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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기업으로 누리고 나눠주자 2016. 12, 04.
우리는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이 땅을 우리의 기업으로 되찾는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모세가 신명기를 쓸 무렵,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 들어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법궤와 성막을 소유하고 있었고, 제사장의 봉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대로도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세는 자신이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미리 가르치고자 신명기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여호수아 앞에 있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는 여호수아서 다음의 일을 기록한 셈입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에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과 또 여리고 성이 함락 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신명기에서 이 땅에 들어간 후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자, 이 좋은 땅을 기업으로 누리는 우리의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저는 오늘 말씀 주제를 < 그리스도를 기업으로 누리고, 나눠주자 >라고 간략하게 기술했는데, 여기서 “기업”이라는 것은 내 가족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삶의 터전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업으로 누린다는 것은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서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업이요 산업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수고해야 합니까?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디에서 종사하느냐? 는 겁니다. 즉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냐? 는 말입니다. 이 질문의 답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얻는 자인 것입니다.
누가 저에게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목사나 혹은 전도자라고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끔 낯선 사람이 제 직업을 물어보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합니다.’라고 말하면, 엉뚱하게도 그리스도가 어떤 회사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웃으면서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나의 일입니다”라고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제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나의 기업이고, 산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목회자인 저만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일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시장에서 장사를 하든지, 혹은 회사에 다니든지, 혹은 학교에서 선생님을 하시든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 직업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공부하는 학생이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고, 사업을 하는 것도, 그리고 어떤 직업을 가진 것도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사업을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돈을 버리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업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아멘?!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항상 일하고 있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그리스도를 구하고, 그리스도를 누리며 그분을 체험하기 위해서 사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땅을 소유한 우리 생활태도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수고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업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열심을 품고, 주님을 생산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농부가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과목을 심어 거름을 주고, 열매를 생산해 내듯이, 우리는 좋은 땅에서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생산해 내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산업이요 기업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과연 부요하다고 보십니까? 당연히 부요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못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매우 궁핍하고, 빈곤합니다. 왜, 그런 겁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잠언 6장 9-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 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고 말씀해 줍니다.
여러분, 약속의 땅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을 이미 소유한 자입니다. 당연히 부요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궁핍하고 빈곤한 겁니까? 그 땅의 풍성함을 산출해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요케 되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땅을 경작해야 하고, 말씀의 씨를 마음 밭에 많이 뿌려야 합니다. 영적인 나무에 물을 주셔야 합니다. 이 일을 누군가 대신해 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직접 이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요함을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침에도 기도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셨습니까? 지난주에는 몇 번이나 주님을 적용하고 접촉하셨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기름진 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조금만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 말씀묵상을 하시면, 얼마든지 풍성하고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16장 16, 17절을 보시면,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하신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어도 일 년에 세 차례, 절기에는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모두가 함께 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때, 주님은 결코 빈손으로 오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 땅에서 얻은 소산물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열심히 일해서 자신이 쓸 것을 물론이고, 그 땅에서 기업이 없어 가난하게 사는 나그네들이나 제사장의 무리들에게 자기의 소산물을 풍성하게 나눠주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교회에 오실 때, 주님을 경배하러 오실 때, 빈손으로 오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드릴 헌물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고 체험한 그리스도를 한 아름 가지고 오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매일 수고해야 합니다. 이 때, 자신의 필요를 얻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그 많이 그리스도를 산출해 내야 합니다. 이는 아직도 기업을 가지지 못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서, 좀 더 풍성하게 주님을 산출해 내셔야 합니다.
신명기 15장 11절을 보시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제사장과 레위 자손들의 필요를 채울 여분도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18장 3, 4절을 보시면,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응식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우양을 물론하고 그 앞 넓적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또 너의 처음 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너의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 풍성한 산물 중에 가장 좋은 것은 가져오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추수할 때에 주님을 위하여 첫 열매를 남겨 놓아야 했습니다. 소가 새끼를 낳을 때에 첫 새끼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겨 놓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도, 부지런히 수고해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땅에서의 우리의 생활 태도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경작하는 생활이며, 그리스도를 풍족히 생산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얻도록 열심을 내어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단체적으로 그분을 경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일 때, 우리가 얻은 그리스도 우리가 적용하고 체험한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가지고 모이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 그렇습니다. 내가 경험한 그리스도의 어떠함을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성도들이 함께 그리스도를 풍성히 누리게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것을 제물로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풍성히 누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향기 나는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12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매일아침,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누림을 위해서, 나 자신을 주님께 산제사로 드려야합니다. 이는 오늘 내가 삶 속에서 선택해야 하는 모든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자신의 몸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깨어나는 순간부터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을 누리기 위해서 나 자신을 산제사로 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온 종일 나의 모든 상황 가운데서 주님을 체험하고, 주님만을 적용하기 원합니다. 내일을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하루! 당신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합니다. 주여, 당신의 땅을 경작하고, 씨를 뿌리며, 주의 농작물에 물을 주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매 순간순간마다, 주님과의 교통을 유지하게 되고, 실제로 주님 안에서 살면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주님을 적용하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의 ‘기업’은 소출이 풍성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주일이 되면,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경배하러 옵니다. 이 때, 빈손으로 오시지 않고, 두 손 가득히 그리스도를 담아 오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 손에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남겨둔 좋은 것이 있고, 또 타인을 섬길 수 있는 여분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때, 어느 형제가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형제님, 저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요, 좀 도와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기꺼이 그를 도울 수 있는 여분의 은혜를 공급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남겨둔 것으로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마음껏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서, 또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주님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수확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열심히 수고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열심을 내서 그리스도를 산출해 낸다면, 우리의 예배와 만남이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 모임이 되겠습니까? 기대가 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이런 풍성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공급할 것이 있고, 여러분도 저에게 공급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것을 나눠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좋은 것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도 기쁘게 자신의 풍성한 몫을 소유하시게 될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신다는 겁니다.
저는 교회의 이런 풍성한 모습을 전람회와 박람회로 비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각 지방마다 자기의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전시하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때로는 전 세계에서 각 나라마다 자기들이 계발한 상품을 가지고 와서 선전하는 것을 보시면, 그곳이 축제의 장소가 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예배와도 같다고 봅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하고, 내가 생산해낸, 그리스도를 전람하기 위해서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가 경작하고, 내가 체험하고 생산한 그리스도를 전람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모임이 마치 전람회처럼, 박람회처럼, 축제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인 절기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초막절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모두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산물 중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과일과 채소와 곡식 등을 가져왔고, 소나 양이나 다른 많은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그 때의 그 상황을 볼 수 있다면, 그 땅의 풍성함을 보시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쌓여있는 아름답고 잘 익은 농산물과 수많은 양과 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임재 앞에 모여서 자신들이 가져온 좋은 것들을 함께 누릴 때, 하나님도 자신의 몫을 얻으신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어야 하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서 함께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그리스도를 생산해 내고, 체험한 그리스도를 가지고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빈손으로 왔다면, 그것은 우리가 경배할 준비가 없이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께 경배하러 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찬양하고 전시하기 위해서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한 형제가 일어나 “주님, 여기 제가 수고하여 얻은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점에서, 또 저런 점에서 참으로 풍성하십니다.”라고 고백을 하시면, 또 어떤 자매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그리스도의 인내와 친절함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렇게 친절하셨고, 달콤하셨고 실제적인 분이 되어 주셨습니다.”라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확한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하고 수확한 그리스도를 가지고 와서 경배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는 경배가 되고, 성도들에게는 공급이 되며, 원수 마귀에게는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승리의 간증이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우리들에게는 풍성함이 되고, 마귀에게는 패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승리를 선포하고 감사를 가져오는 교회는 공중에 있는 악한 세력들에게는 당혹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또 이것을 보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그 교회를 칭송할 것이며, 마음을 열고 이 교회를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회복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모임을 가질 때에 우리 모두는 부요케 되고 풍성한 양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산물을 가지고 올 때, 더욱 풍성한 산물을 가지고 갈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수고한 그리스도요. 우리에게서 생산된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룩하게 변화된 하나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를 기업으로 누리고 나누는 이 풍성한 은혜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시면, 그리스도를 누리는 두 가지 길이 보입니다. 하나는 수직적인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수평적인 예배입니다. 수직적인 예배란, 하나님과 교회의 단체적인 만남이고, 수평적인 예배란 성도들이 서로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작은 무리의 셀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두 가지 예배가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 된지 100년이 못 되어 로마제국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두 날개를 가진 교회라고 말합니다. 대그룹으로 모이는 축제 예배와 소그룹으로 모이는 셀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비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대부분, 단체적인 대그룹 예배만이 남아 있고, 소그룹 셀 예배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주로 셀 모임에 관해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구약의 성전예배가 사라지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PPT12) 누가복음 22장 19,20절에서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하신 말씀을 보시면, 이 날이 바로 주님이 잡히시기 전 날 밤, 유월절을 기념하는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이 날 주님은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모든 구약의 제사와 규례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으로 바꿔진 것입니다.
그런데 24장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후, 맨 처음으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자신의 임재를 무엇으로 드러내신 것입니까? 떡을 떼실 때, 자기를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거푸 안식 후 첫날에 제자들 모인 곳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정했고, 그 날 떡을 떼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만찬 예배가 정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사도행전 20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이 밤에 유두고가 창문에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난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날이 언제였고, 무슨 목적으로 모였으며, 교회가 어떤 활동들을 한 것인지를 살펴보면 초대교회가 어떻게 모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언제 모였습니까? “안식 후 첫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켰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안식 후 첫 날”이 정규적인 주의 날로 바꿔졌으며, 그 날 무슨 목적으로 모인 겁니까?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사도 바울이 방문하셨기 강론을 하게 된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가 주의 날에 모여서 무엇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진 것입니까? 성만찬 예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순회하시던 사도 바울의 방문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 강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주로 떡을 함께 떼는 오이코스를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이코스’란 관계중심의 가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집’ 혹은 ‘가족’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대부분 셀 중심 모임으로 모이기를 힘썼던 것입니다. 이 모임은 우선적으로 성만찬을 하면서 주님을 예배하고 거기서 성도들이 함께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 모임의 주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80%가 셀 중심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대부분의 시간을 12명의 제자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 초대교회는 집에서 오이코스 중심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한 번 성경을 찾아볼까요?
사도행전 2장 46,47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보십시오. 여기에 두 모임이 있지요?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는데, 이것은 대그룹 축제예배입니다. 그리고 집에서 떡을 떼고 음식을 먹으면서 찬미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42절을 보시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하신 걸 보면, 이들이 모였을 때, (1)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고 (2) 서로 교제했으며, (3) 떡을 떼었고, (4)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집회 모습입니다.
사도행전20장 20절을 보십시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라고 하신 것을 보면, 공중 앞에서는 대그룹 예배를 보여주고 각 집에서는 관계중심의 셀 모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19절을 보겠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에서 아둘라와 브리스가는 바울이 장막 짓는 일을 함께 했던 사랑하는 부부 사역자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있는 교회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 당시 초대교회들은 대부분 오이코스 중심의 셀 모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지역에 여러 셀 모임들이 연합으로 모여서 그 지역의 교회로 조직되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로마서 16장 3-5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23절도 보시면 초대 교회의 조직 구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23절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보십시오. 앞 구절에서는 브리스가와 아둘라의 집에 있는 오이코스 모임을 볼 수 있었는데, 23절에는 ‘온 교회’라고 나오는데 이는 로마시 안에 여러 오이코스 모임들이 있었지만 교회는 하나로 조직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4장 23절을 보면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에서도 온 교회가 나오는데 이는 ‘고린도’ 지역에는 여러 오이코스 모임들이 있지만 이렇게 여러 모임이 함께 모이는 단체적인 대그룹 모임도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초대교회는 주로 만찬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오이코스 중심으로 집에서 모이는 모임이 곳곳에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사도들이 방문하게 되면, 온 교회가 한 곳에 모여서 말씀 강론을 하는 대그룹 모임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 모임의 비중은 8:2 정도로 셀 중심의 모임이 80%라면, 대그룹 모임이 20%정도였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오이코스의 모임의 인도자의 집에서 성만찬 예배드리면서 함께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도들이 순회하다가 방문하게 되면, 말씀 집회로 모여서 온 교회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초대교회는 두 날개를 가진 비상하는 교회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오이코스 중심의 친밀한 모임을 가졌기 때문에 그 결속력과 영향력이 대단했습니다. 이들은 리더의 삶을 직접 보고 배웠기 때문에 변화의 속도가 무척 빨랐고, 또 온 식구들이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가지고 나와서 서로 나눠주는 모임을 가졌기 때문에 은혜가 넘치는 모임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는 것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저들을 칭찬하면서,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변화가 급물살을 탔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가 100년도 되지 않아서 그 큰 로마제국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정복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콘스탄틴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인이 아니었고, 정략가였습니다. 로마를 움직이는데 배신하지 않는 정직한 신하들을 찾아보니까, 60% 이상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그의 영향력이 결단코 미치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곳이 곧 오이코스 중심으로 집에서 모이는 셀 모임인 것을 알고서, 그가 제우스 신전을 대신할 수 있는 큰 예배당을 지어서 대그룹으로만 모이도록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황제가 직접 대그룹 예배에 참석함으로 점차 오이코스 모임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역사를 연구하는 어떤 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제국은 셀 모임으로 정복되었지만, 교회는 정작 셀 모임을 버림으로서 그 영향력을 잃고 말았다”고 기술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로마는 결국 셀로 무너졌지만 그러나 교회에서 셀이 사라지면서 결국 교회가 무너지고 만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오이코스 모임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17년도에는 초대교회가 가장 중시했던 성만찬 예배를 회복하고 관계중심의 오이코스 모임을 활성화 시킬 계획입니다. 일단 매주일 성만찬 예배를 드리면서 친밀한 성도의 교제를 다시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일단 남자와 여자로 나눠 모이다가 나중에 셀 모임들이 개척되면, 리더 중심으로 만찬예배를 확대해 나갈 생각입니다. 그 때에도 대 예배는 종전대로 11시에 모일 것입니다. 그러나 셀 들이 번식하여 여러 모임이 되면, 오후가 아닌 다양한 시간대로 조절하여 셀 리더 중심의 모임을 회복할 것입니다.
(PPT23) 이 때, 중요한 것은 빈손으로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무언가 내 삶 속에서 주님을 체험하고, 주님을 얻은 것을 가지고 나오셔야 합니다. 내 영과 혼과 몸에 일어난 변화를 가지고 주님이 하신 일을 자랑하고, 함께 나눔으로서, 모임을 풍성케 하려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나를 부요케 하신 주님을 드러내고, 자랑코자 하는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모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모임은 풍성케 되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양육과 공급이 이뤄지고, 또 그것을 지켜보던 불신자들도 구원받고자 하는 갈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흥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섬기고 나눠주는 제사장들이 되셔야 합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임을 풍성케 하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내가 살고 우리가 사는 비결입니다. 받고자 하는 자보다 주려고 하는 자가 많아야 모임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교회의 회복에 마음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2017년도에는 우리가 꿈꾸는 풍성한 예배 회복과 함께 다른 가정들이 더해지는 부흥의 물결이 잔잔히 시작되는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