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미나리초무침, 부부가 함께 요리하기

(오징어미나리 초무침, 우리집에는 미니라와 부추만 있었음^^)
직업으로서의 일을 하지 않은지, 이제 8개월이 지났다. 은퇴라고 해야 할려나, 전업주부의 삶을 산다고 해야 할려나, 장성한 아이들을 도시로 내보내고 부부 둘이 사는 실버부부라고 해야 할려나. 사실 나의 정체성이 혼란스럽기도 한 사태에 놓여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며칠 전에는 결혼생활 이십칠년만에 부부 둘이 함께 부엌에서 음식만들기를 해보는 체험을 하고나니, 혼란스럽고 낯선 이 체험앞에서 은퇴 후에 '현재'가 더욱 생소했다. 그 생소함은 글쓰기로 기록을 해둘 필요까지 만들어냈으니.
'현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와 구분되면서 비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에서 해탈을 위한 해체론, 데리다와 오규원편-
우리 부부의 과거에는 부엌에서 함께 요리하기라는 역사는 없었다. 요리는 나의 몫이거나, 천사아줌마들의 몫이었고, 그것은 일로 간주되었다. 이와달리 최근에 부부가 오징어초무침을 해서 먹었을때는 갑자기 요리가 문화로 탈바꿈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부부의 현재가 과거와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부부 함께 요리하기를 통해서 풀어내보고 싶어졌다.
남편 원푸리는 미나리를 좋아한다며 장을 볼 때 미나리를 샀고, 오징어미나리초무침 레시피를 찾아서 내게 보여주며 함께 요리를 하자는 적극적인 제안을 해왔는데, 마치 "함께 부엌에서 놀래?" 라고 묻는 듯 했다. 요리라는 일을 내 몫으로 해야 하는 불안한 부담감과 책임감이 확 덜어지는 듯 해서, 안 해본 음식 만들기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저어기로 멀리 날아가버렸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요리하기를 무척 싫어한다'
예외적으로 요리하기를 좋아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홈스쿨링하는 우리 두 아이들을 조리사1, 조리사 2로 거느리고 나는 앞에서 진두지휘할 때였다. 자잘한 식재료 다듬기와 설거지는 조리사들이 하고 우리가 함께 요리를 했을 때였다. 우리 두 아이들에게 요리법을 설명하면서 아이들의 존경하는 눈빛을 받았을때는 즐겁기도 했다. 그리고 청소년 시기인 우리 두 아이들이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볼때 나의 요리능력에 무한한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는 주로 돈까스, 쑥전, 감자 샐러드, 오징어김치전, 김밥등등을 해 먹었다.
이제 각설하고 요기 오징어미나리초무침의 황금레시피를 공개하자면,
http://blog.naver.com/whwndud7/220698396386 (필가락님 블로그:사진을 보면 더욱 잘 이해될 듯)
가장 중요한 양념은(소스는?)
고추장 2, 고춧가루 4, 간장 1, 마늘 1, 설탕 2, 올리고당 1, 효소 1, 식초 4
밥숟가락 수북이고 아니고, 그냥 한 숟가락을 말한다.
재료는 오징어 두 마리에,
그에 걸맞는 야채들(양파, 오이, 고추, 부추, 미나리, 쪽파, 당근 등등의 집에 있는 야채들을 몽땅 집합하면 될 듯 하다,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마지막에 참기름 1, 깨를 뿌려 마무리한다.
둘이서 막걸리 750 밀리리터를 각 1병하고, 오징어미나리초무침은 부부 둘의 안주가 되었으며, 한 접시 고스란히 남아서 그 다음날 반찬으로 먹었으니 아마도 풍성한 4인분은 될 듯하다. 각 1병을 해보니 우리의 막걸리 주량을 드디어 정확하게 알게 되었는데 우리는 각자 6도인 막걸리를 500 밀리리터 정도 먹으면 딱인듯 하다. 흠, 상당히 약한 주량이라는 것을 짐작은 했지만, 약하구만^^ 물론, 컨디션에 따라서 주량은 상당한 오차가 있기는 하나 앞으로 참고해야 할 주량 기준치를 잘 알게 되었다.
남편 원푸리는 오징어를 씻고 칼집을 내서 동그랗게 말리게 하는데 오징어 겉이 아니라 속에 칼집을 보다 촘촘하게 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뭔 칼집내는 칼을 사야겠다고 벼르고 있다. 요리 도구에 대한 관심도 생기는 듯 하다. 나는 야채와 양념을 책임졌는데, 미나리 잎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미나리는 제일 나중에 무쳐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갸들이 무척 여려서 실처럼 질겨진다는 이유때문이다.
요리가 일이 아니라 놀이문화가 될 수 있다는데 부부 둘이 동의하면서 이제 종종 함께 문화적으로 놀고, 문화적으로 먹자고 합의했다. 생존을 위해, 건강을 위해 먹던 음식 만드는 일이, 문화를 위해, 놀이를 위해 함께 음식을 만드는 과정으로 업그레이드 되어가는 것을 둘이 알달딸하게(막걸리 땜시^^) 느꼈다는 거다. 둘이서 이렇게나 쉽게 공감하는 사건도 다 있다니! 함께 요리하기, 우리의 은퇴 후의 미래다. 이런 미래 참 좋다.
나는 혼자 요리하는 거는 무쟈게 싫어하고, 함께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과거를 뒤적이다가 알게 되었다. 하마터면 나는 요리하는 걸 싫어하는 줄로 오해할 뻔 했다. 휴우~ 내가 나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기록을 여기서 마친다.

요건 팁인데, 봄이라 냉이를 캤는데, 생냉이 초무침을 좋아하는 원푸리의 취향에 맞춰 그 오징어초무침 양념이라고 해야 하나, 샐러드 소스라고 해야나하나? 여하튼 그 레시피대로 오징어와 야채를 빼고 그대신 순수 냉이로만 무쳤는데, 정말 맜있었다. 냉이 뿌리가 그렇게 달고 향긋할 수가 있다니! 막걸리를 또 부르길래 요번에는 각자 450 밀리리터를 했더니, 딱 알맞은 취기가 왔다. 하도 맛있어 용기를 내서 앞집에 한 접시 갖다 줬더니, 그 레시피를 달라고 전화가 왔다. 이제 그 집도 냉이초무침해서 드신단다. 그동안은 데쳐서 무치거나, 국만 끓여드셨다면서.
세상에나, 거의 요리 생초보가 레시피를 적어서 드리다니, 나 자신의 요리실력?에 놀란 사건이었음을 기록한다.
이제 모든 야채에 이 레시피를 쓰면 될 듯하다. 푸성귀들이여, 오라, 너네들은 이제 이 소스의 옷을 입게 될지니!
첫댓글 아~~ 배고파지네요~~따끈한 현미밥 한 숟가락에 나물무침 한 젓가락 먹으면~~꿀떡~~하겠네요~^^
와 너무 맛있어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