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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부 57
이튿날 네흘류도프는 변호사를 찾아가서 메니쇼프 사건을 이야기하고 그 변호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변호사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우선 조사를 해본 다음, 사건이 네흘류도프의 말 그대로라면 무보수로 변호를 맡겠노라고 했다. 네흘류도프는 또 사소한 부주의로 말미암아 130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이것은 누구의 책임이며 누구의 죄가 되느냐고 물었다.
변호사는 정확한 대답을 하려는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누구의 죄냐고요? 누구의 죄도 아닙니다." 그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검사에게 말하면 지사의 죄라 할 것이고, 지사한테 말하면 검사의 죄라고 할 테죠. 결국 누구의 죄도 아닌 겁니다."
"나는 이제 곧 마슬렌니코프한테 가서 그에게 말해보겠습니다."
"아니, 소용없을 겁니다"라고 변호사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라도 그자가 당신의 친척이나 친구는 아닐 테죠? 그자는, 이런 표현을 용서하세요, 지독한 바보인 데다가 교활하기 짝이 없는 놈이랍니다."
네흘류도프는 마슬렌니코프가 변호사에 대해서 한 말을 생각하고, 아무 대답도 없이 인사를 하고 마슬렌니코프에게로 마차를 달렸다.
네흘류도프는 마슬렌니코프에게 두 가지 일을 부탁해야만 했다. 마슬로바를 병원으로 옮겨달라는 것과, 통행증이 없어서 아무 죄도 없이 수감되어 있는 130명을 방면하는 일이었다.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나, 목적을 이루러면 이 방법뿐이었으므로 하는 수가 없었다.
마슬렌니코프의 집으로 다가갔을 때 네흘류도프는 현관 앞 마차를 대는 곳에서 2인승 경마차, 포장마차, 사륜마차 등 승용마차 여러 대를 보고 오늘이 마침 마슬렌니코프가 자기보고 와달라고 한 그의 아내의 초대일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네흘류도프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 포장마차가 한 대 서 있었고, 모표가 붙은 모자를 쓰고 망토를 두른 하인이 현관 문턱에서 긴 치맛자락을 추켜들고 단화를 신은 검은 양말의 가느다란 발목을 드러내고 있는 부인을 마차에 태우고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머무르고 있는 마차들 중에서 문이 닫힌 코르차긴 일가의 포장마차를 보았다. 혈색이 좋은 백발의 마부는 특히 낯익은 나리라도 대하듯이 네흘류도프에게 정중하고도 공손하게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네흘류도프가 현관 수위에게 미하일 이바노비치(마슬렌노코프)가 어디 있느냐고 채 묻기도 전에, 그 자신이 층계 중턱까지가 아니라 맨 밑까지 배웅하게 되어 있는 매우 귀중한 손님을 보내면서 양탄자가 깔린 층계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 몹시도 귀중한 군인 손님은 층계를 내려오면서 이번에 시(市)에 건립될 육아원의 기금 모집을 위한 복권 추첨에 대해서 프랑스어로 말했는데, 귀부인들을 위해서도 훌륭한 사업이라는 의견을 토로하고 있었다. "부인들에게도 재밌는 일이고 돈도 모일 게고."
"Qu'elles s'amusent et que le bon Dieu les benisse(마음껏 재미를 보라죠. 그러면 하나님도 축복을 주실겁니다)......여어, 네흘류도프, 안녕하시오. 이거 오래간만이군요"하고 군인은 네흘류도프에게 인사를 했다. "Allez plresenter vos devoirs a madame(어서 가서 부지사 부인에게 인사나 드리시오). 코르차긴 댁 분들도 와 있으니까. Et Nadine Bukshevden. Toutes les jolies femmes de la cite(그리고 나디네 북스헤브젠 양도. 시중의 미인들의 총출동이라오)"하고 그는 금줄로 장식된 화려한 옷을 입은 자기 하인이 입혀주는 털외투 밑으로 그 군인다운 어깨를 쫙 펴고 살짝 치켜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Au revoir, mon cher(자, 그럼 안녕히!)" 그는 다시 한 번 마슬렌니코프의 손을 잡았다.
"자, 2층으로 가세. 잘 왔네!" 마스렌니코프는 네흘류도프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끼고는 그 거대한 몸집에도 성급히 그를 위로 끌어올리면서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마슬렌니코프는 유달리 즐거운 흥분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조금 전에 왔던 귀중한 손님이 호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마슬렌니코프는 황제의 이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근위대에서 근무했으므로 이젠 황제의 이름에도 익숙해질 단계가 되었을 텐데, 그 이름을 대하는 일이 거듭될수록 더욱 비굴해져가기만 했다. 그리고 높은 분에게서 이러한 호의를 받을 때마다 마슬렌니코프가 느끼는 환희란, 마치 주인이 길들인 개를 어루만지고 토닥토닥 두드리고 귓전을 긁어줄 때 개들이 느끼는 그러한 환희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럴 때 개는 꼬리를 흔들기도 하고,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아양을 떨기도 하고, 귀를 비벼대며 미친 듯이 맴돌기도 한다. 마슬렌니코프도 능히 이런 짓을 해낼 위인이었다. 그는 네흘류도프의 심각한 표정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덮어놓고 객실로 끌고 들어갔다. 그래서 네흘류도프도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세. 그저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마슬렌니코프는 네흘류도프와 함께 홀을 지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사 부인께 네흘류도프 공작께서 오셨다고 여쭈어주게." 그는 걸어가면서 하인에게 일렀다. 하인은 종종걸음으로 그를 앞질러 걸어갔다. "Vous n'avez qu'a ordonner(무엇이든 자네 분부대로 하겠네). 그러나 아내를 좀 만나주게나, 요전번에는 자네를 그냥 보냈다고 해서 아주 혼이 났다네."
그들이 객실로 들어갔을 때는 벌써 하인이 알린 뒤인지라 지사 부인이라 자칭하고 있는 부지사 부인 안나 이그나티예브나는 소파 옆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모자와 머리 너머로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네흘류도프에게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보였다. 객실 한구석에 자리 잡은 티테이블 옆에는 귀부인들이 앉아 있고 군인과 문관들이 서 있었다. 거기서는 이들 남녀의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Enfin(드디어 오셨군요)! 당신은 어째서 우리하고 친해지려 하지 않으시죠? 우리가 실례되는 일이라도 했던가요?"
안나 이그나티예브나는 네흘류도프와의 친근한 사이를(실은 한 번도 가까웠던 적이 없음에도) 과시하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면서 네흘류도프를 맞았다.
"서로 아시던가요? 이분은 벨랴프스카야 부인, 그리고 미하일 이바노비치 체르노프씨, 자, 좀 더 다가앉으세요."
"미시, Venez donc a notre table. On vous apportera votre the(이쪽 탁자로 오세요. 차를 드릴 테니).....그리고 당신도요....."
그녀는 이름을 잊었는지, 미시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리 오세요, 공작님. 차 드시겠어요?"
"전 절대로 찬성할 수 없어요. 그 여자는 결코 사랑하지 않았으니까요"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하지만 고기만두는 사랑했지요."
"언제나 쓸데없는 농담만 하셔." 높다란 모자에 비단이며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다른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C'est excellent(정말 멋지군요), 이 가벼운 와플은, 이리 좀 더 주세요.
"곧 떠나시나요?"
"네,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찾아뵌 거예요."
"지금 봄이 한창인데 시골은 얼마나 좋을까요!"
마치 그 옷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듯이 구김 하나 없는 검은 줄무늬 옷으로 날씬한 허리를 휘감고 모자를 쓴 미시는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네흘류도프를 보자 얼굴을 확 붉혔다.
"저는 떠나신 줄 알았어요"하고 미시는 네흘류도프에게 말했다.
"떠나려고 했습니다만"하고 그는 대답했다. "일이 지체돼서요. 실은 여기 온 것도 그일 때문입니다."
"어머니한테 들러주세요. 무척 만나고 싶어 하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으나, 그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고 또 그것을 네흘류도프가 안다고 느끼자 더욱더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래도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네흘류도프는 그녀가 얼굴을 붉힌 것을 모른 체하려고 애쓰면서 침울하게 말했다.
미시는 화가 난 듯 이맛살을 찌푸리고 어깨를 흠칫하고는 우아한 장교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장교는 그녀의 손에서 빈 찻잔을 받아 들더니, 군도를 안락의자에 부딪히면서 사내다운 동작으로 그것을 다른 탁자로 갖다 놓았다.
"당신도 육아원에 꼭 기부하셔야 해요."
"그야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제비를 뽑을 때까지 제 선심을 고이 보존해두고 싶군요. 그리고 그때는 제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드리지요."
"그럼 두고 봅시다!" 억지로 웃어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초대가 대성공이었으므로 안나 이그나티예브나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미카(그녀의 뚱뚱한 남편 마슬렌니코프를 가리킨다)가 말하더군요, 당신은 요즘 감옥 일로 바브시다고요. 저도 충분히 이해가 가요"하고 그녀는 네흘류도프에게 말했다. "미카에게도 그야 여러 가지 결점이 있겠습니다만, 그이가 얼마나 착한지는 당신도 잘 아실 거예요. 그 불쌍한 죄수들은 모두 그이의 자식들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이는 꼭 그렇게밖엔 생각하지 않아요. Il est d'une bonte(글쎄, 얼마나 선량한지)....."
그녀는 죄수들에게 채찍질을 명령한 남편의 그 bonte(선량함)을 표현할 만한 적당한 말을 찾아낼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곧 웃음을 띠고는, 그때 마침 들어온 보랏빛 나비 리본을 단 주름투성이 늙은 부인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흘류도프는 예의에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필요한, 알맹이가 없는 말을 적당히 지껄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마슬렌니코프 쪽으로 다가갔다.
"자, 그럼 내 말 좀 들어주겠나?"
"아, 참! 무슨 이야기지? 이리 오게."
그들은 조그마한 일본식 서재로 들어가서 창가에 앉았다.
부활 1부 58
"자 말하게. Je suis vous(무엇이든 다 들어줄게). 담배 피우겠나? 아, 잠깐만 기다리게, 여길 재투성이로 만들면 안 되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재떨이를 가져왔다. "자, 무슨 얘기지?"
"실은 자네한테 두 가지 청이 있는데 마이야."
"아, 그래."
마슬렌니코프의 얼굴은 갑자기 어둡고 침울해졌다. 주인이 귓전을 긁어줄 때의 개의 모습은 완전히 가셨다. 응접실에서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Jamais, jamais je ne croirais(절대로 안 믿어요, 절대로)"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쪽 끝에서는 어떤 사내의 목소리가 "La comtesse Voronzoff et Victor Apraksine(보론초바 백작 부인과 빅도르 아프락신)"이라는 말을 자꾸 되풀이하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마슬렌니코프는 응접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귀를 기울이며 네흘류도프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 그 여자 일 때문에 왔네"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아, 죄 없이 판결을 받았다는 그 여자 말이지. 알고 있네, 알고 있어."
"그 여자를 감방 병원으로 옮겨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들 하더군."
마슬렌니코프는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글쎄, 어떨지"하고 그는 말했다. "어쨌든 알아봐서 내일 전보로 알리겠네."
"병원에는 환자가 많아서 간호사 조수가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그래, 그래. 어쨌든 나중에 날려주겠네."
"부탁하네"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응접실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자유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또 빅토르 짓일 거야." 빙그레 웃으면서 마슬렌니코프는 말했다. "저자는 마음만 내키면 꽤 멋진 농담을 하거든."
"그리고 또 한 가지"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지금 감옥에는 통행증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130명이나 수감되어 있는데 벌써 한 달이나 되었다더군."
그리고 그는 그들이 수감된 이유를 설명했다.
"자넨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지?"하고 마슬렌니코프는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갑자기 불안과 불만의 기색이 떠올랐다.
"어느 죄수한테 면회를 갔을 때 그들이 복도에서 나를 둘러싸고 호소하더군....."
"어떤 죄수한테 갔는데?"
"죄 없이 수감된 농민이었네. 나는 그에게 변호사를 대주었지.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닐세. 도대체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단지 통행증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수감될 수 있느냐 말이야? 그리고...."
"그건 검사가 할 일이야"하고 마슬렌니코프는 화가 난 듯이 네흘류도프의 말을 가로챘다.
"이것이 바로 자네가 말하는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이란 걸세. 검사보는 가끔 감옥을 방문해서 죄수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트럼프 놀이만 하고 있거든."
"그럼 자넨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네흘류도프는 지사가 반드시 검사 탓으로 돌릴 것이라는 변호사의 말을 상기하면서 우울한 낯으로 물었다.
"아니, 해보지. 곧 조사해보도록 하겠네."
"그 여자로서는 더욱더 좋지 않죠. C'est un souffre-douleur(그야 수난자가 되는 거예요)." 응접실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으나, 자기가 하고 있는 말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어조였다.
"그럼 더 좋습니다. 난 이걸 갖겠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이렇게 말하는 남자의 농담 소리와, 무엇인지 주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의 농담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요. 안 된다고요, 절대로"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럼 좋아. 모든 걸 내게 맡기게." 마슬렌니코프는 터키석 반지를 낀 하얀 손으로 담뱃불을 끄면서 이렇게 되풀이했다. "자, 이제 부인들 쪽으로 가세."
"참, 그리고 또 하나." 네흘류도프는 객실로 들어가지 않고 문가에 발을 멈추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 감옥에서 체형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인가?"
마슬렌니코프는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런 말까지 하긴가? 이봐, 자넬 감옥에 보내선 안 되겠군, 그렇게 사사건건 참견을 하니 말이야. 자, 가세. 아네트(안나의 프랑스식 호칭)가 부르고 있으니까." 그는 네흘류도프의 팔을 붙들고 귀빈들의 방문을 받았을 때의 흥분을 되살리면서 이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이미 기쁨에서 오는 흥분이 아니라 불안에서 오는 흥분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에게서 팔을 빼고는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고, 또 아무 말도 없이 우울한 낯으로 응접실과 홀을 지나 현관으로 달려 나오는 하인들 옆을 스치며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어요? 그분에게 무슨 말을 하셨어요?"하고 부인은 남편에게 말했다.
"저게 바로 a la francaise(프랑스식이라는 거죠)"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저게 무슨 a la francaise(프랑스식이에요), 저건 a la zoulou(줄루 식이라는 거예요)."[줄루한 아프리카의 한 야만족을 일컫는 말]
"그렇지만 저분은 언제나 저런 식인걸요, 뭐."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해서 지껄여대는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들은 이날의 안성맞춤인 화젯거리로 네흘류도프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마슬렌니코프를 방문한 다음 날, 네흘류도프는 그에게 편지를 받았다. 문장이 박힌 번들번들한 두꺼운 종이에 힘찬 달필로 쓴 그 편지에는, 마슬로바를 병원으로 옮기도록 의사에게 써 보냈으니까 아마 네흘류도프의 희망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거기에는 '친애하는 옛 벗 마슬렌니코프'라는 문구와 함께 놀랄 만큼 크고 멋진 필적으로 힘차게 사인이 되어 있었다.
"바보 같으니!"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뇌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벗'이라는 말에서 그는 자기한테까지 너그러움을 과시하려는 마슬렌니코프의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도덕적으로는 더럽고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네흘류도프를 자기 벗이라고 부름으로써 그에게 아첨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역시 자신의 위대함을 그다지 자랑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