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생각만을 머릿속에 담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헤아려 보면 정확히 나는 10대 초반이 되던 해부터 아마 자살이란 것에 매수당해 살았다고 생각된다 한참 꿈에 부풀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억지로라도 희망에 차 있어야 할 나이에 뚱딴지처럼 자살이라는 둥지에 머물러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던 10대 초반의 소녀.... 아니다 나는 안다 세월을 거슬러 가면 적절한 이유는 있다 장남이던 오빠는 나와 나이차가 12세가 된다 띠동갑이다 나이차가 벌어진 이유는 그 사이에 몇 명의 형제들이 어린 나이에 제 명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오빠의 방엔 항상 책이 쌓여 있었다 대개는 시집이나 수필집 문학전집이 주류를 이뤘고 동화책도 많았다 그리고 철학서적들이 넘쳐났다 나머지가 대학을 위한 딱딱한 입시서적들.... 오빠는 중.고.대를 하숙을 하면서 타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방의 책들은 항상 내것이나 다름없었다 방학이 되면 오빠는 새로운 책들을 한보따리 들고 나타났다 그때마다 오빠가 반갑다기 보다는 새로운 책들을 만나는 게 여간 반갑지 않았다 방학을 기다리는 것이 늘 행복했다 그때 내가 읽었던 책들은 대개 동화책들이었지만 문학서적도 제법 있었다 춘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바다와 노인. 이방인 등......이방인은 그 뜻을 잘 몰랐지만 왠지 읽고나서는 인생이란 게 별다른 의미가 없어보이고 꽤나 힘겹고 절망적이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곤 했다 방에서 밤늦게까지 책읅 읽다가 잠이 들면 밤새 책의 내용들이 현실처럼 내 꿈속으로 들어 와 나의 영혼를 짓밟거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버렸다 그 방에서의 어린 내 삶은 그야말로 위험한 것들로 덕지덕지 채워져 가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희열은 내겐 고상한 한편의 시요 수필이요 특별한 동화이기만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도 내가 그 방에서 찾는 나른한 행복감을 대신하진 못했다 자연히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그리고 춘희다 그 두 책은 내가 읽어서는 안 되는 책들이었다 읽었다고 해도 그저 동화책 정도로만 넘겨 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나에게 책이 발하던 것은 빛이나 희망이 아니고 어둠 절망 괴로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소설들은 대개가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 책이 가르치는 대로 어린 나이에 인생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니 모든 게 힘겨웠고 무서운 외로움들이 나를 향해서만 질주 해 오는 것같아 피할 곳이라곤 자살 외엔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야말로 토굴속 같은 나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사춘기.....가 함께 병행하여 정신없이 나의 삶을 무섭게 갉아먹고 있었다 10대의 자살은 너무 무리다 나는 스무살이 되면 반드시 자살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며 20대를 맞았다 그러나 쉽게 자살을 이행하지는 못했다 내년에 ...아니야 내년도 늦지않아.... 또 내년에..... 나는 자살해서 죽기를 결심한 이상 내가 이 세상에 남겨둬야할 것들은 없을 것 같았다 모든걸 버리자 다 버리고 가야지.... 나에게 있는 것은 과연 뭘까.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아. 있었다 그래도 하나가 있다면 있었다 처녀성.... 나의 자작극은 그때부터 빛을 발하며 극도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버릴 곳을 찾기도 쉬운 게 아니었다 유명한 사찰로 갈까. 내가 옛부터 아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찾아볼까. 아니야 새로운 얼굴을 찾아내야 해.... 어디서 그런 앙큼하고 불손하고 독소가 든 생각을 만들어 냈는지...지금 헤아려도 어리석기 그지없다..... 시간이 많지 않았던 나는 초조해 졌고 나중엔 무리수를 두어야 했다
어느날 어떤 청년 하나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내가 바라고바라던 어쩌면 내 이상형에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구나 있어... 내 심장은 이미 뛸만큼 뛰고 있었고 가슴깊이 담아야하는 이상적인 심정들이 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내 삶에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며 잠을 못이루고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그에게 익명의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보냈는지 왜 보냈는지 어째서 그런 편지를 받아야하는지 그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연들을 날마다 써서 그의 앞으로 보냈던 것이다 누군가 써놓은 시나 수필 소설의 세련되고 멋진 한 구절들을 정성스레 옮겨 써넣은 나의 편지글들은 익명의 편지를 더욱 빛나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편지는 날마다 그에게로 보내졌고 나는 날마다 편지를 쓰는 즐거움으로 내 삶은 그동안 맛볼 수없었던 만족이라는 열차속에서 정신없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달 후에 나는 그와 드디어 마주앉게 되었다 그는 뜻밖에 의문의 편지의 주인이 나라는걸 알고 참으로 놀라워했다 데이트도 몇번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졸업과 함께 저ㅡ남쪽으로 직장이 결정되어 헤어지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리고 몇번의 만남이 있은 후에야 나는 내가 저지르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그를 미련없이 보내버리고 말았다 지금에서야 알겠지만 그게 바로 스토커라는 못된 병이란 걸 알게되었다 그에게 진심으로 나는 용서를 바란다 진심으로 용서를......
끝내 자살도 하지못하고 세월만 보낸 채 얼마 후 나는 결혼이라는 낯선 장소에 버려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자살이라는 것에 환호하고 거기에 함몰되어 살아야했던 이유는 결혼과 함께 절실하게 밝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그 힘겹고 눈물겹던 20년의 결혼생활. ... 그런데 그런데 그 생활에선 왜 자살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지 그게 참 의문으로 다가온다 그 어느 때보다 자살이란 단어를 옆에 끼고 살았을 나날이였던 그 때에.... 참으로 아이러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