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쓰며 삶의 소중함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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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사진은 경기도 일산에 있는 한 납골당. ⓒ미디어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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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아. 엄마 아빠야. 네가 이 글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엄마나
아빠, 혹은 둘 중 하나가 네 곁에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우리
딸이 씩씩하고 예쁘게 살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준다면 엄마 아빠는 좋겠구나. 너를 위해 준비해둔 조그마한 선물은 보험증권으로 대신할게. 엄마 아빠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 딸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기에는 부족할 지 몰라도 엄마 아빠가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란다."
'하늘나라'라는 납골묘 중계업체 유서쓰기 게시판에 올라온 한 30대
부부의 유서 중 일부다. 이들은 아직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지만, 유서를 미리 작성하면서 사후를 대비하고 있다. 회사원 김정민(38ㆍ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씨도 1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유서를 작성하고 있다.
"유서를 쓰면 지난 시간을 냉정하게 돌아보고,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달라진 상황에 맞게 유서를 수정하면 예전 유서는 일기처럼 남게 됩니다. 훗날 자식들에게 멋진 기록을 남기기 위해 더욱 알차게 시간을 사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유서
덕분에 담배도 끊고, 가족 몰래 적금도 붓고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최근 부쩍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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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이정민씨는 사망 후 신체와
재산의 일부를 기증하는 서약을 했다. ⓒ미디어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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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쓰고, 자신의 유골을 안치할 납골당을 분양 받는 등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최근 부쩍 늘었다. 유서쓰기는 기업들의 홍보 이벤트로 사용될 정도로 이미 보편화된 상태. 시민의신문은 올해 초부터
'아름다운 유서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를 통해 사후 장기 기증을 약속한 사람도 계속 늘어, 91년 3600여명에서 2001년 6만70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건축업을 하는 김영옥(57ㆍ부산시 서구) 씨는 지난 25일 간의 일부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김씨가 멀쩡한 간을 떼어낸 것은 순전히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을 하기 위해서다. 김씨가 수술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세 번째. 지난 87년 골수 이식 수술을 했고, 97년에는 신장 한 쪽을 떼어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했다. 김씨는 사후 시신기증까지 약속한 상태다.
"삶은 안개처럼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재산의 일부를 기부하는 사람도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 아름다운
재단에 매달 기부금을 내기로 약속한 사람들은 3000여 명이었지만,
올 상반기에만 지난해의 두 배가 넘는 7300여 명으로 늘었다.
지난 23일에는 병마와 싸우고 있는 사업가 이홍종(60ㆍ경기도 수원시) 씨가 100억대 부동산을 기부,불우이웃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안식처인 나눔의 집에 살고
있는 김군자(88) 씨도 지난 2000년 8월 자신의 전재산인 5000만원을
아름다운재단에 전액 기부했다. 김 씨는 "죽기 전에 남은 돈이 있다면
더 기부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회사원 이정민(25ㆍ서울시 서초구 서초동ㆍ여) 씨는 사망에 대비해
신체와 재산의 일부를 기증하는 서약을 하기도 했다. 이씨는 지난 99년 사후 장기기증 서약서를 작성했고, 지난 달에는 보험금의 1%가 기부금으로 빠져나가는 사랑의 보험에 가입했다. 이씨는 "내일 당장 내가 죽는다면 그 후 남게 되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됐다"고 말했다.
"죽음 준비는 가진 자의 여유" 지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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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전문가 모종수 씨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가진자의 여유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디어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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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유골이 안치될 납골당이나, 시신이 묻힐 묘자리를 미리 알아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납골당 청아공원 관계자는 "최근 계약자의 30%는 죽어서 자신의 유골이 안치될 장소를 분양받는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이 납골당의 1층 추모실 곳곳에는 '예약-OOO씨'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풍수전문가 모종수(용인시 선관위 사무국장ㆍ경문대 겸임교수) 씨는
"미리 납골당이나 묘자리를 정해두면 자신이 사망했을 때 자손들이
당황하지 않고 일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불안감을 해소하고 삶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말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삶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됐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곱지 않는 시선도 있다. 유서를 작성한 김정민 씨는 "유서를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가 '젊은 사람이
무슨 짓이냐'며 화를 내는 통에 혼쭐이 났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김영옥 씨도 가족들이 반기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모종수 씨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어쩌면 가진 자의 여유일 수 있다"며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편법, 탈법으로 죽음을 준비한다?
강원도 춘천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이모(62) 씨는 서울에 살고
있는 딸 부부에게 시가 1억5000만원 상당의 연립주택을 물려줄 예정이다. 그는 딸과 사위가 살고 있는 서울의 연립주택을 사위 명의로 바꾸면서 증여세를 피하기 위해 일단 허위로 매매계약을 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또 고향에 10억 원 상당의 상가 건물을
미혼인 아들 이름으로 매입할 계획도 갖고 있다.
이씨처럼 편법을 동원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재산가들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때 물어야 할 상속세를 내지
않기 위해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자식 이름으로 돈을 빌려 부동산을 사고 장기간에 걸쳐 상환하거나, 종신보험을 통해 상속세를 회피하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수법이다.
S증권사의 한 자산관리 전문가는 "상속보다 증여에 탈세, 절세 수단이 많아 죽기 전에 미리 재산을 넘기는 사람이 많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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