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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케 하신 예수님(눅 4:16-21)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울대 후문 앞에는 낙성대라는 곳이 있습니다. 청년 시절, 서울에 있을 때, 자주 갔던 곳입니다. 서울대 후문을 내려오는 길은 은행나무 길로, 가을철 노랑단풍을 즐길 수 있는 아주 멋진 곳입니다. 낙성대의 한자는 “떨어질 낙(落), 별 성(星)”인데, 한 마디로, 하늘의 별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낙성대는 강감찬이 태어난 곳인데,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런데, 낙성대는 강감찬이 태어난 서울에만 있는 것이, 그가 죽음을 맞이한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도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는데, 하나는 생명을 의미하고, 하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오백년”을 보면서, 역사 공부를 했는데, 요즈음 KBS에서 “고려 거란전쟁”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은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큰 전쟁 외에도, 작은 전투까지 포함하면, 여러 차례이지만, 중요한 전쟁을 중심으로, 3차 전쟁으로 구분됩니다. 993년에 벌어진 1차 전쟁 때에는 서희가 거란과의 담판을 통하여, 오히려 빼앗겼던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2차 전쟁은 강조의 난을 계기로, 현종이 즉위한 1010년에 쳐들어왔습니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시점은 2차 전쟁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종 9년인 1018년의 3차 전쟁은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은 패망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을 보면, 고려를 쳐들어온 거란군에 맞서는 고려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군과 거란군의 전투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살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싸울 때,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죽고 죽이는, 싸움 후, 여기 저기 널브러져 있는 처참한 모습들, 살기 위하여 험한 산길로 도망치는 사람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 땅에 다시는 그와 같은 전쟁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 극장에는 우리나라 영화 두 편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을 다룬 “노량 : 죽음의 바다”라는 영화와 1979년 10월 26일 이후, 12월 12일에 일어난 군사 반란을 다룬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천을 빼앗겼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회복해야 합니다. 해방의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거란에 맞선 것도, 왜구에 맞선 것도, 그리고, 군사정권에 맞선 것도, 우리의 산천과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빼앗긴 땅과 백성과 자유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얽매이고, 자유가 없는 삶이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미국 독립운동가였던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자유케 하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오셨습니까?
빌립보서 2:6-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오셨을까요? 결론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살기 위하여,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물이 되어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누가복음 19: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요한일서 5:12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육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생명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새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 있는 것 같았으나 죽은 자였습니다. 에베소서 2:1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음을 날마다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탄의 계절, 오늘은 성탄절 전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오셨을까? 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말 구유로 오셨을까?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하여, 대속물이 되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고귀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생명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 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셨는데, 그 말씀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이사야 61:1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읽으신 후,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을 때, 그 회당 안에 있는 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주목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응하여지기를 바랍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롭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민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기독교학교, 즉 미션스쿨을 다녔습니다. 중학교 입학하던 해가 “서울의 봄”을 기대하며 들떠있던 바로 때였습니다. 군사독재 시대이지만, 교복 자율화, 두발 자율화가 실시되어,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편한 복장과 장발을 하고 다녔습니다.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자유를 외치던 때였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해방되는 것 같았습니다. 서울의 봄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울의 봄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야를 오가며, 정권은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권력과 재물의 노예가 되어, 상대방을 비방하고, 끌어내리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의 봄은 영영 오지 않는 것일까요?
미션스쿨인지라, 주일예배 출석 카드에 교회 도장을 찍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 친구 따라, 교회를 옮겨다니기도 했지만, 서울 올라오기 전, 마지막에 출석했던 교회가 봉화산 자락 끝에 위치한 죽도봉 올라가는 길목의 승산교회습니다.
순천만 국제정원 정문 앞에서, 똑바로 서서, 오른쪽 산자락의 끝을 보면, 튀어나온 봉오리가 하나 있는데, 대나무가 많다고 하여, 죽도봉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그 죽도봉 올라가는 중턱에 교회가 우뚝 서 있습니다. 교회를 정면으로 들어가려면,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그 교회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기역자 교회라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남자만, 다른 한쪽은 여자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구조로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그런 기역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회 마당 한쪽 바로 옆에, 새로운 교회 건물을 지었으나, 그 기역자 교회 건물을 허물지 않고, 지금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왜 기역자 교회 건물입니까? 복음이 들어오고, 교회가 세워졌으나, 수백년을 지탱해왔던 유교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녀의 구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가 주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런 기역자 교회는 사라졌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죄의 포로였습니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의 짐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모든 속박을 벗겨 주셨습니다. 자유케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맘껏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죄악과 전쟁과 질병 등으로 인생의 자유를 빼앗기고, 포로 같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로마서 8: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존 웨슬리는 “예수님은 인간을 더 이상 죄의 노예로 남겨두지 아니하고, 죄로부터 해방시키시는 분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누가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겠습니까? 석가, 공자, 맹자, 마호메트입니까?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포로된 상태에서, 절망과 불행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돈이 우상이 되어 포로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거짓과 속임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일어납니까? 강도, 절도, 살인, 폭행 등, 죄와 사망과 마귀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눌린 자를 자유롭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걱정, 근심, 가난, 저주에 짓눌려 평화와 안정과 기쁨도 없이, 고통당하는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0:38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걱정, 근심, 불안, 두려움, 공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성령과 능력을 받아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쳐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고침 받은 사람들은 건강과 평안과 자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계 역대 왕들은 얼마나 오래오래 살았을까요? 로마 황제는 평균 수명이 35세이고, 중국의 왕들 평균 수명은 36.7세. 조선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3.3세로서 왕들이 모두 단명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았을 왕들이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어느 글을 보니, 권력을 가진 왕들이 장수하지 못하고, 단명한 이유는 바로 근심, 걱정,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최고급 음식이나 보약이, 정신적인 고통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암살당하지 않을까, 반역자에게 왕 자리를 잃지는 않을까, 또 온갖 나라 일을 염려하며,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살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해서라도 유지해보려고, 더 불안해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해방과 참된 자유를 맘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뭔가에 눌린 삶을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사슬에 매여, 포로되어 끌려가는 우리 인생을 자유케 하고, 어둔 눈을 열어, 천국의 소망을 보여 주며, 온갖 인생의 짐, 죄의 짐, 죽음의 짐, 질병의 짐, 염려와 걱정 등, 인생고의 짐에 눌려 허덕이는 인생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하신 것처럼, 우리도 본래 자유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 자유를 빼앗기고, 눌리고, 포로되어 끌려가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종의 멍에, 두려움과 근심의 멍에를 풀어버리셨습니다. 눌린 것으로부터 자유케 하여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우리를 죄의 짐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 감사와 찬양을 올리며, 우리의 온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야 합니다.
참된 자유의 기쁨을 얻은 자로서, 이 자유의 기쁨을 주신 예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예수님 믿기 이전에,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서 역사학 교수와 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객관적 입장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뻔한 이야기야. 착한 사람이 되라는 그런 이야기겠지.” 그러나, 그의 첫 번째 소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성경은 전혀 다르다. 인간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루이스를 흔든 첫 번째 충격이었습니다. 두 번째 충격은 “그리스도는 훌륭한 스승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든가? 아니면 미치광이든가?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미치광이라고 볼 수는 없다. 거짓말쟁이 일 수도 없다. 그러면, 그는 누구겠는가? 그는 자신의 선언처럼, 참 하나님이심에 틀림이 없다!”
그는 성경을 객관적으로 읽다가, 놀라운 발견 앞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구원자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신앙에 관한 책들을 썼는데, 인류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내려온 모든 시대 속에서, 어른들과 아이들을 위해 가장 많은 신앙의 책들을 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쓴 대표적인 소설이 “나니아 연대기”입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등이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4)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진리되신 예수님을 알 때, 우리는 그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를 바로 알 때, 우리는 모든 죄와 영적 무지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저와 여러분의 귀에도, 오늘 이 말씀이 임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온전히 구원함을 받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
그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여,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염려와 걱정이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죄의 짐에 억눌려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한마음교회를 붙들어 주셔서, 오직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자유만을 선포하는 복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한마음교회 속한 모든 성도들과 가정과 자녀들이 오직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