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신앙 시 및 신앙 글 스크랩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문화 (신국원 교수)
은하수 추천 0 조회 76 15.01.12 12:5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문화

신국원교수(총신대)
총신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M.A,M.Div,Th.M)
화란자유대(Th.D)
기독교철학



이 강의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문화의 상관성이다. 이 둘다 역사적 배경이나 함축이 큰 말들이어서 짧은 시간에 자세한 내용을 말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이 강좌는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의 배경과 특성을 간략히 설명하고 난후, 양자간에 있음직한 관계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서 그치고자 한다.



(I) 최근의 상황

최근 철학, 문학뿐 아니라 점차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많이 논의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점차 이 시대의 정신을 규명하는 지시어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국에서도 최근 찬반 논의가 벌어진 바 있어서 왠만한 사람들 가운데 이 말을 한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막상 그 개념을 규정하려고 하면 그것은 쉽지않다. 심지어는 서양철학의 본고장에서 조차 아직도 이 말의 개념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 이 말은 대개 아놀드 토인비가 그의 대표작인 <역사의 연구>에서 처음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하나의 철학적-문화적 용어로 만들어 보편화 시킨 것은 미국의 학계이다. 그런 탓인지 유럽의 학계는 왠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의 사용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또 이 말을 만들어낸 영어권에서도 사람에 따라 그 말 자체를 post-modernism 또는 postmodernism으로 다양하게 쓸 정도이다.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 그것은 근대주의의 일부로 분류하기도 하고 근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어떤이는 이 말을 매우 편협한 의미에서 17세기 이후 근대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극단적 비판운동을 지칭하는데 국한시킨다. 협의로 이 말을 쓸 때에는 주로 프랑스의 극단적 비판주의인 데리다의 철학 종말론, “해체주의”나 미셀 후코의 “인간과 주체” 비판등을 지시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매우 넓은 의미에서 20세기 중반이래 구체화되어가는 서구문화 전반의 변화추세에 대한 막연한 지시어로서 이 단어로 쓰기도 한다. 또 그 영향의 범위에 대해서도 어떤이는 이것이 건축이나 예술, 그리고 문학비평에 국한된 방법적 유행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이는 문화의 새로운 형태로 보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 규정이 이렇게 다양한 것은 그것이 현재의 문화 사회적 환경으로 계속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단의 거리를 갖을 수 없어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고 전망을 내다보기란 더욱 어렵다. 또 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하는 요인은 그것의 실체를 대변할 만한 통일된 움직임이나 학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학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만 보더라도 서로 비판적으로 대립되는 여러 학파의 다양한 주장이 서로 얽히어 있어 전모를 한마디로 규정하기 극히 어렵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규정이 이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그것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철학적인 논의를 통하거나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방식보다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다른 방법은 관심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다소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논의로 부터 포스트모던적 현상들에로 돌려보는 방법이다. <포스트모던적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 이라는 짧으나 핵심있는 책을 쓴 리오타르 (Jean-Francois Lyotard)가 이러한 방법의 좋은 예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적 상황이란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커다란 움직임이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협의의 철학적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정보사회의 도래와 그것에 따른 경제, 사회, 정치등의 폭넓은 문화적 변화에 주목했다. 그는 그 변화가 "포스트모던적 상황" 이라 부를 수 있는 "19세기말 부터 과학, 문학 및 예술의 게임 규칙에 영향을 끼친 변형들 이후의 문화상태" (서광사판, 13쪽)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잠시 따라가 볼 가치가 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꼭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우리의 주변에 나타나는 변화들을 주의깊게 관찰하면 대략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II)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리요타르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폭넓은 문화적 변화에 주목했으나 그의 논의 역시 개념적이어서 이해가 쉽지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주장의 요지만을 따라 보다 구체적인 세가지 예, 즉 건축, 영화, 음악의 예를 통해서 포스트모던적 문화의 특질을 단면적으로 나마 엿보고자 한다.


첫째의 예는 94년 한국유학생 수양회 (KOSTA)가 열렸던 미국 동부 메릴렌드주와 펜실바니아주 경계 근처 (남북전쟁의 격전지요 링컨의 역사적 민주주의 연설로 유명한 게티스버그 근교)에 위치한 세인트 메리 대학의 경우이다. 이 대학은 카톨릭 학교로서 산마루에 위치하고 학교 앞으로는 커다란 고속도로가 정문 앞을 통과하고 있다. 건축 순서로 볼 때, 산기슭에 위치한 건물들로 부터 학교를 지어 내려온 것이 분명한데 처음지은 건물들은 유럽의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설계로 중앙의 돔이 있고 좌우 균형을 맞춘 육중한 석제 건축물들이었다. 이 건물들 아래쪽에는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가히 세계 공통적이라 할 수 있는 평면적 근대식 콘크리트 건물들의 집단이 늘어서 있다. 그 밑에 결혼한 학생들을 위한 아파트 군이 있는데 이곳은 다소 현대식 건물에 익숙한 눈으로 볼 때 특이한 겉모습과 배열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의 특징은 그저 멋을 가미한 근대식 콘크리트 건물에 불과한 정도로 이목을 끌정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속도로 밑으로 지하도를 건너 최근에 지은 이학교의 체육관에 이르면 우리는 전혀 색다른 건물 앞에 서게된다. 이 건물은 짧은 지면을 통해 그 특징을 쉽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면에서 특징적이었다. 우선 건축재료가 콘크리트, 석재, 철강, 유리, 그리고 헝겁 (텐트용 섬유재) 등으로 다양했고 학교쪽에 바라보는 측면은 전형적인 근대식 건물의 사각형적 외관을 전혀 벗어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건물의 내부는 가운데 사무실및 통로가 있었고, 외관이 강철재로 유리 첨탑을 세워 채광을 하는 남쪽편은 커다란 농구, 배구장 5-8개 정도가 들어갈 마루를 깐 5층 이상의 유리로 된 건물이고, 다른 쪽은 천정이 텐트치듯 들쑥 날쑥 설계된 8면짜리 테니스장 겸 주변에 실내 죠깅트랙이 있었다. 일단 시야를 옮겨 남이나 북편에서 이 건물을 바라본다면 이 건물 역시 좌우 균형을 맞춘 건물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학교의 건물들 속에서 서양의 건축물들이 전근대, 근대, 포스트모던 시대에 어떠한 변천을 해왔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예를 발견한다. 여기서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양식들의 변화는 외면적 유행이라기 보다는 문화의 근본에 있는 세계관의 변화를 반영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예는 우리로 하여금 이 각시대에 어떠한 정신과 사상이 문화의 기초의 역활을 해왔는지를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건물들에는 각시대의 고유한 철학과 문화적 정신과 특질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러분이 이 학교의 교정에 들어서게 되면 각자의 취향에 따라 어느 한 종류의 건축양식을 더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셋 모두 특색있는 것으로 여겨 그 셋이 모두 한 학교를 이루는 것을 단순히 한 건축양식으로 된 것 보다 다행이 여기고 좋아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다양한 양식으로 학교를 이루어 놓은 학교측의 자세는 아마도 세번째 자세에 가장 접근할 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건물들이 엄연히 눈앞에 서서 보여주듯이 우리는 개개인의 기호와 취향과는 관계없이 전근대와 근대를 거쳐 또 하나의 새로운 양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예를 미국의 한 학교의 것을 들었으나 같은 이야기를 우리 주변의 예로서도 쉽게 예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에서도 기능과 용적효율 등이 위주가 된 단조로운 건축물로 부터 이탈한 매우 다양한 외형, 여러 시대와 문화적 건축유형이 근래의 건축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와같은 건축양식이 보여주는 변화가 단지 외형적인 유행의 변화라고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들 주변에 시대와 문화가 근본적이고 침층적인 차원에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두번째 예는 작년 미국서 개봉된 "필라델피아"라는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는 동성애자인 한 젊은 변호사가 에이즈에 걸려 장래가 촉망되던 법률회사에서 해고당하자 한 흑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소송끝에 이기지만 결국 비참히 죽는다는 있음직한 이야기이다. 영화를 논하는 사람들이 기본상식은 (잘된 영화일수록) "영화에는 우연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제목이 우연일리는 없다. 그러면 왜 제목이 '필라델피아'인가? 북미에서 동성애로 가장 유명한 곳은 센프란시스코와 토론토이다. 아마도 필라델피아는 그 희랍어적 어의가 "형제들의 사랑의 도시"인 점과 필라델피아가 그 말 처럼 관용을 표방했던 도시였음을 착안해서 제목으로 채택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주제가 관용이다. 이 영화는 종래의 논쟁의 불씨를 던진 다른 영화들과 달리 동성애, 에이즈 문제에 대해 찬반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주인공의 변론을 맡았던 흑인 변호사도 처음엔 동성애자와 에이즈 환자를 향해 지극히 "평범"한 반응을 보인다. 그는 "정상"적으로 (흑인여자와) 결혼해서 사는 사람이다. 영화 전편을 통해서 아기를 출산하는 이야기,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다분히 애가 태어날 수 없는 게이 동거자와 대조를 의도한다고 보아야 한다. 또 그 주인공 집안이 매우 훌륭한 양식을 가진 가문이요 (전통적인 자유 민주주의적 정치의식을 소유한) 또 다른 모든 사람이 모두가 "정상"적으로 결혼한 가정임을 보이는 것도 의도적이다.


그러나 영화 자체는 어느 한편도 들지 않고 심지어는 주인공의 생사도 끝이 나도록 분명하지 않다. 끝으로 영화 필라델피아가 주인공을 법률가로 잡은 점에 주목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법이란 어느 사회에서건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질서의 상징이다. 또 대개 법률가들은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직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계층에 그것도 촉망받는 젊은 법률가가 동성애에 에이즈까지 겹쳐 법과 질서를 깨트렸을(?) 뿐 아니라 (그래서 그는 핍박(?)을 받는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법과 더불어 싸운다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수치로 생각할 수 있는 가족의 사랑과 흑인의 인류애적 관용과 이해를 바탕으로 말이다.


이 영화를 보게된 관객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사실에 직면해서 어느 편에 설 것인지는 스스로가 정하는 수 밖에 없다. 영화 자체가 논쟁의 편들기를 절제하고 있으므로 종전의 영화들에 비해 감정이입의 선택을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제삼의 길, 즉 관용과 다양성을 은근히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틀렸다고 반발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앞서 들었던 건축의 예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도 여러가지 다양한 사고의 유형들과 그것에서 비롯된 행동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처럼 허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고와 행동들은 우리들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고 서로 맞닥뜨려 심한 갈등을 보이고 있다.


기왕의 영화의 예를 꺼냈으므로 참고로 덧붙이자면 이 영화 이외에도 다른 주제와 기교로 제작된 영화들 가운데도 포스트모던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영화들은 이미 우리들 주변에 흔하다. 즉 "터미네이터," "펄프 픽션," "백투더휴쳐 시리즈"등과 같은 시간개념과 장소, 심지어는 스토리 사이의 구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형식의 작품과 고전적 스토리의 포스트모던적 패러디인 "로빈 훗," 자연주의적 서구 과학문명 비판을 앞세운 "늑대와 춤," "포카혼타스"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영화는 요즈음 너무도 흔해 일일히 거론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 영화들을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해서 언급할 수 있는 까닭은 단순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기존의 시간개념, 실재에 대한 개념, 질서, 가치관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이나 변형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음악의 예는 간단히 언급만 하려한다. 요즘 우리들은 텔레비젼에서 클라식과 대중음악, 민속음악과 양악의 구분이 약화되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형식의 "열린음악회"를 보게된다. 열린 음악회는 이전에 분명히 구분되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한무대에 올려 섞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기존의 무대위의 연주자와 청중이라는 구분마져 노래같이 부르기등으로 약화시키고 있다. 자연히 이러한 음악회에서 감동적 공감을 얻는 노래들은 개인의 사적인 감정을 말하는 노래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노래인 점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의 가벼운 예이지만 음악의 이 새로운 공연형태도 기존의 구분과 질서에 대한 근본적 변혁을 도입하는 면에서 그 바탕정신이 포스트모던적 분위기와 통하는 점이 있다.


앞서 예들을 통하여 간단히 생각해본 바와 같이 포스트모던적 변화는 어떤 추상적 철학, 이념적 운동이라기 보다 이미 존재하는 문화의 추세이다. 흔히 이 문화적 변화의 추세를 개념적으로 정리하여 철학적으로 표상하여 지지하고 나아가 극단적 형태로 주장하는 문학비평, 철학의 유파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른다. 물론 이것은 그 말을 매우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로는 16세기 이후 근대의 4세기 간의 전통이 그 뿌리부터 흔들리는 경험을 포스트모던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 변화의 정신적 성향을 반영하고 또 인도해가는 사상들 모두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화적 변화는 거의 모든 현대의 문화적 표현, 즉 현대적 스토리 텔링과 현대정신의 가시적 구조물들에서 뚜렸하게 볼 수 있다. 여기서 확인되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특징은 그 사상과 문화적 표현의 시대적 간격이 매우 좁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떠한 사상이 문화적 표현으로 나타나기 까지는 길게는 여러 세기가 걸리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사상적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예들을 통해서 보듯이 그것을 반대하던 좋아하던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오늘날의 문화적 현실이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모던"적 사회에 살고 있다. 따라서 강의자의 요점은 이렇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고 반대할 수는 있다. 또 기독교인으로 마땅히 그렇게 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의 문화에 이미 깊숙히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거나 무관심으로 외면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인 자세도, 책임있는 신앙인의 자세도 아니라는 점이다.



(III) 포스트모더니즘 출현의 문화-역사적 배경

이제 왜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가 대두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간단히 되집어보기로 하자. 포스트모더니즘란 과학기술과 계몽사상에 기초한 근대주의의 이후 (post-modern)를 뜻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에는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모더니즘이란 근대의 정신을 말한다. 서양의 모더니즘의 발단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한 중세의 해체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16세기 이후 과학의 발전과 계몽사상의 대두로 고무된 세속화 과정은 자율적 이성을 문화의 토대로 삼는 인본주의로 기울어졌다. 즉 근대문화는 이성적 철학과 과학의 기초위에 서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과학-기술 문화에 대한 비판을 구심점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운동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광범위한 문화적 추세라고 할 때, 그것은 말 그대로 "포스트" 모던적 요소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될 수 있다. 여기서 "포스트"란 "근대 이후" 라는 시간개념과 더불어 "근대에 대한 반대," 또는 "근대로 부터의 탈피" 라는 의미 두가지 모두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이후 문화의 여러 부문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소위 “포스트 (post)”논쟁은 흔히 서구문화가 한 패러다임을 뒤로 하고 새로운 무엇으로 진입하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는 "이후"로서의 포스트 보다는 "탈, 반대"의 의미가 중심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온 것은 결코 역사가 흘러가면서 자연히 모더니즘이 다른 무엇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수세기간 누적된 병적요소들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반발과 대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더니즘의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찌기 훗설이 지적했던 <유럽의 학문의 위기> Die Krisis der europaischen Wissenschaft (1936)와 맥을 같이 한다. 이것은 근대문화의 기초역활을 했던 철학의 위기를 말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잠시후에 부연하겠다. 그러나 먼저 생각할 점은 이러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데는 보다 더 구체적인 계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데이빗 클렘이라는 한 철학자의 지적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 팽배했던 근대주의적 이상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인들은 그 파괴에 몸서리를 쳤고, 연이어 이념분쟁 속에서 전대미문의 문화, 정치, 사회적 혼란을 체험했다. 또 도덕적 쇠퇴와 과학의 한계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의식, 그리고 환경문제등에 부딪쳐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 모든 불길한 현상들이 지시하는 것은 이제껏 신뢰해온 과학적 문화가 기다리던 산업사회의 유토피아를 가져오기 보다 오히려 문명 전체를 멸망의 위기로 몰고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었다. 중세의 어두움을 이성의 빛으로 밝히겠다던 계몽의 불꽃이 언젠가 꺼지고 만 것을 뒤늦게 깨닫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결과 전시대에 팽배하던 낙관적 진보사상이나 문화발전론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날로 상승세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슈팽글러의 서구의 몰락, 소로킨의 우리시대의 위기, 그리고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같은 책들에 잘 반영되어 있다. 금세기 초반에 쓰여진 이 선지자적 예고는 세기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모든 학문과 사회생활에서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학자들 사이의 공통적 인식은 이 위기가 지엽적 문제가 아닌 문화 전반의 총체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위기의 뿌리에는 근대문명을 지배해온 계몽사상과 과학주의적 세계관의 문제점들이 있다는 의식이 뒤따랐다. 즉 이 위기는 16세기 이후 서양의 문화가 지향하던 "토대주의 (foundationalism)"적 문화구조의 위기라고 환언할 수 있다. 토대주의란 간단히 말하면 16세기 전후로 발전한 과학이 결여하고 있는듯 보이는 철학적 기초를 방법론적 인식론을 통하여 마련함으로서 과학-기술적 문명의 체계의 정당성 (legitimacy)을 확보 하고자 하는 노력 일체를 말한다. 예를 들면 지식의 확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나왔던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인식의 반성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심각한 문제는 과연 철학이 이 기초공사를 담당할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 의문시 된 때 부터 였다. 철학이 그에 대한 기대와 약속대로 문화의 기초라 할 수 있는 확실한 지식의 가능성을 이론으로 보장할 수 있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문화 전체가 기초없이 공중에 떠있는 위기가 초래되는 것이 아닌 가? 이 의문은 근대의 문화체제 전체를 근본적 불안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번스틴 (Richard Bernstein)은 Beyond Objectivism and Subjectivism 이란 책에서 그러한 불안의 핵심을 잘 파헤치고 있다. 그는 이 불안의 소재가 객관주의적인 낙관론와 상대주의적 비관 사이의 딜레마에 있는 것으로 보고, 이 딜레마를 가진 현대인은 항상 "테카르트적 불안 (Cartesian Anxiety)"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이 토대주의적 세계관의 문제점은 이미 니체, 막스, 프로이드 등에 의해서 폭로되었다. 또 역사의식, 미학, 윤리, 실천이성등을 앞세운 낭만주의나 역사주의적 도전, 그리고 서구철학이 내내 궁구하던 본질 (essence)보다 인간의 구체적인 실존 (existence)이 중요함을 부르짖는 실존주의의 반항은 앞서말한 철학자 몇몇의 비판보다 훨씬 큰 손상을 근대적 토대주의 철학에 안겨주었다. 결국 근대의 서구는 과학적 객관주의와 역사적, 미학적, 실존적 상대주의 사이에서 분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놓고보면 포스트모던이즘이란 이미 근대의 분열된 유산이 예고된 코스를 따라 심화되고 극단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대개 철학적 논쟁들은 시대의 문화적 변화를 반영하거나 일어나는 변화를 조직적으로 표현하므로 문제의 핵심을 규명하고 그 해결책 모색에 앞서곤 했다. 이 점은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논쟁이란 간략히 말해서 어떻게 근대적 세계관과 그 문화의 약점을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철학이 해결해야 할 중심과제는 무엇인가? 이제 앞에서 논의한 내용을 기초해서 포스트모던적 상황하의 철학논쟁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떻게 근대의 과학-기술문명의 세계관과 그것의 토대주의적 문화의 약점을 극복하느냐? 또 그러한 근대의 객관적 과학주의 문화의 유산을 극복하는 노력이 어떻게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과연 철학은 이러한 딜레마를 초월하는 새로운 진리에 기초하여 문화의 기초를 다시금 확고히 해줄 방도가 있는가?



(IV) 포스트모던 철학사상의 분파

포스트모던 철학은 근대에 대한 회의와 환멸에서 비롯되었기에 그 근본에 있어 근대의 과학주의 문화와 그 정신적 기초에 대한 비판을 표방한다. 이러한 비판은 우선 과학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과 둘째로는 그 기초에 놓여있는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그 비판은 상이한 원인분석과 대안의 차이점에 의해 여러개의 분파로 나누어 진다. 과학기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은 소위 신막스주의를 표방한 프랑크프르트 학파에 의해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한편 계몽사상에 대한 비판은 철학적 해석학을 통해서 새로운 철학을 시도한 하이데가나 가다머에 의해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이러한 건설적 비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의 사상가들은 근대의 문제는 서구사상 전통의 뿌리에서 비롯된다고 파악하고 그 전통 자체를 해체하여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갖는다. 주로 프랑스의 학자들이 중심된 이 운동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나 리요타르, 후코등이 이끄는 협의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극단적 비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의 정서를 극적으로 표현한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 한다. 즉 정도에 차이는 있으나 모든 포스트모던의 사상가들이 일반적으로 데카르트 이후 서양철학의 근간이요, 과학적 서구문화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이성주의적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서구문화가 희랍시대 이후 자연적 세계에 대립된 형이상학적 세계를 통해서 "진리"를 알고 그로서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얻고자 하는 체계를 크게 벗어나 본일이 없었던 것을 참작할 때, 우리는 이 반형이상학적 자세를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히 이러한 형이상학 비판에는 두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로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주의가 지나치게 현실과 사회, 역사와 유리된 추상적 개념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고자 했다는 비판이다. 또 하나는 과학기술 문명의 핵심이라고 할 방법론적 객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주의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사변이 아닌 객관적 수학을 모델로 하여 철학 을 모든 학문의 기초에 대한 방법론적 연구요 학문의 학문을 만드려고 노력한 이래, 철학의 역사는 그 이상의 성취 불가능성을 깨닫는 역사였다고 조차 할 수 있다. 특히 최근의 철학은 주로 이러한 망상에 대한 비판에 전력하는 형편이다. 이것은 또한 철학이 문화의 토대를 제공한다는 토대주의에 대해 근본적 비판을 수반한다. 포스트모던니즘은 이성주의적이고 객관주의가 팽배하던 근대주의 시대와는 달리 주관주의적인 자유의 동인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관념적 문화를 벗어나 보다 다원적이며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중심의 새로운 문화적 분위기를 지시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객관주의적 문화 비판이 필연적으로 피할 수 없던 부담은 어떻게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만일 어느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는 문화적 기초를 철학이던 다른 무엇이 제공할 수 없다면 결국 모든 진리에 대한 주장들은 균등한 위치와 특권을 누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극단적 비판인 해체주의등은 모든 조직적 철학과 단일의 체계, 통일을 추구하는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강한 상대주의적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대개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어떻게 과거의 문제많은 과학적 객관주의에 복귀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모색함에 주력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특징은 철학적인 것 특히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어서 일각에서는 "철학의 종말"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 논의 자체는 매우 철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이 핵심적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해결자세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유파를 편의상 셋으로 나누어 소개할 수 있다. 이러한 분파구분과 그 성향에 대한 평가는 매우 상대적이어서 이 짧은 논고에서는 다 언급할 수 없지만 앞서 언급한 그 특징을 따라 요약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근대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결국 계몽주의적 노선에 서서 이성적 비판이론을 사회문화의 토대로 재건을 꾀하는 비판철학, 그와는 반대로 언뜻 보기에 모든 기초와 체계적인 것, 심지어는 모든 이성적인 것을 배격하는 것으로 보이는 해체주의와 같은 극단적 근대비판류, 그리고 아울러 다소 보수적인 듯 보이면서도 이 둘 사이에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철학적 해석학이 있다.



(V)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독교 문화에 미칠 수 영향

전술한 바와 같이 여러가지 증좌를 살필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종전의 서구문화와 다른 무엇을 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의 특징은 근대적 이성주의 비판으로 근대적 통일성 이상에 대해 다양성을 중시하고, 절대적 진리 추구보다 상대성, 역사성을 주목한다. 결국 그 문화적 시각이 多元主義를 지향한다. 이것은 이미 현대의 문화적 특징의 하나가 같은 지역사회 내에 다양한 세계관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세계관이란 단어는 이미 상대주의를 함의하고 있다. 그 말에는 세상을 보는 시각에 따라 인간이 창조하는 세계인 문화가 달라진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세계관이란 말이 문화-사회적 논의에 있어 중요한 단어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현대의 문화적 다원주의를 반영한다고 하겠다. 이런 특징을 가진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오는 복합적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주의적 사고의 독선, "객관성의 이름을 가진 편견에 대한 편견과 폭력," 이성 절대주의, 실증주의등 근대주의의 부정적 모습에 반대를 제기하고, 근대적 문화에 의해 위축된 삶의 요소들 (종교, 예술등)을 복원하고 활성화 하는 면에 기여한다는 측면이 있다. 즉 여러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17세기 이후 기독교 정신과 줄곳 충돌해온 근대적 이성주의, 계몽주의의 자율성 주장과 인본주의적 정신에 대한 깊이있는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종전의 편견을 배제한 가치중립적 사고를 내세워 특히 기독교는 편견이라는 주장을 "편견에 대한 편견"으로 재인식하는 변화를 간접적으로 초래했다. 이와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환경은 어쩌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훨씬 수월하게 문화활동에 그 목소리를 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은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리관에 있어 과학과 객관성이란 이름의 독단을 배제한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방법적인 면에서는 대화적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성향은 동시에 역시 부정적으로도 작용한다. 이러한 폭넓은 세계관의 어두운 면에 숨은 극단적 상대주의, 다원주의는 절대성을 표방하는 그 무엇도 비판, 배격한다는 기조를 가지고 있다. 현대철학의 포스트모던적 성향은 이미 절대적 통일을 지향하던 헤겔의 철학이후 어떤 비판과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지를 보면 그 일면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극단적 비판을 지향하는 해체주의등은 명백히 상대주의와 비관론적 허무주의를 배태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 비판에 의하면 이 시대에는 신도 죽었고, 신없는 근대인에게 신을 대신했던 이성도 죽었으며 (No God, No God's Double) 그 결과 인간도 죽은 시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적 권위에 의한 것이건, 이성적 법칙에 의한 것이었던 절대가 부정된 시대에 남는 것은 "의견"들 뿐이며, 소위 해석학자들이 구상하는 "의견의 나눔, 대화"는 쉽사리 힘의 질서, 극단적 보수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즉 상대주의는 쉽게 힘의 논리를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향을 가진다. 절대적인 것은 신이건 이성이건 모두가 부정되는 체계에서는 힘과 관능만이 질서의 지도역을 갖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잘못된 과학적 토대주의의 붕괴는 환영할 만 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상대주의와 윤리적 무정부 상태는 더욱 경계해야할 악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분위기를 가진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기독교 신학의 많은 부분에 직접 간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포스트모던 철학의 핵심라고 할 수 있는 철학적 해석학은 이미 에벌링이나 판넨버그, 데이빗 트레이시등을 통해서 신학 방법론과 성경 해석학에 전입되고 있다. 하버마스적 비판철학을 신학의 방법론으로 전용하려는 시도도 있다. 또 여성신학, 해방신학등은 해체주의적 원리에서 그들의 성경해석이나 논리적 체계의 도구를 공급받고 있다.


그 외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동양적인 지혜에의 호기심을 유발하므로 동서양의 만남을 표면적 이유로한 종교, 사상적 혼합주의를 고무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소위 종교 다원주의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일원주의)를 핵으로 하는 뉴에이지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울러 어떤 형태의 것이건 절대적 규범이 존재론, 인식론, 윤리 (철학, 세계관에 삼대 기초)의 영역들에 있어 모두 무너진 결과중 하나로 이제껏 규제되던 감성, 관능, 탐욕 등의 폭발적 해방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할 위험이다. 요즈음의 예술들 가운데 상업예술 (광고)나 대중예술, 특히 영상매체에서 두드러지는 음란성, 무규범성, 성역없는 상품화, 대상화, 무차별적 주제 선정등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문화의 전반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껏 기독교의 지성인들은 주로 두가지 점에서 근대문화와 그 대변인인 철학과 과학에 응답해왔다. 첫째로 과학과 철학의 자율성과 비기독교적 정신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의 정신도 철학이나 과학만큼이나 합리적임을 강조해왔다. 이점은 근대정신 비판에 누구보다 앞섰던 근본주의적 변증가도 자신의 신학체계야 말로 가장 합리적인 체계임을 강조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것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껏 우리가 익숙해왔던 문화나 세계관과 전혀 다른 가치와 성향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학도 이에 대항하여 그 전략을 수정해야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기독교신학의 역사는 시대적 소명에 민감함을 가진 일꾼들에 의하여 살아있는 전통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오늘날 우리가 이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하려면 이 시대의 정신이요 철학적 기조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바른 기초적 이해는 모든 기독교 지성인들에게 절실한 과제이다.

 

 

- http://cafe.daum.net/ansanhoebok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5.01.14 08:03

    첫댓글 모든 시대의 정신은 성경 곧 모든 인류역사의 TEXST(성경)에 대한 예수의 관점(해석)에서만
    정확무오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 확고한 실예를 마12:38~42, 15:1~11, 23:1~15, 24:35절에서 말씀하셨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