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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식생활에서 군것질은 중요한 먹거리가 되었다.
공부할 때 간식으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나 놀이하는 아이들의 주전부리로 아니면 길 가다가 충동적으로 하는 군것질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아이들의 입도 즐거워졌다.
군것질의 사전적 의미로는 꼭 필요하지 않은 음식물을 사서 먹는 것, 또는 주전부리라고 나온다.
‘군’이란 접두사는 ‘필요한 범위 밖의 또는 쓸데없는’의 의미를 갖는다.
보통 군것질이라 할 때 끼니 이외 다른 것을 먹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먼 여행을 떠날 때 밀개떡같이 간단한 음식을 싸 가지고 다녀 식사를 해결했다.
며칠씩 걸리는 긴 여행이라면 상하지 않고 휴대가 편하여 먹기 쉬운 특별한 음식 미숫가루를 가지고 다녔다.
샘물을 한 바가지 퍼서 미숫가루를 풀어 마시면 충분히 한끼 식사가 된 것이다.
여유가 있게 여행길을 오르게 되면 주막에 들러 국밥이나 국수를 먹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을 농업국으로 살아오면서 일년 중 씨 뿌리고 거두는 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의 식생활에서 입이 심심할 때, 끼니가 지나 배가 고파질 때 간단히 먹었던 군것질은 1970년대 무렵부터였다.
주전부리뿐 아니라 끼니도 연명하지 못했던 춘궁기, 또는 맥령기라는 시절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래로(예로부터)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1950, 1960년대에 농토가 적어서 자기 가족이 먹을 양식도 생산하지 못하는 농가(農家)에서 일어난다.
가난한 농가는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진다.
당장 저녁거리가 없다. 어린 자식들은 밥 달라고 보채고, 산모는 젖이 안 나와 젖먹이는 울부짖는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라 양식을 꾸어올 데도, 꾸어줄 사람도 없다.
할 수 없이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태워 가루로 만든 다음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넣고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리추수 때라야 끼니라도 때울 수 있는데 그때까지 못 견디면 굶어 죽는다.
그래서 ‘보릿고개’를 당하는 농가는 식구 중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어린 자식들을 양자로 보내거나 식모살이를 하게 했다.
이런 농가의 어려움은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주도형 산업정책으로 1970년대에 가서야 해결하게 된다.
최근에는 경제성장과 함께 농가소득도 늘어나 보릿고개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풍토에 맞는 독자적인 식생활이 있었다.
쌀이나 잡곡, 감자와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고 제철 채소, 콩류, 해초, 생선과 조개를 먹었다.
밥을 중심으로 채소, 된장, 생선이 있었고 간식으로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먹게 됐다.
가마솥에 밥을 해먹고 나면 밑바닥에 눌어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누룽지이다.
누룽지는 오늘날처럼 과자나, 빵, 그 밖의 간식거리가 그다지 많지 않던 시절, 가장 많이 찾던 군것질의 하나로 가마치 또는 눌은밥이라고도 한다.
그 분량에 따라 쌀누룽지, 보리누룽지, 콩누룽지 등으로 부르고 있는 곳도 있다.
군것질거리가 귀했던 시절, 누룽지는 맛이 있고 고소하며 또 먹으면 배도 불러, 누구나 이를 좋아하였고,
아이들이 많은 집에서는 밥을 지을때 일부러 밥을 눌려 누룽지를 많이 긁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과자나 빵, 그 밖의 군것질거리가 많이 선보이고, 또 밥을 짓는 데도 예전처럼 재래식 밥솥을 쓰지 않고
전기 밥솥이나 간단한 알루미늄 냄비 등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아 누룽지를 눌리고 있는 집이 줄어들고 있고,
누룽지를 찾는 사람의 수효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대신 근래에는 누룽지를 본뜬 여러 가지 과자류가 나오고, 또 누룽지를 말려 식용유로 튀긴 누룽지튀김과 같은 먹거리도 선보여 누룽지에 대한 추억을 더듬게 하고 있다.
옛날에는 엿장수, 강냉이장수가 골목에 나타났다 하면 어머니들은 아이들 단속부터 했다. 멀쩡한 놋숟가락과 할머니의 새 고무신이 느닷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녹슨 쇠붙이를 내밀며 “아저씨, 엿 많이 주세요” 하면, “그거야 내 마음이지” 하던 그 엿장수.
지금은 아무렇게나 버리는 쓰레기도 그때는 정말 소중한 자원이었고, 그래서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물건도 엿장수 아저씨는 친절히도 다 받았다.
4, 5월이면 농가에서는 논농사를 준비한다.
24절기의 하나인 청명이 되면 봄밭갈이를 하는데 엄마 손잡고 새참 내오던 아이들은 삐삐, 또는 삘기라 부르는 띠의 어린순을 군것질 대신 먹기도 했다.
어렵던 시절에는 군것질거리가 따로 없었다. 조금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은 과일을 먹고 형편이 안 되는 집은 생오이나 가지 따위를 먹기도 했다.
삶은 감자와 옥수수도 좋은 간식거리였고 날고구마도 좋았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대에 옥수수는 한여름 좋은 간식이자 반쯤은 주식이 되었다.
푸성귀만 가득한 밥상이 물려지고 나면 커다란 싸리나무 광주리에 옥수수가 수북히 담겨져 나온다.
옥수수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 아이들의 씹어먹는 먹거리이면서 놀잇감이었다. 옥수수로 하모니카도 만들어 불고 옥수숫대도 먹을 수 있는거였다.
아카시아 향내가 진동을 하면 나뭇가지로 병정놀이를 하던 개구쟁이도 가위바위보로 잎을 따던 계집아이도 모두 아카시아꽃을 따먹었다.
봄이면 산에 하얗게 피던 아카시아 꽃. 한 움큼 볼에 가득 넣어 씹을 때 느끼는 그 맛은 아이들에게 충분한 달콤함을 주었다.
이 밖에 입이 심심할 때 하루종일 물고 다닌 꽈리,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칡.
전북 고창에서는 특별한 군것질거리가 있었다. 입안에서 톡 터지는 달콤쌉싸름한 화채. 선명한 색깔만큼이나 맛이 뛰어난 앵두화채.
7월 이맘때쯤이면 산길에는 오디, 산딸기, 앵두가 흐드러지게 열려 있다.
그중에서도 앵두는 무더운 여름 시원한 화채를 만들어 먹으면 더위를 싹 잊게 해주는 음식이다.
시골에서는 앵두가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훌륭한 군것질거리였다.
시골집에 아름드리 서 있던 앵두나무에 주홍빛 앵두가 알알이 한아름 열리면 나무 위에 올라가 정신없이 따먹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는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가마솥에다 엿을 고았다.
찹쌀이나 멥쌀에다 엿기름을 넣고 오랫동안 고아 액체처럼 걸쭉해진 것을 굳혀서 만든다.
밤새워 엿을 켜던 우리 여인네들의 한과 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엿고던 민요도 전해져 오는데 아마도 긴 시간 동안 무료하고 적적한 것이 민요를 탄생시키지 않았나 싶다.
‘사랑방에 우리 서방인은 글 읽다가 조느라고 앞뒷질하고 요내사 긴긴밤에 밤새워 엿켜느라 앞뒷질이다.’
제3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던 1972년부터는 빵, 양과자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정부에서는 백미 소비 억제책으로 국제시장 가격이 저렴한 소맥을 수입, 적극적인 분식 장려를 하였다.
삼립식품 공업주식회사가 발족하면서 보름달빵, 단팥빵, 곰보빵은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초코파이의 향수도 대단하다.
1980년대와서 군것질 하면 보통 어린아이들을 연상하곤 하지만 요즘은 아이, 어른 구별없이 간식을 즐기는 것 같다.
여학교 앞에는 튀긴 고구마나 꽈배기 장수가 있었고 극장가와 대학가에는 군밤이나 땅콩을 파는 이들이 많았다.
남자학교나 노동자들이 많은 부근에는 풀빵장수나 포장마차가 있어 싸고 양 많은 먹거리를 팔았다.
겨울밤 시험 공부를 하다 골목으로 난 창문으로 사먹는 찹쌀떡이나 김밥의 맛도 기가 막히고
밤참으로 라면을 끓여 찬밥과 신 김치를 곁들여 먹는 맛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맛이다.
여름에는 ‘부라보콘’이나 ‘키스바’같은 아이스크림류가 겨울에는 ‘호빵’등이 주 메뉴였다.
영양갱에 대한 추억은 한마디로 ‘감질나는 맛’이었다. 어릴 때는 영양거리였고 그 ‘감질나는 맛’이 아까워 한번에 크게 베어 먹지 않고 이빨로 야금야금 먹고는 했다.
길다란 종이를 조금씩 뜯어가면서 먹을 만큼만 먹고 나머지는 종이에 싸서 숨겨뒀었던 기억도 나고, 어쩌다가 영양갱이 몇 개 생기면 책상 서랍에 두고 두고 먹기도 했다.
국민학교 앞에 설치되어 있던 조그마한 군것질 가게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핫도그를 50원에 팔았다.
역시 50원의 아이 손바닥만한 울릉도 오징어(상표명.지금 생각하면 발이 10개 달렸을 뿐 오징어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뎅. 또 100원의 오리뽑기가 있었다.
아이스크림 하면 역시 쭈쭈바. 그것도 50원짜리였다. 아무튼 여름이건 겨울이건 잘도 물고 다녔다.
붕어빵도 가끔은 풀빵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났다. 아버지 시절 10원에 붕어빵이 10개였다는 이야기는 전설에 가까웠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꼴로 출몰하는 솜사탕 아저씨는 최고의 이벤트였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일이면 없어질 솜사탕을 맛보기 위해 아이들끼리 허겁지겁 돈을 빌리곤 했다.
비닐 막대기 안에 가득 들어 있는 주황색 물체. 그 재료 및 제작비법이 궁금하다. 어렸을 때부터 늘 궁금해서 겉봉을 살펴보았더니 구연산 아니면 포도당.
먹을 수 있는 물체니까 써 놓았겠지만 말이다. 아폴로를 하나하나 먹고 그중 몇 개나 쓰레기통에 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쭈쭈바의 발전판이 많이 나왔다는것. 특히 초콜릿 맛이 나는 것 빠삐코라는 것도 있었다.
제일 인기는 쫀드기가 아니었나 싶다. 짝짝 가늘게 찢어 입에 넣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던 그 구수한 맛 오래도록 먹었었던 것 같다.
군것질거리도 변해가듯이 놀이도 시대에 따라 변해간다. 아이들이 밖에서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인지 골목에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컴퓨터와 TV에 열중하는 아이들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2000년대에는 1997년 IMF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로 인한 구미 대중소비문화의 전면화로 인하여 외식산업이 발전했다.
군것질거리도 피자, 햄버거, 아이스크림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옷에만 복고풍이 이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에도 복고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2003년 지금의 초등학교 앞 풍경이 1970~198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자오락기라는 것이 있어 가끔 아이들이 사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앞에 몰두하는 것을 빼고는 추억의 ‘불량식품’이 그 동안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 다시 나타났다.
라면땅, 쫀드기, 아폴로 등 옛날 과자가 최신 유행을 달리고 있다. 인터넷에서 일고 있는 정통(?) ‘불량’식품의 열기도 대단하다.
불량식품이어서 더 맛있게 느껴졌던 ‘쫀드기’, ‘아폴로’, ‘달고나’ 등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급증하고 있다. 이 제품들을 먹고 있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어느 기관에서 군것질 좋아하는 순서를 조사한 적이 있다. 떡볶이, 피자, 아이스크림, 과자, 라면, 햄버거, 빵, 기타 순으로 나타났다.
군것질거리에 제아무리 흥망성쇠가 있다 하더라도 지존의 자리는 역시 떡볶이에 돌아간 것을 알 수 있다.
가격도 저렴하고 배까지 든든하니 한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어디서든지 쉽게 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맛이 최고이지 않은가?
음식문화는 그 사회를 반영한다고 한다. 지금 누룽지나 강냉이가 그리운 것은 어렵고 가난했지만 서로에 대한 정이 따뜻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