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마을과 돌담 돌담이 논에도 밭에도 과수원과 집에도 축대와 담장으로 쌓여 있다. 가옥에서는 좌청룡우백호 구실을 하므로, 야생동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며, 홍수 때 산에서 떠내려 오는 돌을 돌로써 막아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고 있다. 마을의 땅을 파면 돌이 지천이다. 50cm정도의 깊이까지 있는 돌은 죄다 골라서 담장을 쌓았지만, 그 밑으로 땅을 파면 돌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오랜 세월 팔공산에서 흙과 돌들이 떠 내려와서 쌓인 곳이라는 증거이다. 흙에 돌이 많이 섞여 있다면 풍수적으로 좋은 곳은 아니다. 흙이 기운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돌을 골라내어 옥토로 만들어왔다. 이 모든 노력이 비보풍수이다. 비보풍수裨補風水란 인간의 노력으로 좋은 땅을 만들고자하는 삶의 방법론이다.
군위군 부계면 한밤마을의 풍수
팔공산의 북쪽 사면에 자리 잡은 한밤마을은 부림홍씨의 터전이다.
한밤마을의 자리는 충적토일 가능성이 높다. 과수원 개간을 위해 땅을 파면 돌이 쏟아져 나온다. 적어도 일이천년 동안에 대홍수에 의해서 팔공산에서 돌과 흙이 떠 내려와서 쌓인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터전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이다. 1930년 경오 대홍수 때에 쑥대밭이 될 정도라고 전해지나, 지난 루사(2002)와 매미(2003) 때에도 한밤마을은 그다지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한밤마을 산수도 남쪽에 팔공산을 두고 좌우 능선(적색선)이 한밤마을을 크게 감싸고 있다. 마을에 좌청룡 우백호는 개천 건너 무정한 모습이고, 능선은 북쪽으로 두 팔 벌리고 있으니,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천(청색선)의 물길은 마을의 좌우를 지나가면서 동구 밖에서 합류한다. 팔공산에서 한밤마을까지는 6km에 불과하여 부계면은 경사가 심하여 물살이 급하고 세므로 물의 운반력과 관성력이 강하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한밤마을에서만 돌담을 볼 수 있는 지질이 형성된 이유이다. 마을이 약간 높은 곳에 형성이 되어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큰 홍수를 겪지 않는다. 1930년 경오년 대홍수 때에 쑥대밭이 된 후로 루사와 매미때에도 작은 개천은 범람해도 남천은 넘치지 않았다. (1)물의 침식작용으로 마을 동쪽에는 3-5m가 넘는 깎아지른 절벽(3)이 형성되어 있다.
한밤마을은 풍수적으로 몇 가지 결함이 있다. 첫째 마을 주산은 있으나 좌청룡∙우백호∙안산이 없다. 둘째 남쪽에 주산이 있고 북쪽이 열려 있어서 북풍한설에 취약하다. 셋째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반궁수 형태로 마을을 덮치는 형국이다.
남쪽에는 팔공산이 있는데 1000m가 넘는 높은 산이라 경사가 급하니 물살도 세다. 따라서 홍수가 나면 상당한 물리력으로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팔공산 정상에서 발원한 물이 남천南川을 이루어 한밤마을의 우측을 흐르고, 팔공산 주능선 서쪽 파계봉(991m)에서 발원한 물은 마을의 좌측을 흘러서 동구 밖에서 합류한다. 개천 바깥에 있는 능선이 개천의 물을 마을 쪽으로 모이도록 가이드 역할을 하므로 오히려 마을로 침범해 들어오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을 터전은 오랜 시간 충적으로 두툼한 언덕을 형성하고 있어서 수해를 입을 가능성은 낮지만, 팔공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막을 길이 없다. 소위 마을자체에 좌청룡우백호가 없어서 받는 설움이 읽혀진다.
남천고택과 한밤마을의 북향가옥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768번지에 부림홍씨의 대저택이 남아 있다. 이 집은 250여년전(1836) 홍귀응洪龜應이 아버지 홍우태洪宇泰(19대)를 위해 세운 집. 부림홍씨 남천고택도 한밤마을의 다른 건물처럼 팔공산을 등지고 북향으로 지어졌다. 팔공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한밤마을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이곳 사람들은 포부가 넓고 뜻한 바가 크다. 쉬 움직이지 않으나 한 번 작심한 일은 끝을 봐야 한다. 사람이 간사하지 못하여 난세에 벼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림홍씨 29대 홍석규씨는 “한밤마을 가옥이 대부분 북향으로 지어진 것은 팔공산의 드센 기를 피하기 위한 것”라고 한다. 북향은 팔공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방향이다. 예로부터 바람은 흉을 가져다주는 자연현상으로 파악했다.
쌍백당 잣나무 남천고택 사당 앞에 심어져 있는 두 그루의 잣나무. 절개를 상징한다.
비보풍수의 지혜
한밤마을의 북쪽이 열려 있다는 것은 풍수적 방위결함이다. 방위에 따라 지형지물의 형성이 알맞게 배치된 곳을 풍수적으로 좋은 형국이라고 한다. 마을의 북쪽에는 산이 버티고 있어야 함이 마땅하지만 한밤마을은 남쪽에 산이 있다. 마을입구에 솔숲정이로 수구막이를 조성하였다. 마을 북쪽에 주산이 없으면 안산案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 없다. 솔숲정이로 수구막이와 안산의 역할을 대신하는 비보풍수를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북풍한설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이쯤 되면 남향집을 짓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마을의 고택들을 보면 북향집이 많다. 이는 집을 지으매 낮은 곳을 뒤로하고 집을 지을 수는 없다는 선비정신의 발로이다. ‘정신은 산이 관장한다’는 사상적 바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세파와 고난을 정면 돌파로 이겨내야지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겠다는 부림홍씨 가문의 올곧은 정신를 나타내고 있다. 북향한옥의 구조특성상 찬바람을 껴안고 살아야 하는 고충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이유이다.
100년 횟수의 대홍수가 나면 마을의 좌우를 흐르는 개천물이 마을로 치고 올라올 수 있다. 떠내려 온 돌로써 담장을 쌓아 가옥의 좌청룡 우백호로 활용하고 있다. 이것을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할 수 있다. 계곡의 음산한 바람이라도 불면 돌담을 스치는 와중에 음기가 사라질 것이다. 돌을 활용한 비보풍수이다.
흙에 돌이 많이 섞여 있다면 풍수적으로도 좋은 곳이 아니다. 흙이 기운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흙에서 돌을 골라내어야 하고 버릴 곳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돌담이다. 돌담은 마을의 청룡백호는 없지만, 소국적인 가옥의 좌청룡우백호를 형성하려는 노력이다. 옛날에도 자연재해는 반복되었을 것임에도 수백년간 터전을 버리지 않은 것은 팔공산을 바라보며 정신적 유희를 즐길 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홍로의 묘 군위군 산성면 백학리 시현에 있는 홍로의 묘. 돌혈로써 주위의 형국이 아름답다.
그는 포은의 문인으로 이성계가 싫어서 낙향한다. 그후 포은의 피살소식을 듣고 곡기를 끊어서 1392년 조선이 건국되는 시기에 삶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27세. 맑디맑은 정신의 소유자이다.
홍귀달 부자의 거침없는 정신세계
부림홍씨의 고매한 절개를 보여준 인물이 10대 홍귀달洪貴達과 네명의 아들들이다.
홍귀달은 안동 예안 출신인 농암 이현보의 스승으로 영남학맥의 연원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조선전기 영남의 대표적인 문장가인 허백정 홍귀달(1438∼1504)은 1460년 세조 때에 문과로 급제하였다. 연산군 생모 윤비의 폐모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던 그는 대제학과 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른다. 갑자사화(1504) 때 연산군에게 직간直諫하다가 경원으로 유배 도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 하였다. 당시 그의 네 아들도 유배를 당했다.
양산서원 부림홍씨 가문에서 대대로 인재를 길러낸 교육기관이다. <휘찬려사(彙纂麗史)>(경상북도 유형문화재251호) 목판 831장을 보관하던 곳이었으나, 한국국학진흥원에 이관(2012년4월21일)하였다. 홍귀달의 다섯째 아들 홍언국洪彦國의 증손이 대사간 홍호洪鎬(1586~1646)이고, 그의 아들이 경성판관 홍여하洪汝河(1621~1678)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서 내용이 혼란스럽다고 생각하여 1639년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휘찬려사彙纂麗史>를 저술했다. 문과 급제 2년 후 효종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좌천되었으며, 서인과 대립하였다가 송시열의 공격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셋째아들 홍언충洪彦忠은 이조정랑을 지냈는데 연산군에게 상소하여 간언을 올렸다가 투옥되어 장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진안현으로 귀양을 간다. 유배 중에 중종반정의 소식을 듣는다. 그는 신원회복과 영광의 한양 길을 포기하고 자기를 죽이려던 연산군을 위해 울며 절의를 지켰다. 중종이 벼슬을 내렸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다. 동문선에 그의 시가 전한다. 패주에 대한 절개를 지킨 경우는 우리 역사상 단 한사람뿐일 것이다.
성호사설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려(高麗)가 멸망하자 야은(冶隱)이 있었고, 장릉(莊陵)이 손위(遜位)할 적에 육신(六臣)이 있었으며, 연산(燕山)이 폐위(廢位)되자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 같은 이가 있었는데, 모두 그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이다.”
맑은 물에 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했다. 정신세계에서는 맑은 물이야 말로 최고의 경지이다. 홍귀달 부자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자기가 가야할 길을 무쏘의 뿔처럼 홀로 갔다. 이런 기개와 자존감은 그 누구도 따르기 힘든 경지로 팔공산의 선경에 힘입은 바 크다.[qsoon]
삼국유사를 잉태한 인각사 일연스님이 말년에 기거하면서 삼국유사를 쓴 사찰이다. 옛 모습은 없고 인각사 보각국사탑(보물)과 부도 몇 개 그리고 석불상이 자리를 지켰으며, 근래에 극락전을 복원 건립했다. 극락전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바라보는 방향은 좌우 산 사이를 향하고 있다. 풍수적으로 두 산이 앞에 버티고 있으면 산과 산 사이를 택하여 방향으로 삼는다. 642년 의상대사가 건립했다는 인각사에도 풍수지리학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