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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月)
[1909년] 이재명, `을사5적`의 이완용 습격
←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체포돼 순국한 독립운동가 이재명 선생
스무살의 열혈 청년 이재명이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2세 추도식에 참석한 `을사5적` 이완용을 칼로 찔렀다.
이완용은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살아나 이듬해 8월 총리대신으로 정부의 전권위원이 돼 일본과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돼 이듬해 9월 사형당했다.
이재명은 1890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살에 하와이로 이민을 갔으나 제1-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항일운동을 위해 조국으로 되돌아왔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평양 방문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하려 평양역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안창호 선생의 만류로 단념했다.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사살되자 목표를 상실한 이재명은 이완용 암살로 목표를 바꿔 이날 거사하게 됐다./조선
[1876년] 주시경(周時經) 출생
← 주시경
1876년 12월 22일 태어남 / 1914년 7월 27일 죽음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다.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다. 그러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 - 주시경
주시경은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한글 연구를 통해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족 사상의 뿌리를 지키려 했던 실천적인 한글학자이다. 그는 훈민정음을 우리 겨레의 독창적인 글자를 뜻하는 한글로 바꿔 불렀으며, 한글과 영어 알파벳의 비교 연구를 통해 한글의 자모음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또한 이중모음과 단모음을 처음으로 구분해냈다. 초기 문법서 중 가장 독창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국어문법>(1910)은 이런 연구의 소산이었다. 주시경의 문법이론은 최현배의 <우리말본>(1937)의 토대가 되었다. 1896년 그는 철자법을 통일할 목적으로 독립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를 설립했다. 또한 젊은이들을 위해 상동청년학원에 국어강습소를 열었으며, 독립협회 조직에도 참여했다.
[1894년] 드레퓌스 종신형 선고
← 프랑스 육군 장교 시절의 드레퓌스(1894 이전)
1894년 12월 22일 프랑스의 장교이자 유대인인 드레퓌스가 군사기밀을 독일에 팔아넘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단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반(反)유대주의파가 이끌던 여론과 프랑스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편견과 예단에 입각한 배심원들의 평결과 종신형의 선고를 환영했다. 그러나 뒤이어 육군 소령 에스테라지가 스파이 조직에 가담했으며, 드레퓌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편지의 필적이 바로 에스테라지의 것이라는 증거가 발견되면서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은 국론이 양분되는 등 최대의 정치적·도덕적 위기를 맞았다. 드레퓌스는 에밀 졸라를 비롯해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등 많은 양심적인 지식인의 도움으로 마침내 무죄 판결을 끌어낼 수 있었다. 집단적 편견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드레퓌스를 구해낸 프랑스 지식인의 집단적 저항은, 지식인의 양심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1876년] 벨, 전화기 발명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1876년 2월 14일 벨이 전화 발명 특허를 신청하자, 일라이셔 그레이는 특허권에 대한 일시정지 조치를 요청했다. 벨은 전화선을 통해 인간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전달할 때, 그레이가 먼저 발명했던 마이크로폰 타입의 부드러운 송화기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가 쓴 전자기식 금속진동판 수화기는 그 몇 달 전에 그레이에 의해 만들어져 널리 쓰이던 것이었다. 특허신청서에 적힌 내용과 다르게 벨이 그레이의 기술을 사용했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2일 벨은 그레이보다 먼저 전화기를 완성했다. 전화기의 발명은 오늘날의 통신 혁명을 예고하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레이는 특허권을 놓고 벨과 법정투쟁을 벌였으나 패소했고, 결국 특허권은 벨에게로 돌아갔다.
[1989년] `고도를 기다리며`의 저자 사뮈엘 베케트 사망
← 아일랜드의 작가 사뮈엘 베케트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1989년 12월 22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지난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베케트는 향년 83세로,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베케트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근교에서 태어났다. 1923~27년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로망스어를 공부했고, 이곳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벨파스트의 한 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은 후 1928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강사가 됐다. 여기서 그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현대소설 `율리시스(Ulysses)`의 저자이자 스스로 망명한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를 만났다. 그는 스승이면서 친구였던 조이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것을 독특하게 발전시켰고, 특히 소설에서는 내면세계의 허무적 심연(深淵)이 추구되었으며, 희곡에서는 인물의 움직임이 적고 대화가 없는 드라마로 형식화되어 있다.
그는 그의 전 작품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인간의 조건을 일상적인 언어로 묘사했다. 1952년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성공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3부작의 소설 `몰로이`(1951) `말론은 죽다`(1951) `이름 붙일 수 없는 것`(1953)은 누보 로망의 선구적 작품이며, 그 외에 희곡 `승부의 끝`(1957) `오, 아름다운 나날`(1963) `연극`(1964) 등이 있다./조선
[2001년] 아키히토 일왕, 한반도와 혈연관계 언급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2001년 12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대한 생각을 질문받고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고 '속(續)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연(緣)을 느낀다”며 일왕가(家)가 고대 한반도와 깊숙이 관련돼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간무'는 재위 기간 781∼806년의 제50대 일왕으로, 일왕 자신이 공개적으로 한반도와의 혈연적 관련성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매끄럽지 못한 당시의 한일 관계에 비춰 양국우호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이번 일왕 발언이 학문적으로 새로운 사실을 밝힌 것은 아니다. 7세기 후엽 백제 멸망 때 일본 왕실이 대규모 원군을 보내 함께 싸우는 등 고대 일왕가가 백제와 깊은 관계였음은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통설이다.
다만 학자와 학계에서만 통용되던 '역사적 사실'이, 일왕 본인의 입을 통해 '일반적 사실'로 변해 대중적 전파력을 지니게 됐다는 점에서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당시 전문가들은 내다보았다. /조선
[1997년] 전직 대통령 전두환-노태우씨, 특별사면으로 석방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 2년여 만에 1997년 12월 22일 오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검은 색 코트에 회색 목도리 차림으로 안양교도소를 나온 전씨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마른편이었으나 건강한 모습이었다.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노씨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국민들에 대한 인사말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축하 인사만을 짤막하게 하고는 구치소 앞을 떠났다. 두 사람은 특별사면과 함께 복권까지 돼 정치활동 재개가 가능해졌다.
전-노씨는 추징금을 각각 1천8백93억원, 2천2백29억원을 미납한 상태였다. 전-노씨와 함께 12.12사태, 5.18 및 부정축재 사건 관련자 15명도 석방됐다. 그러나 전-노씨의 출감을 지켜본 사회단체와 시민들은 두 사람의 출감모습이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반성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선
[1993년] 남아공의회, 신헌법안 승인,백인지배체제 종지부
본격적인 개혁은 1989년 총선으로 집권한 대통령 드클레르크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90년 2월 ANC의 의장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고 흑백분리법이 폐지되었으며, 1991년 인종차별정책의 근간법인 인구등록법의 폐지가 의회를 통과했고, 신헌법제정이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때 평화협상이 좌초되기도 했지만,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다인종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6년 의회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비롯한 인권보장 측면이 강조된 신헌법을 채택하여 1997년 2월부터 부분적으로 발효되기 시작하였고 1999년 6월 완전 발효되었다. 1999년 6월 2일 총선에서 ANC가 승리하였으며, 6월 14일 대통령 선거에서 음베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naver
[1993년] 충남 부여군 능산리고분에서 1,400여년전의 국보급 금동제 향로 ‘금동용봉봉래산향로’ 발굴
충남 부여군 능산리 고분군에서 1천4백여년전 백제 장인의 솜씨가 한껏 발휘된 국보급 금동제 향로인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일명 박산로/博山香爐)가 완벽한 모습으로 발굴됐다.
국립부여박물관이 1993년 12월 22일 공개한 이 향로는 사적 14호인 능산리 왕릉묘역에서 서쪽으로 2백m쯤 떨어진 논에서 나온 것으로 높이 64 ㎝이며, 전체적으로 뚜껑손잡이, 뚜껑, 몸체, 다리부분 등 4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뚜껑손잡이의 봉, 받침은 용의 형상으로 왕실에서 사용됐음을 보여주며 뚜껑에는 피리, 비파, 현, 금, 북 등을 연주하는 5인의 주악상이 있고, 30개의 봉우리에는 지팡이를 든 사람, 머리를 감는 사람 등 각종 인물상과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뱀 새 등 온갖 동물, 불타는 모양의 무늬, 폭포 등을 양각해놓았다.
이러한 조각은 신선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몸체 바깥은 연꽃으로 감싸 당시 백제왕실에는 도교와 불교사상이 혼재했음을 짐작케 했다. 이 향로는 국내에서 발굴된 것 가운데 가장 크면서도 조각이 화려,정교할 뿐 아니라 왕실에서 사용한 것이어서 고고-미술학사상 획기적인 발굴로 백제유물 가운데 단일출토품으로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됐다. /조선
[1989년]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정권 붕괴
동구권의 거센 개혁열기를 완강히 거부해 온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정권이 1989년 12월 22일 5일간의 민중봉기 끝에 마침내 붕괴됐다. 차우세스쿠는 이날 부인과 함께 해외망명을 시도했으나 루마니아군에 의해 체포됐다.
차우세스쿠 정권이 붕괴된 직후 마네스쿠 전외무장관이 이끄는 '구국전선'이 잠정적으로 통치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차우세스쿠 친위부대가 이날 부쿠레슈티로 진입, 군중들에게 총을 쏴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정정불안이 계속됐다. 차우세스쿠는 이날 오전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수도 부쿠레슈티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벌어진 반정부시위를 계속 무력진압할 태세를 보였으나 군부가 시위대와 합류, 정권타도투쟁에 나서자 정권을 포기했다.
시위대와 루마니아 정규군은 공산당 중앙본부, 방송국 등 주요거점을 모두 장악했으며,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우리는 승리했다"고 환호했다. /조선
[1947년] 김구, 남한단독정부수립 반대 성명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발언으로 공식화되었다.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해체됐고, 한국문제는 UN으로 넘어갔다.
김구는 처음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반탁을 했다.
1947년 12월 1일, 김구는 "미소공동위원회로도 안 되고, 소련은 이미 이북에 단독정권을 이미 만들어 놓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는가.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한다는 조건이라면 이박사의 단독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라며 성명을 통해 단독정부수립에 합의했다.
그 후 20일이 지난 12월 22일, 김구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박사가 단독정부를 하면 사실상 미군정이 연장된다.” “외국군 철수 후 UN 감사 하에 남북이 의논하여 과도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가 남한만이라도 먼저 자유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5월 10일로 선거일을 결정했다.
이에 김구는 '3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김규식 등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정치협상을 제안했고, 북한은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를 반대하는 남북 조선의 모든 사회단체 대표들과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한다.'는 회답을 보냈다. (조선-지만원) /naver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뢴트겐(Wilhelm Conrad Rontgen) , 인류 최초의 X-선 사진을 찍음
1895년 11월 8일 저녁 뢴트겐은 놀라운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후일 신문기자와 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날 나는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히토르프-크룩스 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금시안화바륨 종이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나자, 종이 위에는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기 아크등에서 나오는 빛조차도 이렇게 뒤덮인 종이는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인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 때 히토르프-크룩스 관에서는 륌코르프 고전압 발생장치에 의해서 음극선이 유리관의 금속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해서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이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서 백금시안화바륨을 감광시켰던 것이었다. 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해나갔다. 12월 22일 그는 자신의 처를 실험실로 불러서 그녀의 손을 X-선으로 찍어보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12월 28일 뢴트겐은 그간의 실험을 정리해서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 학회지에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관해서'라는 논문을 접수시켰다.
이 짧은 논문은 곧 인쇄되어 1896년 신년에 이미 뢴트겐은 논문의 별쇄본을 X-선 사진과 함께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1월 4일에는 독일 물리학회 50주년 기념 학회가 있었는데, 뢴트겐의 발견은 이때 전 독일 과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의학자들은 X-선의 의학적 중요성을 발 빠르게 알아차리고 뢴트겐에게 강연을 요청했다. 학계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도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해서 뢴트겐은 일약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Google
[1849년]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 Fyodor M.) 사형선고
1849년 12월 22일 오전 9시, 페테르부르그의 세묘노프 연병장에는 총살형을 선고받은 21명의 사형수들이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 서서 최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에 반기를 든 국가사범들이었다.
사형집행관이 사형 선고문을 낭독하자 첫째 조가 처형대 위에 세워졌다. 가장 죄가 무거운 페트라쉐프스키와 소위보 몸벨리, 그리고 비평가이자 작가인 그리고리예프가 눈이 가리워진 채 말뚝에 묶였다. 그들 앞에 선 사수들은 일제히 세 사람의 가슴에 총을 겨눈 채 구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말을 탄 한 관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며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크게 외쳤다.
"사형을 중지하시오! 하해와 같은 황제의 명으로 사형을 중단하시오."
이 잔인한 처형극은 다시는 모반을 꾀하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꾸며진 각본이었다. 사형수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사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형수에 포함돼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머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 중 일부는 정신질환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거나 불치의 병에 걸렸고, 심한 동상으로 손발을 절단하기도 했다.
훗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혹한 속에서 자신이 추위를 느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생사가 교차하는 순간의 미묘한 감정만은 그의 글 속에서 자주 언급했다. 그해 12월의 어느 아침의 극적인 체험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어느 작가들보다 더 날카롭게 인간의 심연을 파헤칠 수 있었으며, 인류의 과오와 고통을 깊게 통찰할 수 있었다. (bizmon) /Google
[1823년] 프랑스 곤충학자 파브르(Fabre, Jean Henri) 출생
1823. 12. 23 ~ 1915. 10. 11
남프랑스의 아베롱현(縣) 생레옹 출생. 빈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현의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카르팡트라스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몽펠리에대학에서 물리 ·수학을 배운 후 1849년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중학의 물리학 교사가 되었다. 4년 후에 아비뇽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에 임명되었으며, 이학사(理學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1854년 31세 때의 겨울 레온 뒤프르의 소책자를 읽고 감명을 받아, 곤충연구에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이듬해 노래기벌의 연구를 발표하였고, 얼마 후에 아비뇽의 르키앙박물관장에 임명되었으며, 1886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관학파(훈구파)의 공격과 비난으로 인해 교단과 박물관장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였으며, 과학보급서를 저술하였음에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878년 마지막 거처인 세리냥의 아르마스로 이사하여, 그 유명한 《곤충기(昆蟲記) Souvenirs entomologiques》(10권, 1879∼1907)를 출판하였다. 1910년에 파브르 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스톡홀름 학사원(學士院)에서는 린네상을, 프랑스 정부는 훈장과 연금을 수여하였다. /naver
[1808년]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교향곡>이 빈에서 초연
운명교향곡 [運命交響曲] -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C단조(작품번호 67)의 통칭
모두 4악장으로 이루어졌다. 교향곡 제3번 《영웅》(1804)이 완성된 뒤 곧 쓰기 시작했으나 이보다도 먼저 교향곡 제4번(작품번호 60, 1806)이 완성되고 그 후 본격적인 작업이 계속되어 마침내 1808년에 완성, 빈에서 초연되었다. 이 곡의 이름은 제1악장 첫머리의 동기에 대해 베토벤 자신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한 데 연유하고 있다. 베토벤의 귀에 이상이 생기고, 영원한 애인으로 알려진 테레제 브룬스비크와의 파국, 나폴레옹의 침공 등 시련이 겹쳤던 시대의 작품이다. 기법적으로도 뛰어나 마지막 악장에서는 트롬본 3, 피콜로 1을 곁들여 빛나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다. /naver
[1639년] 프랑스의 극작가 라신(Racine, Jean) 출생
1639. 12. 22 ~ 1699. 4. 21
샹파뉴 지방의 라 페르테밀롱 출생. P.코르네유, J.B.P.몰리에르와 함께 3대 고전극 작가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조부모 아래에서 자랐다. 14세 때 조부가 사망하자, 조모를 따라 고모가 수녀로 있는 포르 루아얄데샹 수도원으로 갔다. 1653∼1655년 보베의 기술학교에 다니다가, 포르 루아얄 수도원 부속 소학원에서 공부하였으나 1656년 이 학원 해산 후에는 수도원 근처에 살면서 당시의 얀센주의자 P.니콜, C.랑슬로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 고요한 골짜기에서 그리스 고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배우며, 남몰래 문학에 도취하는 나날을 보냈다. 19세가 되던 1658년 파리로 나가서 1년간 철학을 수강, 라 퐁텐 등과 친교를 맺어, 시작(詩作)에 뜻을 두었다. 1660년 루이 14세의 결혼에 축하시 《센강의 님프 La nymphe de 1a Seine》를 써서, 국왕으로부터 100 루이의 상금을 탔다.
그 후 극작에는 실패하여 상연기회를 얻지 못하고, 1661년 사제직을 얻기 위해 백부가 부사제로 있는 유제스로 갔다. 그러나 사제직의 권리를 둘러싼 소송사태에 실망하고 문학열도 단념하지 못해, 1663년 파리로 돌아와서 시작(詩作)으로 연금을 받으며 부알로 등 문인들과 사귀었다. 1664년 몰리에르의 호의로 그리스의 테베의 왕권을 둘러싼 형제간의 싸움에서 취재한 《테바이드 La Thebaide ou les freres ennemis》를 상연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연애비극 《알렉산드르 Alexandre》를 몰리에르 극단에게 상연하게 하면서, 변심하여 부르고뉴 극단에도 상연시켰으므로 몰리에르와는 소원해졌으나 작품은 성공하였다. 1666년 포르 루아얄에서의 은사 니콜이 극시인을 '공중(公衆)의 해독자'라고 비난한 데 대해 공개서한으로 반박하고 그와 결별하였다.
1667년 몰리에르 극단에서 빼내어 애인으로 삼은 여배우 라 뒤 파르크 주연으로 《앙드로마크 Andromaque》를 상연, 인간의 내적 숙명으로서의 연애 정념을 포착하여 그 때문에 파멸하는 인간상을 묘사하였다. 코르네유의 의지비극에 대한 정념비극(情念悲劇)의 신풍을 개척, 성공을 거두고 상류 사교계에도 출입하게 되었다. 1668년에는 유일한 희극 《소송광(訴訟狂)들 Les Plaideurs》을 상연하기도 하였다. 그 후 《브리타니퀴스 Britannicus》(1669)에 이어 같은 제재로 코르네유와 경작(競作)하여 승리를 차지한 《베레니스 Berenice》(1670)를 쓰고, 《바자제 Bajazet》(1672) 《미트리다트 Mithridate》(1673) 《이피제니 Iphigenie》(1674)를 연이어 발표, 그 모두가 삼일치(三一致)의 법칙을 지킨 정념비극의 걸작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673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여배우 라 샹 메레와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페드르 Phedre》(1677)를 쓴 뒤 극작을 일단 그만두고, 1677년 5월 재산가의 딸 카트린 드 로마네와 결혼하여 신앙심이 두터운 가장이 되었다. 이 '라신의 침묵'은 문학사상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 이유로서는 《페드르》 상연이 반대파의 방해를 받고, 2류작가 프라돈과의 경작(競作)으로 말려들었으며, 국왕의 수사가(修史家)로서 안정된 위치를 얻었으며, 죄의식을 《페드르》에 담아 포르 루아얄의 은사와 화해하고 신앙을 회복한 일들을 들 수 있다. 사관(史官)으로서의 작품은 《포르 루아얄사(史)》(1698)가 있고, 종교시 《성가(聖家)》(1694)를 썼다. 그 후 왕의 후궁 맹트농 부인의 요청으로, 부인이 주재하던 생 시르 여학원 원생들의 상연용으로 합창대를 이용한 종교비극 《에스테르 Esther》(1689) 《아탈리 Athalie》(1691)를 쓴 것 외에는 일체의 극작을 중지하고 조용한 생활을 보내다가 1699년 파리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작품은 신이나 권력으로 대표되는 숙명에 저항하면서, 자유를 관철하지 못하고, 격렬한 정념으로 파멸되는 인간의 처절한 모습과 그들의 내면적 갈등을 다루어 이를 고조시키다가 정점에 이르러 단숨에 무너지는 위기로 몰고가는 묘사를 하고 있다. 더구나 항상 간결하고 정선된 단어의 배열을 유려한 운문으로 소화시켜, 내용과 표현이 일치되어 말이 동시에 음악이며 장치인 점 등은, 그의 작품만이 지니고 자랑하는 비길 데 없는 완성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naver
그 밖에
2001년 북한공작선, 일본 순시선과 교전 침몰
2001년 KT-MS 제휴, 아르헨티나 디폴트 사태로 잠정 연기
2000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합병 발표
1999년 대한항공 항공기 영국 스탠스테드공항 이륙직후 추락(4명 사망)
1994년 이탈리아 총리 베를루스코니 사임
1994년 북한, 영공개방 방침 발표
1992년 한국 베트남 수교
1992년 광케이블망 국내 첫 개통
1989년 `고도를 기다리며`의 저자 사뮈엘 베케트 사망
1987년 산악인 허영호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
1983년 서사모아 북한과 단교
1983년 아라파트, 이집트 방문 무바라크와 회담
1983년 공안(公安)관련자 172명 석방, 정승화 최기식 고은 등 142명 복권
1983년 한국-기니비사우 국교 수립
1982년 한국청소년축구 제23회 아시아청소년대회서 우승, 이라크에 2-1승
1982년 치안본부, 신체장애자에 운전면허응시자격 허용
1980년 서울형사지법 피의자구속적부심 부활 후 첫 석방 결정
1978년 박정희 대통령, 개각 단행
1977년 수출 1백억달러 달성
1969년 미국의 영화감독 슈테른베르크 사망
1966년 민주사회당 창당(대표 서민호)
1965년 영국 BBC 방송 최초의 종군특파원 딤블비 사망
1965년 다호메이 군사쿠데타, 소글로 장군이 전권 장악
1962년 최고위, 헌법개정안 가결 선포
1961년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실시
1958년 민속극장 개관
1947년 이탈리아, 공화국헌법 제정
1944년 미국 프로 야구선수 스티브 칼턴 출생
1938년 숙명여전(현 숙명여자대학교) 개교
1921년 에디슨, `전축 캐비넷` 디자인으로 특허 취득
1911년 미국의 천문학자 레버 출생
1909년 원각사 개관
1902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 121명 인천항 출발
1885년 일본, 내각제도 발족
1883년 미국의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 출생
1882년 최초의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전구 등장
1876년 이탈리아계 프랑스 작가 필리포 마리네티 출생
1872년 프랑스의 세균학자 게랭 출생
1858년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 출생
1768년 영국의 풍경화가 크롬 출생
1702년 스위스의 초상화가 장 리오타르 출생
1641년 프랑스 정치가 막시밀리언 쉴리 사망 1178년 일본의 제81대 천황 안토쿠 출생
1145년 삼국사기 완성
1095년 노르만계 시칠리아 왕국의 왕 루지에로 2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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