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성백종주
김옥자
올 해 여름 폭염에 땀을 너무 많이 흘렸더니, 살이 빠지기는커녕 몸에 진기가 다 빠진 것 같다.
산에 다녀오면 힘이 좀 나려나? 산을 좋아해서 인지, 아프다가도 산에만 가면 거짓말처럼 씩씩해졌다.
무엇이 촉매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지리산 그 맑은 별빛이 내 가슴에서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이 가장 젊을 때이고, 퇴행성 관절은 지금보다 더 나아 질리는 없을 것 같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우선 대피소 두 군데를 예약해 놓고 동행자를 찾았다. 고맙게도 같은 마인드를 가진 친언니가 수호신처럼 동행해 주었다.
해마다 1000고지가 넘는 영남 알프스 인증은 같이 하였지만, 그래도 당일코스가 아닌 지리산 종주는 다르다.
아무리 짐을 줄이고 줄여도 3일간 먹을 것만 해도 무게가 상당하였다.
지리산은 고지대에서도 식수 공급이 잘 되어 있고, 대피소에서 비상식량 정도는 판매를 하였다.
이동식으로 주먹밥을 챙기고 나머진 발열체를 이용한 비화식으로 준비를 했다.
추석 연휴동안 일기예보를 보니 3일 내내 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최악의 경우, 첫째 날만이라도 등산화에 질벅질벅하게 물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만족하리라 기대치를 낮췄다.
비가 올 것을 알고 미리 대비를 하고 간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산행 도중 일어나는 온갖 불확실한 일들에는 순간순간 판단하고 대처해야 한다. 그것이 여행의 묘미라 할 수 있겠다. 컨디션을 한 달 전부터 체크했다. 못 갈 이유를 붙이자면,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어디 하나 멀쩡한 한 데가 없었다.
지리산의 넓은 품에 안겨 구름을 같이 덮고, 원시적 숨결을 느끼며 다독다독 설레는 밤을 지내 볼 수만 있어도 후회하지 않겠다.
후에 나의 모든 기능이 약해져 웃음기 잃은 건조한 마음이 일어날 때, 그런 추억을 꺼내 먹으며 견뎌봄이 어떨지.
하산지점인 백무동탐방센터에 차를 두고 성삼재에서 백무동으로 하산하는 성백종주를 할 계획이었다.
예약했던 지리산 택시는 새벽 2시에 대낮처럼 와 주었다. "지리산의 부름에 오셨습니까?"
그렇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밤중에 지리산 종주를 하겠다고 할머니 이름을 단 여자 둘이서 큰 배낭을 지고 집을 나섰겠나.
우리 같은 도깨비들을 흔히 만나는 일인 듯, 기사님은 부드러운 음성만큼이나 참 친절하셨다.
성삼재 주차장에 내리니 전설의 고향 같은 으스스한 허연 안개구름과 새벽 찬바람이 빠른 휘모리장단으로 쏴 하고 반기는데, 첫 인사치곤 살짝 긴장되었다.
국립공원은 입산시간지정제로 정확히 새벽3시에 차단 바를 열어 주었다. 서울에서 성삼재까지 운행하는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도 있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요즘은 혼자서 산행하는 모습도 자연스런 모습이다.
사방이 캄캄하여 렌턴을 켜고 발끝만 쳐다보고 걷다보니 10분도 채 안 지났는데 우리만 남았다.
구름이 걷혔는지, 나뭇잎 사이로 금가루 같은 별빛이 쏟아졌지만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동이 트기 전까지는 어둠 속이라 속력을 낼 수도 없었다. 종주 중 가장 긴 구간인 벽소령 대피소까지 가려면, 우리 같은 거북이 속도로는 하루에 12시간 이상 부지런히 걸어야한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
어둠속에서 임걸령, 노루목을 지나고 어디쯤인지 걷다가 해가 뜨고, 삼도봉 바위에 앉아 주먹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액자 속 그림처럼 바위 주변에 피어있는 9월의 들국화가 가을임을 알려 주었다.문명의 화답으로 핸드폰 카메라로 고이 담아보았지만, 역시 자연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제일 좋았다.
들꽃은 그냥 있기만 한 것인데도 참 고맙다! 평범한 것이 가장 고마운 존재들이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이 어찌 돈으로 되는 일인가!
토끼봉을 가기 전까지는 그나마 난이도 없이 평이했다.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라더니, 세 개의 도를 아우르는 넓은 품 때문이었는지, 끝까지 걸어보면 그 해답을 알게 되겠지.
때로는 등 뒤에서 배웅해 주시던 뒷산 둘레길 같고, 때로는 어머니의 속살같이 부드러운 앞산 능선 같기도 했다.
방심해 진다 싶으면 물 묻은 바위 길을 내어 정신 바짝 차리도록 해 주시고, 가야할 길은 아직 먼데 주저앉고 싶을 때에는 야생화 환하게 반겨주는 바위 등을 내어주며 휴식하라신다.
토끼봉(1,535m)을 넘은 뒤 명선봉(1,583m) 오르막을 칠 때는 새벽부터 걸어온 탓이라 그런지 체력이 고갈되었다.
무거운 등짐이 미련스러웠다. 이럴 땐 거북이가 아니라 껍데기를 지고 기어가는 달팽이였다.
멀찌감치 대피소 지붕이라도 보인다면 힘이 좀 날 것 같은데,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막막하였다.
지치고 지쳐 갈 무렵 연하천대피소가 산모롱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났다.
너무 기다리다 오신님처럼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허탈하였다. 오늘의 목적지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3.6km가 더 남았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휴식을 하고 나면 체력이 또 충전이 되었다.
하룻밤 묵어가는 등산객이 대부분인 대피소에서 느긋하게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며 책을 읽는 여유있는 분도 보였다.
운무가 가득한 벽소령(1,350m)엔 달도 별도 없었지만, 비가 오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게 첫 번째 코스인 우리의 인내심 테스트는 무사히 통과했다.
둘째 날 부터는 좀 기대된다. 세석평전과 연하성전이 펼쳐지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역시 새벽 어둠을 뚫고 산행은 시작되었다. 잘 정비 된 선비샘을 지나고 언제 지나왔는지 칠선봉(1,558m),영신봉(1,652m)을 지난 다음 샘물이 좋은 세석대피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세석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기후변화대응스테이션이 있다.
산에서는 쓰레기를 3일 내내 가지고 다녀야 한다.
고지대에서는 공기의 밀도 때문에 밀폐된 커피믹서 봉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얼마나 자동센서가 잘 되어 있는 인체를 가졌는지 감사한 일이다.
세석평전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꾸 뒤돌아보며 또 걷는다.
천국같이 펼쳐진 아득한 구름 속의 촛대봉(1,703m)에서 까맣게 심지가 되어 서 보는 것도 좋았다.
삼신봉을 지나 연하선경을 지날 땐 야생화 속에 선녀가 된 듯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두 번째 목적지 장터목대피소(1,653m)에 도착하여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천황봉(1,915m)으로 향했다.
아직 입실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고, 비가 올 것 같은 변덕스런 내일의 날씨를 기약할 수 없었기에 시간을 앞당겨 천황봉 정상석에서 종주의 꽃을 피웠다.
셋째 날 새벽에도 비는 다행히 우리들을 피해 갔고, 도깨비같이 이마에 불을 밝히고 다시 한 번 천황봉을 올랐다.
해발1915m 높이에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장엄한 해돋이의 연출을 보기 위해 사람들로 붐볐다.
일출의 잔치가 끝난 후, 자욱한 운무를 남겨두고 사람들은 빠르게 빠져 나간다.
고사목과 산구절초가 아름다운 제석봉을 지날 땐, 고사목의 시간을 더듬어보고 싶었으나, 일출에 온 마음이 빼앗겨 버린 뒤 볼 일을 다 보고 난 사람처럼 걸음만 제촉하느라 아쉽게도 대충 지나오고 말았다.
장터목에서 아침을 먹고 하산을 시작했다.
여행은 집까지 무사히 돌아오는 것까지가 여행이라고 한다지.
참샘을 지나고 하동바위를 지나서 백무동주차장까지 내려오는 데에도 3시간이나 걸렸다.
9월의 지리산 능선에는 온통 보랏빛 투구꽃이 호위해 주었다.
길 양쪽에는 들국화와 쑥뿌쟁이, 엷은 보라빛 벌개미취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다.
바위에 붙어 자라는 흰색 꽃은 소금쟁이를 닮았는데, 검색해보니 이미 이름을 갖고 있었다. 바위떡풀이란다.
숲속에 흰 꽃들과 잘 어울리는 보라꽃 용담, 간간이 나타나 해맑게 웃고 있는 동자꽃.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정원이다.
생태보전을 위해 들꽃 씨앗들이 다소곳이 미사포같이 망을 쓰고 있는 모습 , 집단 고사한 조릿대의 아픈 이야기와 구름도 넘다 지친 능선이야기, 제석봉의 주인공인 고사목들의 묵언의 100년, 여름을 살다 간 산오이풀들의 마른 이야기, 천황봉 성모이야기,
옛날 물물교환장소로 장이 열렸다는 1750m 높이의 장터목에서 현란한 서쪽 저녁노을과 동쪽 한가위 보름달의 은밀한 이야기들은 다 풀어 놓을 수 없다.
한발 한발 걸어 본 지리산은 구름과 안개로 이끼가 많고 습기로 늘 마르지 않는 아직은 젊은 산이었다.
지리산의 청춘을 돌려놓기 위해 국립공원을 지정하고, 무분별한 산행로를 차단하고, 비박도 금지 하며 탐방로 인원을 제한하는 등, 많은 불편을 감수하면서 함께 지켜온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었다.
핸드폰에 열려 있는 앱 모두 닫기처럼, 가끔은 밖으로 열어 두었던 생각의 창들을 모두 닫고 오직 나만의 시간을 지내 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값비싼 치장보다 값진 선물이 될 것이다. 자연에게서 무상으로 받은 선물들을 배낭 가득 담고 2박3일의 종주를 무사히 마쳤다.
묵묵한 산은 언제나 일상에 무심해 있는 나를 일깨워 준다. 당연한 일에 감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힘든 산행을 다녀오면 산 아래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불평불만이 없어지는 것 같다.
다음 기회엔 1인 1실로 새로 단장한 노고단 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체력 때문에 남겨 두었던 반야봉을 다녀와야겠다.
지리산의 맑음에 마음 헹구고 싶을 때 , 정상에 욕심부리지 않고, 세석대피소 쯤에 머물면서, 세석평전, 연하성전을 느린 걸음으로 휴가를 보내는 것도 좋을 법하다.