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산 산행기
4월 서울건축사등산동호회 정기 산행지인 고대산(832)을 오르기 위해 8시 16분 집결장소인 동두천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거리가 멀어서 서둘러 나서다 보니 정해진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
역 광장으로 내려서니 이득우 건축사가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같은 열차인데 먼저 나와 있었다. 옆에 있던 정동수 건축사도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잠시 후 최종수 사무총장이 손창미 건축사와 함께 다가왔다. 오면서 전화 통화를 하면서 같은 차에 탄 것을 알았다.
역 광장 앞에 서 있는 버스가 고대산 출발장소인 신탄리행 완행 버스였다. 직행보다 20분 더 걸린다고 하는데 시간 여유가 많아서 이 차가 먼저 도착할 것 같았다. 한 번에 많은 인원이 다 타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최총장만 남고 넷이서 먼저 출발했다. 작년 초 연천고에 일을 보러 올 때 이용한 노선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는 길이 대강 머릿속에 그려졌다.
버스가 가는 길에 38선 경계표지석과 한탄강을 지났다. 지방에서 간혹 완행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지나는 길가의 시골 마을 풍경이 살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래전에 들렀던 전곡선사유적지도 길에서 멀지 않다. 버스가 전곡, 연천을 지나 9시 34분 신탄리역에 도착했다. 신탄리역은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구로 유명한 곳인데 경원선 복선전철 동두천역 ~ 연천역 구간 공사로 통근열차가 중단되고 대체운송버스가 운행하고 있다 한다.
역 주변을 둘러보다 바로 산행을 시작했다. 오기 전 인터넷을 찾아보니 고대산 정상에서 본 북쪽 철원평야 조망이 눈에 띠었다. 그리고 오늘 정상에서 그 풍광을 그리려고 화구를 준비했다. 가다 보니 혼자 온 분이 고대산 들머리로 가고 있어서 잠시 동행을 했다. 고대산 들머리에서 2코스를 찾아 들어섰다.
오를수록 점차 경사가 가팔라지고 있었다. 등산로 주변에 막 피어난 진달래와 생강나무 꽃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런데 피는 상황이 양지쪽과 응달쪽이 다르고 아래쪽과 위쪽이 달랐다. 경사가 급한 너덜 길을 오르다 보니 위쪽에 정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쪽 칼바위 능선을 지나는 부근에는 진달래가 앙상한 가지에서 꽃눈이 막 움터 오를 뿐 꽃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한겨울 풍경 그대로였다. 생강나무 꽃만 간간히 보였다.
이맘때 산에 오르면 그야말로 생명의 신비를 다시 느끼게 된다. 마른 가지에서 약동하며 돋아나는 생명력을 대할 때마다 우주의 신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맘때 초목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현상은 마치 동물의 세계 같은 경외감이 크게 다가온다. 마른 가지 끝에서 햇살에 반응해 돋아나는 것이 마치 새가 알을 품어 그 온기로 알에서 새가 태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광봉을 오르니 송선학 재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1코스를 막 출발했으니 정상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다. 잠시 후 삼각봉을 거쳐 11시 14분 고대산 정상(832m)에 도착했다. 정상부가 헬기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너른 데크에 미끄럼 방지용 고무가 깔려 있었다. 정상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뒤돌아보니 그 너른 데크가 하늘에 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특별한 건축적 공간감이 느껴졌다. 데크 한쪽에 거기서 보이는 풍광을 설명해 놓은 안내판이 놓여 있었다. 그 사진 안에 백마고지, 철원평야, 노동당사, 한탄강 등의 안내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 사진을 참고하며 실제 위치를 파악했다. 유명한 백마고지는 매우 작아 보였다. 그런데 그 작은 고지가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의 격전지였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 저녁부터 10월 15일 오전까지 철원 서북방 395고지에서 전개된 전투이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056명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 병력 2만명에 국군 제51·52·53포병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3자주포병대대, 미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9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은 약 1만 명, 국군은 3,5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백마고지 전투에는 총 28만발 정도의 폭탄이 투하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백마고지의 높이가 몇 미터 낮아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전투 기간중 주인이 12번 바뀌었다고도 한다. 앞에 바라보이는 저 작은 고지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전력을 투하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로 너른 철원 평야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작년에 그 고지에서 고 조응성 하사의 유해가 발굴이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발굴 사진이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총알이 관통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그 얼마 후 연고가 확인되어 딸을 찾았다.
정상부 3코스로 내려서는 지점에 화구를 펼치고 앞에 바라보이는 풍광을 스케치했다. 그림을 그리다 일행이 올라오면 함께 식사를 하려고 생각했다. 지나던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해도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동양화를 전공했다고 하는 한 여자 분은 다시 그려보려는데 그리지 않은지 오래되어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스케치를 하면서 기다리던 일행이 소식이 없었다. 먼저 올라온 이득우 건축사가 아까 지났던 대광봉에서 식사를 할 거라고 했다. 자신도 정상석 앞에서 식사를 했다고 했다. 대광봉을 바라보니 정자에서 식사하는 일행이 보였다.
사실 오늘은 산행에 참석 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진행중인 논문이 심사 과정에서 수정재심 판정을 받아서 해결하기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제 밤에도 늦게까지 보완용 도판 작업을 했다. 하다 안되면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데까지 최선은 다해야 할 것 같았다. 뒤에 오는 일행을 기다리며 생각을 하다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하고 먼저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대광봉에서 식사를 하고 먼저 온 일행에게 전달해달라고 주었다.
2시 6분 하산을 시작했다. 3코스는 1,2코스보다 거리가 조금 멀었다. 정상에서 내려보이던 군 막사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 표범 바위를 거쳐 2시 57분 입구 야영장으로 내려섰다. 고대산은 여기저기 너른 야영캠핑장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관리소 앞을 지나니 예약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관리소 직원이 주말에는 예약을 하기 여럽다고 했다. 오전에 오르던 들머리 앞을 지나 3시 13분 일행이 예약한 식당에 들러 한 사람 식사가 되느냐고 하니 된장찌개는 가능하다고 했다. 점심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거기서 식사를 하고 신탄리역 앞에서 아까 이용했던 완행버스를 타고 동두천역으로 돌아나왔다.
마음에 여우가 없었지만 봄기운을 받아 온갖 초목이 약동하는 자연의 생명력과 경외로움을 몸으로 느끼는 하루가 되었다. 그리고 산을 오르내리며 마음의 압박감도 조금 누그려뜨리는 시간이 된 것 같았다.
(20220409)
첫댓글 저도 저번에 갔을땐 텐트치고.비박하는 등산인을 본 적이 있어요
고대산 야영캠핑시설이 인기인것 같았습니다.
회원들과 함께 얼굴도 보고, 식사하시고 가셨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다음 산행때 뵙겠습니다.
고대산 정상에서 식사하신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먼저 오려니 아쉬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김석환건축사님 얼굴도못뵌것같습니다.
글잘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먼저 내려왔습니다.
의미 있는 산행이었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