서 자작자급 하는 것, 예 정회원의 자격입니다. 동광원에 정회원이 있고 준회원이 있었습니다. 정회원의 자격은 동광원의 정신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 모든 규칙을 잘 지키고 철저히 충고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화목을 힘쓰는 사람. 웃어른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자기의 직책에 충실한 사람. 예, 감사합니다. 19번 성가 19번 추도가 오늘 이 선생님 세상 뜨신 것을 생각 하시면서 성가 19번입니다. 추도가 이 선생님을 생각하는 노래입니다.
저 저산에 해가지고 동산위에 달떠오니 우리주님 따라가신 스승생각 새로워라. 그 물속에 비친 저 달 내 마음과 흡사하네. 백합 같은 그 순정을 그리스도에게로만 십여 년을 하루같이 말씀하신 그 비밀은 그 피 속에 스며들어 귓전에 사무치네. 샛별 같은 네 동정을 주님께만 바치라고 그 피땀이 다 진하고 그 숨결이 다하도록 못 잊어서 못 잊어서 다시 말씀하시었네. 네 정절을 주께 봉헌 하겠느냐? 물으실 때 예 말하고 대답하니 다시 말씀 하시기를 너 지극히 적은 이를 섬기라고 하시었네. 그 귀양이 다 풀리고 주님 앞에 가시던 날 감격함을 못 이기고 오 기뻐라. 오 기뻐라. 말하시던 그 음성이 지금같이 들려오네. 십자가에 달리셔서 목마르다. 하시던 님 그 사랑이 목이 말라 부르짖던 그 음성이 가시던 님 연상하면 또 다시만 들려오네. 그 순결과 가난함과 그 순명의 복음삼덕 우리주님 앞서시고 저의 스승 따르시니 그 사랑에 의지하고 저희들도 따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이 귀한 시간에 저는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 나오면 순수한 이 선생님에 대한 뭐라 할까? 우리의 옛날에 믿었던 그 신앙을 말씀 드려야 하는데 제가 나오면 설교식이 되겠다. 해서 제가 안 나오려고 했는데 김 선생님이 나가라고 하셔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먼저 희옥 씨 어머니와 모든 언니들이 다 이렇게 이 선생님에 대해서 말씀을 하셔서 잘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쉬었던 우리 수양회 총회 이 수양회가 쉬었다가 개최되었다고 해서 오늘 오셨다가 가신 엄 목사님과 원 선생님에게 그런 인사를 드렸습니다. 같이 그때 협력하시던 우리 선생님들은 다 가시고 어른들은 보니까 든든하고 또 어딘가 모르게 한쪽이 빈 것 같았는데 또 뵈려는지 못 뵈려는지 몰라도 이렇게 오셔서 수고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갈렸습니다. 그런 마당에 저도 이 시간에 그때 이 선생님을 만났을 때 어느 편인가 한편을 이야기 하라고 해서 제가 하려면 많은 것이 있는데요. 전편도 후편도 떼어놓고 중간 편을 말해야 될까? 그런 생각을 해보고 시간이 너무 짧으니까 이렇게 제가 생각으로는 걸인 편을 해볼까 생각합니다. 여기 머리도 시작도 또 머리도 떼어놓고 끝도 떼어놓고 중간 편 중간에 걸인 생활을 했으니까 걸인 편 밖에 계셔서 오신 분들은 심심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들 실제로 그렇게 몸으로 부닥쳤고 사실에 그렇게 생활했기 때문에 이것이 또 한 번 들어봄으로 옛날 생활이 그리워진 것이지요.
선생님과 관계 우리들의 생활이 있어서 이야기 해봅니다. 이해하시고 밖에 사시는 분들은 가셔도 되고 계셔도 되고 자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셨지요? 제일 적은 것을 둘 말씀하고 제일 큰 것을 말씀하셨는데 무엇 무엇이 크다고 말씀 하셨지요? 두 가지 반대입니다. 사도 중에 제일 적은 사람 사도 중에 제일작고 죄인 중에서는 제일 크다고 그랬어요. 저는 그렇게는 못되었어도 이 동광원 사람으로는 제일 적은 사람이에요. 무엇으로 학문적으로나 머리가 둔한 적으로나 내가 좀 머리가 영리했다면 그때 말씀 좀 듣고 했을 텐데 전혀 막혔어요. 지금 같으면 조금 어떻게 바늘귀라도 뚫어지려는가? 한 가지라도 물어보고 했을 텐데 한마디도 못해봤어요. 내 생각으로 머리로는 그렇게 캄캄한 사람이야. 얼마나 캄캄했던지 참말로 그런 사람에 하나에요. 그러나 하나 말로 조금 했어요. 말 이 선생님을 상당히 업고 다녔어요. 말 노릇을 한 겁니다. 말이 말하는 거예요. 말이 방언하는 거예요. 그래서 걸인 편을 조금 이 시간에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집회에서 이야기 했습니다만 모든 문제를 이렇게 여러모로 협력해서 수고해 주신 언니들에게 감사드리고 원장님으로부터 어떻게 이렇게 다들 좋게 생각하시고 여기 오셨다가 가신 선생님들도 목사님들도 다 이렇게 좋게 생각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걸인 편 다 떼어내 버리고 걸인편만 조금 하려는데 네가 함평에서 살다가 옛날에 불타진 동광원이라는 데가 있었어요. 우리가 부른 말이지요. 육이오 전에 거기에서 동광원을 시작해서 하다가 고아들 데리고 사업하다가 육이오를 만나서 불타버렸어요. 그래서 거기다가 막을 치고 그렇게 살고 있는데 함평에 있다가 거기에 왔어요. 다 떼어내버리고 말하는 거예요. 지금 너무나 시간이 없어요. 왔더니 이 선생님께서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으시고 계시면서 저한테 평화시대가 오면 갚을 예산하고 지금은 얻어먹고 저기를 하라고 당신의 윗도리를 벗어서 던져줘요. 이놈 입고 가라고도 안 해요. 탁 벗어 주시면서 이놈 입고 가서 밥 얻어오라는 거지요. 그러니 이놈의 것 몸둥어리는 성성해가지고 밥 한 끼 얻어 본 역사가 없어요. 내가 그러니 이놈의 것 어떻게 입고 밥을 얻으러 가냐 이것이야. 내가 밥 달라는 말 입에서 나올 것 같지도 않아, 그래서 입고 밥을 얻으러 갑니다. 앞도 못 봐요. 양쪽도 못 봅니다. 사람들이 싹 다 나만 보는 것 같아, 그러니까 앞만 보고 갑니다. 옆에 누가 볼 수도 없을 정도로 그런 정도로 앞만 보고 갑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밥을 얻어가지고 와서 먹고 한번 두 번 연습을 해보니까요. 상당히 연습이 되었어요. 그렇게 되니까 강변에 나가서 살게 되었어요. 움막 쳐놓고 살게 되니까 막을 쳐놓고 고슬빈 씨라고 계신데 거기 옆에다가 막을 치고 사는데 그렇게 사니까 원장님이 신입반이라고 해가지고 얻어먹는 소년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나한테 붙여줘 가지고 그 사람들을 데리고 밥을 얻어먹고 살아요. 그때 당시는 가난하니까 어디를 가야 밥을 많이 주냐? 깡통을 가지고 가면 여관집에 가면요. 식은 밥 남은 것 하나줘요. 여러 집에 안가고 밥을 얻어오니까 애기들이 나보다 잘 얻어오는 애기들이 있어요. 나보다 선수야. 따라 오라고 나를 데리고 그런 데로 가는 거야. 그때는 다리 밑에 천사라고 우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았어요. 일본에 갔다가 한국에 나와 가지고 어쩔 수가 없으니까 다리 밑에 와가지고 거지 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런 판국에 우리들도 끼었어. 그렇게 살지요. 상당히 살면서 되어가지고 김 선생님 계시지만 거기서 살면서 어더더 할아버지 앉아서 얻어 잡수시는 그런 양반 한분을 모셨어요. 그래가지고 모시는데 때에 따라서는 노인네가 인제 참 청결하기는 한데 담배를 피워요. 담배도 때로는 사다 드리는데 요것만 피우고 그만 피우시라도 그러면 어더더더더 그러세요.
고맙다고 사다주면 그런 식으로 하는데 때로는 이 양반이 참 정신은 맑은데 어쩌다가 실수를 해가지고 빨리 잘되지 않아가지고 똥을 싸버려요. 그러면 그놈 씻으려면 지금 같으면 아닌데 그때는 얼마나 냄새가 나는지요? 어른 똥이라, 그런 것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좀 살다가 얼마동안 사는데 그렇게 살면서도 항상 마음이 안 놓이는 거예요. 항상 부끄러워요. 건강한 사람이 밥을 얻어먹어야, 그런 마음이 있고 편하지 않고 그런데 고슬빈 씨라고 팔이 소아마비로 한 팔이 말라서 우리들은 생전 보여주지도 않아요. 옷 속에 넣고 사시는 분이라 그런 분이 있어서 제가 한번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건강한 사람이 얻어먹고 사니까 이거 보통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얼마나 용기 있는 말인지 몰라. 당신네들은 건강하니까 오늘이라도 이것 벗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우리는 생각해 보라고? 그 말에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내 마음은 딱 땅에다가 묻어버렸지. 그 말이 사실이지요? 내 생각만하고 그런 말을 해버린 거예요. 그렇게 한참 사니까 마음이 보따리가 커져가지고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것 보다 서울로 가봐야 되겠다. 마음이 상당히 그렇게 단련이 되어버렸지요.
무엇까지 배웠냐하면 그 양반한테 무엇을 주워다 먹고 밥을 얻어먹지 않고 사는 기술을 그 양반한테 배웠어요. 그래서 나도 서울 가서 얻어먹다가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도 살겠어요. 그렇게, 그렇게 서울 가서 한참 사는 거예요. 한참 사는데 어디 여기서 애기들하고 같이 능곡에 가는 애기들이 있어서 같이 한꺼번에 몰려갔는데 나하고 같이 사는 얻어먹는 손님들 싹 데리고 갔어요. 이 사람들 다른 사람들은 농사지을 목적으로 갔는데 이 사람들은 농사지을 목적도 아니야. 나한테 가만히 빠져나갈라는데 이 사람들이 기미를 알아가지고 어디 담요를 가지고와서 담요를 덮고 앉아서 밤을 새우는 거예요. 그러다가 내가 혼자 도망을 했던가? 도로 능곡을 데리고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떼어놓고 밤에 도망을 갔어요. 그래가지고 서울 가서 혼자서 있는데 그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광주로 갈 사람은 가고 인제 붙을 사람은 붙고 그렇게 되어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살다가 저는 서울 굴에 인제 어디 살 데가 없으니까 굴 전향을 하는데 어디가냐하면 지금 서울 신촌으로 가는 그 굴이 하나는 육이오 때 폭격을 해가지고 무너져 버렸어요. 그래서 그것이 한쪽은 못 다니니까 그냥 차가 안다니고 한쪽만 다니데요. 그런데 굴지키는 양반이 있어요. 그런데 그 양반한테 애기들이 초등학교 다녔든가 안 다녔든가 그런 딸들이 둘이 있는데 그 양반이 마음이 좋아요.
딸만 있어서 그런지 딸을 낳은 아버지들이 마음이 좋은가? 어떤가? 그 양반이 마음이 좋아가지고 모르지 자리를 잡았는지 안 추워? 그러면서 인사를 와요. 아침이면 그러면서 우리 친구가 있는데 잘 있으라고 그래서 한참 거기서 살았어요. 구정이 돌아왔는데 그 집 딸들이 옷을 곱게 입고 한복을 입고 나한테 거기 굴 있는 데로 와요. 무엇 하러 오냐? 그러니까 세배하러 와요. 에끼, 거지한테 세배 하냐? 그러니까 거지한테도 세배하지요, 하고 땅에다 대고 절하는 것 있지요? 애기들이 그만큼 순진하구나. 그렇게 생각해 봤어요. 그렇게 무엇을 하고 한참 살다가 거기서 거기도 많이 떼어 내버리고 한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다가 거기서 깡패들을 만나버렸어요. 거기서 희옥 씨 어머니도 만나고 최씨 어머니도 나 있는데 와서 만나버리고 갈보리 어머니도 이런 것 싹 떼어버리고 다하려면 이거 두 시간을 해도 못 다해요. 그래서 이 깡패 이 사람들이 학생 깡패들이 싹 차려입고 와서 돈 내놓으라는 거야. 말하자면 네가 왕초 아니냐? 거지들 데리고 있으니까 안한다고 그랬더니 그래도 말 안 듣고는 막 때리면서 그때 승명 씨 동생 그 사람하고 맞았어요.
그 사람은 가버리고 나는 이사를 해야겠냐? 어쩌겠냐? 했더니 그때 희옥 씨 어머니하고 최 씨 어머니가 듣고는 동대문 어디를 가보라고 그래서 거기를 가보니까 못쓰겠어. 누가 살고 있고 그래서 다시 그쪽으로 왔어요. 오니까 그 양반이 하는 이야기가 여기서 살지 어째 어디로 가냐고 거기서 한참 맞고 어쩌고 하니까 살 마음이 안 생겨, 또 성경책도 빼앗겨 버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이사를 가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양반이 하는 말이 그러면 내가 알려줄게 신촌 저기가면 기차 대가리를 숨겨 놓으려고 왜정 때 파놓은 굴이 있으니까 그곳으로 가라. 그 양반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어요. 그곳에 가서 한참 사는 거야. 거기에 가서 재미 붙여가지고 얻어먹지도 않고 그렇게 주어다가 채소하고 이렇게 먹고 사는데 살다가 그때도 광주서 서울 올라갈 때처럼 그런 마음이 상당히 커졌어요. 커지니까 내가 부산이고 어디고 돌아다녀봐야겠다. 자신이 생긴 거야. 그래가지고 능곡으로 어디로 간다고 인사하러 딱 가니까 아이고 이 선생님이 와계시네요. 후두결핵으로 말씀을 못하시는데 나를 얼마나 기다린 것처럼 말씀은 못해도 그래가지고 은현 씨 원장님이 필기를 하고 따라다녔어요. 필기를 하시면서 빨리 나있는데 가자는 것이야. 빨리 나있는데 그러니까 가야지. 한쪽에서 들것을 만드는데 그냥 제가 업고가 버렸어요. 업고 가버리는데 가다가 쉬었든가 안 쉬었든가 역전까지 업고가, 가지고는 거기서 그곳으로 모셨어요. 제가 있던 곳에다 저는 보따리 싸가지고 어디로 이사 가려고 그랬는데 다른 생각해요? 새 살림 이에요. 그러니까 한나 씨 어머니도 오시고 희옥 씨 어머니도 오시고 식구들이 다 오 장로님 김 선생님 막 싹 다 식구가 우리 굴에 식구가 겁나게 많아져 버렸어. 그래가지고 거기에 와서 그때 사시면서 하도 열이 나고 후두결핵으로 말씀을 못하시고 그러니까 얼음을 사다가 항상 입에다 머금게 해드리고 그런 무엇을 하고 있는데 우리 동광원 약하고 고기하고 금하던 것을 깬 장본인이야. 심부름한 장본인 이 선생님 내가 없었으면 안 잡수셨을 런지 모르는데 그때 제가 심부름한 장본인이
제가 그 무엇을 사서 물을 해서 드리니까 기도를 하셨다고 그래 그때 하나님의 뜻이면 넘어가게 해주시고 뜻이 아니면 이 물이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 나를 데려가 주시라고 그런 기도를 했는데 넘어갔다 그래요. 그래서 거기에서 모든 사람들이 같이 저기도 드리시고 그때 사실은 개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가 그때 그런 사람의 하나이고 제가 지금은 직설적으로 고기를 먹지말자. 그렇게 해봅니다. 지금은 오늘까지 먹고 살아봤던들 건강한줄 알고 먹었는데 저는 또 꼭 그것을 먹어서 좋다 안 좋다. 그것 보다도 예수님도 자비를 원했으니 나도 자비를 원해서 생각을 해보니까 고기 잡다가 죽는 목숨들이 형제들이 다 내 남편이고 내 동생이고 내 형제라고 생각하면 내 집안에서 오징어 잡다가 죽었는데 그 오징어가 맛이 있겠냐? 그것 이지요. 이것 살다가 보면 언젠가 자기 보는 대로 들어가 버려요. 자기 생각대로 되어 버려요. 고기 먹는데도 잘 믿는데 그런 생각이 들어가고 저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아니고 이런 무엇을 그때 그랬는데 이렇게 된다. 시간이 조금밖에 안 남았는데 그런 편에 있어서 제가 그 걸인 생활을 왜 이야기 하냐하면 그때 그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배고프면 얻어먹고 그런 생각이 죄가 안 된다고 생각이 들어요. 또 그 얻어먹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 하냐? 산에 가도 그렇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워버린 거예요. 저는 걸인생활을 가르쳐줬기 때문에 자유스럽고 또 그뿐 아니라 이분들이 그런 생활을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얼마나 무엇한테 매여서 살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해봐요. 애기들 교육문제 여자들 문제에 얽매여 살 것인데 다 떼어내 버리고 말하려니까 이렇게 체계가 없어요. 장사하다가 실패해가지고 고물장사를 한바탕 하면서 이 선생님이 그랬어요. 의인 이라는 것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 돌배기 속에서 의인은 다 묻혀있다. 그랬어요. 고물장사 하면서도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아주 기구만상한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얼굴이라. 그렇지만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 속에 다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도 귀엽게 볼 수 있어요. 인간으로는 얼굴로 볼 수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 생각도 해보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보냐? 고물 세계라는 것은 무엇이 한탕 되면 신나게 다닙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한 사람은 고개를 쑥 빠치고 다녀요. 가위만 치고 다니고 그래서 나는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무엇을 보면 성경이 보이려고 그래요. 그래서 이 장사 돈 버는 목적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막걸리 먹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막걸린 둘이서 한잔 딱 먹고 죄송합니다. 또 그걸 막걸리 먹을 줄 아냐고 못 먹는다고 하면 음료수 사서 같이 한잔 나눠먹고 아 돈 벌려고 하지 않으면 무엇 하러 다녀? 그러고 아이고 잘했다고 그것 무엇이냐? 믿음에 길을 조금 찾아보려고 하니까 그런 사람들 보다는 조금 더 힘이 찾아지고 생겼다고 그래서 이 선생님이 누구보다 앞서야 되냐? 공산주의보다 앞서야 한다고 하셨어요. 오늘도 공산주의에 대해서 오늘 아침에 원 선생님이 말씀 하셨지만 이 공산주의보다 앞서야 합니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함평에서 살면서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그분을 통해서 내가 이 오늘까지 나는 고난으로 뭉쳐졌다고 할 수 있어요. 왜냐 세 살 때 부모를 잃고 그 이후로 내가 커 나오면서는 내 생애가 어떠한 인생에 있어서 즐겁거나 기쁘거나 그런 것이 통 없었어요. 왜냐 남들은 내 나이에 부모의 사랑을 받고 크고 하는데 나는 어디다 어머니라는 자리를 한자리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이 그렇게 부르면 나는 쳐다만 보고 있어요. 쳐다만 봐요. 나는 그럴 언덕이 없거든. 그런 생활을 하며 이만큼 컸어요.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