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유격 올빼미 (1)
7월이 시작되자 내리쬐는 한여름 땡볕으로 병영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2주일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더위에 지쳤는지, 매일 뜯어도 금세 무성하게 자라던 잡초마저 시들해 보인다.
막사 내 그늘을 벗어나 조금만 걸어도, 땀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다.
유일하게 즐거운 식사 시간 마저, 갓 퍼 담은 밥과 국물을 먹는 일은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닌데, 취사장 내에서 턱밑에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쐬며 소금 땀을 줄줄 흘리는 취사병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그나마 위안이 된다.
“심 이병, 큰일 났다! 유격 훈련 차출이다.”
사수 황 일병이 옆자리에 앉으며, 어쩌면 좋으냐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 유격이요? 며칠이나 받습니까? 입대 6개월 되면 받는가 보네요!”
말로만 듣던 유격 훈련이 어떤 건지, 경험 한번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은데 하필 날씨가 너무 무더울 때라, 고생할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아니야, 심 이병을 찍어서 온 게 아니고, 우리 중대에 한 명 차출이야.”
“아, 그렇습니까? 그래도 제가 가야지요. 신참인데 당연히..”
“글쎄… 사실은 나도 아직 안 다녀왔거든. 재수 좋으면 유격 훈련 안 받고 제대하는 사람도 많이 있대!”
황 일병은 식사하느라 머리는 숙였지만, 일부러 주변 사람 들으라는 듯 두리번거리며 제법 큰 소리로 말을 한다.
“아, 어째 그럴까요? 공평하게 한 번씩 다녀오면 좋을 텐데..”
“놀러 가는 줄 아냐? 4박 5일 동안 좆 팽이 치고 오는 건데!”
출발부터 완전군장으로 가파른 산악행군이 네댓 시간 걸리고, 악질 조교 만나면 쉬는 시간도 없이 피 튀기게 PT 체조만 하다가, 하강 레펠 잘 못 타서 깊은 강물에 빠져 반송장 되어 온다고, 마치 자기가 갔다 오기라도 한 것처럼 밥풀 튀기며 겁을 준다.
“그래도 가고 싶어? 이번엔 내가 갈 테니까, 심 이병은 내년에 가라!”
“아이고, 안됩니다. 황 일병님이 가시면, 정 중사님이 저를 가만두겠습니까? 사수 유격 보내고 앉아있다고, 최 상병 시켜 저를 요절낼 겁니다.”
“하~짜슥, 의리 있는 척 헷갈리게 하네!”
결국 내가 가기로 하고 며칠 후 판초 우의까지 완전군장 챙겨서 내무반을 나섰다.
“4박 5일 휴가, 잘 다녀오겠습니다. 충성!”
대대 내 다른 중대 참가 병사들과 트럭을 타고 집결지인 사령부 연병장에 내렸다.
다른 대대에서 온 병사들도 대부분 억지로 차출되어서인지, 불만과 불안이 섞인 표정들로 투덜거리며, 도살장 끌려온 소들처럼 눈치만 살피고 뒤쪽으로 비실비실 물러나 있다.
“집합~! 대대별로 정열 해 주세요.”
출발 시간이 되자 사령부 기간병들이 나서서 인원 점검을 서두른다.
일반 병 외에 하사관과 장교들도 섞여 있어서 함부로 반말은 하지 않는다.
아침 8시인데 벌써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기 시작한다.
“나눠 주는 소금은 지금 한 알만 먹고, 행군 중에 나누어 먹습니다. 알겠습니까?”
2백여 명 중에 대답하는 병사가 열 명도 안 된다.
원기소 알약처럼 생긴 하얀 소금정 3개를 받으며 유격 훈련에 참가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복창 소리 안 들립니다. 알겠습니까?~”
“예~ 예… 예.”
인민군 부대가 따로 없다. 대답하는 우리가 들어도 한심하다.
트럭에 나눠 타고 선도 지프를 따라 어딘가로 출발한다. 맨 뒤에 적십자 표지를 단 의무부대 앰뷸런스도 따른다.
원주 시내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20분쯤 가더니 산기슭에 멈춰서 하차시킨다.
20Km 산악 행군이 시작된다.
50리 산길을 칼빈 소총 메고 무게 20kg의 완전군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정해놓은 10리는 쉬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거리이고, 100리는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다.
그것도 평탄한 도로에서 맨몸의 얘기일 테고.
2열 종대로 줄지어 낯 설은 강원도 시골길을 행군해간다.
처음에는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일말의 해방감에 젖어 얘기 소리가 이어지기도 한다.
“야~메뚜기가 많기도 하네!”
“그거는 베짱이지, 무슨 메뚜기여~”
상등병이건 일등병이건 유격 훈련 한배를 탄 기분에 소속부대도 다르겠다, 계급장 뗀 얘기들이 정겹게 들린다.
산길로 접어들자 울창한 숲길 둔덕에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고 잔뜩 피어있다.
“오매~ 들국화가 허불나게 피어 버렸구마이.”
“여그 보라색 띤 놈들은 쑥부쟁이고, 저~그 하얀 것들은 구절초라는 거여~. 이것들이 가을도 아닌데 벌써 피어 부렸네!”
들뜬 기분도 잠시, 산길이 점점 가파르다.
가뭄에 메마른 흙길의 돌자갈은 배낭 멘 군화를 미끄러지게 한다.
행군 줄 간격이 좁혀지더니 일렬종대가 되어 오르기 시작한다.
안경 낀 병사는 연신 콧등의 땀을 훔쳐, 벗겨지지 못하게 하느라 더 힘들어 보인다.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거의 기어가다시피 오르기도 한다.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다소 널찍한 내리막 길가에, 벌써 지쳐버린 병사들이 바위에 걸터앉아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마셔댄다.
“산골짝에 개울도 있을 거니까, 물 아끼지 말고 마시고 가도 되겠지?”
누군가 혼잣말처럼 지껄이자 모두 동의라도 하듯이 수통을 연다.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목젖을 타고 내리는 땀방울을 식혀준다.
체력에는 자신 있다 싶은 나도 허벅지를 툭툭 치며 미지근해진 수통 물을 반쯤 넘게 비우고, 손에 적셔 목 주위를 훔쳤다.
휴식도 잠시, 뒤따라온 기간병이 출발을 재촉한다.
“여기서 퍼지르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자, 자 빨리 일어들 나세요!”
“맨몸으로 인솔하는 자기랑 같나?”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면서도 먼저 온 병사들은 일어나고 뒤에 온 병사들은 휴식을 취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목적지도 모르는 행군은 질서도 없이 이어지고, 가파른 산등성이는 수도 없이 나타나 인내심을 시험한다.
수통 물도 떨어지고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실 침마저 말라가는데, 무슨 놈의 산골짝이 개울도 귀하고 어쩌다 있는 건 바싹 마른 도랑들뿐이다.
군복 상의 단추가 다 풀어진 지 오래고, 카빈총이 지팡이가 되어 갈 무렵, 가파른 내리막길 저 멀리에 논이 보이기 시작한다.
민가가 가까이 있는 게 틀림없다.
지쳐버린 병사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가자, 파릇한 벼가 무성하게 자란 논두렁에 병사들이 주저앉아 논의 물을 퍼마신다.
나도 별수 없이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데, 징그러운 갈색 산개구리가 뒷다리를 쭉 펼쳐 헤엄쳐 간다.
아무래도 저것이 오줌을 갈겼을 텐데..
그나마 타는 갈증을 해소하고 나니, 꼬르륵 허기진 뱃속에서 영양분을 달랜다.
논물에 소금정 두 알을 다 털어 삼키고 배낭 멘 채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높고 푸른 하늘 저 멀리 회색빛 구름 덩이가 떠 있다.
소나기라도 한줄기 쏟아지면 좋으련만!
“자~여러분, 조금만 가면 배식 차가 와있어요. 혹시 아픈 사람은 의무반에 보이고, 도저히 더 못 가겠으면 앰뷸런스로 후송합니다.”
뒤따라온 기간병이 희소식을 알려준다.
패잔병처럼 늘어져 있던 병사들이 주섬주섬 일어나서 왁자지껄 출발을 서두른다.
“앰뷸런스 타고 가도 괜찮은겨?”
“괜찮기는, 자대 가서 혼쭐나고 보충 훈련받으러 또 오겠지, 뭐!”
당연한 얘긴데도 물어보고 싶은 심정들이다.
그러고도 30분쯤 더 걸어가서야 작은 마을 공터에 배식 차량, 앰뷸런스와 먼저 도착한 병사들이 보인다.
“으메, 와 이리 맛있노? 퍼뜩 묵고 한 번 더 묵자.”
“많이 드시면, 나머지 행군 못 하고 앰뷸런스 탑니다.”
시원한 찬물에 소금 땀 씻어내고 나무 그늘에 앉아 먹는 점심이 꿀맛이 따로 없다.
군대 생활에서 제일 좋은 것이 바로 이 순간이다.
반찬도 쇠고기 볶음에 사과 한 개가 추가됐다.
식사 후에 20분쯤 달콤한 낮잠도 즐길 수 있었다.
두세 명만 후송되고, 거기서부터 대열을 정비하여 넓은 자갈밭 길을 따라, 제대로 된 행군이 계속되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유격훈련장 입구에 도착했다.
강이라 불러도 될듯한 천천히 흐르는 큰 냇물 건너편에 소나무 숲이 무성한, 병풍 같은 절벽이 보이고 수심이 깊은 강물 속에, 한 폭의 산수화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유격훈련장이라니..’
경치에 감탄하며, 기차가 다니는 철교 밑에서 수면보다 높게 강폭의 절반을 차지한 모래 둔덕 옆 둑길로 강물을 거슬러 조금 들어가자, 연병장과 막사가 보인다.
군화 소리 철벅거리며 절도 있는 걸음으로 미지의 지옥 속으로 열 맞추어 들어갔다.
불안, 초조, 공포.
높지 않은 뒷산을 배경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자리한 유격훈련대 연병장 연단 앞에 빨간색 모자와 상의 차림의 20여 명 유격 조교들이 2열 횡대로 도열해 서서 우리를 맞이한다.
(참조) : 원주의 이 유격훈련장은 철교가 나오는 영화 “박하사탕” 촬영지이며, 경치가 너무 좋아서 지금은 “간현 유원지”로 바뀌었습니다.
첫댓글 간현유원지는 내가 자알 알지요, 거기가 김충열 은사님 고향이라, 속초서 돌아올 때 꽁치 두어박스 사들고 가면, 고담준론과 매운탕과 막걸리가 있었고.
네, 김현거사님. 간현유원지에 얽힌 그런 사연이 있군요.
지금도 경관이 아름답지만 군사 시설에 묶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을 줄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