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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은 다 죄니라.
2016, 5, 29
롬14 : 17-23
로마서 14장 마지막절인 23절의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니라 하는 말씀은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에게 새삼 부담스럽게 들여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내용의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이미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육신으로 행하는 것은 다 죄니라.”하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또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은 다 죄니라.”는 말씀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 이라면 멸망할 육신의 행위를 피해서 성령으로 인도 받는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사람들은 육신으로 사는 것은 마귀의 종으로 멸망으로 가는 길임을 아주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죄를 짓는 행위가 멸망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죄를 짓는 행위를 무척이나 싫어하십니다.
성령님은 죄를 짓는 행위를 아주 싫어하십니다.
성령님은 죄를 짓는 행위 그 자체를 심히 통회하고 애통해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의에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죄에 짓는 행위를 애통해 하시고 통해하시며 혐오하시기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원하십니다.
23절의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것은 다 죄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상은 눈도 없고 귀도 없고 말할 수 있는 입도 없는 쪼개서 불을 뗄 수 있는 나무토막에 불과한 것으로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도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우상을 어떤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우상을 어떤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은 우상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따라서 자기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으면서 마음에 거리낌으로 먹게 됩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그 제물을 마음에 거리낌이 되면서도 먹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양심에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제물을 먹는 행위는 우상의 제사에 참여하는 행위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우상을 어떤 신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의 제사에 참여한 자로 자기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행위를 하는 그것은 곧 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음심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에 거리끼는 문제를 행하는 것은 모두 다 죄입니다.
나는 오늘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7절 말씀에 “하나님 나라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양심에 걸리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오직 성령 안에서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위해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먼저 성령 안에서 “의”를 이루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의”란 모든 죄에서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의의 행위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3장10절에 “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라 하셨습니다.
육신으로 행하는 이들은 다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 생각부터서가 죄로 가득한 모두 죄인들입니다.
사람이 모든 죄에서 떠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행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서 떠나기 위해서 먼저 성령 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성령을 받기 전에는 누구도 죄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 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죄에서 떠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9절의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화평 가운데 있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여기서 지금 화평을 이루는 그 많은 조건들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화평하기 어려운 사람은 자기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분한 마음이 올라오며 그 분노를 참는다 해도 마음에 쓴 뿌리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과 화평하기란 원수와 화평하기 보다 더 어렵습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옹졸하고 어리석고 교만하고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남을 무시하는 행위를 합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은 다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어리석고 교만한 내가 남을 무시하는 행위가 전부 나의 어리석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내 마음에서 형제에 대한 사랑과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심으로 형제들과 화목하고 화평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7절에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하지만 또한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21절에서 다시 당부하시기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하셨습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려면 육신 안에서는 안 되는 일입이다.
그래서 오직 성령 안에서 화평을 이루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 안에 있어야만 성령의 능력으로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다음은 희락입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4장 4절 5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나는 이대로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내 믿음을 어떤 부와도 바꿀 수 없습니다.
나는 거듭난 종인 것이 너무나 좋고 더욱이 성령을 알고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 거지 나사로처럼 천사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가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내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두고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내게 없습니다.
다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좀 더 하나님을 더 알고 성령의 능력을 더 받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성령이 무엇이며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지극히 실제적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주의 영이 계시다는 말이요, 또 다르게 말씀드리면 살아계신 주님이 한 인격으로 우리 안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이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주님이 행하시는 몇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째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성경을 열어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몇 주 전 사도 바울을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서 보여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 성경의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대한 그 많은 예언 된 말씀들을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보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나무에 달아 희생 제물이 되게 하신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69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 분명한 예언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천년 이상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과 선지서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된 말씀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셨던 것처럼 그 때까지 아무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렇게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경해석의 대가인 가말리엘 선생도 바울도 구약성경에 기록 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기이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이 성령을 받은 후에야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 많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 이전에는 아무도 사도 바울처럼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사람도 바울처럼 깨닫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눈을 열어서 성경을 보고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 가지입니다.
성령이 말씀을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셔야 그 말씀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가르치심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가 아는 어떤 말씀도 우리에게 결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을 안다 할지라도 그 말씀에 자신을 드리며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가르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행함으로 그 결과를 얻기 위해 있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입술로 백번 천 번 믿는다고 고백한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 말씀에 순종이 따르지 못한다면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주님의 말씀인 것까지도 믿지만 자신에게 들여 주시는 주의 음성으로는 듣지는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얼마나 원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얼마나 원하고 있습니까?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원하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듣게 됩니다.
두 번째로 성령은 죄를 깊이 회개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회개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하는 회개는 죄에 대한 수치와 모멸감과 자기 혐오감으로 견딜 수 없는 아픈 가슴으로 깊이 통해하는 회개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심히 통해하고 애통해 하는 이 회개를 말로 표현 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성령 받기 전에는 이토록 통회하는 회개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런 회개를 하고도 또 같은 죄를 짓게 되고 또 짓게 되면 자기에 대한 혐오감은 더욱 깊어지고 자신은 결코 개선 될 수 없는 짐승이요 벌레인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찬송가 151장에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 보혈 흘렸네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찬송가에 “이 벌레 같은 나” 라는 말이 좀 유치하게 들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나면 “벌레 같은 나” 라는 가사를 성령을 받은 사람이 쓴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만이 우리 육신을 깊이 깨닫고 알게 하십니다.
성령이 아니시라면 육신은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인 그 실상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끊임없이 죄를 짓는 자기를 통해서 육신이 무엇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이토록 통해하고 애통해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죄를 그 토록 슬퍼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은 회개만으로 고쳐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바꾸어져야 죄를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믿는 자에게 말씀을 행하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기 전에는 말씀을 읽어도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렵고 또 주의 말씀을 안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그 말씀이 실제인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이루고자 하는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그 말씀의 실제를 경험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하시는 우리들이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예수 믿는 우리와의 실제적인 연합 된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 말씀의 뜻은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나는 살아있는 주님의 포도나무 가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주님의 포도나무 가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포도나무 가지라면 나는 주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며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가지는 줄기로부터 수액을 공급 받아 열매를 맺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나는 그 가지가 되어야 주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참으로 오래 동안 기도했습니다.
내 청춘이 이 기도를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내가 성령을 받고 난 후에야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며, 나는 주님과 살아 있는 연합체요,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힘으로 살며, 주께서 내게 주시는 소원대로 순종하여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결단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네 번째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주님과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경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주님은 우리 안에 성령계시면 우리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시는 방법으로 우리 마음에 자기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마음에 주의 말씀이 생각날 때에는 주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단순히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입니다.
성령님은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음성으로 듣게 하십니다.
주의 말씀을 주의 음성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주님과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1-4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우리 주님은 가난한 한 과부가 자기가 가진 동전 두 랩돈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과부는 하나님께 자기 생명과 삶과 생활 전부를 하나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내게 이 가난한 과부를 통해서 참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내게 너도 이처럼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내 영혼에 가득합니다.
주의 이 말씀이 내 영혼에 지금도 울리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우리가 세상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지금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도 깨닫고 나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것도 깨닫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26장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손을 높이 들어서 싸인을 보낼지라도 그들이 보지 않지만 자기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열성을 본다면 그들도 부끄러워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주께서 손을 높이 들어 싸인을 보내실 때에 그 싸인을 보고 응답할 수 있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한 열성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고, 영적인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결단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을 주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이왕이면 우리 모두가 성령님의 은사를 받아 살아계시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성령님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 연합하게 하고 한 몸 되게 하시며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은 실제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