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4:7~10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 25.1.12 주일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입니다. 올 한 해는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을 ‘절대존엄’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서도 실내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는데 유일하게 예외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수업하는 교실에서도 담배를 피우면서 참관하는데 선생들이 말리기는커녕 재떨이 들고 따라다닙니다. 보트를 타면 누구나 구명조끼를 입어야 하는데도 안 입고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끼가 맞는 게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안 입고 탑니다. 이것이 절대존엄, 독재국가의 최고 권력자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여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만일 예외가 있다면 그 예외조항조차도 법이 정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행정부는 말할 것도 없이 법을 지켜야 하고 법을 재정하는 입법부나 법에 따른 판결을 하는 사법부도 당연히 법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법치국가입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더 높은 윤리와 도덕이 적용되고 마땅히 책임과 의무를 솔선수범해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즈’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선진국의 모습이고 민주국가, 법치국가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판에는 이 상식이 안 통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야가 똑같다는 게 더 문제입니다. 참으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통탄스럽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지금 상식이 잘 통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베트남입니다. 베트남이 지난주 동남아컵 축구대회에서 결승에서 태국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들은 베트남 축구에 상식이 통했다고 열광합니다. 베트남 축구감독이 박항서를 이어서 김상식 감독이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전북현대 프로감독을 하다가 성적이 안 좋아서 경질 당했는데, 즉 우리나라에서는 상식이 안 통했는데 베트남에서는 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와 비교해서 그보다 상대적으로 선하거나 거룩하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선, 절대 의를 가진 분입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흠이 없으시고 부족함도 없는,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다른 신들보다 좀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좀 나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유일하신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완전하시고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지만 법을 파괴하거나 초월하여 자기에게는 도무지 법을 적용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먼저 법을 준행하고 약속한 대로 이루시며 지키시는 분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가장 잘 이행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야말로 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정직하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신 심판자요 재판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또한 얼마나 인격적인 분이신지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이 절대자로만 존재하신다면 그분을 가까이 하고 그분과 사귐을 가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분 앞에 한없이 연약한 인간이 어찌 감히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엄격한 재판장이지만 또한 한없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알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하고 싶어 하십니다. 즉 하나님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를 가까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얼굴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먼저 해결해주셨습니다.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죽음의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사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일1:4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레10:3에 보시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하는데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라고 하십니다. 시145:18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시25:14에서는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이 나오기를 기다리시고 그래서 친밀한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고 가까이 다가오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잠8:17). 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라고 했습니다(삼상2:30).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오라고 청하시는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죄인 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먼저 초청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왕이, 대통령이 초청하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초청장을 돌렸는데도 자리가 많이 비어있자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라고 했습니다(마22:9).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왕이 백성에게 다가와 함께 앉으시겠다는 것처럼 하나님이 죄인을 초청하고 내려와서 함께 앉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변론하다’란 히브리어로 ‘웨니우와케하’인데 ‘와서 시시비비를 따져보자’라는 말입니다. ‘대면하여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희의 허물과 죄를 다 찾아내어 따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의 과거를 다 추적해서 밝히겠다, 뒤통수치겠다는 것이 아니고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할 것이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다면 용서해주고 더렵혀졌다면 씻어주고 허물이 있다면 덮어주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채워주고 연약한 것이 있다면 강하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변론자로 나서서 우리와 대면하여 토론하겠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인격을 알게 합니다. 우리를 변론에 초대하심만으로도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인격적인 분입니다. 얼마나 좋은 분이십니까? 절대자로서 우리에게 절대 선, 절대 의를 제시하지 않고 스스로 낮아져서 죄인을 찾아와 만나주시고 원탁에 둘러앉아 토론하자고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하나님과 제대로 토론하면 이길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욥기 38장, 39장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답해보라며 질문하는 내용입니다. 단순히 수학적, 상식적인 질문이 아니라 세상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때 욥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욥40:1에서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욥은 다만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 트집 잡았다가는, 괜히 하나님 탓으로 돌렸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 것입니다. 한 번 말했다가 다시는 말을 못할 지경입니다. 욥만 그러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색하고 질문하면 답할 수 있는 지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변론하자는 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따져 캐묻듯 하지 않고 함께 앉아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 자비하심입니다. 곧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세상은 노사 간에, 정부 부처 간에 대화하자고 해도 왜 소통이 안 되고 공조가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계급장을 안 떼고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고 대화하니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말하자면 계급장 떼고 나오신 것입니다. 권위를 다 내려놓고 그야말로 함께 둘러앉으신 것입니다. 도리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우리 위해 십자가의 희생도 감당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이처럼 내려놓고 대화하자니 진정한 소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이렇게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우리도 마음을 열고 더 가까이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영혼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하면 마릅니다. 영혼이 메마르고 죽어갑니다. 결국은 심판에 이르게 되고 멸망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셔야 가능하고 우리가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겠다고, 가까이 하는 자에게 더 다가오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우리도 이 사실을 믿고 나아가면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입술로만,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고 행함이 있고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술로만 섬기고 따르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경배에 대하여 이사야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너희가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로 변명만 늘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처럼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날마다 죽노라 하는 마음과 결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고백합니다. 시편 73:28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입니다. 올해는 정말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복된 해가 되길 축복합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말씀을 늘 묵상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찾아서 섬기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