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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에 가서 짐을 맡기는 곳을 찾았다. 짐 보관하는 것은 우리나라처럼 바깥에 방치되어 있지 않고 전철에서 티켓 파는 곳
같은 사무실이 있고 부칠 짐을 보여줘야 그곳을 통과할 수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여러 개의 짐 넣는 보관상자들이 있었다.
근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동전이 아니라 희한하게 신용카드로만 계산이 된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비씨 체크카드가 있어서 그것
으로 짐을 넣을 수 있었다.
처음이라 어떻게 하는지 몰라 옆에 사람만 보다 그래도 몰라 물어봐서 했더니 의외로 간단했다.
열쇠가 아니라 나중에 종이가 나오는데 그것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짐을 다시 찾을 때 그것을 넣으면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것
이었다.
깨끗하고 편리한 트램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짐을 맡기고 가벼운 몸으로 나는 트램을 타고 반 고흐 미술관으로 갔다.
하지만 고호 박물관에 가는 길에 길을 잃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치고 다시 타고 오는 길.. 하늘을 보니 내 마음만큼이나 하
늘도 흐려있었다. 흐린 날만큼이나 흐린 기억이 많은 암스텔담, 결국 물어 물어 다시 고호 박물관에 갈 수 있었다.
고호 미술관 앞에서 내리자 한 젊은 여자가 미술관 앞에 있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사진을 찍었는데 그녀는 갑자기
내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그녀의 사진을 찍고 나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같이 표를 사러 갔는데 줄이 밖에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고호 박물관이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 몰랐다
반고흐 박물관 길게 늘어선 줄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잠시 출장을 나와 하루 구경 중이었다. 나는 나와 같은 여행객이면 동행을 하자고 하려 했는데 아쉬
웠다.
박물관 안에서나마 같이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화장실을 갔다오면서 그녀와 헤어지고 말았다. 반 고호 박물관은 입장료도 10
유로나 했지만 들어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공항처럼 일일이 들어가는 입구에서 가방을 조사한다. 나는 별 특별한 물건
도 없으니 괜찮겠지 했는데 가방 안에 물병을 보더니 물병은 금지라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물병을 버리거나 관람을 포
기하거나 해야 했다. 물 때문에 관람을 포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어제 싸게 샀지만 다른 곳에서 사면 1유로나 하는
물을 버리기도 싫었다. 나는 살짝 기념품 가게로 가서 엽서 파는 아가씨한테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잠깐 물병을 맡길 수 없
냐고 부탁해서 물병을 맡기고 검사하는 직원에게 가방을 보여주며 당당하게 들어갔다.
한국에 작품들이 많이 갔다고 해서 오히려 여기서는 볼게 없는 게 아닌가 걱정을 했는데 그 작품들이 다시 돌아온 건지 아니면
고호의 작품이 워낙에 많은 건지 화랑을 가득 메운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년도 별로 시기별로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전시
되어있는 막대한 양의 고호 그림들은 비싼 입장료와 앞의 까탈스런 입장검사를 용서하게 만들었다.
나는 고호 팬은 아니었다.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가서 고호의 해바라기를 보고도 그닥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고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그의 비극적 인생은 내 마음을 끌었고 그의 그림을 보고 싶게 했다.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1887년 자화상 – 그림 속의 고호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파란 눈 속에서 그의 고독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비현실적인 색채
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의 무수히 많은 자화상들 중에 이 자화상이 특별히 내 눈을 사로잡았다.
1887년 황금 정물화 – 레몬과 배등을 그린 정물화인데 동생 테오에게 바치는 그림으로 특이한건
그림의 테두리도 그림의 연장처럼 되어 같은 노란색과 황금색이 어울려져 있는데 알고 보니 그 프레임도 고호가 직접 만들어
색칠했다고 했다. 한평생 유일하게 그를 인정하고 지지해준 그의 동생을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게 그 둘의 아름다운 관계가 떠
올라 인상적이었고 강렬한 노란색이 예뻤다.
고호의 작품은 정물화나 풍경화가 많은데 지극히 정적인 대상체를 지극히 동적으로 그렸다. 그래서 인지 그의 그림을 보면 꿈
틀꿈틀하며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붓의 터치 때문인 것도 같았지만 그것보다 그의 열정 때문인 것 같다. 그의 독특한 시
선과 영혼이 그런 색깔과 붓 터치를 탄생시키며 살아있듯 보이게 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정도 고호의 그림들을 보고 나와 기념품 가게에서 인상적이던 고호의 그림 엽서를 사고 물도 찾은 후 박물관에서 나와 왕
립미술관에 가는 공원에 갔다. 공원에는 I amsterdam 이라는 커다란 글자 조형물위에 사람들이 앉고, 서고 다양한 포즈로 사
진을 찍고 있었다.
그 공간에서 나도 부탁을 해서 사진 하나를 찍고 렘브란트와 베르메르가 기다리고 있는 왕립미술관으로 갔다. 왕립미술관 앞에
는 은색 날개 옷에 은색 모자에 온통 은색으로 칠한 천사 아저씨 같은 사람이 아이에게 비누방울을 불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
어서 사진을 찍고 그에게 그와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냐고 말했더니 물론이라며 어서 올라오라고 했다. 그는 거리에서 조금 높
은 공간에 있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한 외국 여자한테 사진을 부탁했다. 그는 내게 최고로 로맨틱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라고
해서 날 웃겼고 내가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웃기만 하자 나보고 Pretty girl 이라며 내게 자신이 들고 있던 꽃을 주었다. 주변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여행의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거리의 예술가
들 그런 사람들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그 사람과 이야기 해보고 웃고 같이 사진 찍고 결국 이런 색다른 경험이 좋은 추억이 되
고.. 그 사람 덕분에 많이 웃어서인지 아침에 우울했던 기분이 많이 가셨다. 그 사람은 정말 내겐 천사였다.
왕립미술관은 고호미술관처럼 입장료가 10유로에 까다롭게 검사했지만 물병은 들고 들어갈 수 있었다.
베르메르의 kitchen maid - 진주 귀걸이 소녀를 책으로 보면서 알게 된 베르메르, 책을 다 읽은 후 인터넷으로 그의 그림들을
다 찾아봤다. 그때 본 이 그림을 진품으로 확인을 했다. 그림은 생각보다 작았다. 햇빛이 어디에 비치는지 보이는 것 같은 이 그
림은 고호와는 반대로 동적인 그림인데도 지극히 정적으로 보였다. 너무나 사실적인데 하녀가 우유를 따르는 순간, 그 순간이
그 햇살이나 그 공간이 지극히 평화로워 보여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그리고 55세의 렘브란트의 자화상 포기할건 포기하고 더
이상의 미련이나 후회도 없다는 그래서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후련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그림들을 보고 있다가 다리가 아파 앉아 있는데 내 눈 앞에서 갑자기 놀라운 정경이 벌어졌다. 긴머리의 여자와
조금은 뚱뚱한 머리를 길게 딴 여자가 박물관 안에서 가벼운 키스도 아닌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연인들이 어느 장소에서건 가리지 않고 키스를 하는 것은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많이 봐와 익숙해졌다
고 자부했는데 박물관 안에서 그것도 이성커플이 아닌 동성커플이 저렇게 진하게 키스하는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역시 암
스텔담이었다. 성에 대해 개방적이고 동성들도 결혼할 수 있다더니 동성커플도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키스를 하는구나. 한참 동
안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커플을 보는데 마침내 그 둘의 입술이 떨어지고 그 주인공들을 보는 순간 나는 실소를 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머리 딴 뚱뚱한 여자가 알고 보니 남자였던 것이다.
암스텔담이어서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이런 착각을 했을까? 아무튼 뒷모습은 정말 여성스러운 그 남
자와 그의 여자는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을 지나갔다.
왕립미술관을 나와 그 앞에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공원 벤치에서 호스텔에서 싸온 샌드위치와 과일들을 먹었다.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있자니 다리가 많이 아팠다. 음식을 먹고 한가로이 햇살을 맞으며 주변
을 둘러보았다. 공원 곳곳에는 커플들이 포진해 키스를 하거나 껴안고 있었고 굳이 커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일행이 있어 즐
겁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 나만 혼자 인 것 같았다. 좀 전까지 ‘안 맞는 사람과 있을 바에는 혼자인 게 편하다.’라고 느꼈는데 반
나절도 지나지 않아 외로워져 다시 마음 맞는 누군가를 만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혼자 있으면 누구보다 남
자친구 생각만 간절해진다. 그러면 여행의 즐거움 보다는 빨리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만 든다. 맞는 사람을 만나 같이 즐겁게
지내다 보면 남자친구를 잠시 잊고 여행을 좀 더 즐길 수가 있다. 그래서 동행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은 없는 것을…
그래서 혼자 있으면 힘이 들더라도 더 돌아다닐 수 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더 외로우니까. 그렇기에 나는 피곤이 덜 풀렸는
데도 조금 쉬다 바로 안네 프랑크 생가로 향했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트램을 타고 그 근처 정류장에 왔는데 주변에 사람들
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안네프랑크 생가가 어딘지 몰랐다.
좀 쉬고 있는데 보니 헤링스를 파는 곳이 옆에 보였다. 헤링스는 청어를 말린 것으로 네델란드의 특산물로 유명한 것이다. 배가
별로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 맛이 궁금하여 하나 샀다. 핫도그처럼 빵에 넣어먹는데 소스는 겨자와 피클이 전부였다. 생선을 구
운 것도 아니고 그냥 말린 거라 비린내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겨자와 피클 때문인지 비린내는 하나도 나지 않고 생각보다
맛있었다. 헤링스를 먹으며 눈이 마주친 남자에게 안네 프랑크 박물관 길을 물었는데 그가 잘 알려주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운하를 따라 가니 줄이 길게 늘어선 곳이 보였다. 그곳이 안네 생가였고 7유로의 입장료를 받았다.
안네 프랑크 생가는 독일이 침공했을 당시 안네의 아버지 상가에 이중 문을 만들어 그 이층에서 숨어 지내던 집을 보존하고 박
물관처럼 자료를 수집했다. 안네의 일기 한 구절이 소개되면서 안네네 가족이 숨어있던 2층 방을 차례로 가볼 수 있다. 또 비디
오로 안네의 가족을 도왔던 사람, 안네가 있던 수용소옆에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안네를 보았던 그녀의 친구의 증언도 볼 수 있
다.
2층 안네의 방에는 연예인 사진들이 벽에 덕지덕지 붙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4살 안네는 역시 소녀였다. 하루 하루 불안에
떨며 숨어 지내는 와중에도 자기 방을 꾸미며 사랑을 꿈꾸었던 소녀, 연예인들에게 관심이 많고 이성에도 눈을 뜨기 시작한 맑
은 웃음을 가진 한 평범한 소녀의 그 평범한 방은 그녀가 당했던 그 비극의 잔인함을 더 느끼게 해주었다. 결국 장소를 들켜 가
족들 모두 흩어지고 엄마와 언니가 병에 걸려 다 죽은 그 수용소에 혼자 남았다가 언니와 같은 병으로 쓸쓸하게 죽어갔다는 안
네, 누가 왜 이렇게 죄 없고 평범한 소녀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건지. 마음이 아팠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
라는 마음으로 안네의 생가를 보존 한 것 같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많은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안네의 일기 책이 다 있었
다.
고등학교때 도서실에서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내 책을 뺏아 들어올렸다. 누군
가 봤더니 그 당시 내가 짝사랑하던 한문 선생님이었다. 나는 책에 너무 빠져 있어 선생님이 옆에서 날 지켜보고 계시는 줄도
몰랐었다.
“하이틴 소설이면 뺏으려고 했더니 좋은 책이네 잘 봐라” 하시고 웃으며 가셨다.
사실 나는 도서실에서 하이틴 소설도 많이 읽었었다. 하지만 그날은 다행히도 하이틴을 보지 않고 안네의 일기를 보고 있었던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짝사랑했던 선생님의 말과 웃음에 마음 설레였던 기억이 났다.
<출처 : ★ No.1 유럽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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