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저녁의 편지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12월의 기도
목필균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 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 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12월의 숲
황지우
눈맞은 겨울 나무 숲에 가보았다
더 들어오지 말라는 듯
벗은 몸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 목숨들로 連帶해 있었다
눈 맞는 겨울나무 숲은
木炭畵 가루 희뿌연 겨울나무 숲은
聖者의 길을 잠시 보여주며
이 길은 없는 길이라고
사랑은 이렇게 대책 없는 것이라고
다만 서로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듯
형식적 경계가 안 보이게 눈 내리고
겨울 나무 숲은 내가 돌아갈 길을
온통 감추어 버리고
인근 산의 積雪量을 엿보는 겨울나무 숲
나는 내내,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렸다
12월의 아침 시간
헤세
비는 엷게 베일 드리우고, 굼뜬 눈송이들이
잿빛 베일에 섞여 짜여
위쪽 가지와 철조망에 드리워져 있다
아래쪽 창유리에 오그리고 앉아 있다
서늘한 물기 속에서 녹아 유영하며
축축한 땅 냄새에
뭔가 엷은 것, 아무 것도 아닌 것 어렴풋한 것을 준다
또 물방울들의 졸졸거림에 머뭇거림의
몸짓을 주고, 대낮의 빛에게는
마음 상하게 하는 언짢은 창백함을 준다
아침에 눈먼 창유리들의 열 가운데서
장밋빛으로 따뜻한 흐린 광채가 어렴풋이 밝아 온다
외롭게 아직 창문 하나 어둠의 조명을 받아
간호원 하나 온다 그녀는 눈雪으로
눈眼을 축인다, 한동안
서서 응시한다 방으로 되돌아간다
촛불이 꺼진다 잿빛의
빛바랜 날 속에서 장벽이 늘어난다
12월이란 참말로 잔인한 달이다
천상병
엘리어트란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는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새 기분으로
맞이하는 것은
새해뿐이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
김사인
또 한 잔을 부어넣는다
술은 혀와 입안과 목젖을 어루만지며
몸 안의 제 길을 따라 흘러간다
저도 이젠 옛날의
순진하던 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뜨겁고 쓰다
윗목에 웅크린 주모는
벌써 고향 가는 꿈을 꾸나본데
다시 한 잔을 털어넣으며
가만히 내 속에 대고 말한다
수다사水多寺 높은 문턱만 다는 아니다
싸구려 유곽의 어둑한 잠 속에도 길은 있다
섣달 그믐
김은경(1976 - )
오래 전
붉은 그믐의 밤이 반죽한
한 몸이 있었는데
무딘 칼 한 자루에도
마음 곧잘 내어 주던
착한 영혼이 있었는데
잠깐의 목멤이 없지는 않았으나
모르는 척
식당에 혼자 앉아
팥칼국수를 먹는 저녁
내가 미처 음복 못하고 보낸
첩첩의 고통이 긴 실타래 풀어
마침내 나를 먹이는가
떠난 당신이 내 앞에 앉아
허연 국수사발 같은 눈동자로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데
살아야 한다고, 때로는 무심한 듯
살아야 한다고
왼손이 오른손에게 더운 손이
찬 손에게
몸이 일부를 내어 주며
숟가락을 내미는 시간, 핏빛의 당신을
물 한 모금 없이
후루룩 삼키는 저녁
목으로 넘어가는 이 따뜻한 어둠이
당신의 눈물인 듯 간간하다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허영자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빚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눈은 내려라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12월의 노래
이효녕
한해 마무리해 보내는 겨울
12월이 다시 돌아오네
인생은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나뭇가지에서 놀던 참새는
어디론가 날아간 그 자리
나이테를 하나 더 만들어
겨울안개 뒤에 서있네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안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섣달눈은
가장 가벼운데도
달력 맨 끝에 서있다가
허공의 허파에서 계속 숨쉬네
차가워진 가슴과 들녘에 앉은
하얀 눈 사이로 다른 세상을 향하여
언제나 따스하게 안아주려는
또 한 세월을 향하여
그 숱한 생각들의 깊이를 향하여
한 해를 마무리해 보내는
겨울12월이 다시 돌아오네
지금껏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숨겨진 향기가 겨울안개 뒤에 서서
떠도는 바람이 가슴을 두드리네
오가는 세월을 안고
오 지워지는 세월을 안고.
12월의 노래
박종학
마침내 달랑 한 장
그렇지만 마지막은 싫어요
처음 시작이라 불러 주세요
차가운 손길
하지만 마음만은 아니랍니다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입니다
나를 보면 행복해 합니다
나를 보면 추억으로 여깁니다
나를 보면 삶을 느낍니다
나는 행복입니다
나는 추억입니다
그래서 나는 12월입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과 함께
외로운 무의탁 노인들과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과함께
한해를 뒤 돌아보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기쁨의 합창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나는 희망이고
기쁨이고
사랑이고 싶습니다
나는 12월입니다
12월의 노래
이해인
하얀 배추 속같이
깨끗한 내음의 12월에
우리는 월동 준비를 해요
단 한 마디의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헛 말을 많이 했던
빈 말을 많이 했던
우리의 지난 날을 잊어버려요
때로는 마늘이 되고
때로는 파가 되고
때로는 생강이 되는
사랑의 양념
부서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다시 기억해요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 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한겨울 추위 속에
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
행복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