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후 쌍봉집(雙峯集)
군수 이공 묘갈명(郡守李公墓碣銘) - 정극후(鄭克後, 1577~1658) 찬(撰)
공의 휘는 준(浚), 자는 청원(淸源),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의 아들 전인(全仁)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증직되었는데, 이분이 공의 부친이다. 회재 선생의 도덕과 그 선대의 가계는 행장과 연보 속에 상세히실려 있다.
공의 모친인 숙인(淑人) 진주 하씨(晉州河氏)는 진사(進士) 보(溥)의 딸로 가정 경자년(庚子年, 1540, 중종 35) 10월 1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예법(禮法)이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義)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으며, 성장해서는 퇴계 선생의 문하를 출입하며 회재 선생의 성대한 덕을 드러냈으니, 회재 선생이 훌륭한 손자를 두었다고 할 만하다.
공의 배위 숙부인(淑夫人) 오천 정씨(烏川鄭氏)는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이교(以橋)의 손녀로서 무인(武仁)이 부친이다. 공은 천계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원)에 세상을 떠나 향년 84세이고, 숙부인은 숭정 신미년(辛未年, 1631, 인조 9)에 세상을 떠나 향년 91세이다. 부부가 모두 장수를 누렸으니 또한 세상에 드문 일이다.
공의 벼슬살이는 다음과 같다. 당시에 전란이 일어나자 비분강개하여 붓을 내던지고 참전하였고, 무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경산 현령(慶山縣令)을 지내고 내직으로 들어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냈다. 그리고 만경 현령(萬頃縣令)을 지내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냈는데, 모두 청렴하고 신중하며 백성을 사랑한 행정이 현저하게 칭송받았다.
가문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은 것은 전수받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공의 품행은 다음과 같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부모를 섬길 때는 봉양을 극진히 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제수를 지극히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였으며, 새벽마다
가묘(家廟)에 배알했는데 비바람이 쳐도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빈객을 대접하거나 불쌍한 이웃을 구휼할 때는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 공의 품행이 이와 같았으므로 당시의 명현과 거장들이 모두 공의 사람됨을 아꼈다. 간혹 저술로 회재 선생의 이공(李公) : 이준(李浚, 1540~1623)으로,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求庵), 본관은 여강(驪江)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손자이다. 저서로는 구암유고 가 있다.
도덕을 발휘하기도 했던 것은 또한 공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다. 숙부인이 또한 현숙한 덕성을 지녀서 가정을 다스리는 데에 그 직분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물건을 장만하여 바깥일을 돕는 것에도 또한 성심을 다하였으니, 어질고 착한 품행을 쌓아서 후손들이 무궁한 보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은 굉, 차남은 용이다. 굉은 나이가 80세를 넘어서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용은 무과에 급제하고 또한 나이가 80세를 넘어서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서자 둘은 정(定)과 우(宇)이다. 굉(宏)의 아들은 홍후(弘煦), 홍희(弘熙)이다.
용(容)의 아들은 홍기(弘炁)이다. 홍기는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가각 석규(碩圭), 상규(尙圭, 익규(益圭), 환규(桓圭), 신규(信圭), 명규(命圭)이다. 홍후(弘煦)는 아들이 없어 익규를 데려다 양자로 삼았다.
정(定)의 아들은 홍훈(弘勳), 홍서(弘瑞)이다. 우(宇)의 아들은 홍도(弘燾)이다.
처음에 공과 숙부인은 경주와 영천의 산에 각각 안장되었는데 지맥이 좋지 않아서 치술령(鵄述嶺) 남쪽 갑좌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다시 터를 잡고, 을미년(乙未年, 1655, 효종 6) 10월 20일에 동시에 옮겨 합장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난 정유년(丁酉年, 1657, 효종 8)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으므로 명문을 짓는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대현을 내려 / 天降大賢
우리 동방에 은혜 베풀었네 / 惠我東方
덕 쌓은 집안 후손에 경사 있어, 160)
집터 닦는 손자 있었네. 161) / 有孫肯堂
들어오면 청전162)을 지키고, / 入守靑氊
나가면 동장163)을 찼네. / 出佩銅章
규중에 법도 있고, / 閨門有則
살림살이 자애롭고 어질었네.
오복을 다 받아 / 中饋慈良
무궁한 장수를 누렸네. 壽考無疆
이 편안한 유택에서 잠드니, / 備膺五福
아름답고 상서로운 터를 잡았네. / 共此寧宮
묘소가 또한 편안하면, / 地卜休祥
후세도 번창하리라. / 後世其昌
즐겁도다 이 언덕이여, / 樂哉斯丘
치술령의 남쪽일세. / 鵄述之陽
좌우 산맥이 빙 둘러 에워싸니, / 左右環拱
귀신이 보호하여 재앙 없으리라. / 鬼護無殃
비석에 새겨 밝게 보이니, / 刻石明示
만세토록 탈 없이 보존되리라. / 萬歲之藏
160) 덕……있어 : 앞의 각주 138) 참조.
161) 집터……있었네 : 선조의 유업(遺業)을 잇는 것을 말한다.『서경』「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모든 방법을 강구해
놓았는데 아들이 집터를 닦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집을 얽어 만들 수가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
構]”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162) 청전(靑氈) : 선조(先祖)의 유물(遺物)이라는 뜻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의 집에 좀도둑이 들었을 때, 다른 물건을 훔칠 때
는 모르는 체하고 누워 있다가, 탑상(榻牀)에 올라 손을 대려 하자, “그 청전은 우리 집안의 오래된 물건이니 그냥 놔둘 수 없겠는가?
[青氊我家故物 可特置之]”라고 말하여, 도둑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晉書』卷80「王獻之列傳」)
163) 동장(銅章) : 구리로 만든 도장으로, 지방관이 차는 인장이다. 여기서는 이준이 경산 현령(慶山縣令), 만경 현령(萬頃縣令), 청도 군
수(淸道郡守)를 지냈기 때문에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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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守李公墓碣銘[鄭克後]
公諱浚字淸源。系出驪州。文元公晦齋李先生有庶子曰全仁。贈通訓大夫禮賓寺正。是爲公之考也。先生道德與夫前代世系。詳在行狀年譜中。公之妣淑人晉州河氏。進士溥之女。以嘉靖庚子十月十三日生公。公生于禮法之家。逮聞義方之敎。長而出入退溪先生之門。以闡揚先生盛德。可謂有孫矣。公之配淑夫人烏川鄭氏。議政府舍人諱以僑之孫曰武仁其考也。公卒于天啓癸亥。享年八十四。淑夫人卒于崇禎辛未。享年九十一。一室內外。俱享遐齡。亦世所難也。公之爵。時値搶攘。慷慨投筆。以武决科。初爲慶山縣令。入爲軍器寺僉正。又爲萬頃縣令。陞通政爲淸道郡守。皆以廉謹愛民著稱。其不墜家聲者有所受也。公之行。天性至孝。事親則極其奉養。祭祀則極其豐㓗。每晨謁於家廟。風雨不廢。至於接賓客恤隣里。皆得其懽心。夫如是故一時名賢鉅公。咸愛其爲人。或有所述作以發揮先生道德者。亦公至誠之所致也。淑夫人亦有賢德。非徒內治之盡其職事。其所以供具營辦以助其外者。亦極其誠心。宜其仁善之積而食報於後者爲無竆也。有子二人。長曰宏。次曰容。宏年踰八十。授通政。容以武科亦年踰八十。授通政。有庶子二人。曰定曰宇。宏之子曰弘煦,弘煕。容之子曰弘炁。有子六人碩圭,尙圭,益圭,桓圭,信圭,命圭其名也。弘喣無子。以益圭爲後。定之子曰弘勳,弘瑞。宇之子曰弘燾。始公與淑夫人。各葬于慶州永川之山。以地道不寧。改卜于鵄述嶺之南甲坐庚向之原。以乙未十月二十日共營而同窆焉。後三年丁酉立石。因以銘焉。其銘曰。
天降大賢。惠我東方。積德餘慶。有孫肯堂。入守靑氊。出佩銅章。閨門有則。中饋慈良。備膺五福。壽考無疆。
共此寧宮。地卜休祥。亦旣安焉。後世其昌。樂哉斯丘。鵄述之陽。左右環拱。鬼護無殃。刻石明示。萬歲之藏。<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