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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세스바예스의 기적
- 롤랑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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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밝고 달이 환하게 비춘다.
샤를은 누워 있다.
그러나 롤랑과 올리비에, 십이 기사,
그리고 프랑스 군사들 생각으로 괴로워 한다.
그들을 롱보스에 피투성이로 죽은 채 남겨 놓았다.
눈물과 탄식을 금할 길 없어
하느님께 그들 영혼의 보호자가 되어주시기를 기도한다.
고통이 너무 크기에 왕은 피로를 느끼며 잠이 든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초원 곳곳에서 프랑스인들이 잠들어 있다.
서 있을 힘도 없는 말도 한 마리 없다.
배가 고프면 앉아서 풀을 뜯는다.
고통을 제대로 겪어보아야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법이다.
- 3장 〈샤를마뉴의 회군〉 중에서 -
가을이 온 모양이다.
추석이 앞서니 바람결이 많이 달라졌다.
지난 여름은 무더위 속에서 책을 읽었다.
《롤랑의 노래》는 장편 서사시다. 국내 최초로 중세 프랑스어 원전 완역본이란다.
이젠 한국인들도 많이 아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출발하는 론세스바예스라는 마을의 전설 이야기다.
중세초에 유럽은 기사들의 활동을 노래하는 무훈시(武勳詩, Chansons de geste)가 유행했다. 주로 그들의 무용담과 사랑을 담은 이야기였다.
이는 유럽 문학의 바탕이 되었기로 각지를 유랑하던 음유시인들에 의해 구전되었다.
무훈시는 기사 문학의 요체로서 걷기의 역사와 깊이 관련되기도 했다.
음유시인은 봉건 영주의 궁정을 찾아다니며 자작 시를 낭송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락을 제공하고 다녔기로 일종의 배우이면서 음악가요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의 음유시인들은 노래로서 인생의 애환을 영탄한다.
우리는 작고한 이동원 가수나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밥 딜런(Bob Dylan) 등이 이에 속할테다.
당시에 유행했던 대표작으로는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말고도 영국도 〈아서왕 이야기〉 독일도 〈니벨룽겐의 노래〉 등이 있다. 스페인도 예외가 아니라서 - 다소 시차가 있지만 - 허풍쟁이 유랑 기사 《돈 키호테》가 이런 장르에 속할 터이다. 단지 그건 장편소설이지만......
특히 롤랑의 노래는 오늘날 세계인에게 사랑 받는 프랑스 문학의 바탕이 되었단다.
심지어 '프랑스어가 생기고 나서 《롤랑의 노래》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 롤랑의 노래가 프랑스어를 만들었다'는 세평까지 있다.
아무러나 서양 중세란 귀족들과 기사계급의 시대였다.
기사도란 9~13세기 중세 유럽에서 500년 동안 지속된 봉건 사회의 산물이다. 명예와 신앙이라는 2대 윤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기사 서임식(敍任式)에서 실천 덕목을 선서했다. 무용(武勇) ·성실(誠實) ·명예 ·예의 ·경건(敬虔) ·겸양(謙讓) ·약자보호 등이다.
오늘날 회자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신사도의 원천이기도 하다.
롤랑은 프랑크 왕국의 황제 샤를마뉴의 조카이자 용맹하고 뛰어난 기사였다.
그가 스페인을 지배하던 이슬람(사라센)을 토벌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줄거리다.
오늘은 독후감에 덧붙여 당시의 시대 배경과 몇몇 사사로운 이야기도 좀 풀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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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륙횡단 길에서 프랑스를 지날 때 경험이다 .
르퓌를 통과한 첫날 생 프리바트 디알리에(Saint-Privat-d'Allier)의 지트에서다.
2년 전 첫 '르퓌길'에서 젊은 부부가 하도 바지런하고 재미나서 재차 들려본 숙소였다.
체크인을 하고 났더니 주인이 2~3€를 더 내겠냔다.
그날 투숙객은 8~9명으로, 저녁을 먹고 나면 이야기꾼이 올거라며 참석자는 미리 회비를 받는다는 거란다.
스토리텔링 기회가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거절을 했다.
프랑스어의 해득도 문제고 내일을 위해서 일찍 쉬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먼동이 틀 때까지 이야기에 빠져 있었단다. 아마 무훈시와 유사한 이야기가 오갔을 테다.
환갑 때 땅끝에서 휴전선까지 국토종단을 해본 경험으로, 길바닥에서 유럽인들의 스토리텔링 문화가 마냥 부러웠다.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생쟝에서 출발한다면,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자마자 만나는 스페인의 첫 마을 아닌가. 유럽에서 가장 유명했던 서사시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와 샤를마뉴 대제 이야기는 바로 거기서 있었던 일이다. 스페인의 프랑스길을 걸어본 나그네라면 대체로 아시는 이야기리라.
순례자들 중에는 부부, 자녀, 또는 친구와 동행하는 경우가 흔하다.
앞으로 800 여Km의 대장정을 동고동락해야 하므로 순례길의 면면을 미리 살펴보는 정보도 필요할테다. 물론 열심으로 걷기 만하는 분들께는 번거로운 일일테지만,
둘째 날 론세스바예스를 출발해서 주비리(21,9Km, Zubiri)를 지나 팜플로나Pamplona)로 가는 40 여Km의 생소한 여정에서 심심풀이로 삼았으면 좋겠다.
길은 언제나 사람들의 생활상과 시대성을 투영한다. 하므로 이를 알고 다닌다면 즐거움은 배가 될테다.
하지만 어찌 그것뿐일까?
고수 나그네라면 자갈길에서도 언제쯤 몇사람이 지나갔구나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길섭에 응축된 인문학까지 파고들면 보람이 더 각별하지 않겠는가.
롤랑은 프랑크 왕국의 황제 샤를마뉴의 조카이자 12명의 성기사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뛰어난 기사였다.
778년 8월 15일 샤를마뉴와 그의 군대는 이슬람교도에게 사라고사(Zaragoza)를 탈환하려는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가고 있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던 중에 후방을 맡았던 롤랑의 부대가 롱스포에서 사라고사의 왕 마르실리오로부터 기습을 받게 되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의 군대에는 악명 높은 배신자인 가늘롱이 있었는데, 그는 롤랑의 의붓아버지로 롤랑이 기사로 성공하여 샤를마뉴의 오른팔이 된 것을 질투했다고 한다.
롤랑의 군대는 불시에 습격을 받아 절박한 위험에 빠졌음에도 책임감과 자존심이 강한 롤랑은 부하 올리비에(Oliveros)의 청도 받아들이지 않고 왕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전설의 뿔 나팔 올리판테(Olifante)도 불지 않았다. 샤를마뉴는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이 아끼는 보검(두란다르트, Durandart)까지 하사하였는데, 이 검은 요정들이 만든 검으로 산을 쪼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
결국 자신의 주위에 60여명의 부하들만이 남게 되자 부득이 올리판테로 도움을 청했다. 이때 샤를마뉴는 가늘롱과 함께 체스를 두고 있었는데, 한편 올리판테 소리를 들은 가늘롱은 - 사라고사의 왕 마르실리오와 결탁하여 롤랑을 처치하려는 -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게 된다.
롤랑은 죽는 순간에 성 베드로의 치아가 포함된 자신의 칼 두란다르트를 깨트려 버리기 위해서 커다란 바위를 내리쳤지만 바위만 갈라지고 칼은 멀쩡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롤랑과 프랑크족의 열두 명의 성기사, 용감한 부하 올리비에, 튀르팽(Turpín) 주교까지 전멸을 당했다. 뒤늦게 전투에 참패한 비보를 알게 된 샤를마뉴는 후방 부대가 잠복했던 계곡까지 돌아가 끔찍한 대학살을 보고서, 죽은 병사들을 위한 카톨릭식 무덤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기에 모두 옷을 벗겨서 함께 매장했다. 하지만 적군과 아군을 섞어서 매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샤를마뉴는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금 후에 병사들이 달려와서 고하기로 입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시체들이 있다고 전했다.
이에 샤를마뉴는 이들을 분리해서 그리스도교 무덤으로 매장했단다.
이것이 바로 로시스 바예(Rosis Valle, '장미의 계곡') 즉, 론세스바예스라는 지명의 기원이다.
☞ 덧붙이면, 위에서 밑줄 처리된 롱스포는 바로 지금의 론세스바예스로 추정된다.
나중에 샤를마뉴 대제는 결국 적을 쫓아가 전멸시키고 사라고사까지도 정복했으며 가늘롱과 공모했던 왕인 마르실리오도 죽였다. 프랑스에 숨어있던 가늘롱은 신의 심판을 받고 네 토막으로 잘려 처형 당했다고 한다.
샤를마뉴는 롤랑과 그의 부하 올리비에 그리고 튀르팽 주교의 유해를 프랑스로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또한 샤를마뉴는 당시 이슬람교도들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기에 시사 골짜기로 후퇴해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그 자리엔 아직도 그의 눈물로 젖은 바위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때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 대제를 위로하며, 젊은 여자들을 불러 모으라고 가르쳐주었다. 이에 샤를마뉴는 53,066명의 아가씨들을 불러 모은 후 그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기사들처럼 무장시켰다.
이슬람군은 이들을 샤를마뉴의 대군이라 착각하여 두려움에 떨며 항복하고 세례까지 받았다.
그 후 젊은 여자들은 발까를로스로 돌아와서 창을 바닥에 꽂아놓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기적이 일어나 땅에 꽂아놓은 창들이 꽃이 핀 나무로 변해 있었다. 그때부터 이곳을 ‘창의 숲’ (Bosque de Las Lanzas)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피레네의 뢰페데르(Lepoeder 1,430m) 고개를 꼴딱 넘어가면 오른쪽 언덕 아래는 급경사 비탈에 숲이 빽빽하다.
롤랑의 발자국이라도 있을 법한 숲속을 미끄러지며 내려가다 보면, 아마 경험자들은 하늘을 향해 촘촘히 뻗은 나무들이 마치 창대같구나 느끼실테다.
역시 론세스바예스는 샤를마뉴 대제와 관련하여 기적 같은 전설이 허다하다.
독후감에 보태서, 마침 「한국순례자협회」의 대표 변정식님(어거스틴)의 재미난 기사가 있어서 참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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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롤랑의 노래'는 중세의 프랑크 왕국과 샤를마뉴 대제가 배경이다.
유럽에서 기독교의 순례길 네트워크는 스페인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펼쳐져 중세란 세월과 관련이 깊다.
사설이 지루해도 서양 중세와 관련된 일부 순례길도 한 번 살펴보련다.
(기사 중에 특히 순례길 소개는 복잡한 정보가 나열되므로 완독에는 각별한 집중력이 필요하실 터입니다.)
세계사는 기원 후 5세기에 서로마제국의 멸망(476년)으로 고대가 끝나고 중세로 진입했다.
이어서 14세기에 1,453년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풀(이스탄불)이 이슬람에 정복되기까지 중세는 대략 1,000년을 지속했다.
우선, 그보다 수백년 앞선 역사부터 소환하고서 중세를 논해야겠다.
기원 직전에 스페인을 통치하던 로마의 카이사르가 서유럽을 정복하는 《갈리아 전쟁기》를 보면 유럽은 수백 유파의 게르만족이 할거했다.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 땅이고 당시에 중서부 유럽 일대는 켈트족이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갈리아 전쟁이란 로마가 프랑스를 병탄한 이후에도 동진을 계속하여 라인강을 넘어 지금의 독일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기원 전후 고대의 로마제국은 결과적으로 켈트족이 지배하던 유럽 본토를 게르만족으로 대치시킨 역할을 한 셈이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에 유럽은 얼마 동안 다양한 게르만 일파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들의 이동은 남진보다 서진이 더 강력했다.
발트해 연안(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의 북게르만도 내려왔지만 헝가리를 중심으로 한 판노니아 평원의 동게르만도 서쪽으로 밀려왔다.
이동의 직접 동기는 - 높아지는 인구밀도와 불리한 기후 등 - 생업보다 강력한 흉노족의 내습 때문이었다.
우리의 역사에도 등장하는 흉노들은 한나라의 7대왕 무제의 토벌 정책으로 쫓겨나 중앙아시의 초원을 떠나야 했다.
그들은 동유럽에서 게르만족과 처음으로 부딪쳤다. 당시에 아틸라 형제가 이끌던 흉노가 얼마나 강퍅했던지 게르만들은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서 서쪽으로 쫓겨나야 했다.
그들이 프랑크족, 동고트.서고트족, 반달족 등이다.
반달족은 남유럽을 지나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자리잡고 나중에 무어인이 되어, 이슬람의 발흥에 따라 스페인을 침략하는 선봉에 섰다. 그리고 서고트족은 남유럽을 지나 이베리아 반도까지 들어가 스페인 왕국을 세웠다.
특히 헝가리Hungary)는 훈스(Huns) 즉, 훈족의 땅이란 의미다. 선주민 마자르족 역시도 핀란드와 동일한 흉노의 일파이다.
당시에 흉노가 지나간 일대는 '개도 짓지 않는다' 또는 흉노가 온다 하면 '밤새 울던 어린애도 울음을 뚝 그친다'는 공포심에 휩싸일 정도로, 그들은 지금까지도 서양인들에게 깊은 투라우마를 심어 놓았다.
한편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게르만을 평하기로 단지 체격이 우람해서 전투나 잘 치루는 야만인이라 무시했다.
암튼 중세 초기는 이방인 게르만들에 의해서 유럽 본토가 재편되는 과정이었다.
이상은 필자의 〈대륙횡단기〉에서 동유럽과 오스트리아를 지날 때 이미 간간히 소개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5~6세기에 유럽은 서로마라는 기둥이 넘어지자 여러 게르만 국가들이 탄생과 멸망을 반복했다.
초기에 그들은 숫자도 적었고 문화적으로도 선진 로마인들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리아 북쪽에 자리잡은 프랑크인들은 달랐다.
프랑크족은 서(西)게르만에 속하는 일파로 단일 부족명이 아니라 살리족 ·리부아리족 ·카티족 등 라인강 중 ·하류의 동안(東岸)에 거주하는 여러 소부족의 부족집단에 관한 호칭이다. 여러 부족장이 흩어져 할거하던 중에 살리족이 지도적 지위에 있었기로, 481년 클로비스라는 부족장이 하나로 통일 왕국을 개창했다.
그것이 프랑크족의 메로빙거(메로비우스) 왕조이다.
지금의 프랑스란 국명의 뿌리도 물론 이에서 비롯 되었다.
프랑크인들은 클로비스 1세를 지도자로 발 빠르게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인들과 부지런히 교류하면서 곳곳에 흩어진 로마 귀족들의 도움을 받은 결과였다. 이어서 프랑크 왕국은 날로 세력을 넓혀가니 북서 유럽 일대까지 차지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이와같이 게르만들은 이동 후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역사에서 지금까지 뚜렸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게르만이라면, 프랑크족의 왕국(프랑스)을 포함해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란드(영국)와 서고트족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르투갈) 정도이다.
현재의 프랑스도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이 군소 왕국을 이루고 있다가 백년전쟁 이후에 통합된 결과이다.
독일의 경우도 라인강의 중류 지역에서 부르군드족 등 여러 부족들이 할거하면서 서로마와 동맹 관계를 유지했으나 결국 훈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독일에서는 이런 과정이 전설화 되어 무훈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테마가 되었다.
한편, 메로빙거 왕조는 6세기 후반부터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니 실권은 왕실을 관리하던 궁재(지금의 총리 또는 재상)의 수중으로 넘어 갔다. 8세기에 이르니 궁재였던 카를루스 마르텔은 이슬람이 자주 피레네 산맥을 넘어와 침략을 거듭하므로 국왕을 대신해 직접 전투에 나서므로 궁재의 세력은 커져 만갔다.
마르텔 궁재는 외적의 침입에 번번이 맞서면서 특히 기병 부대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바로 중세 유럽에서 - 기병을 앞세우고 - 기사계급이 뿌리내린 배경이다.
751년 궁재는 백성들의 호감을 배경으로 이름뿐인 국왕을 배제하고 선대로부터 시작된 메로빙거 왕조를 마감하고서 카롤루스 왕조를 개창했다. 마르텔의 사후에 이어서 아들 피핀 역시도 궁재가 되어 아버지 못지 않은 활약을 이어갔다
그럴 즈음에 로마 교회는 마침 보호자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이탈리아 북쪽에서 끊임없이 세력을 넓히던 랑고바르드 왕국의 위협과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의 황제까지도 우호보다 오히려 로마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이다.
문득 로마 교황이 피핀에게 구원을 청해 왔다.
바로 그때, 피핀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강력한 기병 부대로 난국을 타개하고 이탈리아의 중 북부를 로마 교황에게 헌정했다. 하므로 그 일대는 - 프랑크 왕국의 후원에 힘입어 - 오랜 후세에도 로마 교황의 영역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 교황령 또는 바티칸 시국이 계속 지탱해 온 연유다.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748~814)는 유럽의 아버지 또는 구원자로 불린다.
그는 부왕의 단신에 비해서 190Cm 장신에 인물도 출중해서 지금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문맹이었다. 중세 중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징기스칸 역시도 문맹이었단다.
아무러나 샤를마뉴 대제는 프랑크 왕국의 전성 시대를 열었다.
내치는 중앙집권 정부를 강화시키면서 전쟁 말고도 학문을 중시해 교육을 진흥 시키고, 수도원 학교도 건립하고, 왕국의 왕립학교(사실상 지금의 대학)도 설립해 유럽 각지의 학자들을 교사로 초빙했다.
그러므로 샤를마뉴 대제의 시대는 인문학도 크게 발전하였기에 흔히들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라 부른다.
외치는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히면서 기독교를 열성적으로 전파시켰다. 상술한 바와같이 바티칸의 교황(레오3세)이 외적의 괴롭힘을 당하던 난국을 해소시켜 준 대가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사실상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재현된 셈이었다.
샤를마뉴(스페인어 카롤로스 ) 대제 사후에 프랑크 왕국은 세 아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혼란을 겪다가, 결국 게르만의 상속 전통에 따라 왕국은 3분되었다.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 왕국들이다.
그것이 오늘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토의 기반이다.
3형제가 분쟁을 계속하는 동안에 물론 베르됭 조약과 메르센 조약이 등이 배경이 되었다.
결국 중세 초기에 클로비스1세가 창건한 프랑크 왕국은 지금의 서양 즉, 유럽의 모태가 된 셈이다.
어쨋거나 서양 중세는 교권과 왕권이 치열하게 샅바 싸움을 되풀이했다. 교황은 대관식으로 황제를 서임(서敍任)한다며 교권을 과시하고 황제는 전쟁으로 교황을 보호해 왕권의 존재감을 내세웠다. 반복 되는 일련의 갈등은 마치 싸움닭처럼 서로를 부풀려 갔다. 그런 연유로 오늘 날 유럽 관광객들은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솟은 교회의 첨탑과 언덕 위에 아름다운 고성(古城)을 구경할 수 있게 된 거다.
서양 중세란 이처럼 신앙을 위해서는 화려한 교회와 수도원이, 영주(국왕)를 위해서는 기사계급과 봉건주의가 뒷배가 된 세월이었다.
이베리아 반도는 원래 이베로족이 살고 있었다.
BC 11세기쯤 거기에 페니키아의 식민지 카르타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
그들은 현재의 스페인을 히스파니아라 불렀다. 페니카아 말로 '토끼가 많은 땅'이란 의미다.
스페인 카탈루니아의 바르셀로나(Barcelona)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스페인이 그들의 식민지였다는 증거다. 당시는 그의 조부가 총독이었고, 아버지의 이름도 하밀카르 바르카(Hmilcar Barca)였다.
그리고 BC 7세기 이후는 스페인 땅에 차례로 그리스, 로마 사람들도 들어왔다. 스페인은 물산도 풍부했고 반도라는 자연지리적인 위치가 힘이 센 이민족들에게 흡인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란 기원 전후 2~300년 동안 스페인을 통치한 로마인들이 고착시킨 지명이다. 현재의 스페인어가 라틴어에 뿌리를 두게된 연유도 물론 로마인들의 영향이다.
로마인들이 과연 스페인을 지배했구나, 재미난 보기가 있다.
프랑스길 경험자 분들은 혹시 보셨나요?
까미노 도중에 포도밭으로 유명한 리오하의 로그로뇨( Logroño) 초입에, 에브로강의 다리 앞에는 하얀 입간판이 덩실 서 있다. 그 구조물에는 로마 제국 카이사르 장군의 유명한 레토릭이 선명하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물론 이는 카이사르가 동방에 식민지의 반란을 전광석화처럼 진압하고서 로마 원로원에 급전한 승전보다.
로그로뇨를 지나가는 에브로 강은 - 프랑스길과 북쪽길의 사이에서 나란히 달리는 - 칸타브리아 산맥에서 흘러내리고 당시는 유수한 내륙 수로였다 그러니 칸타브리아쪽으로 상류 지역엔 로마의 군단도 여럿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그로뇨에 당도하시면 부디 와인 한 잔의 낭만에 빠져 보시기를~~
4세기 초부터 스페인은 남유럽에서 흘러온 서고트족이 왕국을 이루어 살던 중에, 8세기는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에게 정복을 당했다.
이슬람(무슬림)들은 무어인(Moors)을 앞세워 침략해 남쪽 안달루시아부터 점점 북상해 왔다.
스페인풍이 유럽 본토와 차별화되는 이유는 물론 그런 세월에 이슬람화가 깊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럴 즈음에 스페인에서는 크리스쳔들이 앞장서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이란 독립 투쟁을 전개했다.
레콩키스타는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까지 무려 800 여년이나 계속되었다. 그건 스페인 혼자 만의 독립운동이 아니었고 기독교 유럽도 합세한 투쟁으로 상승했다.
10세기 초에 시작되어 250년 동안이나 계속된 십자군 전쟁도 시작의 단초는 스페인이었다.
"십자군은 하나님의 영광"이란 기치로 스페인이 불을 지른 전쟁이었다.
전쟁이란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화 교류가 뒤따른다. 당시는 선진 문명이었던 아랍 세계와 후진의 유럽이 서로 간에 교류가 활발해졌다. 오랜 전쟁의 여파는 유럽 세계를 급진적으로 또는 서서히 변화시켜 나갔다.
흔히들 유럽의 중세를 신앙적인 측면에서 '암흑시대'라 칭한다. 유럽사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인간의 본연을 찾아 중세를 마감하는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자연히 크리스쳔들의 순례길도 꿈틀대기 시작하였다.
중세 이후 명맥을 유지하던 순례길 중에서 특히 '산티아고 가는 길'의 글로벌화도 1970년대 파울로 코엘류의 소설 《순례자》와 《연금술사》의 세계적인 대중화가 더욱 방향제 역할을 했다.
롤랑의 노래 무대인 스페인의 동북부 피레네 산맥의 주변은 수많은 순례길이 널려 있다.
피에몬테길, 아를길, 프랑스길, 북쪽길, 아라곤길, 바스크길, 내부 바스크길, 바짠길, 에브로길, 까탈란길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들 중에서 위에 서사시에 등장하는 사라고사(Zaragoza)는 아라곤길의 요충지다.
당시에 이슬람들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아를길에 이어지는, 사라고사에서 피레네를 넘어 프랑스의 나르본(Narbonne)까지도 수시로 넘너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아를길'이란 남프로방스의 아를(Arles)에서 출발해서 지중해 연안을 잠시 따라가다가 프랑스의 남부 내륙으로 들어가 피레네를 넘고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상당히 먼 길이라 스페인 방향으로 각 도시 간의 거리를 소개하면, 아를→나르본(160Km, Narbonne)→카르카손(60Km, Carrcassonne)→쏭뽀흐(320Km, Somport)에서 피레네를 만난다. 길은 계속되어 쏭뽀흐(Somport)와→하카(100Km, jaca) 사이에서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 땅으로 들어가면 아라곤길이 되고, 계속해서 122Km 를 더 진행하면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프랑스길과 합류한다. 하므로 이 루트는 프랑스의 아를에서 출발해서 스페인에서 프랑스길을 만날 때까지는 총 760Km에 이르는 셈이다.
필자는 참으로 아름답다는 이 구간과 함께 앞서 피에몬테길까지, 몸이 허락한다면 꼭 한 번 걸어보고 싶다.
암튼 이들 중에서 원조 아라곤길이란 쏭뽀흐→하카(100Km)→사라고사(135Km) 도합 200 여Km를 말한다.
덧붙이면, 사라고사는 아라곤 지방에서 사라고사주의 주도(州都)이다.
중세는 아라곤 왕국의 수도였고 스페인의 북동부를 관통하는 에브로강의 중류에 위치해 있다.
카스티야 왕국과 함께 오늘날 스페인 왕국의 기초를 만든 옛 아라곤 왕국의 수도였다. 아울러 옛날은 세비야, 톨레도와 함께 서고트 왕국 문화의 중심지였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빌바오, 툴루즈(프랑스) 등 주변의 각 주요 도시와는 약 300 여km 거리에 있기에, 지금도 교통의 요지 기능은 여전하다. 그러기에 당시에 아라곤의 사라고사는 스페인의 무슬림들이 서유럽 병탄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 왔던 거다.
지루한 기사가 또 옆길로 나가지만,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과 사라고사의 존재감은 영국의 역사와도 관련된다.
영국의 헨리 8세 왕은 첫왕비와 이혼하고 왕비의 시녀였던 앤 볼린과 재혼 문제로 바티칸의 교황청과 결별해 영국국교회(성공회)라는 새로운 종교를 설립했다.
재혼의 명분은 형(아서 왕자)이 캐서린과 결혼한 지 몇 달 후에 병사하여 신방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기에 결혼이 무효임을 주장했다. 헨리 8세는 무려 여섯 왕비와 재혼을 거듭했으나 첫째 왕비인 캐서린은 바로 아라곤 왕국의 공주였다.
본처 캐서린의 딸은 후일 메리 1세 여왕이 되었고 첫째 계비 앤 볼린의 딸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되었다.
하므로 두 여왕은 서로 이복의 언니 동생인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이다.
여왕은 당시에 영국이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 없던 16세기 초반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를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아울러 여왕은 재임 중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Armada)를 격파하므로써 스페인이 세계사에서 물락해 가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으로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영국의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여왕은 언제나 “짐(朕)은 국가와 결혼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공공연하게 말해 신민들을 기쁘게 했다.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 기구하게도 친모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처형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이라 알려져 있다.
☞ 이상의 영국 이야기는「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재구성했음.
스페인의 '프랑스길'은 자존심이 센 프랑스인들이 자기네 나라를 지난다고 자랑삼아 지은 이름이다.
그 이전에, 프랑스를 통과하는 '산티아고 가는 길'은 네 갈래다
모두가 생쟝의 30Km 이전 생팔레(St. Palais)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생쟝으로 향하고, 계속해서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에서는 '프랑스길'로 불린다. 다만 남쪽에 '아를길'의 루트는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가장 북쪽을 지나는 길은 '파리길'이다. 파리에서 남서쪽 생쟝까지는 780Km.
하지만 원래 남서 방향보다 북유럽 일대(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등)로 이어지는 길이 더 관심사이긴 하다. 2014년 필자는 유럽 남북종단 길에서 덴마크를 지날 때,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 포인트라는 올후스(Arhaus)에서 산티아고 2,600Km를 두 번이나 완주했다는 덴마크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함부르크와 파리를 지나갔다고 했다.
파리에서 생쟝으로 220Km쯤 내려가면 뚜르(Tours)란 동네가 나오고 계속 100 여Km를 더 내려가면 푸아티에(Poitiers)란 동네를 만난다. 두 도시는 대개 노르망디 반도 인근의 북프랑스 사람들의 '파리길' 집결 포인트로 알려졌으나 바로 그 일대가 《롤랑의 노래》의 태생지인 거다.
732년 「투르-프아티에 전투」로 프랑스 역사상 아주 유명한 고장이다.
옛 전투는 뚜르와 프아티에 사이에 2/3 지점에서 맞붙었으니 파리에서 불과 300Km까지 이슬람이 쳐들어왔다는 의미다. 그 전투는 샤를마뉴 대제의 조부 카를 마르텔이 주도했다.
싸움은 그 50년 후에도 계속되어 손자 샤를마뉴 대제가 대를 이어 물려받았다. 스페인의 이슬람들은 기독교 유럽의 본고장인 서유럽을, 피레네 산맥을 줄기차게 넘어와 침략해 오던 중이었다.
그리고 이슬람들은 이 전투의 패배로 서유럽 정벌을 기어이 포기했다.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가 황제가 되어 선대의 치적을 이어받고서, 전장(戰場)을 스페인으로 옮겨와 이슬람과 잔불 처리를 하던 서사시다.
이슬람들의 기독교 정복 몸부림은 서유럽만이 아니었고 동유럽에서도 끈임없이 자행되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서유럽 양쪽에서 그들의 집념 어린 도전은 결과적으로 별무소용도 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유는 동유럽에서는 소아시아 반도(터키)의 토로스 산맥이 서유럽에서는 피레네 산맥 등이 방패막이가 되어 준 덕분이다.
동유럽이 이슬람과 지리적으로 가깝기에 쉽사리 정복되었던 발칸 반도가 '유럽의 화약고'란 별칭으로 불리는 세계사를 더듬어 보건대, 무슬림들의 유럽 본토 정복의 실패는 세계 인류를 위해 크나큰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깊은 신앙심에 따른다면, 어쩌면 산맥이란 자연지물보다 크리스쳔들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인지도 모른다.
주제와 동떨어진 사족을 좀 달아보련다.
(부디 이 기록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카페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작성했습니다.)
카페에서 소생의 〈유럽 대륙횡단기〉는 스위스의 루체른을 지나면서 일단 멈추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시작했던 기록이 오스트리아에 들어와 (25편)으로 재개했으나 스위스에서 (44편)으로 멈췄다.
대륙횡단기의 연재 중단이 두번째다.
변명의 여지도 없이 부끄럽고 송구한 일이다.
코로나가 막 유행을 시작한 2020년 봄에 카페는 올라오는 기사까지도 한적했다.
다들 여행길도 막혀버리고 얼마나 무료하실까 싶어서 훨씬 지난 이야기를 재차 소환해서 시작했던 일이다.
그후 카페는 다양한 기사들이 흔해졌지만 일단 오스트리아의 동서횡단까지만 전해드리자 했던 일이다.
하지만 스위스까지 넘어왔다. 길이란 어디론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기에~~
카페는 오스트리아나 스위스를 걸어낸 기록이 흔치 않기에 나름대로 정보를 제공하고 싶었다.
물론 중서부 유럽에 관한 멋진 기록들은 영상이 대부분이고 구체적인 소개는 드물어서였다.
2009년 첫 까미노 길은 출발을 생쟝이 아니라 프랑스의 르퓌로 잡고 보니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때 마침 운좋게도 골수 나그네 김남희 선생으로부터 선험자를 소개받아 1,600Km 완주를 해낼 수 있었다.
그 2년 후에는 아예 유럽 대륙의 동서횡단을 나서려고 보니 무엇보다 정보가 막연했다.
특히 동유럽은 이슬람의 지배 이후로 기독교의 순례길('산티아고 가는 길')이 거의 소멸된 거나 다름없다.
동유럽과 헝가리의 아득한 지평선을 돌파해 부다페스트에 들어와서는 대체로 '헝가리길'을 따라가면 되지만, 나의 길만을 찾는데 2~3년이 걸렸다.
그것이 카페에서 소생이 길 소개를 끊임없이 남발하는 연유다.
물론 이번에 《롤랑의 노래》 독후감(?) 역시도 길 정보를 제공하는 일환이다.
유럽 대륙의 동서횡단과 남북종단의 노하우는 머나먼 길 도전에 꿈을 지닌 나그네들을 위하여 언제나 열려 있다. 부디 그분들께도 일조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부기~~
♣ 기사도 이야기
〈기사도의 사전적 정의 〉
기사도의 시대란 귀족들의 시대를 의미한다.
기사도는 중세 서유럽 봉건 제도의 꽃으로, 지배 계급인 귀족들의 도덕과 예절 등을 뜻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여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하므로 영주의 아들에 대한 교육이 철저해서 세심한 교육과정을 거쳐야 했다.
① 기사가 되는 법
② 전쟁에 이기는 법
* 7세- 시동(어머니를 떠나,7년 동안 귀족 여인의 심부름, 식사 시중 들기(승마, 용맹성, 예의범절 배우기)
* 14세-종자(7년 동안 귀족 남성 시중 들기 및, 말 돌보기, 필요할 때 창 같다 주기)
* 21세-기사가 됨(기사 서임식은 일종의 성년식)
〈기사 서임식 절차〉
① 목욕(중세는 몇년 동안 목욕 안 하는 관습이 흔함)
② 새옷 갈아입기
③ 교회에 가서 철야기도 하기
④ 날이 새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서약하기
* 신을 위해 봉사할 것(기독교를 위해서 싸우겠습니다)
* 주군에게 충성할 것(용맹하고 훌륭한 기사가 되겠습니다)
* 동료와의 관계에서 명예를 중시하고 약자(특히 여자)를 보호하겠습니다.
- 여자 앞에서는 투구를 벗음→'나는 당신의 친구이므로 당신 앞에선 투구를 쓰지 않습니다.'
⑤ 백색 가죽벨트를 허리에 차고 금 박차를 신발에 부착시킨다.
⑥ 영주 앞에 무릎 꿇고- 영주, "그대에게 작위를 내리노라."
※ 기사들의 문장(紋章)은 갑옷과 투구로 완전무장하고 있어서 전쟁 중에 적과 섞이면 구별이 안 되므로 매우 필요했던 상징이다.
☞ 이상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참고했음.
♣ 바람만이 아는 대답
- 작사 및 노래, 밥 딜런 -
사람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봐야
진정한 삶을 깨닫게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날아봐야
백사장에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전쟁의 포화가 휩쓸고 지나가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친구여, 그 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산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씻겨 바다로 흘러 들어갈까
사람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까
사람은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사람이 하늘을 얼마나 올려다봐야
진정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기울여야
타인의 비명을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될까
친구여, 그 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지
친구여, 그 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