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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학자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을 꼬집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청년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기로 하고 횡단에 필요한 양식과 장비 등 철저히 준비하여 떠났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준비했던 생수가 며칠 지나지 않아 떨어졌습니다. 사막에 물이 없으면 현대적 장비를 갖추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이 청년은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야자나무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본 것입니다. 쉴 수 있는 오아시스와 물이 있은 환경인데 청년은 자기가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만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청년이 정신이 희미한 상태로 깨어보니 이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청년은 새소리를 들으면서 이젠 죽음이 코앞에 왔구나 생각하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다음날 사막에서 사는 베두인 아버지와 아들이 오아시스인 물가에 왔는데 안타깝게도 청년이 목이 말라 입이 새까맣게 탄 채 죽어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왜 물이 있는데 이 청년이 물을 먹지 못하고 죽었을까요?" 아빠가 대답하기를 "이 청년이 바로 똑똑한 현대인이란다." 아들에게 일러 주었답니다.
현대사회는 사람들마다 자신의 이름을 들어내고자 목말라하며 정신없이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탑을 쌓을 때 지혜로웠습니다. 저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여기 흔한 돌보다 흙을 이겨 벽돌에 역청을 발라한 층 한 층 쌓으면 훨씬 단단할 것 같네~그런데 역청을 바른 지혜는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때 지시하기를 “ 너는 고페르(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을 칠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창6:14)
노아가 사용한 방주 역청은 생명을 보호하기위한 재료였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는 벽돌의 역청은 세상에서 자기이름을 높이는 재료로 사용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벨탑은 무너지고 서로 알아들었던 언어가 갑자기 혼잡해지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바벨탑이 그렇습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지식이 시간과 함께 업그레이드가 되어 수많은 도구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인간 기술에 의해 높이 1KM 바벨탑 제다타워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건축중에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롯데타워555m) AI인공지능으로 만든 로봇이 미래 인간을 지배할 것이다. 예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결국 하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도구가 되고 있음을 영적안목으로 보아야합니다.
성경에 등장한 많은 선지자중에 예레미야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요시아왕때 부터 유다의 마지막왕 시드기야 때까지 40년 동안 활동하며 유다의 멸망을 지켜본 선지자입니다. 그는 소명을 받기 전 까지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소명은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유대백성에게 하나님말씀을 전하는데 애통하는 심정으로 조국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해야 하는 비통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렘9:18...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애가 3:48-50....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3절....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하나님께서 유다 자기백성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대나라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스스로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는데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버리는 순간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곧 바로 선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건조하기 때문에 물이 귀합니다. 그래서 물을 가두는 저장소인 웅덩이를 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웅덩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터진 웅덩이입니다....... 터진 웅덩이는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물을 채울려고 해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똑똑한 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고 싶어 합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여 우주여행이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 창업자)는 2029년까지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두뇌로 이루어진 과학이 지금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늘 끝까지 하나님께 도전장을 내밀며 도전하는 바벨탑이 오늘의 과학입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내면 깊숙이 멍들어있는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 줄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은 카페의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카페가 얼마나 많습니까? 통계청자료에 의하면 2022기준 국내 커피전문점 수가 10만729개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많이 생기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외로움이 많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카페에 앉아있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풍성한 것 같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 보여도 사람들은 더 지루해하고 힘들어합니다.
터진 웅덩이인 것입니다....... 터진 웅덩이라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채워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금방 바닥을 드러냅니다. 모든 것이 만족은 잠깐이고 금방 갈증이 찾아옵니다. 지속적인 만족은 없습니다. 결국 또 다른 것을 찾아다녀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웅덩이를 채우기 위해 계속 발버둥 치며 지금도 살아갑니다.
목이 마르면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극적인 음료수를 마십니다. 한순간은 시원하지만 곧 목이 마릅니다. 사람들은 문제에 직면하려고 하기보다 문제로부터 탈출하려고 합니다. 가정에서 어려움이 있으면 가정 안에서 문제를 풀어가려고 해야 합니다. 부부의 문제를 가정 바깥에서 풀려고 하면 사고가 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는 교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교회를 옮겨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이교회 끼웃 저교회 끼웃 자주 교회를 옮기는 것이 한국교회 기독인의 현실입니다. 어느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지만 거의 수평이동에 불과합니다.
교회도 한 번이 어렵지 자꾸 옮기면 쉽습니다. 자꾸 옮기면 결국 교회에 정착하는 것을 실패하게 되고 영적 목마름은 깊어만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문제는 터진 웅덩이를 자기 스스로 채울려고 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큰 문제요 결국은 하나님의 회초리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시대에 하나님은 유대백성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11절 보세요 .....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유대백성은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바꿔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밥 먹듯이 한 자기백성을 향하여 화를 내시면서 “ 나의 백성은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웠다고 꾸중하신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예레미야가 소명 받을 때가 요시아 왕 때 인데 신앙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요시야왕 이전 할아버지 므낫세왕이 55년 동안 왕좌에 있으면서 저지른 일은 너무나 엄청났습니다. 바알제단을 쌓았고 아세라 여신상을 만들고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했습니다. 자기 아들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이방신에게 재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아왕이 할아버지 므낫세가 저지른 악한 일들을 뿌리채 뽑은 것입니다. 여호와 전에 있었던 남창의 집을 헐었습니다. 아세라상을 성전에서 내다가 기드론 시내에서 불사르고 빨아서 가루를 만들어 버렸습니다.(왕하23:6-7)
그리고 성전을 새롭게 수리하는데 귀중한 율법 책을 발견한 것입니다. 귀중한 율법책을 발견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며 율법이 기록된 문서를 찾아 다 불태운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수리하다 감추어진 율법책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율법책을 사반이 낭독하는 순간 하나님말씀을 듣던 요시아 왕이 옷을 찟었습니다.(왕하22:11) 그동안 하나님을 멀리했던 죄를 회개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던 절기가 요시야왕 때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왕이 남쪽 애급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려고 유대나라를 통과하는 것을 막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온 유다백성이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눈물로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대하 35:24-25)
이런 아픈을 지켜본 다음 지도자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한 길로만 가야하는데 스스로 웅덩이를 다시 팠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버렸습니다. 안식일 날 다시 정사와 희락으로 바꾸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 만 해 주었습니다. 예레미야를 사기꾼으로 몰아 그를 죽이려 물 없는 우물 속에 빠뜨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나라 조국의 멸망을 눈앞에서 여호야김왕에 이어 여호야긴 시드기야 세 왕이 스스로 웅덩이를 판 죄로 바벨론나라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기구들을 다 옮겨가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보다도 이방신을 택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똑같이 행하였습니다. ---“그의 조상들이 향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23:32)
이런 비극적인 현실 앞에 해결책은 무엇이겠습니까? 답은 오직 한 가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 밖에 없습니다. 누구든 생수의 근원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가 할 일이 없어집니다.....스스로 무엇을 찾고자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 자수성가 한 사람들은 아무리 가져도 불안합니다.....언제 밑 빠진 독이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채우는 것과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내가 부자가 된 것과 하나님이 돈을 벌게 해주시는 것은 다릅니다.... 내 힘으로 출세한 것과 하나님이 오르게 하신 것은 전혀 다릅니다......오직 나의 지식의 힘을 빼고 하나님께 맡기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시편 37: 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생수의 근원에서 물이 계속 솟아오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다윗은 시편 23 :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주님을 만나고 너무 기뻐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다윗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주셔서 흘러넘치고 남았다고 했습니다......
♪♬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내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방패 나의 참소망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이 내안에 계시기에 생수가 흘러 넘쳐 마르지 않음을 믿습니다.
요4장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남자와 결혼해본 여인입니다. 동네사람들은 수치스럽고 부도덕한 여인이라며 이 여인을 따돌렸습니다. 중동은 물이 귀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정오에 야곱의 우물터에 왔습니다.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르러 왔을까? 정오는 사람 왕래가 없을 것이다 생각하고 이 여인은 우물터에 온 것입니다. 그만큼 사마리아 여인은 마음이 우울하고 공허하여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몰래 우물터에 와서 물을 길르러 왔는데 예수님이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이때까지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는데 예수님이 먼저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때 여인이 뭐라고 하십니까? 어찌 나는 이방인인데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만큼 이 여인에게는 여러 가지로 소외당하고 마음의 문이 닫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예수님 수가성 여인의 마음을 하시고 생수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요4: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여인은 이 말씀을 받고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까?...... 먹어도 먹어도 목 말랐던 물동이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와보라 생명수 이신 메시야 그리스도를 만났다며 외쳤습니다.
이제 숨어만 지냈던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과 교제함으로 당당한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더 놀라운 변화는 사마리아 여인이 제일 먼저 찾았던 것은 예배 할 곳을 찾았어요 이유가 있습니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과 늘 만나서 교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삶이 변화하면 주님을 만나 교제하기위해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래서 거룩한 주일 성도들이 예배한곳을 찾아 교회에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분초라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생명체가 물을 통하여 생명을 보존 될수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영적생명을 보존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비옥한 땅이라도 물이 없으면 삽시간에 불모지가 됩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있지 않으면 살수가 없듯이 아무리 좋은 고기라도 물을 떠너서는 그 물고기는 순식간에 변질고도 맙니다.
사도요한은 사대교회를 가리켜 책망하시기를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었으나 실상은 죽은자로다(계3:1)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운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의 실상이 물을 떠난 고기처럼 영적으로 죽어 있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또한 지식의 홍수로 사는 현대인들을 향한 경고의 멧세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터진 웅덩이에 조금이라도 물을 붓고 있었다면 이제는 멈추고 오직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이 샘솟듯 솟아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