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5일)은 대한 제국의 황족이자 독립 운동가로 본관은 전주, 이름은 강(堈), 초명은 평길(平吉), 호는 만오(晩悟)이다. 광무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장씨이다.1891년, 의화군에 봉해져 1893년, 김사준 남작의 딸 김수덕(金修德)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895년, 특파대사에 임명되어 유럽 순방을 마쳤다. 일본 게이오 대학을 거쳐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어노크 칼리지와 델라웨어 주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및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4년, 안창호(安昌浩),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 이듬해 공립신문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0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 그 해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으로부터 금척대훈장을 수여받았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 블라디보스토크지회를 설립, 1909년, 재로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통감 이토 히로부미 암살 계획에 동조하여 중임을 수행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부랑자 행세를 하여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항일 독립 투사들과 끊임없이 접촉, 묵묵히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통감 사이토 마코토 암살 미수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서울로 압송,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같은 해,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 의정원(議政院) 의원 및 부의장과 의장직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어 곤욕을 치렀다. 이후, 일제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광복 후에도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5년 8월 15일, 서울 성북구의 별저 성락원(城樂苑)에서 타계하였다. 슬하에, 이건(李鍵), 이우(李鍝), 이갑(李鉀), 이석(李錫) 등 12남 9녀를 두었다.
가족 관계(12남 9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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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봉컬렉션 원문보기 글쓴이: 네페르티티
첫댓글 우왓, 12남 9녀 대가족이군요~~~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