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주현절 2주/ 교회력)
요한복음 1:29~42(사 49:1~7, 시 40:1~11, 고전 1:1~9)

오늘은 주현절 둘째주일입니다.
지난주 ‘내게로 오시는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세례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고, 하늘에서 말씀하시며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공인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을 우리는 ‘화육 사건’이라고 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살갗을 지닌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을 보여주신 것을 기념하며,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이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돌아보는 절기가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의 ‘현’자는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분명하고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뜻이 있습니다. 주현절 끝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아로서 어떻게 희생양이 되시어 고난 겪으셨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는지에 묵상하는 사순절, 부활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 교회력

그래서 교회력절기는 주현절로 시작하여 사순절,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활동을 기억하는 성령강림절, 성령과 동행함으로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어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다루는 창조절, 새롭게 창조되었음에도 다시 죄에 늪에 빠져 살아가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로 이어집니다. 성탄절에 이어 주현절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교회의 절기는 주현절(녹색), 사순절(보라색), 성령강림절(붉은 색), 창조절(녹색), 성탄절(흰색 또는 보라색) 5가지가 있습니다. 이 절기에 따라 강단의 스톨, 초, 목회자의 스톨 등의 색깔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장식을 할 때에도 절기에 맞는 색깔을 가진 꽃들로 장식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는 이것을 바탕으로 구약, 시가서, 서신서, 복음서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말씀들을 선택하여 예배 전반에 사용하도록 안내한 것입니다. 설교할 때, 네 본문을 모두 녹여서 준비할 수도 있고, 어느 한 본문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되 적절하게 다른 말씀들을 예배 순서에 삽입하여 사용합니다. 시가서는 성시를 교독할 때나 예배의 부름에서 주로 사용되고, 구약성서의 말씀은 참회의 예전에 많이 사용됩니다. 서신서의 말씀은 응답과 결단의 시간에, 복음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선포된다는 의미를 담아, 일어서서 ‘아멘!’으로 받습니다.
■ 오늘의 말씀(요 1:29~42, 사 49:1~7, 시 40:1~11, 고전 1:1~9)

오늘 주신 성서 일과의 말씀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묵상하면서 저는 ‘경청과 봄’이라는 두 단어로 정리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방의 빛인 이스라엘’에 관해 말씀하시며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사 49:1)로 시작하며, 시편 40편 1절 말씀은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로 시작합니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전서에서는 “너희를 불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하시므로 역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경청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경청’과 관련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오실 때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의 말씀과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연노라”(요 1:34), 그리고 39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하시며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와 형제제 안드레를 제자로 삼으시는 말씀을 통해서 ‘봄(보다)’이라는 단어를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 경청하시는 하나님

많은 이들이 대화의 기술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대화가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데, 경청하지 않고 자기의 말만 합니다. 이렇게 되니 ‘공감의 능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말만 거듭 되풀이합니다. 국회에서 ‘청문회’하는 모습을 보셨겠습니다만, 정치인들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주장만 합니다. 자기주장을 하면서 ‘국민의 뜻’이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대결만 난무하고, 국민을 섬기라고 국회의원으로 뽑아주었니만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일만 합니다. 경청하지 않는 사회의 단면을 우리는 국회를 통해서 봅니다. 그런데 ‘경청의 실종’이 국회에만 있겠습니까?
신앙인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만 취사선택하여 읽고,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듣고 싶은 설교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로 포장된 자기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교회력 설교’가 옳다고 봅니다. 먼저 설교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서서 묵상하고, 그 말씀을 통해 들을 것을 전해야 설교다운 설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경청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들을 수 았는 것입니다. 그냥 건성건성 듣지 말고 정성을 다해서 들으면 한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스라엘게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셔서, 경청하셔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이시니 귀 기울여 들으면 ‘빛’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경청하시길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으면서, 내 요구만 한다면 마치 끊어진 수화기를 들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릴 적 이맘때면 동산에 올라가 시린 손을 비벼가며 친구들과 연싸움을 하곤 했습니다.
먼저 연을 하늘 높이 올리면 가물가물 합니다만, 연줄이 끊어졌는지 아닌지는 느낌으로 압니다. 연은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지만, 상대방과 겨뤄 연줄이 끊어지는 순간 손가락에 느낌이 확 옵니다. 연줄이 끊어졌는데 아무리 얼레를 오르내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이어진 신앙의 끈이 끊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러려면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으로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으로 듣다 보면 불편한 말씀도 많습니다. 그런데 본래 진리란 불편한 것입니다. 익숙한 것이 아니라 불편하기에, 그 불편한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삶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이 성숙한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경청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셔서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며, 우리의 걸음을 견고하게 하시는(시 40:2) 복을 누리십시오.
■ 봄(보다)

아직 봄은 멀었지만, ‘봄’이라는 단어는 ‘보다’에서 왔습니다. 봄이 오면 긴 겨울을 보낸 씨앗들이 싹을 내고, 꽃이 핍니다. 볼 것이 많은 계절, 그래서 ‘봄’입니다. 그런데 이 ‘봄’이 무엇 때문에 가능할까요? ‘빛’이 있어 가능한 것입니다. 사진을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빛이 있어야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빛이 있어 봄이 시작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피어나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어둠 속에 살아가던 우리에게 빛으로 오신 분, 그분이 바로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여러분, 색깔 중에서 가장 풍부한 색을 품고 있는 것이 무슨 색일까요?
삼원색을 아시죠? 빨강, 파랑, 노랑입니다. 그런데 빛의 삼원색은 빨강, 초록, 파랑입니다. 이 세 가지 색을 각기 다른 비율로 섞으면 모든 색을 표현할 수 있는데, 세 가지 색을 거의 같은 비율로 섞으면 검은색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검은색’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시는 분도 있고, 실제로 디자인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색깔은 ‘검은색’입니다. 저도 검은색을 좋아합니다. 특히 흑백사진을 좋아하는데, 두 가지 색의 조화가 그려내는 사진은 컬러사진이 주지 못하는 깊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으로 상징되는 ‘검은색’ 혹은 ‘암흑’, 그래서 이 세상을 암흑과도 같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이 빛이 왔습니다. 주현절은 ‘어둔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분’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빛으로 오셔서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가는 우리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 본래의 아름다웠던 빛깔들을 회복시켜주신다는 의미로 본다면 너무 비약일까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하신 이유는, 그 어두운 세상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것을 보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세상에 있는 빛들이 발현되어야 자신도 찬양을 받을 수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오신 주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요 1:29)으로 오셨으니 ‘보라’는 것입니다. 그를 보고, 제자가 된 시몬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는 새 삶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오신 예수님을 ‘보고’ 그를 ‘영접’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저마다의 색깔로 피워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피워내고 싶으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의 많은 것 중 하나로 주님을 보지 마시고, 가장 귀한 분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처럼 주님 외의 것은 분토로 여기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우리의 삶을 피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 예배하고, 성경공부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도와주시는 것이지, 경청하지도 않고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자기의 욕심을 구하는 방편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상 숭배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는 말씀은 추상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고 들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별나라 우주인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책만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주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공중을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쁜 일상에 치여 하늘을 본지가 언제인지도 모르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보라’는 것입니다. 일단, 보십시오. 그러면 보는 눈이 뜨이면 들리게 됩니다. 주현절을 보내며, 보고 듣는 눈과 귀가 열리시는 기적을 체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