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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관* 스크랩 염소에 대한 시
동산 추천 0 조회 26 09.06.07 22:11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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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 문신 

 

 

 

하나의 낭설인지도 몰라
날카로운 내 뿔이 우주로 향한 안테나라는 거
 
검은 구름은 풀밭 상공을 낮게 흘러가고
나는 비로소 축축한 무릎을 펴고 일어선다
어디선가 초록 이끼의 냄새가 맡아진다
그러나 바람은 불지 않는다
모든 쓸쓸했던 것들의 아픔을 느낀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흘러오게 되었던가!
기억은 가끔씩 부러지기도 하면서
내가 그어놓은 둥근 금 안으로 상형문자 같은
무거운 구름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갔는지
얼마나 많은 죽음들이 별로 환생했는지 내 뿔은
기억하지 못한다
젖은 바람이 속눈썹 끝에서 불어온다
검은 구름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우주선처럼
허공에 긴 꼬리를 떼어내며 불시착한다
풀들이 창살처럼 단단하게 일어선다
나는 우주를 향해 열린 안테나를 세워
유배 일기를 타전한다
나는 이미 말뚝의 중심에 길들여졌으므로
지상에서의 생활은 즐거운 나날뿐이라고

그리하여 불구의 꼬리가 한 뼘쯤 자라난 것 같기도 하다고
그러나 오늘도 접속이 거부되는 내 운명이여!
 
하나의 낭설임에 틀림없어
날카로운 내 뿔 속에 우주의 비밀이 들어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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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염소의 만트라 / 고진하


 

 

늙으면 너나없이 말이 많아진다.
제 몸에서 죽음이 자라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일까.
산책이나 좀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무릎 관절에서 똑, 똑, 삭정가지 부러지는 소리.

묵언기도 사흘째,
무슨 성상(聖像) 따위도 방 안에 없지만
잠잠히 엎드려 있으려 했으나
멍머구리 들끓듯 안의 소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풀밭 위 사람들 발자국이 낸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방죽 밑에 풀어놓은 흑염소들,
한가로이 풀 뜯어먹기에 여념이 없는 놈들 옆에
똥 누는 폼으로 쭈그린 나도
민들레, 질경이, 토끼풀 몇 잎씩 뜯어 꼭꼭 씹어본다.
헌데, 왜 이렇게 쓴 거야...... 퉤, 퉤!
난 무심코 며칠 공들인 묵언을 깨버리고 만다.
그 순간, 늙은 흑염소가 우스꽝스럽게 구부러진 뿔을 흔들며
들이받을 둣 가까이 다가오다가
지가 무슨 구루(Guru)라도 되는 양 만트라 하나 획 던져준다;
음, 메에에에...... 음, 메에에에에......

그 떨리는 소리의 여운(餘韻)은 산책길에 또 만난,
무뚝뚝한 기차의 기적 소리로 시원스레 이어진다.
침묵의 연인이고 싶어 스스로 재갈 물린 묵언 사흘
그래, 이쯤에서 작파(作破)해버리자......

 

 

 

 

 

 

 

 

 

 

 

염소 / 문정희



저 염소도 아는가 보다
온 몸을 쥐어짜는 그의 울음에
벌판의 풀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네 발로 딛고 있는 이 지상을
곧 떠나리라는 것을
저 지렁이도 아는가 보다
꿈틀댈 때마다
온 몸으로 모래를 떨구는 것을 보니
흐린 날이 아니어도
하늘 가득히 검은 새들은 날아가고
서둘러 씨방을 만들어
꽃들은 몸 속 가장 은밀한 곳에
시간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을 보니
염소도 지렁이도 새들도 꽃들도
다 알고 있나보다
길은 어디든 있을 뿐이며
지금 이 순간이 전부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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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와의 촌수 / 복효근

 

 

 

햇살 짱짱한 봄날
팔순 어머니와 나와 내 딸 선혜, 인혜와
산모퉁이 돌아가며 냉이를 캔다
저 쪽 언덕엔
겨우내 새끼를 낳았나 보다
삐쩍 마른 어미 염소가 새끼들 데불고 나왔다
염소와 사람 촌수가 이렇게 가깝구나
풀과 나물이 한 끗 차이듯
초식의 유습을 공유한
한 끗 차이도 안 되는 짐승으로
우리는 새순을 뜯으며
함께 햇살을 나누고 있구나
오늘은 전생과 내생도 한 뼘 차이로 가까워서
어머니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손녀들에게 자꾸자꾸 풀이름을 가르치는데
아무래도 나는
저 염소에게 가서
댁의 성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봐야 되겠다

 

 

 

 

 

 

 

 

 

 

 

 

염소 울음이 세상을 흔든다 / 박완호   

 

 

 

새끼 염소가 죽었다
난 지 사흘만에 나선 첫 산책길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길을 잃었을까
누구의 귀에도 가 닿지 못한
울음 한 조각 물고
똥통에 빠져 죽은
염소의 검은 등을 밟고
수의라도 덮어주려는 듯
구더기들 하얗게 몰려든다

 

목덜미 털이 벗겨지도록
종일 새끼를 찾던 어미는
모르는 척 허겁지겁 밥그릇을 바닥까지 핥는다

물기 젖은 염소의 눈길 가 닿는
사발 속 허공 

어미 염소의 허기가
세상의 저녁을 흔든다 
 

 

 

 

 

 

 

 

 

 

 

 

언덕 위의 염소 / 박유라

 

- 사진 2 

 

 

 

가도 가도 그 자리
풀밭 벽에서 반야를 되새김질하는 염소들

눈조리개 몽롱히 열어 옴쭉옴쭉 방정맞게
여기서도 옴 저기서도 옴 옴을, 오물거리며

 

해가 가마솥 풀빵만큼 부풀어오른 정오
라디오에서는 흘러간 옛노래가 메들리로 나온다
손가락 장단을 한 번씩 퉁겨 올릴 때마다
부드럽게 흐르는 턱과 턱 능선에서
침에 섞여 노래와 풀들이 잘게 으깨지고
한나절 언덕이 잘 반죽되고 있다
부풀어 올라라 부풀어 올라라 풀 풀 풀
해가 서쪽 목책에 종잇장처럼 가볍게 걸릴 때까지
내일 아침 한 통 하얀 젖이 흘러나올 때까지

 

산사나무꽃은 하염없이 지고
부는 바람 하루, 이틀, 사흘,......
내가 매일 목을 놓아먹이는 것은 무엇일까
옴,마,니,밧,메,훔,아,주,공,갈,염,소,똥,십,원,에,열,두,개,떽,떼,굴,
염소 엉덩이께에서 흘러나오는 따끈한 구름들

 

 

 

 

 

 

 


 

 

 

염소를 찾아서 1 / 임영조  

 


 
사시장철 검은 망토
하관은 빨아 박복한 턱에
재래식 수염 기르고, 종종
풍월을 읊는 소문난 음치
그 한심한 건달을 아시는지요
남이야 바쁘든 말든
자고 새면 들녘이나 냇가로 나가
유유자적 하루 해를 축내는 行者
해지면 제 그림자 밟고 돌아와
절망절망 고독을 씹는
그 하릴없는 축생을 아시는지요
참으로 딱한 한량이, 실은
먼 옛날 大國에서 흘러 들어온
글줄이나 했다는 귀족의 후예
여말에 남포현 외딴 섬
竹島로 귀양갔다 풀려나, 그 길로
羊角山 기슭 박토에 말뚝 박고
대대로 농사짓고 달빛 받아 글 읽던
청빈한 백면서생의 후예
그를 아시는지요
뿔은 세우되 冠으로 쓸 뿐
수염은 기르되 뽐내지 않고
식사 때는 으레 어깨부터 낮추는
누추한 처소도 탓하지 않는 샌님
억지로 목줄을 당기면
오히려 완강히 저항하는 외고집
개같이 아부할 줄 모르고
돼지같이 과욕 할 줄 모르고
고양이같이 교활할 줄 모르는
그래서 늘 외롭고 검소한 축생
그를 이젠 아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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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를 찾아서 3 / 임영조

                     

 

  
고2 때 기말시험 보던 날
납부금 안 냈다고 쫓겨난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식구들 몰래
새끼 밴 염소를 내다 팔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삼십 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판 걸 알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뿌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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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를 위한 기도 / 박정석

 

 

선한 어둠이 그려진다 수도修道같은 되새김질 쓸쓸해 질 때, 너에게
도 영토는 있구나, 해는 져 내린다 검게 무리지어 향하는 곳, 애초에
廢家였다 속에 들어서면 훅 끼치는 분뇨의 훈기, 달라진 것은 없다
진드기에 제 몸 내어주고 어둠 한켠 차지한 네 조상 중 채독菜毒앓
은 여인에게 바쳐지던 몸 있었다 고삐 끌어다 아버지에게 인도한 나,
공모의 흔적으로 쓴다
앞 뒷발 묶여 모 누워 붉은 피 내 준, 잠시간은 사람처럼 두 발로 바
둥거려본, 짱짱 내리박는 태양 아래 금박 씌운 몸 환호하며 달리던 풀
밭으로 너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릎 세워, 선착순 뛰어,로 이룬 무릎 보호대 장기壯氣로 달고 바위
뛰넘던 갈라진 네 발굽의 야성, 피 묻은 스테인리스 그릇, 쇠와 피가
열정과 냉정의 슬픔으로 떠오를지라도
매에, 매에 콩알 같은 네 똥, 온갖 풀을 새겨 만든 환, 풀밭에다 뿌린
네 수치까지 먹고 자란 억새밭을 돌아서 저 감감한 廢家, 먹물 풀어 놓
은 칠흙 속으로 매에, 저승꽃 잔뜩 뜯어 달고 네 거느리던 식솔들 보러
다각다각 뛰어가고 있을 것인데

 

 

 

 

 

 

 

 

 Untitled

 

 

 

 

염소에게 / 유강희   

 

 

 

해질 녘이나
바람 부는 날엔
아기 염소들은 비탈진 언덕에 발을 딛고
學習하듯 쓴 풀을 뜯으며
매애매애 하고 울음을 짠다.
필시 우는 기술 하나는 기막히게 타고난 듯
애잔하고도 애닮게 그것들은
울음도 한꺼번에 크게 쏟지 않고
조금씩 찔찔 흘리며 눈물을 아껴 운다.
눈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는 저이들끼리
생뿔을 부딪쳐 쩔쩔 피 흘리며
매애매애 울기도 한다.
매일 누가 죽는지, 슬픈 일이 있는지
검은 상복을 입고 그렇게 속세의 언덕을 누비는 것이다.

 

 

 

 

 

 

 

 

 Untitled

 

 

 

 

염소의 저녁 / 안도현  
 

 

 

할머니가 말뚝에 매어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번 더 힘을 준다
그러자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의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Untitled

 

 

 

 

울다 염소 / 조현석 

 

 

 

비어 있던 속, 기름기 없던 뱃속으로
푹 삶아진 염소가 갈기갈기 찢겨져 들어왔다
술 몇 잔과 더불어 신선한 공기도 몇 됫박
소독되지 않은 단양 하선암 생수도 몇 컵
해체된 염소 몸이 남긴 갖은 부속물을
소주 반 잔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어
배 속 깊은 곳에 가두었다
밤새 되새김질하는 염소가 운다
울음이 깊을 때마다 몸이 요동쳤다
속 편해지려고 되지도 않은 되새김질을
나도 여러 번, 하고 또 했지만
날카로운 뿔에 받혀 상처가 난 듯 꾸르르륵…
더부룩했다, 밤새 염소가 풀밭이 아닌
융단 같은 위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놀았다
낮에 몸 부딪는 축구를 해서인지
왼쪽 어깨가 아파 오른쪽으로 돌아눕고
등이 배겨 배를 깔고 돌아누웠던, 아침이
다가오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그 놈이 울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먼동 무렵에
잠 깨어 물안개 피어오른 계곡을 거닐 때
예전에 잠시 그곳에서 뛰놀던 염소가
세차게 방파제를 때리던 태풍 속 파도처럼 요동쳤다
빠르게 달려간 구식 화장실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시끄럽게 괴롭히던 염소를 끄집어냈다
쫘르르 쏴아아아아아… 자신이 놀던 곳으로 염소는
회오리 물살에 묻혀 돌아가려던 것이다
찬바람 불고 찬비 내리는 단양 하선암 계곡
물가에 자리 잡고 앉아 몇몇이 두런거렸던 그날

 

 

 

 

 

 


 

 Momentos Rurais

 

 

 

 

염소 / 이정록

 

 


그라목손이라는 제초제
깨진 병 모가지에 뱃가죽을 꽂고
허물을 벗은 뱀을 본 적이 있다

그가 떠난 뒤 홀로 남은 염소는
매년 벌초를 해주겠다며
그의 육촌이 끌고 갔다

벌초를 하다가
뱀의 허물도 종종 만난다는데
올해는 산딸기나무며 쑥부쟁이가 너무 뒤엉켜서
제초제를 쳤다고 했다

죽은 지 다섯 해 만에
또 한번 약을 먹인 꼴이라며
늙은 그의 육촌이
뱀 껍질 같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세상을 뜬 지 삼 년이 넘은 그의 염소가
빈집을 자꾸 돌아다보며
서쪽 하늘로 걸어가고 있었다

노을 속에는
염소의 긴 울음소리가 산다

 

 

 

 

 

 

 

 Momentos Rurais

 

 

 

 

염소와 풀밭 / 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Untitled

 

 

 

 

나는 염소 간 데를 모르네 / 신현정  

 

 

 

연두가 눈을 콕콕 찌르는
아지랑이 아롱아롱 하는 이 들판에 와서
무어 할 거 없나 하고 장난기가 슬그머니 발동하는 것이어서
옳다, 나는 누가 말목에 매어 놓고 간 염소를
줄을 있는대로 풀어주다가
아예 모가지를 벗겨 주었다네
염소 가네
어디로인가 가네
나는 모르네
어디서 음메에가 들리네
하늘 언저리가 파랗게 젖어 있는 것으로 봐서
거기서 잠시 울다 간 거 같으네
아 저기저기 뿔 쬐그맣게 달고 가는 흰구름이 저거 ?소 맞을 거네
나는 모르네
이 봄, 팔짝 뛰고 뒤로 나자빠질 봄이네
정말 모르네

 

 

 

 

 

 

 

 

 Untitled

 

 

 

 

흑염소 / 박종국  

 

 

우리가, 말뚝 박아놓고 매어놓은 고삐만큼

자유가 허락된 흑염소는

우리에게,

책임과 의무의 멍에를 씌워놓고

저를 묶은 밧줄 당기고 당긴다

 

풀밭에서 목메어 우는 건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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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안을 나오며 / 정병근  

 

 

버둥거리는 염소의 입에 소금을 먹이고
목을 따자,
몇 번 몸을 떨던 염소는 곧 조용해진다
노파가 양은솥을 대고 피를 받아낸다
염소의 뜬 눈이 광속으로 허공을 가른다
영감이 버너불로 염소를 그으른다
불똥 속에 드러나는 염소의 얼굴
어금니를 꽉 다문 저 무표정이 무섭다
털을 다 그을린 영감이 담배를 피워문다
담배를 빠는 볼이 대추꼭지처럼 쪼글쪼글하다
염소보다 영감의 팔자가 더 세서
염소는 죽어서도 영감을 저주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기억하며 사는 인간만이 불행할 뿐,
기억이 짧은 염소는 그 짧은 기억의 힘으로
죽으면 죽었지 미련하나 남기지 않는다
오후의 설핏한 해가 힘 센 허기를 몰고 온다
허기는 얼마나 골똘한 망각인가
뒤안을 나오는데 우리 속의 염소들이
누구시냐는 듯 멀뚱멀뚱 쳐다본다

 

 

 

 

 

 

with my kid, jaisalmer

 

 

 

고집 센 염소 / 이창수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한 마리 염소만 남아 빈집을 지키고 있다
근처 풀밭으로 염소를 몰고 가는데
콩밭이며 고구마밭 눈에 보이는대로 달려든다
여린 잎사귀부터 기시돋힌 아키시아 줄기까지
닥차는 대로 집어 삼켜야 직성이 풀리는
욕망의 관을 쓴 염소
이놈의 고삐를 팽팽하게 당기다 보니
나를 고집 센 염소로 비유하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껍질부터 뿌리까지 송두리째 던져주고도
게걸스럽게 자신을 먹어치우는
내 욕망의 관 용케도 받아주시던
언제나 가슴 속 푸른 풀밭으로 남아있는 어머니
자꾸만 벼이삭을 향해 달려드는
저 한 마리 고집 센 염소
회초리로 내려치며 운다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흑염소 공양 / 김용락

 

 

영천 사는 이중기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냈다고

흑염소를 잡아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20대 광풍노도를 함께 보냈다는

부산의 최영철 시인도 부인이 운전하는 티코를 타고

영천에 왔다

앞마당에 양은 백솥을 걸어놓고

염소를 삶는 장작불 앞에 앉아서 최 아무개 시인이 말했다

착한 염소를 배에 묻어야지 어떻게 땅에 묻노?

가난한 시인들의 밥이 되기 위해 기꺼이 순교한

염소의 사망을 그런 식으로 문상할 때

갑자기 그가 시인으로 보였다

그래 염소를 더러운 인간들이 먹어치워야지

어떻게 땅에 묻노?

누군가의 먹이 감이 된다는 것은

살아서 최대의 공양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의 어깨 너머로 薄暮에 젖어드는 

노란 무꽃이 환하게 등을 켜고 있었다 

 

 

 

 

 

 

 

    염소 젖에 초승달이 떴다 / 한규동 

 

                                              

1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염소가 흑백 사진 한 장을 내민다. 별자리 사진 같은 엑스레이 흑백 사진에 흰 별이 희미하게 떠있다. 염소와 같이 탄 시내 버스유리창으로 들어온 도심의 오후 햇살에 염소 얼굴의 실핏줄까지 보인다.


2

버스는 세종로 모퉁이를 지나간다. 모퉁이를 지난 버스는 사진 속별을 찾아 날아 들어간다. 도로 공사 중에 차가 막힌다. 운전사들이 머리를 빼고 두리번거린다. 도로에 핏 물이 흥건하다. 동맥이 지나간 자리, 굴착기는 아스팔트 두피를 벗겨 내고 있다. 두꺼운 두피가 걷어진 자리 속살이 보인다. 속살 사이로 혈관에서 진한 흙물이 바닥을 적시고 있다. 칼집을 내놓은 자리를 포크레인이 깊이 손을 넣는다. 퇴적층 같은 아스팔트 속살 살점들이 밖으로 떨어진다. 시간이 갈수록 주변은 피로 흥건하게 적시고 삽날이 깊어질수록 수압을 이기지 못한 물줄기가 세차게 용솟음친다. 인부들은 끊어진 광케이블 신경들을 옮겨 가며 접합수술을 한다. 이미 몇 가닥의 신경이 끊어져 다리를 절고 있다. 동맥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핏물을 통통거리며 양수기가 연실 길바닥에 토악질 해 논다. 쉽게 지혈이 되지 않는다. 출혈이 심하다.


3

몸속으로 파고 들어온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하여 전신 마취를 한다. 경쟁 하듯 수술 칼들이 임파선 줄기를 잘라 낸다. 연결고리를 자른다. 언제 들어 왔는지 세포 줄기에는 또 다른 세균들이 자리싸움을 한다. 깊이 뿌리를 뻗고 있는  잔가지를 좀처럼 잘라 낼 수가 없다. 내 몸의 균형을 흔드는 뿌리, 그 뿌리를 뽑는다. 마음까지 스며든 뿌리를 제거 한다.

4

그녀는 우주정거장 암 병동 침실 칸에 누워 있다. 빵빵하던 왼쪽 젖무덤이 바람이 빠져 버렸다. 그 위에 보랏빛 초승달이 문신처럼 떠있다.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The ring

 

 

 

각축 / 문인수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 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만 놉니다.
2월, 상사화 잎싹만 한 뿔을 맞대며 톡, 탁,
골 때리며 풀리그로
끊임없는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The Queen

  

 

 

 

산양 / 이건청 

 

 

 

아버지의 등 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그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끓어 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 동물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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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6.07 23:13

    첫댓글 이렇게 환상적인 사진과 글들을 몰이하느라 연일 수고하시는 동산님께 머리도 식히실겸 노래를 올립니다.

  • 09.06.08 08:40

    어린시절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저의 아름다운 추억 중의 하나. 이른 새벽마다 할머니가 짜 주신 염소젖으로 온 식구가 따끈하게 마시며 살아 온 그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답니다. 오늘 염소에 대한 아름다운 시들을 읽으며 행복한 하루를 엽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09.06.08 09:58

    염소의 시를 읽으며, 시인들의 염소에 대한 애정과 상상에 함께 젖어 보았습니다. '하나의 낭설인지도 몰라 날카로운 내 뿔이 우주로 향한 안테나라는 거' 그리고 '옴,마,니,밧,메,훔,아,주,공,갈,염,소,똥,십,원,에,열,두,개,떽,떼,굴,'- 절창입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 09.06.08 14:40

    호호호^^ 아주 공갈 염소 똥 십원에 열 두 개 ㅎㅎㅎ 절창 중의 절창입니다. 오늘은 외할머니의 대한 추억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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